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문서는 앤드류스 대학교 캠퍼스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복음 연구회 (Gospel Study Group)의 2012년 3월 5일 모임에 제출되어 발표된 R. J. 그래블 (R. J. GRAVELL) 장로의 발표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특히 그리스도가 소위 “무고한 연약함(innocent infirmities)”만을 지니고 성육신하셨다는 주장에 대해, 성경말씀과 예언의 신에 근거해 분석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연구서로서 이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재림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복음을 연구하거나 공유할 때, 진리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는 되도록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명확한 구절이나 인용구를 찾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을 읽을 때, 나는 “모든(ALL)”, “항상(ALWAYS)”, “결단코(NEVER)”,그리고 “모든(EVERY)“과 같은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이 단어들이 비록 단순하지만, 그 의미에서 매우 강력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 단어들은 그것이 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의미한다고 믿는 내가 순진한 사람인가? “모든”은 항상 “모든”을 뜻하는가, 아니면 “거의 모든”을 의미하는가? “결단코”라는 단어는 결코 “결단코”를 뜻하지 않고 실제로는 “거의 결단코”를 의미하는가? 내가 여러분에게 이것을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가 자주 하나님 말씀의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해를 간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논문을 함께 읽을 때 이러한 단어들과 그와 유사한 다른 단어들에 주의를 기울여 봐 주기를 부탁드린다.

이 논문에 담긴 생각과 아이디어는 오직 나의 것이다. 1888년 기별 연구 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나의 생각과 결론 또는 이 주제를 제시하는 나의 방식에 완전히 동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친구들 가운데서, 나는 내 솔직한 생각과 신념을 자유롭게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 중 일부는 직설적일 것이지만, 그것은 나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판단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함께 노력하는 동안 여러분의 인내와 기도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엘렌 화잇은 “하나님 아들의 인성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했으며 “우리의 연구 과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The Youth Instructor, October 13, 1898). 그녀는 또한  “우리는 우리 주님의 참된 인성에 대하여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하기를 원한다” (Letter 69, 1897, Manuscript Releases, vol. 8, p. 447) 고 말했다. 지난 50여년 동안의 재림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주제보다 더 문제가 되었고 교회를 떠들썩하게 한 주제는 없었다. 많은 책과 기사들이 모든 관점에서 쓰여졌다. 우리는 그것을 모든 각도에서 관찰했고, 관련된 본문의 모든 내용을 분석하였고, 엘렌 화잇의 글을 사방으로 끌어당겼다.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일어 벌어졌는가? 이런 우리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있는가?

가장 많은 혼란을 야기한 것은 여전히 첫 번째로 쓰여진 책이다. 1957년에 쓰여진 「교리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답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이 책이 출간되기 두 해 전에 리로이 프룸 목사가 주축이 된 대총회의 일부 지도자들과 몇명의 복음주의파 지도자들 간에 일련의 회의가 있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파 인사들 중 두 사람은 이터니티 잡지의 편집자인 도널드 반하우스(Donald Barnhouse) 박사와 비기독교적인 이단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명성을 얻은 젊은 연구자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었다. 1955년에 월터 마틴은 재림교회가 믿는바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프룸 목사에게 재림교회 지도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후 새로운 주석이 달린 「교리에 대한 질문」 주석판이 2003년에 발행되었다. [이 주석판의 편집자인] 조지 나이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룬 이 책의 부분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논평을 했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았다:

“우리는 교단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주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518)

월터 마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이트 박사는 “마틴이 재림교회의 신학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질문은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을 때, 인간의 죄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음’을 견지하는지였다”(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518)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는 여러 분명한 진술들을 월터 마틴이 우리 재림교회의 출판물에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프룸과 그의 동료들은 교회가 더 이상 이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고 월터 마틴을 납득시켰다. 그러면서 프룸은 이전의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광적인 소수 분파”라고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조지 나이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룸 자신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xv)

월터 마틴은 결국 자신의 이단 목록에서 재림교회를 제거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계속해서 믿고 있는 바를 알았다면,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교회 역사의 이 시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조지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평가를 하였다: “그 결과 복음주의파들과의 평화를 이루었지만 재림교회 내부에서는 문제를 야기시겼다.” (Questions on Doctrine, p. 2003) 프룸 목사에 대해 계속 언급하면서 조지 나이트는 또한 “프룸과 그의 동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간에, 그들이 제시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견해가 교단의 대다수가 보유한 입장이라는 그들의 주장” (Questions on Doctrine, 2003 p. xvii) 과 “그리스도가 죄된 인성을 지녔다고 말한 엘렌 화잇 진술을 누락한 것은 솔직하지 못했고 투명하지 않았다.” (Questions on Doctrine, 2003 p. 517)

그 후 40여년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가 타락하기 전 아담의 본성을 취했다는 개념을 계속해서 고취시켜 왔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취했다는 것을 교회가 마침내 인정한 것은 지난 10-12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해 어느 정도 진전이 이루어진 것은 주님께 찬양을 돌릴 일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실제로 취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재림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가 취한 타락한 본성에 한계를 두고 싶어한다. 요즈음 제안되고 있는 개념은 그리스도가 [죄와 상관없는 배고픔, 고통, 연약함, 슬픔과 같은] 우리의 “무고한 연약성(innocent infirmities)”에 참여하기 위한 정도까지만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조지 나이트와 다른 여러 사람들이 견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가르침이 성서적이며, 엘렌 화잇에 의해 정직하게 뒷바침될 수 있을까? 우리는 나중에 이 “무고한 연약성”이란 개념에 대해 더 언급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연합을 위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제쳐두라고 권해왔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한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의견일치를 이루기 전에는, 결코 연합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사업이 종결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 문제를 놓고 현재 진행되는 논쟁은 123년 전 “주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 .그분의 백성들에게  보내셨던”(목사, 91) 기별자와 기별을 거부한 직접적인 결과라고 본다. (목사, 91) 이 기별에 대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저항은 이러한 혼란을 지속시켜 왔다.

우리가 먼저 살펴봐야 할 혼란의 한 분야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된 육신 속에 거하면서 오염되지 않을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을 모르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재림교회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수년간 들어왔다. 우리의 본성은 죄이며 부패함으로 가득 차 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다면 우리와 같이 구속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 되셨을 것이라고 들어왔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인가?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 3:16-17) 여기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순복한 사람들인 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울이 말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을 주목하라.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존재의 상태가 아닌 선택이었다. 우리가 거듭나기 전에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실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나는 바로 그 순간,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주님을 위한 거룩한 성전이 된다. 오직 우리 자신의 적극적인 더럽힘(죄)의 선택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거처에서 물러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 아버지의 뜻에 순복하지 않으신 순간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 2:19)

그리스도께서 갓난아이로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는 존재의 법칙을 어기지 않고, 인간의 육신으로 자신을 감싸고 아버지께서 그를 위해 준비하신 몸 속에 거할 권리가 있었다. 성령이 거듭난 성도의 마음과 정신에 거할 때 더럽힘을 당하지 않듯이 그리스도는 죄된 육신을 취함으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았다. 엘렌 화잇은 “빛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그들은 주님이 보시는 대로 보게 될 것이다. .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위해 문을 열게 될 것이고, 그분을 영광스러운 손님으로 맞이할 것이다. 그리하면 영혼은 그리스도께서 거할 수 있는 성전이 될 것이다.”(리뷰와 헤럴드, 1898년 5월 24일) 라며 성경말씀을 보충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순복한 마음 속에 거할 수 있고 그렇게 할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순복할 때, 우리 마음의 문은 자동적으로 활짝 열려 그리스도를 영접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그러한 우리의 마음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되고 그곳이 자신이 편히 거할 성전임을 알고 들어올 것이다. 새롭게 된 마음은 부드러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넘치며, 그리스도의 삶을 유지하는 의로움으로 흘러 나오게 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1888년 재림교회에 전해졌다. 엘렌 화잇은 그 기별이 “무한히 아름다우신 그리스도”를 드러냈다고 말했다 (Sermon, Rome, New York, June 19, 1889). 그녀는 그 기별이 하나님의 기별자인 A. T. 존스 목사와 E. J. 와고너 목사를 통해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직접 주어졌다고 말했다. 1888년 대총회 후1년 6개월 뒤, 그녀는 이 두 사람이 “참된 셋째 천사의 기별”를 전하고 있음을 알려주었고 (리뷰와 헤럴드, 1890년 4월 1일), “셋째 천사의 기별은 온 세상을 그분의 영광으로 환하게 할 것이다”고 말했다 (대쟁투, 611). 그녀는 또한 “셋째 천사의 기별은 멸망하고 있는 세계에 보내는 마지막 기별”이라고 말했다 (리뷰와 헤럴드, 1909년 4월 22일). 나는 종종 이 기별이 충만한 “셋째 천사의 기별”이며, “멸망하고 있는 세계에 보내는 마지막 기별”로서,  “온 세상을 그분의 영광으로 환하게 할 것”이라면, 왜 교회 전체가 이 메시지를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곧 돌아오심을 위해 자신과 세상을 준비하지 않고 있는지 의아해 왔다. 우리의 딜레마에 대한 답이 여전히 이 기별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 기별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존스와 와고너는 종종 우리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당신 아들을 죽게 내맡기면서 겪은 일에 대해 기슬하였다. 그들은 또한 우리의 죄를 위한 완전한 희생이 되기 위해 우리 구속주가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는지, 그리스도가 얼마나 우리 안에서 그분의 완전한 의로운 삶을 재현하기를 갈망하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우리의 인성과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는 몇 가지 질문들이 여기 있다:

(1) 우리가 죄된 육신으로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을까?
(2)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된 육신 속에 거하면서도 여전히 “거룩한 것”으로 불릴 수 있을까?
(3) 우리가 죄된 육신으로 거룩해질 수 있을까?
(4) 성경이 이것을 가르치고 엘렌 화잇이 분명히 그것을 지지하는가?
(5) 만약 대답이 ‘그렇다’라면,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단은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사단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였다.” (영문 시조, 1896년 1월 16일) 그가 맞다면 다른 질문들에 대한 대답도 ‘아니오’가 될 수밖에 없다.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 사단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거룩해져서 그리스도의 재림 이 전에 죄 없이 살 수 있음을 믿지 않고 있다. 나는 신학교 학생들이 이생에서 모든 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조롱하는 것을 들었다. (신학생들이 전해 주었는데) 앤드류스 대학의 한 교수는 그의 반 학생들에게 그들 중 누구라도 오늘 죄 짓는 것을 멈췄는지 물어보았다고 한다. 학생들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그러면 죄 짓는 것을 멈춘 사람이 있는지 아는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에 학생들은 고개를 떨구거나 다른 곳을 바라 보면서 교실은 당연히 매우 조용해졌다. 그리고 곧 이어 그 교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죄를 극복한다는 생각을 비웃었다고 한다. 가끔 불편한 웃음이 학생들에게서 나오곤 했지만 아무도 그의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문제는 우리가 모든 죄를 극복했는지 혹은 그런 사람을 알고 있는지가 아니다. 문제는, 그분의 내재하는 영의 능력을 통해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지켜주실 수 있는 구속주를 우리가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자는 사단이었다. 하지만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켰으며, 인간도 율법을 지킬 수 있음을 논쟁의 여지 없이 증명하였다”(리뷰와 헤럴드, 1901년 5월 7일)고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논쟁의 여지 없이” 증명하셨다면, 그분이 어떻게 증명하셨는가? 그리고 증명하셨다면, 어찌하여 이것이 오늘날 재림교회에서 여전히 두드러진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가?

우리가 모든 죄를 극복할 수 있는지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인성을 취하셨는지에 대한 논쟁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제한적으로만 취하셨다고 믿으며 동시에 우리가 죄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취하시고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으셨지만, 그러한 인성이 대부분 피곤하거나, 배고프고, 목마르며, 물론 죽을 수 있다는 육체적 불편함들(무고한 연약성)에 국한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우리가 모든 죄에 대해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진정으로 취했다면 그 자신이 구속주를 필요로 하는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수년 전 모리스 벤든 목사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는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성을 가졌다면, 그는 죄를 지을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내가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태어나셔서 늘 순복하는 의지를 지니고 오셨더라도 말인가요?” 질문했는데, 벤든 목사는 “그랬더라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우리의 본성을 가졌다면, 그는 죄를 지을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만일 벤든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복하여 거듭나서 성령에 의해 인도받게 될 때에도, 우리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재림하기까지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존스와 와고너 목사들을 통해 보내었고 엘렌 화잇과 다른 선구자들이 지지하였던 기별은 의로움에 대해 교회를 일깨우고 능력으로 세상에 전하라는 기별이었다.

벤든 목사와 이야기를 나눈 몇 주 후, 나는 1888년 대총회가 끝난 지 한 해가 조금 넘은 시점에서 엘렌 화잇이 쓴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발견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지니셨다면 그 자신이 죄인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교인들이 화잇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들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존스와 와고너가 강연과 글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다고 사람들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약 그분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분은 인간이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받으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그분에게 불가능 하였다면 그분은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려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분의 시험과 승리는 인간이 모본되시는 분을 모방하여야 할 것과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리뷰와 헤럴드, 1890년 2월 18일)

성경말씀과 조화를 이루며 존스와 와고너와 더불어 그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 “우리의 조력자“가 되고 우리처럼 시험을 받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본성“을 취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892년 그녀는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가지셨다면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였을 것이다”(영문 시조, 1893년 4월 10일) 라고 말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본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과 나에게 없는 그 어떤 “특별한 능력”도 가지지 않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제한적이거나 “무고한 연약성”만 있는 인성(저등 본성)을 그리스도가 취했다면 그는 우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고 우리가 결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모든 연약성(all the infirmities)”을 지니고(Bible Echo, May 1, 1890) “특별한 능력” 없는 우리의 본성을 그리스도가 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결코 흔들림이 없었다. 1899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싸움 중 가지고 계셨던 모든(every) 이점을 인간이 가질 수 있도록 만드셨다.“ (Manuscript Releases, Volume 16. P. 88) 영감의 펜이 어떻게 이보다 더 명확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모든 연약성“을 취했으며, 그분이 가졌던 “모든 이점“을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이다! 그녀가 “모든 연약성“을 뜻했는가, 아니면 그저 무고한 연약성만을 의미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졌던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이점가운데 일부만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을 때 우리보다 한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음은 사실이다! 이것은 나쁜 소식이 결코 아니다. 그저 좋은 소식일 뿐이 아니라, 아주 좋은 소식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싸움 증 가지고 계셨던 “모든 이점” – 그것을 우리도 가질 수 있기에 그러하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모본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유리한 점이 없어야 하고 (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같아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 죄를 범한적이 없었다면 무엇이 될 수 있었는지 살아있는 실증을 제공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에게 죄인이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인들이 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러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을 떠나기 전에 그의 뜻을 내려놓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거듭나셨다.” 그는 세상에 나온 순간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순복한 채 일생을 보냈다. 그리스도는 성경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 12:49)

엘렌 화잇은 이 성경본문을 보충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분[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분은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소망, 336)

“그[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신성한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다.” (Manuscript 141, 1901)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의 “전능한 힘”을 “내려놓기로” 선택하셨다. 그리스도는 신성한 능력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극복하신 것이다. 그분이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던 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렇게 하셨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가운데 쉬신” 것도 “오직 믿음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거듭났을 때 우리에게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쉴 때 “그리스도가 받은 것과 같은 신성한 능력”을 우리도 받게 될 것이다. 성경 말씀과 화잇 부인은 이 놀라운 진리를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된 육신을 물려받으셨지만 육신의 것을 결코 배양하거나 개발하지 아니 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으나, 우리의 타락한 성과(죄를 범하는 행위)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가 죄된 육신 가운데 이미 처한 상태를 보여주고자 온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러 오신 것이다.

다음은 인간의 타락한 육신에 자신을 감쌌을 때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히 인간이 되었는지를 엘렌 화잇이 우리에게 표현한 다양한 방법을 보여주는 목록이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경험했다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시험들 (ALL our temptations) – 리뷰와 헤럴드, 1905년 3월 9일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 (ALL our difficulties) – 리뷰와 헤럴드, 1889년 10월 1일
우리의 모든 고통들 (ALL our afflictions) – Manuscript Release, Number 1405
우리의 모든 경험들 (ALL our experiences) – 영문 시조, 1897년 11월 24일
그의 형제처럼 모든 것들 (ALL things like His brethren) – 리뷰와 헤럴드, 1892년 5월 1일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All that pertains to human life) – 리뷰와 헤럴드, 1889년 12월 24일
시험당한 모든 점들 (ALL points tempted) – 영문 시조, 1894년 4월 17일
모든 불행들 (ALL the ills) – Manuscript 99, 1908
모든 동반된 불행들 (ALL its attended ills) – 영문 시조, 1877년 1월 4일
모든 골칫거리들 (ALL its liabilities) – The Faith I Live By, p. 48
모든 가능성들 (All its possibilities) – 영문 시조, 1902년 12월 3일
우리의 모든 시련들 (ALL our trials) – 영문 시조, 1892년 4월 18일
우리의 모든 연약함들 (ALL our weaknesses – Upward Look, p. 139
우리의 모든 필요함들 (ALL our necessities) – Manuscript Release, Number 878
우리의 모든 슬픔들 (ALL our sorrows) – That I May Know Him, p. 53
우리의 모든 싸움들 (ALL our battles) – Bible Echo, December 1, 1892
우리의 모든 비애들 (ALL our griefs) – That I May Know Him, p. 53
모든 연약함들 (ALL the infirmities) – Bible Echo, May 21, 1900
모든 욕정의 힘 (ALL the strength of passion) – In Heavenly Places, p. 155
그의 형제처럼 모든 점들 (ALL points like His brethren) – 영문 시조, 1895년 5월 16일
죄를 제외한 모든 면들 (ALL points except sin) – 리뷰와 헤럴드, 1904년 1월 7일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히 인간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모든(ALL)“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했다. 내가 이 논문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그녀가 “모든(ALL)”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녀가 정말로 모두(ALL)를 의미한다고 믿는다! 위의 목록 가운데 있는 굵은 활자로 표시된 “모든 연약함(ALL the infirmities)“이란 문구를 보자. 다음이 그 문구가 있는 인용문이다:

죄를 알지 못하는 그가 타락한 자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 .그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지니고 모든 시험을 견딜 수 있기 위해 자신의 신성에 인성의 옷을 입으셨다. .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루어 졌다.” (Bible Echo, May 21, 1900)

다른 인용구: “우리의 본성과 인간의 모든 연약함을 자신위에 취하신 [그리스도]” (리뷰와 헤럴드, 1905년 1월 19일)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엘렌 화잇이 “모든 연역함”이라는 구절을 처음 사용한 것이 내가 공유한 첫 번째 인용구인데, 날짜는 1900년 6월 27일이었다. 그녀의 진술이 11년 전인 1889년 E. J. 외고너가 말한 것을 얼마나 가깝게 반영하고 있는지 주목하시기 바란다: “만약 그가 모든 일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다면, 그는 그의 형제들이 지닌 모든 연약함에 고통 당하고 모든 시험에 시달렸음이 분명하다.” (Christ and His Righteousness, p. 6, 1889)

엘렌 화잇이 “모든 연약함”이라고 말하는 이 특별한 진술이 위에 열거된 목록의 다른 어떤 것보다 왜 더 중요한가? 엘렌 화잇이 “무고한 연약함(innocent infirmiti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12년이 넘도록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무고한 연약함”만을 취하셨다는 말을 들어왔다. 만약 우리가 엘렌 화잇의 글을 이렇게 함부러 취급하여 “모든(all)”이라는 단어를 “무고한(innocent)”이라는 의미만으로 국한되게 바꿀 수 있다면, 우리는 위 목록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드디어 그리스도는 무고한 약함들과 무고한 시련들, 무고한 고통들 등만을 가졌던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이 수년간 계속된 후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교회내의 많은 사람들이, 증거의 무게 때문에, 그리스도가 실제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음을 인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에서 우리와는 다른 본성을 지닌 그리스도로 만들기를 원하는데, 그들의 이해 부족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나 불신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역자주] 엘렌 화잇이 "무고한 연약함"이란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나이트같은 대안론자들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인성 중 단지 "무고한 연약함(innocent infirmities)"만 취하셨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엘렌 화잇의 서재에 있는 여러 개신교 저자들의 서적 중, 이러한 용어를 사용했던 영국 성공회 목사 헨리 멜빌(Henry Melville)의 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이 여러 비재림교회 저자들의 책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하곤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인용하는걸 피한 용어나 사조까지 엘런 화잇이 지지한다는 근거로 삼는 것은 지나치게 빈약하고 비약적인 추론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취한 인성과 관련하여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는 죄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여기시며,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하기로 선택했는지에 대한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다. 우리 자신의 잘못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분리된 이 세상에 태어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이미 당신의 아들을 통해 우리와 화목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하나님을 온 세상과 화목시켰다. 그런데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와 화목하셨다면, 왜 우리는 그와 분리된 채로 남아있고 구속주를 필요로 하는가? 죄는 분리자이다. 심판 때에 죄로부터 정결됨을 받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영원히 하나님과 분리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와 연괸된 두 가지 뚜렸한 부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유전의 법칙은 두 가지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첫 번째 것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 우리를 괴롭히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유혹을 받는 통로이다. 성경은 이것을 “육신(육체)”이라고 부른다. 엘렌 화잇은 육신을 “저등 본성(the lower nature)”, “죄스러운 육신(sinful flesh)”,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 등으로 지칭한다. 두 번째 부분은 인간의 마음인데, 우리가 이 세상으로 부터 살아남고자 한다면 그 마음이 바뀌어야 한다. 엘렌 화잇은 거듭나기 이전의 인간의 마음을 “육적인 마음(carnal mind)”, “타고난 마음(natural mind)”, “유한한 마음(finite mind)”, “인간의 마음(mind of man)”, “어두워진 마음(darkened mind)” 등으로 지칭한다. 그리고 그녀는 거듭난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mind of God)”, “그리스도의 마음(mind of Christ)”, “신의 본성(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 그리고 “자발적인 마음(willing mind)”으로 지칭한다. 우리가 죄에 대한 유혹에 굴복하거나 저항하기로 선택한 것은 이 마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이다. 우리 모두는 유혹을 당하는 것이 죄가 아님을 이해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유혹을 받게 되는 수단인 타락한 본성이 실제로 죄가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저급한 본성 때문에 구속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육적이고 어두운 마음, 즉 거듭나기 전에는 필히 죄를 선택하게 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구속주가 필요한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인 관계에 있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이며,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을 가지지 않으신 이유이다. 죄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의 선택이다. 엘렌 화잇은 이점에 대해 매우 강력한 의견을 표하였다: “저열한 욕정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혹은 ‘육체의’ 또는 ‘육체의 정욕들’이란 말은 그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신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할까! 아니다.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해야 한다. 부패한 생각은 추방되어야 한다.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한다. 모든 동물적인 경향은 심령의 더욱 높은 능력 아래 복종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보좌를 차지하셔야 한다.” (In Heavenly Places, p. 198)

바울 사도는 마음과 죄된 육신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잘 이해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신(저등 본성)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그리스도의 마음)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롬 8:5)

A. T. 존스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유혹이 어디서 시작되는지에 대해 말하면서, 사도 바울과 화잇 부인의 말에 동의했다:

“그[사단]은 어디서 유혹을 시작하는가? 육체에서다. 사단은 육체를 통해 마음에 도달하고, 하나님은 마음을 통해 육체에 도달한다. . .전쟁터는 육체와 마음 사이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다.” (1895 General Conference Bulletin, p. 328)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의 마음은 죄에 동의했다. 우리는 육신의 유혹을 느꼈고, 우리의 마음이 굴복했으며, 우리 마음의 동의하에, 육신과 정신의 의지와 욕구를 이행했다. 육체가 이끌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간다. 마음이 이끌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법이 준행되게 된다.” (1895 General Conference Bulletin, p. 328)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죄가 아니며, 이것은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도 아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해야 한다”는 권면을 듣는다. 어떻게 우리가 그걸 할수 있을까? “부패한 생각”이 마음에 스쳐가는 그 순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추방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부패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머무르거나 거하게 해서는 안된다. 유혹을 죽게하면 죄가 생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엘렌 화잇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분은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으셨다. 그분은 우리로 신의 성품(그리스도의 마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소망, 123)

믿음이 우리가 아는 전부일 때에, 죄는 더 이상 지배권이 없고, 권위가 없으며, 모든 권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것은 우리 안에 더 이상 존재할 권리가 없어진다. 「재림신도의 가정」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무리 강력한 유혹이라 하더라도 범죄의 핑계가 될 수 없다. 그대가 견디어야 할 압박이 아무리 혹심하다 할지라도 범죄는 그대 스스로 한 행위인 것이다.” (가정, 331) 야고보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말한다. 이 본문에 대한 주석에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는 바로 처음(잉태)부터 죄를 피해야 한다. 모든 감정과 욕망은 이성과 양심에 굴복되어야 한다. 모든 부정한 사상은 즉시 배척되어야 한다. . .어떤 사람도 강제로 범죄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정욕이 이성을 지배하고 불의가 양심을 이기기 전에 심령은 범죄의 행동을 의도해야 한다. 유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벧전 3:12). .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시험을 받을 때마다 도와주실 것이다.” (증언 5권, 177)

이 인용문은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죄는 잉태되기 전인 처음부터 피해야 한다. 마음의 양심과 이성이 우리의 욕망과 육신(저등본성)의 사악함에 대항하는 방지책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 아시는데, 그가 취하신 육신에 “인간 욕정의 모든 힘”을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다 (Heavenly Places, p. 155). 하지만 이렇게 물려받은 욕정에 결코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의 배양된 “동일한 욕정”(증언 3권, 187)을 결코 소유하지 않으셨다. 그의 신성한 본성(그리스도의 마음)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일생의 모든 날 동안 혹은 개심의 순간까지 계속해서 배양하는 “악한 욕정”으로 부터 물러났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이런 “악의 욕정”으로 부터 물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요소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죄, 모든 품성의 결함으로부터 정화된다. 우리는 하나의 죄악적인 성향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Gods Amazing Grace p. 235) 그리스도가 취한 타락한 육신이 아니라 “육적인 마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의 선택을) 떼어놓는다면 하나님에 대한 증오가 자연스럽게 자라게 될 것이다. 하나님 은혜의 능력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은 적개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궤멸할 것이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사랑의 사도 요한은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요일 3:4)라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율법적인 정의이며 죄에 대한 몇 가지 다른 정의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이 가장 두드러지게 가르쳐지던 시기에, 엘렌 화잇은1886년부터 1897사이에 기술된 그녀의 글에서 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설명하면서 “유일한 정의“라는 용어를 12번 이상 사용하였다:

9 Manuscript Releases, p. 249 [Sermon, September 21, 1886].
Signs of the Times, November 24, 1887.
Review and Herald, April 3, 1888.
Signs of the Times, March 3, 1890.
Review and Herald, June 10, 1890.
Review and Herald, July 15, 1890.
The Great Controversy, 1892.
Review and Herald, July 5, 1892.
Signs of the Times, January 8, 1894.
SAT, Vol. 1 p. 228 [Sermon Feb. 11, 1894].
Bible Echo, June 11, 1894.
General Conference Daily Bulletin, March 2, 1897.
“Sunnyside,” Cooranbong, N. S. W. Jan. 11, 1897.

다음은 이런 그녀의 글들 가운데 있는 두 개의 진술이다: “이제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이다.” (리뷰와 헤얼드, 1888년 4월 3일) 그리고 “죄에 대한 정의를 내게 달라고 죄가 정말 무엇인지 교사에게 묻는 것은 모든 죄인의 특권이다. 우리는 요한일서 3장 4절에서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라는 밝힌 정의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성경 전체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Sermon at Williamstown, a suburb of Melbourne, February 11, 1894)

다음 두 진술은 죄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유일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주 강력한 진술이다:

“사도는 우리에게 죄에 대한 진정한 정의를 알려준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 (Confrontation, p. 75)

“죄인들에게 거듭나라고 호소하는 목사들은 죄가 무엇인지, 죄로부터 개심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Confrontation, p. 75)

만약 “전체 성경”에서 주어진 죄에 대한 “유일하고 진정한” 정의가 있고, 그것이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타락한 저등본성은 우리가 지니고 태어나는 결함있는 장비일 뿐 그 이상은 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진리를 거부해 온 것은 그들이 타락한 본성을 지닌 것 자체를 죄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락한 본성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우리의 마음을 바쳤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자신과 사단을 섬겼는지에 대해서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늘에서 루시퍼가 죄를 범했을 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을 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죄에 대해 여러분과 나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는가? 만일 타락한 인간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죄의 정의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성을 가질 수가 없었다면, 그렇다면 여러분과 나는 죄에 대해 변명을 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타락한 육신에 자신을 감쌌다. 육신은 하나님 전에서 소멸되지 않았고, 그리스도께서도 그가 취한 타락한 육신에 오염되지 않았다. 이것의 한 예는 성경에서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접촉한 이야기이다. 「시대의 소망」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문둥병자를 그 무서운 질병에서 깨끗케 한 그리스도의 사업은 영혼을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그분의 사업에 대한 예증이다. 예수께 왔던 그 사람은 ‘온몸에 문둥병’이 있었다. 그 병의 무서운 독기가 그의 온몸에 스며들었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께서 그와 접촉하시지 않도록 막으려고 힘썼다. 왜냐하면 문둥병자를 만진 사람 자신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당신의 손을 문둥병자에게 댔지만 불결하게 되지 않으셨다. 그분의 접촉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나누어 주었다. 문둥병은 깨끗해졌다. 뿌리 깊고, 치명적이며 인간의 능력으로는 정결케 될 수 없는 죄의 문둥병도 이와 같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사 1:5, 6)다. 그러나 인류 가운데 거하기 위해 오신 예수께서는 더럽힘을 받지 않으셨다. 그분의 임재는 죄인에게 치료의 효능이 된다.” (소망, 266)

그리스도는 문둥병자를 만져서 깨끗하게 할 수 있었고, 더럽혀지는 대신 치유함과 생명이 그로부터 전파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죄스러운 육신으로 자신을 감쌌을 때, 그가 취한 인성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다.” 그 대신 생명을 부여하는 힘이 강물처럼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흘러나갔다. 그는 순복한 의지를 가지고 왔으며 성령으로 태어났다. 그리스도가 죄라는 문둥병으로 오염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가 취한 타락한 육신을 통해 그에게 다가오는 유혹에 그의 마음을 굴복하게 되었을 경우에만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그의 육신은 결코 이기지 못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죄스러운 본성(저등 본성) 때문에 구원받거나 멸망되지도 않는다. 우리가 선택한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불순종의 행위들이 심판때에 우리를 정죄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간음한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녀가 타고 난 죄스러운 육신이나 사단이 그 육신을 통해 그녀에게 가져다 준 유혹에 대해서도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그에게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그녀의 모든 마음을 순복하여 그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그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하여, 성령의 거하심을 통해 거룩한 성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 그는 자신의 신성에 인성을 입고, 인간과 어울리며, 긴 인간의 팔로 인류를 품고, 신성한 팔로 하나님의 권좌를 붙잡으셨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사단의 황홀한 유혹으로 에덴에서 잃어버린 원래의 마음을 인간에게 회복시키려고 함이었다.” (Letters and Manuscripts — Volume 12, 1897, Lt 121, 1897, par. 4)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화잇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녀의 진술을 마쳤다:

“우리는 지상에서 그분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 되어, 그분 은혜의 나라를 누리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 세상에서 그분과 함께 할 것이며, 그분의 영광의 나라에 함께 할 것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속하고 우리의 유산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 즉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신성한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며, 그의 완전함 속에서 그와 하나가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 게 될 것이다.” (영문 시조, 1897년 10월 14일)

1888년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 회기와 관련하여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셋째 천사의 기별”이었다고 믿는다. (W. C. White, April 7, 1889) 그런데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엘렌 화잇은 의로움이라는 단어에 대해 간단하게 정의를 내렸다: “의로움은 거룩함이다 (Righteousness is Holiness).” (Thoughts from the Mount of Blessing, p.18)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으로 가지고 나아가야 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은 다름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거룩함”의 기별이다. 그러면 이 거룩함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기별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고 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항상 의견 일치하는 것이다.” (In Heavenly Places, p. 33)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분의 하늘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경험이었으며, 우리도 믿음으로 그분의 신성한 마음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그것이 우리의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분 아버지의 사랑을 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고 우리 안에서 “인간이 에덴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인 원래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오셨다. (영문 시조, 1897년 10월 14일)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이 타락하기전에 가졌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죄스러운 본성을 취하여 창조시 아담에게 주신 것과 같은 마음인 그의 신성한 마음과 연합함으로써 죄를 정복하였다. 인간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행동은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로 가져가 그 위에 못박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영광스러운 몸과 아담에게 주었던 원래의 마음을 다시 한번 연합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히 회복된 인간과 하나님으로 하늘로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믿음으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원래의 마음을 지금 바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타락하기 전 아담이 지녔던 본래의 마음은 타락하기 전 아담의 영화로운 몸과 하나가 될 것이다. 완전히 회복된 아담(인류)는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우리의 주님이자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고 교통하게 될 것이다.

[ 원문 출처: “God Wrapped in Flesh by R. J. Gravell” ]


R. J. 그래블 (R. J. GRAVELL) 장로는 플로리다주의 오랜지 시티에 소재한 DeBary-Orange City SDA Church 의 장로로 봉사하는 평신도 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