이 글은 데니스 프리비 목사 저서 「참된 복음과의 대면」 1장에서 발췌하였다. 현재 재림교회안에 존재하는 두가지 복음관을 비교하고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이 가르치는 참된 복음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한 이 글은 이 주제에 관해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신실한 재림성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역자: 김정대 (Justin Kim)


지난 20여년은 사려깊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고통스러운 기간이었다. 여러 교인들은 재림교회의 사명과 기별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그 어떤 다른 종류의 “재림신앙”이 자신들 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지고 있음을 느껴왔다. 그러면서 “도대체 왜 사랑하는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단 말인가?” 하고 많은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심히 의아해 하고 있는 바이다. 요란한 신학적 공방전이 양 진영 사이에서 계속되는 동안 그 가운데서 많은 교인들은 어느 편이 옳은지 제대로 가늠할 수 없어 당황하고 있거나, 아니면 실망한 가운데 재림교회의 뒷문으로 아무 말없이 슬그머니 떠나가는 것이 상책이 아닐지 고민하고 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이 없는가? 우리 교회가 이렇게 진통을 계속 겪는 동안 우리는 그저 비틀거리며 방향감각을 상실한 운명에 처해있단 말인가?

필자가 확신하는 바, 지금 우리가 고통을 겪고 있는 데는 분명히 그 이유가 있으며, 더불어 이러한 우리의 신학적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해결책이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이 복음에 의해 평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나는 이러한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바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바로 복음이기에, 그 복음이 없다면 우리의 안식일 준수에는 그 어떤 의미나 목적이 존재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바로 이 결정적인 질문이 여러 목회자와 교직자들 및 평신도들의 의식가운데서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구하기 위해, 나는 여기서 지금 재림교회 안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복음관이 강론되고 있음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불어 이 두 가지 복음관이 견지하고 있는 전제와 결론을 포함한 전체적인 개요를 설명할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왜 일부 인사들이 재림신앙의 가르침에 대해 양심의 위기를 겪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나는 그 중 어느 복음관이 성경말씀은 물론 재림신앙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해 나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이렇게 서로 대치되는 복음관의 입장을 명확히 파악하게 될 때,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좀 더 잘 준비된 마음 자세를 가지고 성경과 영감적인 엘렌 화잇 여사의 서적들을 연구할 수 있을 것이며, 그리하여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믿음 체계들 중 어느 쪽을 여러분 자신의 복음관으로 선택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이러한 결정은 궁극적으로 성경 연구와 기도에 근거해 내려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에는 이설 분파 그룹들을 분별해 가담치 않고 재림교회의 주류가운데 머무는 것이 비교적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소위 목자의 지팡이 파나 개혁파의 주장에 휩쓸려 따라가는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재림교회의 주류 안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복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러한 선택은 이제 좀 더 어려워 지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은 재림교회 안에서 지난 50여년간의 세월 동안 조성되어 왔는데, 지금 이 시대에 전해지는 가르침과 사건들은 이렇게 이미 오래 전에 뿌려진 씨앗들의 자연적인 귀결일 뿐이라는 사실이 이 필자의 견해이다. 우리가 한 때 한 줄기의 진리로 우리 앞에 펼쳐 있다고 생각했던 길이 근래에 와서야 그것이 두 가지 다른 줄기임이 들어났고, 그 길들이 세월과 함께 점점 더 넓게 분기되면서 드디어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처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필자가 깊은 확신과 함께 제시하려는 핵심적 결론은 바로, 이 두 가지 다른 복음관의 줄기들은 철저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이며, 그 사이에는 타협이나 조화가 결코 논리적으로 불가능 하기에,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믿음의 체계 사이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제 정말 참된 복음이 제 자리에 우뚝 그 자태를 들어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복음”이라는 호칭을 획득하기 위해 서로 쟁론하고 있는 이 두 가지 다른 복음관에 대해 우리 한번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하자.

문제의 진술

노르웨이에서 재림교회 잡지의 한 편집자로 있다가 교회를 떠나간 아게 렌달렌씨가 약 25년 전에 다음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1950년대에 들어와 재림교회는 과감하게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는데, 신학적 순수주의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몇 가지의 교리들을 공개적으로 사장시켰던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점차로 증가되고 또한 외부 복음주의파 신학자들과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19세기 시대의 잔존물인 몇 전근대적인 교리들에 대하여 여러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일말의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 교리들 중 주범이 바로 두 단계로 분리된 속죄론과 그리스도의 타락된 인성론인데, 1957년에 출판된 서적 「교리에 대한 질문」에서 바로 이 두 가지 교리들이 폐기 처분되었던 바이다.

이러한 정화과정이 1970년대 초기까지 계속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마지막 세대를 사는 성도들이 죄 없는 완전한 품성을 이루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점차로 사라지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 .전통적인 재림신앙을 계속 유지코자 하는 몇 강경한 수호자들의 혼신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타락된 인성론과 이생에서 완전한 품성의 형성이 가능하다는 교리들이 성서적 증거들의 막중한 무게로 인해 점차적으로 침식되어 왔다.

이제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재림교회는 그 역사상 접해본 적이 없었던 엄청난 규모의 한 새로운 위기를 직면하고 있다. 재림신앙의 정말 근본이라고 생각되어온 ‘성소교리’가 지금 면밀한 검토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더불어 은밀한 선지자로서의 엘렌 화잇의 권위성이 재평가되고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 바이다.

1950년대에 일반 개신교 복음주의파 지도자들의 호감을 사려고 추구했던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이 결코 예상치 못했던 그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올 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전통적인 재림교회의 풍정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정체성의 위기가 자리를 잡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오늘날은 이 재림운동의 유효성 그 자체 조차 많은 교인들에 의해 의문시 되고 있는 편이다. 그들은 지금의 이 재림교회가 자기들이 입교하였던 그 교회가 더 이상 아니라고 느끼고 있다. 전도 목사들이 전도회를 통해 자기들에게 제시했던 재림교회 교리들의 탁월성은 이제 완전 난장판이 되어 버렸기에, 그들은 ‘이 교회가 정말 마지막 남은 진리 교회란 말인가?’ 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게 렌달렌, 「재림교회: 매체가 기별이 되어버렸는가?」, Evangelica잡지, 1980년 12월호, 35 페이지).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이 렌달렌씨가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지만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기술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난 30여년 동안 전개되어온 이슈들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쟁점이 되고 있는 이슈들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는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말을 하였다. 바로 이러한 이슈들이 제대로 파악되고 규정된 후에만 참된 복음이 제 위치에 설 희망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렐달렌씨의 기사 중에 있는 지극히 중요한 한 부분을 다시 인용하고자 한다: “1950년대에 일반 개신교 복음주의파 지도자들의 호감을 사려고 추구했던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그들이 결코 예상치 못했던 그 어떤 다른 결과를 가져올 일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 후 전통적인 재림교회의 풍정이 급격하게 변화되어 왔다.”  이 얼마나 정곡을 찌르는 진단인가! [1]

[1] 역자주: 소수의 재림교회 지도자들과 복음주의파 대표자들 사이의 회담 후 교회 전체의 인준과정을 거치지 않고 1957년에 출판된 「교리에 대한 질문 (Questions on Doctrine)」이라는 책에 대한 언급. 이 책은 우리의 교리를 대체적으로 훌륭하게 변증한 부분이 있지만, 속죄론과 직결된 성소교리의 희석 및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을 때 타락한 우리 인간의 본성과 동일한 인성을 지니고 오셨다는 전통적 재림교회의 이해를 부인한 것 때문에 재림교회 역사상 가장 심하게 분열을 조장한 책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불행한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들은 본 사이트에 실린 다음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와 있는가?
재림교회와 월터 마틴
「교리에 대한 질문」 초안에 포함되어 있던 원죄론
성육신 진리: 셋째 천사의 기별에 도전한 신 신학
성육신 진리: 셋째 천사의 기별의 회복을 위한 투쟁

이렇게 1950-60년대에 뿌려졌던 신학적 씨앗들이 성장해서 오늘날 그에 상당한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는 신학적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어떤 전제들을 받아들이게 될 경우 그에 상당한 어떤 결론들에 도달함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여러 생각 있는 재림교인들이 이렇게 유추된 결론들이 함축하는 바를 그들의 삶에 적용할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서로 엇갈리며 상충되는 전제와 결론들이 지금 재림교회 안에서 여러 학자와 목회자들 및 평신도들에 의해 널리 견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제는 재림교회와 다른 일반 교회 간의 교리적 차이가 아니라, 이러한 두 가지 별개의 신학적 체계들이 오늘날의 재림교회 안에서 동시에 살아있고 자라고 있음을 우리가 인식하여야 한다.  그러면 이제 이 두 가지 신학체계의 개별적 요소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하자.

주요 쟁점

필자가 보기에, 이 두 가지 믿음 체계의 향방을 가늠하는 전반적 논쟁의 전제와 기초를 결정하는 중추적인 이슈는 바로 “죄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결국 복음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어떻게 죄로부터 구원을 받는가에 관한 것인데, 바로 이 죄가 우리로 하여금 멸망 당하게 하고 복음은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지를 알려주는 좋은 소식이기에 그러하다. 아마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전 생애를 통해 당연히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짐작하며 지내왔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고찰해 보지 않은 채 막연히 추정해온 거의 모든 것들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우리가 견지해온 추측들은 단순히 조심스러운 재고가 필요 되는 실증되지 않은 짐작에 불과한 확률이 높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재림교회가 죄에 관해 불명확하거나 아니면 그릇된 의미를 부여함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오류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지금 도전을 받고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조를 받지 않는 한, 사람에게 지옥불의 불꽃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책(guilty)이 부과된다는 그 죄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은 결정적인 질문으로서, 복음이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조해 내는지 제대로 알려면 이 죄의 본질에 관한 올바른 정의를 내리기 위해 우리는 상당히 엄밀할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받아야만 하는가? 우리가 영멸을 피하기 위해서 무엇을 치유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당신이 질병의 치료를 받기 위해 의사를 찾아 가면, 그 의사는 먼저 당신이 앓고 있는 질병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진단한 후에만 그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제와 치료법을 처방해 줄 수 있다. 이 원리는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죄책(guilt)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고 난 후에만,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복음을 올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신학 혹은 개혁신학의 복음관

죄의 본질

성공회 목사인 호주 출신 제프리 팩스톤씨는 그의 도전적인 책 「재림교회의 흔들림」에서, 1888년에 재림교회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거부했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로서 그는 우리가 기독교의 역사적인 교리인 원죄론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원죄론을 종교개혁 신학의 기조를 이루는 원칙으로 제시하였다. (제프리 팩스톤, 「재림교회의 흔들림」, 98-114 페이지)  그런데 이 원죄론은 다름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이유만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책을 진 죄인이라는 신조이다. 개인적으로 선이나 악의 선택이 존재하기 이전에 이미 본질상 죄책을 지닌 죄인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는 우리의 정죄됨이 아담으로부터 온 바 그 타락됨을 우리가 상속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가르침은 데스몬드 포드가 표명한 다음의 견해에서 잘 나타나 있다: “죄로 끌리는 욕구 자체에 죄가 있다. . . 죄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선언되었다. . .악한 욕구는 그것을 의지로 물리칠 때에도 죄가 된다.” (데스몬드 포드, 「성육신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한 팜대일 학술회에 제출한 논문 28페이지).

이 견해에 의하면 죄(sin)와 죄책(guilt)은 우리의 본성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 본성은 죽을 몸이 죽지 아니할 몸을 입어 새로운 몸을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결코 제거될 수 없는데, 바로 그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어버린 이러한 죄책의 현실성을 복음이 처리해야만 된다.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연약함, 결함 및 성향들이 모두 죄가 되는 것이다. 흥미롭고 중요한 점은 종교 개혁자들이 이 원죄론이라는 그들의 교리를 예정론(predestination)의 전제에 기반을 두고 확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 예정론은 하나님이 자기 임의에 따라 인간의 선택과는 상관없이 일부 사람들을 그들의 죄스럽고 죄책을 지닌 본성 안에서 고통 당하고 멸망 당하도록 내버려두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통하여 그의 구원하는 은혜를 보내기로 미리 택하였다는 가르침인데, 이 예정론과 원죄론은 서로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는 교리들임에 틀림 없다. 그러하기에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한편으로 이 예정론을 거부하면서도, 원죄론은 아직도 올바른 복음적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인성

그러면 위의 전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 단계로 가 보자.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면서 동시에 죄 없는 분이기 위해서는 그 분이 어떠한 종류의 인간이 되셔야 하는가? 분명히 신신학적인 견해는 그리스도가 죄 없는 인성, 즉 귀하나 필자가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죄의 본성과는 완전히 다른 인성을 지녀야 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본성” 혹은 “타락 전 인성”으로 불리어 지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학자의 다음 인용문들이 이 점을 좀 더 분명하게 밝혀주리라 본다: “그리스도가 둘째 혹은 마지막 아담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죄 없는 인성을 소유해야만 된다. . .그리스도가 죄스러운 성향을 소유했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 자신이 구속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없다.” (데스몬드 포드, 「성육신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한 팜대일 학술회에 제출한 논문 32 페이지).

이러한 신학 체계에 따르면, 죄로 기우는 본성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 전에서 죄책(guilt)을 지닌 대상이기에 구속주인 그리스도는 우리 인간의 죄스러운 본성과는 그 어떠한 연관도 가져서는 아니 됨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인간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 위에 인용된 학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주고 있다: “창조 당시 성령께서 혼돈에서 완전한 세상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 주님의 탄생을 위해 마리아의 본성을 완전한 본성으로 바꾸어 주셨다.” (데스몬드 포드, 「성육신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한 팜대일 학술회에 제출한 논문 34 페이지). 다시 말하자면 마리아의 유전적 결함들이 바뀌어져서, 우리 인간들이 부모에게서 전해 받는 유전과는 전혀 다른, 완전한 유전적 요소만을 그리스도에게 전수했다는 주장인 바이다.

칭 의

이 “신신학”이 제시하는 복음의 다음 단계는 우리 인간의 체험과 관련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이 논리를 전개한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죄인이어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화로움을 입을 때까지 이 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개심한 이 후에도 계속 죄책을 지닌 죄인으로 남아있게 되어, (이기심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노력들 조차도 오염시켜서 죄를 극복하려는 그 행동 자체 속에서 우리가 죄를 범할 수 있으므로) 훌륭한 행위를 하면서도 죄를 범하기 때문에, 이 신신학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성화보다는 칭의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죄와 부패된 유전으로 인해 변질되고 말았기에, 우리는 항상 외부에서 오는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imputed righteousness)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고체계 안에서는, 복음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뜻하는 칭의에만 국한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래서 칭의만을 의미하게 되고, 성화는 구원의 여부와는 상관없는 일종의 훌륭한 권고 정도에 해당될 뿐이다.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원죄로 더럽혀진 그 어떤 것도 완전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결코 기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논리는 우리가 항상 내면적으로 사실 범죄자이지만 법률적으로는 의로운 존재임을 주장하게 되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보다는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항상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완 전

마지막으로, 죄를 부패된 본성으로 규정하는 “신신학”의 기본적 전제는 품성의 완전에 관해서 불가피한 한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우리의 본질적 죄책이 우리가 태어나면서 상속받은 본성에 있다면, 그리고 더욱이 우리가 죽게 되거나 아니면 주님의 재림과 함께 살아서 승천할 때까지 이 본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밖에 없다면, 완전함은 물론 예수님이 극복하신 것처럼 죄를 극복하거나 혹은 이생에서 죄 없음의 가능성을 논함은 분명히 가당치 않게 된다. 또한 우리 자신의 인간적 노력보다는 예수님을 점점 더 의지하면서 전 생애를 통해 영적으로 계속 성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60세에 이르렀을 때 18세 때와 똑같은 죄책을 지닌다면, “품성의 완전”이라는 용어는 무의미한 것으로 우리의 영적인 어휘 사전에서 하루속히 제거해야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생에서의 도덕적 완전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됨은 원죄론이라는 교리가 불러온 하나의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이러한 사고 체계에서는 도덕적 완전을 성취하려는 노력 자체가 율법주의적인 시도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부인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은혜의 시기가 마쳐진 후에 조차도 하나님 백성들의 품성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면에서 결함이 존재할 것이고, 죄 없음을 오직 완전히 죄 없는 본성으로 보기 때문에, 이 “신신학”은 그러한 상태가 영화로움을 성취하는 재림 때까지 결코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하게 되는 바이다.

위에 요약된 설명은 재림교회의 안팎에서 발견되는 논리정연하며 치밀하게 잘 다듬어진 하나의 신학체계에 기반을 둔 복음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복음관은 시발점인 전제에서부터 결론까지 일관성이 있기에, 귀하가 만일 이 신학체계의 기초적인 전제에서 출발한다면 그것이 제시하는 논리적 귀결로 도착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여러 고참 재림교인들 사이에서 이 소위 “개혁 신학”이 매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논리적이고 성서적이 되기를 바랄 때,  다른 복음관들이 모두 비논리적이고 비성서적이기에 우리는 위에 제시된 복음관의 이해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의 복음인 참된 복음은 위에 요약된 복음관과는 다른 전제 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러하기에 다른 결론으로 우리를 인도한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리고 이 복음만이 하나님과 사단 사이에 벌어져 온 대쟁투의 엄청난 우주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 복음만이 재림교회뿐만 아니라 “영생을 상속받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리까?” 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개인들에게도 안영과 희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확신하는 바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제 구약에서 약속되었으며 신약에서 성취된 복음에 대한 또 다른 한 이해인 재림신앙의 복음관을 아래에서 제시하고자 한다.

재림신앙의 복음관

이 복음관의 기본적인 전제는 하나님과 사단간에 존재하는 우주적 대쟁투의 핵심이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신랄한 고발이 사실무근임을 가리는 쟁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큰 위험부담을 지시고 우주의 피조물들에게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였으며 그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에 대한 사단의 공격이 실로 그러한지를 스스로 판단할 기회를 허락하셨다고 이 복음관은 말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죄의 고통을 허락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강요된 순종은 무가치한 것이며 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죄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도 필히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하여 선택의 자유를 잃어버린 후,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 13:8, KJV)이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이슈들을 분명하게 밝히고 인류에게 두 번째의 유예기간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성육신하기로 자원하셨던 바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의 고통은 사단이 예수님의 주권을 스스로 인정하고 굴복하기 전에는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바로 우주의 가장 큰 비극이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중상모략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결정적인 쟁점은 이 대쟁투의 현장에서 타락한 인간과 타락하지 않은 우주의 거민들 모두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에 있다. 즉 하나님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단을 택할 것인가? 이렇게 볼 때, 이 복음은 어떤 종류의 예정론에도 결코 그 기반을 둘 수가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정론은 하나님을 선택하거나 거부하는 인간의 권리를 본질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이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와 사단간에 진행되어온 대쟁투와 직결된 아주 중요한 개념인 “자유 의지”의 기초 위에 견고하게 세워져 있다. [2]

[2] 역자주: 예정론을 주장하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경시하는 복음관을 칼뱅주의(Calvinism)라고 부른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며 그 위에 기초를 둔 복음관을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라고 명칭한다. 장로교가 칼뱅주의의 대표적인 예라면, 요한 웨슬리가 창시한 감리교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재림교회의 복음관은 아르미니우스주의 계통의 신학적 배경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대쟁투 테마로 승하시켰다고 볼 수 있다.

죄의 본질

이 복음관은 죄의 본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죄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상태에 있지 않고 인간의 선택에 있다. 죄는 인간의 마음이 탐스러운 그 무엇에 동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때 성립되게 된다. 죄책을 유전된 본성의 국면으로 논의하는 것은 책임성이라는 중요한 범주를 간과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을 대적한 인류의 반역에 합류시키거나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대적하게 될 때에만, 죄책이 우리 체험의 일부가 된다.

죄는 인간의 삶, 하나님에 대한 그의 반역 및 그의 의도적인 불순종, 그리고 그런 반역에서 초래된 하나님과의 왜곡된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한마디로 죄는 사람의 본성보다는 그의 의지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죄에 대한 책임성이 그 어떤 의미를 가지려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그로 하여금 불가피한 죄인이 되게 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책임성과 불가피성은 도덕적 영역에서는 상호 배타적인 개념들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죄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의도적 선택으로 정의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신약의 복음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타락되고 죄스러운 본성을 발휘하는 우리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묘사되고 있는 바이다.

그리스도의 인성

이러한 기반 위에 이제 그리스도의 인성, 즉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성육신하셨을 때 그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본성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한다. 만일 죄가 본성이 아니고 선택에 의해 이루어 진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되어진 죄로 기우는 본성을 물려받으면서도 죄인이 아니 될 수 있음이 분명해 진다. 그 분은 결코 자신의 선택들이 유전된 본성에 의해 지배되도록 허용치 않음으로 해서 그의 모든 의식적 선택이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였기에, 그리스도는 언제나 죄 없는 상태로 계셨을 뿐이다. 그가 물려받은 본성은 우리가 물려받은 본성과 다를 바 없었으며, 예수님이 마리아로부터 인간의 죄스러움을 전수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어떤 특별한 개입을 구상할 필요가 없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히 2:14-17).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지위가 아닌 아담이 범죄한 이후 더 심하게 타락한 인간의 수준까지 내려오는 굴욕을 담당키로 자원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그 당시 사람들은 분명히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의 죄 없는 상태에 있지 않았다. 따라서 아담의 타락이 불러온 결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과감한 그 어떤 조처가 필요 되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깊은 죄악의 구렁텅이 속으로 떨어진 인류를 (처음부터 누리도록 지음을 받은 삶의 새로운 경지로) 몸소 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그 구렁텅이로 내려 가셔야만 하였다. 예수님은 우리를 들어 올리기 위하여 가장 높은 하늘 보좌에서 가장 밑바닥까지 자신을 낮추고 내려오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타락에 의해 손상을 입지 않은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면, 그 분은 죄의 영향으로 곤경에 처한 인간의 어려움을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취하셨다면, 죄로 인해 형성된 넓은 구렁이 그 길을 막았을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대변코자 하신 대상은 타락한 인류였다. 타락한 죄인들의 옆에 함께 서서 예수님은 거룩한 하나님과 죄인인 인류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면, 그 분은 분명 하나님과 죄 없는 아담 사이의 구렁은 메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과 타락된 인류 사이의 구렁은 아직도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와 반면에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된 죄스러운 본성을 나누어 가지셨다면, 그의 중보사업은 타락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구렁에 다리를 놓으실 수 있게 된다. 오직 우리의 고통스러운 상황 속으로 깊숙이 그리고 충분히 들어오셔서 우리와 완전히 일체가 되신 후에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었다. 인류가 물려받은 본성이 아닌 그 어떤 인간의 상태를 취하셨다면, 즉시로 원수 마귀는 이의를 제기하며 도전을 던졌을 것이고 우주 거민들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성관이 1888년 당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을 전파한 존스(A. T. Jones)와 와고너(E. J. Waggoner)가 강력하게 외치던 기별의 일부였으며, 그 기별을 엘렌 화잇 여사가 또한 높이 평가하며 인준하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해, 즉 타락한 몸으로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그들이 전파한 기별을 두드러지게 부각시킨 한 핵심적 요소였다.

칭 의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이해에서 이 재림신앙의 복음관은 우리 자신의 개인적 체험의 영역으로 나아간다. 복음은 우리를 용서하심과 동시에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기쁜 소식이라고 정의를 내린다. 복음은 (1)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판결하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포이고, 동시에 (2) 점차적으로 우리가 그 분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우리의 죄스러운 삶을 쇄신시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즉 이 복음은 법적인 판결인 동시에 변화시키는 능력인 바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의 열쇠이며 이러한 믿음 안에서 칭의가 일어난다. 따라서 이 복음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되며 그로 인해 의롭다고 간주되는 칭의와 더불어, 성령의 권능으로 더욱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그로 인해 의롭게 되어지는 성화를 모두 포함한다.

완 전

마지막으로 이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논할 수 있는데, 완전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믿음으로 그 분에게 더욱 더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분의 충만하심으로 일하시도록 허용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과격한 완전론이 아니며, 구원을 받기 위해서나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써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그러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완전은 우리가 지닌 죄스러운 본성의 제거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가진 그 어떤 내적 선함에 의존함을 지칭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성서적인 완전함이란 그리스도의 권능에 완전히 순복 함으로 죄가 지극히 싫어져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욕구가 사라질 때 일어나는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의미한다. 만일 죄가 생각과 말과 행실 중에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우리의 의도적 선택이라면, 죄없음(sinlessness) 또한 생각과 말과 행실 중에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의도적 선택인 바이다. 성서적인 완전함의 목적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우리가 가진 죄스러운 본성의 박멸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통해 그 본성이 회복됨을 말한다. 또 이 완전함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음을 뜻하지 않으며, 계속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정신으로 끝임 없이 계속 성장함을 의미한다. 더불어 이 완전함은 우리가 내적으로 거룩하다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자비와 권능을 구하며 그 분께 의지함에서 오는 기쁨이다. 그 완전함은 유혹의 부재가 아니고 그 유혹이 올 때 그것에 굴복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율적인 선함이 아니며, 그리스도께 완전히 의지하여 배역함에 종지부를 찍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은 죄스러운 본성 가운데 죄 없는 품성의 소유가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복음의 목적은 죄의 도말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완전함은 그와 직결된 목표이며 그리스도안에 거함은 그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의 매일 매일 관심사는 최종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유지하는 그 분과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품성 완성에 대한 이해만이 재림에 관한 제칠일 예수 재림교회의 기별에 살아있는 원동력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종종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함께 고뇌하며 씨름함을 요구한다. 야곱처럼 하나님과 씨름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우리가 깨닫고 있는가? 혼신을 다하여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고 약속하신 말씀을 우리가 한결같은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가?

새로운 신학의 복음관이 불러온 영향들

재림교회 안으로 침투한 복음주의파(신신학)의 복음관은 재림교회안에서 모종의 극적인  결과들을 불러왔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죄인이고 그래서 사는 동안 본성적으로 죄를 계속하기 떄문에, 그리고 우리가 칭의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으며 성화는 단지 구원의 선물일 뿐이라고 가르치며, 완전은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여러가지 재림교리들과 관행들에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쳐 왔다.

먼저 성도들의 성품계발과 성화된 순종을 들여다보는 조사심판(재림전심판)의 교리는 기껏해야 신앙과 무관하거나 최악의 경우 신앙에 파괴적인 개념으로 치부된다. 그리고 엘렌 화잇에게 부여된 가르침의 권위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데, 그녀의 가르침이 이 새로운 복음관의 모든 주요 신조들에 정반대되는 입장을 취하기 때문이다. 또 마지막 시대에서의 계명과 안식일 준수의 중요성이 심각학게 폄하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안식일 준수자들은 태생적으로 본성적인 죄인이기에 계명을 시종일관 범하는 존재며, 완전한 계명은 오직 완전한 본성을 가진 자만이 지킬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건강기별은 질병을 피하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유익한 충고 정도로 전락되는데, 이것은 성화의 일부로서 우리가 구원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요소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오락, 독서, 미디어 제작, 음악, 의상, 장신구등에 관한 교회의 여러 표준들은 “진리”보다는 단순히 문화에 따른 빅토리아 시대 전통의 과거 유산물로서, 지금의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면 현대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치부된다. 새로운 교회 개쳑 방법이 시행되어지고, 그를 통해 들어온 새로운 신자들의 생활양식과 욕구에 거슬리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목적으로 재림교회안에서 좀 더 자유로움을 만끽하려는 이들을 위해 새로운 예배형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일말의 율법주의라는 오점도 피하고 그리고 개인적인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안식일 준수 관행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도 나온다.

이렇게 새로운 복음관의 영향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여러 중고등 학교와 대학들에서다. 이 학교들에서 졸업한 학생들이 이 새로운 복음과 그 열매들을 품고 각 지역의 교회들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재림운동의 통일성이 깨어지게 되었으며, 각 지역에서는 이제 서로 다른 종류의 가르침과 관행을 따르는 여러 “브랜드”의 재림교회들이 존재하게된 상황이다. 이리하여 평신도 교인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혼란과 좌절감과 회중주의와 더불어 교회 지도층에 대한 불신을 가져올 수 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 교회 조직과의 결별까지 초래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위에 요약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복음이 오늘날 재림교회 안에서 강론되고 있는 지경이다. 이제 왜 이 두 신학 체계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입장인지를 여러분이 인식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두 입장 사이엔 절충이 불가능하므로, 이 둘 중 어느 복음을 신앙의 안내자로 택할지 여러분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신가? 필자가 간구하건대, 여러분이 각자 간절한 기도와 함께 성경말씀을 연구하시길 바란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여 깨닫게 될 때 여러분이 믿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믿는지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것이다. 이 두 복음에 관하여 마지막 시대의 핍박 하에서도 굳게 설 수 있는 분별력과 성령의 지도를 받은 결단을 우리가 내려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결정에 정직하게 도달했는지 아니면 좀 더 쉬운 길로 가려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얼버무린 결정을 내렸는지, 예리하게 우리의 양심을 살피시며 주시하실 것이다.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이 되도록 하며, 인간에 의해 날조된 그 어떤 조작품이 아니 되도록 하자.


데니스 프리비(DENNIS PRIEBE) 목사는 50년 동안 목사, 교사, 그리고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11년 동안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후, 30년 이상을 어메이징 팩트 선교 기관의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데니스 프리비 목사의 세미나 동영상 (한글 자막 첨부 - 출처: MIGHTYC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