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원죄론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요시하는 아르미니우스 계통(Arminian Tradition)에 속한 재림신앙의 전반적인 교리와 극한 대립을 이루는 신조이고, 그래서 엘렌 화잇을 비롯한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그러한 죄의 개념을 채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 재림교회의 기본신조문 7항은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라고 명시하면서 타락의 실제성과 그 파괴적인 결과를 강조하며 아담의 죄로 인한 인간의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타락한 본성을 기술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소위 원죄론적인 “타고난 본성적 죄인”의 개념을 배제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참조: “기본 신조문을 통해본 재림교회의 인간론과 죄론“)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 일부 재림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주의파 대표들과 가진 일련의 회의 후, 1957년에 발행된 「교리에 대한 질문(QOD)」을 통해 원죄론적인 가르침이 재림교회로 잠입되면서 그 씨앗이 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원죄론의 개념을 받아들인 신학자들에 의해 후세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양성되면서, 이제는 여러 재림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이 원죄론이 재림신앙에 끼치는 영향을 깊게 고려해 보지도 않은 채 그것을 일종의 당연시되는 정통 기독교 교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한인 재림교인들, 특히 한국연합회에 속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에 있는 정의를 초월하고 무시하며 죄를 그 어떤 존재와 비존재의 철학적 이슈로 부각시키며 전개해온 결과로 보여진다. 신앙과 신학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구원론과 직결되는 원죄론적 죄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이 구원론은 물론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종말론, 성소론 및 생활 양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재림신앙까지 해로운 영향이 파급되어 재림교회는 마지막 시대를 위해 주어진 그 정체성과 존재목적을 상실하고 세속화된 일반 기독교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불행히도 이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한 현상들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필자가 원죄론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특히 재림신앙에 끼치는 해악성을 지적하며 성경과 예언의 신이 밝히는 죄의 정의를 명확하게 제시할 때마다, 일부 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그들의 원죄론적인 견해를 지지하기 위해 여러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들을 문맥이나 전반적인 증거의 무게를 무시하며 “단편적으로” 인용하여 사용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필자는 이 문서에서 원죄론의 기원에 대해 간략하게 짚어 본 후에, 원죄론을 지지하기 위해 오용되고 있는 성경구절들과 예언의 신 인용문들을 자세히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사실은 원죄론의 개념을 지지하지 않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원죄론의 기원과 정의

칼뱅주의 계통(Calvinist Tradition)에 속한 기독교인들의 글을 읽다보면 아담의 원죄로 인해 그의 후손들도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원죄론의 가르침을 마치 성서에 명시된 지주적인 교리로 단정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성서와 교회 역사를 주의 깊게 검토해보면, 이러한 주장은 일반 기독교계의 여러 신조와 관행들 처럼 성경이 쓰여진 300여년이 지난 후 헬라철학에 기반을 둔 영지주의와 이교 사상에 물든 아우그스티누스와 같은 교부들에 의해 기독교 신학으로 들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교부 (A.D. 354-430)는 역사학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아담의 죄로 인해 모든 인간은 유죄 판결을 받은 죄인으로 태어 난다는 이론인 원죄론 교리의 창시자로 인정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의 기독교인들은 육체적 부패가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전수되지만, 죄책은 오직 개인의 선택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믿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는 연약함은 물론 죄책도 모든 사람의 타고난다고 주장했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p. 244). 그러한 개념은 곧 아기들이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원죄를 씻을 기회가 없이 세례 전에 죽는다면,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David Van Biema, “Life After Limbo,” Time, Jan. 9, 2006, p. 68).

많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인 종교 개혁자들, 특히 존 칼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 본성에 대한 견해를 강하게 고수했다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II, Chaps. xxi-xxii).

이렇게 여러 세기동안 죄와 책임과 구원에 관한 새로운 개념이 기독교 신학 사조안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죄를 짓기 쉬운 인간의 선천적인 타락된 본성에 관한 성서적 입장으로 시작하여, 아담의 죄 또한 후손에게 전수된다는 개념으로 점차 진화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유전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전파한 다른 누구보다도 책임이 있었고, 루터와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이 개념은 많은 개신교 교회로 침투하였다.

비록 그 교리가 초대 교회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깊은 생각이나 의문 없이 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 견해 사이에 근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담의 쇠약하고 타락한 본성은 유전의 법칙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개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고 믿는 오류에 빠지기 쉬웠다. 그러나 죄로 기우는 성향과 죄에 대한 죄책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으며, 그 작은 차이가 일련의 다른 여러가지의 교리적 오류를 촉발시켜온 것이다.

죄의 본질에 대해 우리가 생각해 볼 때마다 한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음을 필자는 말하고 싶다. 이 원죄론을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에스겔 18:20)라며 분명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은 현재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1)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므로 죄인이 된다고 한다.

(2)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죄인이 된 바는 죄를 우리가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아담의 자녀들로 태어남으로 해서 타락한 종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간주된다고 한다. 즉 아담의 죄책이 우리의 죄책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3) 또 다른 형태의 견해는 우리가 죄를 물려받거나 죄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관계로 태어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채로 출생되는데, 그 분리됨이 바로 우리의 죄책이라는 것이다. 그 소원해짐에 대한 죄책이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하는데, 어떤 이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죄가 없지만, 타락한 종족의 일부로서 이미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기에 태어나면서 정죄되었다고 까지 말한다.

(4)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는 두 종류의 죄가 있다고 하는데, 첫째, 우리는 이 종족의 일부로 태생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며; 둘째, 우리는 또한 우리자신의 죄들, 우리 자신의 선택들, 우리 자신의 반역행위들 때문에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죄라는 말인데, 따라서 비록 우리의 타락한 종족으로의 태생과 반역적 선택이라는 죄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태생 때문에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견해들의 밑바닥에 있는 공통분모는 우리가 인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죄인 되거나 혹은 정죄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들로 원죄를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이 모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죄책과 정죄됨이 본질적으로 유전되었다는 주장이다.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타락한 본성때문에 죄인이라는 주장인데,  원죄론의 핵심은 바로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한 예가 바로 자신의 입장을 “아담과 하와가 범한 인류 최초의 죄로 인해 아담을 통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전 인류가 태어날 때부터 안고 태어난 그 사망적 상태”로 밝힌 한 인터넷 논객의 원죄론적 개념일 것이다. 원죄를 아담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로 이해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바로 이렇게 “원죄”를 정의해 놓고 나서 그로 인해 그 후손들이 (유전적인) 사망적 상태로 태어나면서 죄인이라는 부연 설명에서 아우구스티누스 원죄론의 기본적인 전제를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이 자기가 존경한다는 몇 재림교회 원로 목사 및 신학자들도 가르치고 있다는 “우리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날 때부터 신분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 혹은 “갓 태어난 어린 아기도 아담이 범죄하여 죽는 순간 함께 죽어버렸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죽어 나온 죄인”이라는 가르침이 바로 이런 원죄론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기들이 가르치는 것이 원죄론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에 신빙성이 없음은 이들의 죄론을 뒷바침하기 위해 인용하는 성경절들 모두가 칼뱅주의자들이 그들의 원죄론적 입장을 위해 사용하는 성경절들과 동일하다는 점이다.

[저자주] 원죄론에 대한 정의를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벵과 일반적인 사전들이 어떻게 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자신의 입장이 원죄론이 아니라는 이 논객의 주장이 얼마나 객관성이 부족한지 알 수 있다.

칼뱅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FIRST EDITION 1536) 
Original sin, therefore, appears to be an hereditary pravity and corruption of our nature, diffused through all the parts of the soul... (따라서 원죄는 영혼의 모든 부분으로 퍼져있는 유전된 우리 본성의 타락과 부패이다...)

MERRIAM-WEBSTER DICTIONARY
the state of sin that according to Christian theology characterizes all human beings as a result of Adam's fall (기독교 신학에 의하면,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인해 모든 인간이 처하게 된 죄의 상태)

BRITANNICA 백과사전
in Christian doctrine, the condition or state of sin into which each human being is born...the origin has been ascribed to the sin of the first man, Adam, who disobeyed God...and, in consequence, transmitted his sin and guilt by heredity to his descendants. (모든 인간이 죄의 상태로 태어난다는 기독교 교리...하나님을 불순종한 첫번쨰 인간인 아담의 죄에서 기원했으며...그 결과 그의 죄와 죄책이 후손들에게 유전으로 전수된다는 교리)

DICTIONARY.COM
a depravity, or tendency to evil, held to be innate in humankind and transmitted from Adam to all humans in consequence of his sin. (아담이 범한 죄의 결과로 모든 인간들에게 전수되고 내재된다고 여겨지는 부패 혹은 악한 경향)

이 “원죄”라는 용어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막대한 거부감을 수반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기본적인 공정감이 그 어떤 상태와 행위들을 스스로 택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것에 대한 죄책을 부과하는 개념을 혐오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믿는 일부 재림교인 중 대부분은 이러한 견해를 표현할 때 비위에 덜 거슬리는 완곡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완곡한 용어들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내재하는 문제점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 칼뱅주의 교리 그 자체, 즉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후손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본의 아닌 범죄자로 출생한다는 신조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태어나면서 죄책을 물려받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그들이 죄라고 믿고있는 죄의 본성을 전해 받았으므로 그 어떤 하나의 죄도 선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용서 하심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인간이 자동적인 죄인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연약해진 의지력에 가해지는 육적 본성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 적령기에 이르기 전에 반사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금방 태어난 아기들도 죄인이라는 근거로 그들에게도 사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드는데, 이 아기들이 죄인이 아니라면 죽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다. 하지만 짐승들도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짐승들에게도 죄가 부과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원죄설에 아무리 다른 이름표를 달아도 여전히 원죄설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죄를 인간의 선택권 너머에 위치시키는 가르침은, 원죄설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리의 다른 어떤 면모들은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원죄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재림교회내로 잠입한 원죄론의 기원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은 1957년도의 「교리에 대한 질문(QOD)」을 통해 도입되었다. 그 이전에는 재림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이 통일적으로 원죄론의 개념을 배격하였다. 다른 글도 있지만, 엘렌 화잇의 다음 글에서 이 사실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 우리의 유일한 소망 – 오늘날 인류의 상태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인간이 본질상 정말 완전히 타락했는가? (Is man by nature totally and wholly depraved?)’ 라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정말 인간은 절망적으로 몰락되고 말았는가? (Is he hopelessly ruined?)’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 궁전을 떠나 우리 인성을 쓰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분의 모본을 따라 우리 모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사셨다. 우리는 의의 모본이 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완성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삶으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죄를 이길 수 있다. 위대한 모본 되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신 것과 똑 같이 인류도 그 죄를 이길 수 있음을 그 분은 드러내 보이셨다. . . .어린 양의 피와 모본 되신 인자를 들어 높이는 우리 자신의 증언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있는데, 그렇게 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모본이 되며 또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계 12:11)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게 된다. 따라서 이렇게 죄를 이긴 이들이 주님께서 그들에게 보여주 신 모본대로 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죄를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다.” (원고 9권 238페이지)

이 글에서 엘렌 화잇이 칼뱅주의자들이 원죄론을 논할 때 사용하는 “totally and wholly depraved” (정말 완전히 타락하다), “hopelessly ruined” (절망적으로 몰락하다) 라는 문구들을 인용하여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언급한 후에 그것에 대해 아니다라고 확고한 답변을 주고 있다.

래리 커크패트릭(Larry Kirkpatrick) 목사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1957년 재림교회의 일부인사들과 복음주의파 대표자들과의 대화 후 발간되었던, 문제의 「교리에 대한 질문」의 저자들이 그 초안 문서에 원죄론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글을 포함하려던 시도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 한 예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이 책의 초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참조:  “「교리에 대한 질문」 초안에 포함되어 있던 원죄론“):

“’죄로 말미암아 사망’ 이라는 표현은 그가 실제의 개인적인 죄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원죄 (original sin)인 아담으로 부터 우리 모두가 전수받은 죄악의 본성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고전 15:21) 어린 아이들까지도 죽게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원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른”것이다 (롬 5:12). 루터는 그의 로마서 주석 81페이지에서 이러한 그의 입장을 잘 표명하고 있다”

“원죄(original sin)는 아담의 범죄로 인한 것이다. 그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그 죄를 담당하고 그 범죄로 인해 죄책을 지게되는데, 그 이유는 아담이 그의 본성을 통해 모두에게 그의 죄를 전수했기 때문이다. 아담 자신이 죄를 범하여 죄스럽고 악하게 된 바 처럼, 그는 오직 선을 거부하고 모든 악으로 기우는 죄인들과 악행자들만을 소산하게 되었다.”

물론 리뷰와 헤럴드 편집인들이 이러한 「교리에 대한 질문」 저자들의 내용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삭제와 수정을 하는 편집을 시도하였지만, 그 책 발간의 주역이었던 리로이 프룸 (Leroy Froom)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그들이 원하는 만큼 수정을 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원죄론의 내용이 포함된 채 이 책이 발간되었다.

만일 프룸, 앤더슨 및 리드가 제시했던 위의 초안에 포함된 원죄론의 전문이 그대로 「교리에 대한 질문」에 포함되어 1957년에 출판되었더라면 어떠한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게 되었다면, 이 문제의 책은 논쟁의 불씨를 넘어 온 재림교회를 흔드는 지진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고, 이 「교리에 대한 질문」을 주도했던 인사들의 숨겨진 의도를 교인들이 좀 더 분명히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교리에 대한 질문」의 저자들은 그 당시 이 책이 새로운 교리를 담은 것이 아니라고 교회 전체에게 단언하였었다. 물론 이 원죄론의 가르침과 용어들이 리뷰와 헤럴드 편집인들에 의해 제거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원죄론의 이설적인 교리와 연루된 여러 주장들이 이 책에 잠복해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인성과 속죄에 관해 새로운 주장을 담은 부분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도의 이유에 대해서 조지 나이트는 2007년 「교리에 대한 질문」 컨퍼런스에서 발표한 “Questions on Doctrine: Symbol of Adventist Theological Tension” (QOD: 재림교회 신학적 긴장의 상징) 이라는 그의 논문에서 「교리에 대한 질문」을 통해 어떻게 재림신앙의 주요 교리가 왜곡되었고 칼뱅주의에 기초한 원죄론적 사조가 어떻게 도입되었는지에 대해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재림교회가 다루어야 했던 가장 문제가 되는 이슈는 그리스도의 인성 문제였다. 그 주제는 그들이(프룸, 앤더슨, 리드) 대화하던 복음주의자들(도널드 반하우스와 월터 마틴)은 그리스도가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면 필연적으로 그리스도는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주제는 골칫거리였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가 죄인이었다면, 그는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당시 재림교회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프룸은 재림교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본성을 갖고 계신다고 느낀다’고 스스로 밝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복음주의자들과 대화에 참석한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조지 나이트, Questions on Doctrine: Symbol of Adventist Theological Tension, 8-11)

다시말해, 칼뱅주의적인 신학에 기초한 복음주의파의 소위 이단감별사들로 부터 재림교회의 이단 딱지를 때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던 프룸은 그것을 위해 이 캘빙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파우스트의 거래”를 했던 것이다. 공식적인 체널을 통하지 않고 소수가 이렇게 교회의 교리를 바꾸려는 시도는 항상 문제를 일으킴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저자주] 죄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새로운 신학을 가르치는 한인 재림교회 신학자나 목사들이 그동안 이 「교리에 대한 질문」 서적을 기반삼아 자신들의 입장이 고유의 정통 재림신앙의 가르침이고 재림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견해를 이설로 공격해 왔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의 허구성이 양 진영 학자들의 논문들을 통해 들어나게 되자, 이제는 그들의 견해가 "재림교회 교리와 신조의 점진적인 발전과 진보"된 것이고 "재림교회의 점진적 교리 발전사"의 일부라고 주장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견해가 재림교회의 정당한 절차를 통해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이러한 주장은 일방적이고 거짓된 주장으로 치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예언의 신 말씀과도 대치되는데,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보내신 대언자인 엘렌 화잇의 글보다 그들의 주장에 더 권위성을 부여하겠다는 말 아닌가?

「교리에 대한 질문」과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참고 문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와 있는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교회가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나요?"
"마음과 죄의 육신"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론과 베이커 편지 내용의 분석"

그리고 그 후 이러한 사조는 에드워드 헤펜스톨(Edward Heppenstall) 앤드류스 신학교수에 의해 더 진전이 되었다. 이 사람이 오랫동안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조적으로, 「교리에 대한 질문」에 의해 장려된 십자가에서의 구속 완결에 대한 초점은 재림교회 신학자 에드워드 헤펜스톨에 의해 더 전개되었다. 죄인이 어떻게 완전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어려움에 대한 그의 해결책은 완전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1963년에 그는 ‘절대적인 완전과 죄없음은 이생에서 실현될 수 없다.’고 말했다. . .이 반응은 부분적으로 이때까지 재림교회에서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개념인 원죄에 대한 헤펜스톨의 이해의 산물이었다. 헤펜스톨은 모든 개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 세상에 들어섰다고 믿었다.” (Seeking a Sanctuary, Second Edition: Seventh-day Adventism and the American Dream by Malcolm Bull, Keith Lockhart)

그리하여 이런한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은 더 나아가 데스몬드 포도의 성소론/심판론 부인으로 이어졌고 이제 한인 재림교인들 사이에서 이상구 박사, 박영호 목사같은 이들이 재림신앙의 기조적인 교리들도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는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의 권위성

이 주제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기 전, 우리는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잘못 해석하지 않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성경과 예언의 신에 포함된 그 진리의 영감성이 차지하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권위성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말씀은 성경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사 28:9-10; 고전 2:12-14). 화잇 부인도 다음과 같이 이 점을 강조하였다:

“성경은 그 자체의 해설자이다. 성구는 성구끼리 비교되어야 한다.” (교육 190)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언의 신 말씀을 주셨는데, 그 목적은 “성경의 진리가 지적하는 잘못을 범한 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초기, p. 78) 그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오류를 교정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상술하기 위하여” (3기별, p. 32)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감의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바로 다음의 증언 말씀이 잘 규정해 주고 있다. 화잇 부인은 자신의 글도 성경과 동일한 방법으로 자신의 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마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듯이 증언들 자체가 이미 주어진 기별들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1 기별, p. 42)

만약 이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러한 신앙 논제에 관한 토론은 아무런 유익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간의 추정들, 학자의 의견들 또는 변덕스러운 인간의 개인적 느낌과 경험들이 우리의 교리적인 결론에 영향을 끼치도록 허용되어 진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가 기도하셨던 그 하나가 됨에 도저히 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요한 17:21) 라고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한 17:17)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였음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통한 거룩해짐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전제 조건임을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시대의 재림교회가 논쟁으로 분열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영감의 말씀들이 너무 어려워 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러한 영감의 말씀들에 자신들의 인간적 개념과 의견을 가미하여 혼합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를 설명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죄의 본질에 관한 이슈를 계속하여 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원죄론을 지지하기 위해 오용되는 성경 말씀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라는 성경절이 아담의 죄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이 불가피하게 죄인으로 태어남을 가르치는 구절로 이해될 수 없다. 이 성경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성경 번역본들은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 성경을 번역한 이들의 신학적 해석이지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말하는 바는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배었을 때 죄인이었으며 자기 또한 현재 죄인이라는 고백일 뿐이다. 이 구절을 포함한 성경 말씀의 그 어떠한 구절도 결코 죄인 됨의 과정을 자유의지의 범주로부터 제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한 아기가 가정에서 도둑질을 가르치고 연습시키는 도둑 부모들에게서 태어났다고 하자. 그러면 이 아기는 도둑질 속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출생 자체로 인해 이 아기가 도둑이 되었는가? 아니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죄 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자체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멸망을 당하는 정죄함을 받은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직 출생 때부터 극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됨을, 그리고 그대로 놓아두면 분명히 죄인으로 귀착함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이 점은 시편 51:5에 대한 재림교회 성경주석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다윗은 아이들이 악의 성향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태어남을 알고 있었다(참조 욥 14:4; 시 58:3; 부조와 선지자, 61 306; 치료봉사, 372, 373; 각 시대의 대쟁투, 533). 그가 자신의 죄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악한 성향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가 더욱 크게 필요함을 강조하고자 노력하였다. (참조 부조, 64)”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다윗은 아이들이 악의 성향이 있는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아이들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51:5에 대한 재림교회 성경주석은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다”는 원죄의 사상과 전혀 상관없고, “다윗이 죄에 대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편 51:5의 의미를 “사람은 모태로부터 죄인으로 태어나므로 죄를 범하게 된다”로 받아들이면, 죄는 당연한 것이고, 죽는 순간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 수 밖에 없다는 “핑계거리”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되면, 성경이 말하는 변화와 승리의 기별은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 시편 51:5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원죄설을 신봉하던 에드워드 헤펜스톨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와 그 선택을 존중하셨기에 인류에게서 물러가셨다. . .그리하여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without God) 출생하게 되었다. .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태어나게 된다.” (에드워드 헤펀스탈, The Man Who Is God: A Study of the Person and Nature of Jesus, Son of God and Son of Man, 1977, p. 107)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편의 기자가 언급한 다음의 구절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러나 주는 나를 태에서 꺼내신 분이시며, 내가 내 어머니의 가슴 위에 있을 때 내게 희망을 주셨나이다. 나는 태에서부터 주께 맡겨졌으니, 주는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22:9-10)

“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의지시니이다.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붙드셨으며, 내 어머니의 배에서 나를 꺼내신 분도 주시니, 내가 계속해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71:5-6)

“주께서 나의 내장을 소유하셨고 주께서 내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시편 139:13)

엘렌 화잇도 어린 자녀들에게 미치는 독실한 어머니들의 영향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 시편의 성경절들과 비슷한 관찰을 주고 있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영아일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산다면 우리도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꼴지워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소망, p. 512)

따라서 위에 인용한 원죄설을 신봉하는 학자처럼, 아담 이후의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태어난다고 논함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위의 성경과 증언 말씀들에 공공연히 반대되는 주장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전체적인 영감의 증거들에 비추어 볼 때, 시편 51:5절이 아담의 죄 때문에 그의 모든 후예는 불가피하게 죄인으로 태어남을 가르치는 구절로 이해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말하는 바는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배었을 때 죄인이었으며 자기 또한 죄를 범한 죄인이라는 고백일 뿐이다. 이 구절을 포함한 성경 말씀의 그 어떠한 구절도 결코 죄인 됨의 과정을 자유의지의 범주로부터 제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명시해야 한다.

이렇게 시편 51:5을 연관된 다른 구절들 및 예언의 신 말씀들과 비교해 볼 때,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어떠한 죄가 사람이 잉태할 때부터 ‘죄’ 중이며 과연 어떠한 죄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악’ 중이란 말인가? 잉태된 자가 무슨 의지를 행사하여 죄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원죄론에 심취한 한 인터넷 논객의 수사적 질문은 핵심을 파악치 못한 질문일 수 밖에 없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재림교회의 신조문 제7항이 준비되고 작성되던 그 당시에 일부 목회자들이 1957년도의 「교리에 대한 질문」을 통해 도입된 원죄론적인 사조를 그 신조문에 끌어들이려고 시도하였음은 교회 역사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1980년 대총회 회기 중, 이 신조문에 대한 공개적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원죄론적인 인간론을 도입하기를 바랬던 W. Duncan Eva (던칸 에바) 라는 목회자/신학자에 의해 이 신조문이 작성되고 준비되던 과정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보고한 기록이 있다:

“이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조문은 원래 더 강한 표현을 담고 있었다. 우리는 시편 51:5의 ‘보소서, 내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 라는 구절을 언급하였는데, 우리가 죄중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포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반대가 여러 위원들로부터 제기되어 그 문절이 삭제되었다.” (53회 대총회의 9번째 회기 중 발언, 1980년 4월 22일 오후 3:15분, Adventist Review 지 보고)

이 신조문을 작성하는 위원회가 잠시 이 원죄론적인 문절을 고려했으나, 여러 위원들의 반대로 인해 삭제되었다는 점 – 이 사실을 셋째 천사 기별을 전할 분별력 있는 재림신앙인들은 분명히 그 의미를 깨달을 필요가 있다.

위의 신조문 작성과정에 대한 던칸 에바의 설명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그 작성 위원들이 시편 51:5의 삽입을 거절했던 이유는, 그 구절이 원죄론을 가르치는 구절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다윗이 죄악이 들어온 세상 중에 태어났음을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그러한 죄악이 존재하는 중에 자신을 가졌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로마서가 쓰여지기 전인 1000년동안 이 구절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 구절에 바탕을 두어 원죄론과 같은 가르침을 전혀 계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리고 바울이 죄에 대한 그의 설명 중 시편의 다른 구절들은 많이 인용하면서도 이 시편 51:5을 결코 인용하지 않았음을 보면, 이 구절이 죄에 대한 구절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참고로 이 시편 51편 5절에 대해 성서적으로 아주 잘 분석한 한 비재림교회 목회자의 글이 있는데, 독자들이 꼭 한번 검토해 보시도록 권한다 (참조: “시편 51편 5절은 무엇을 가르치는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58:3)

이 성경절은 악인(wicked)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 모든 인류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악인의 자녀들이 부모의 돌보지 않음과 그들의 악한 모본을 따라 태어난 후 곧 그들도 유사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단 이러한 경우에도 그 악인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정죄되지 그들이 물려받은 성향에 의해 정죄됨을 받는 것이 아닌 바이다. 다음 예언의 신 말씀을 참조하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해진다: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부조, 306)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는 예수님의 말씀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범죄함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원죄론적인 관념을 지지해 주는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진리를 거부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하던 이미 죄를 범한 죄인들 (바리새인들) 에게 한 말이다. 그들이 이미 죄를 범하였기에 그 죄의 원조인 아비 마귀에서 난 행위를 하는 죄인들임을 질책한 말일 뿐이다.

이 성경절 바로 전에 있는 요 8:39-43의 말씀을 보면 이것은 확실해 진다:

“[39]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줄 알지 못함이로다” (요 8:39-43)

주님께서는 자신을 믿지않고 방해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것이어늘. .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꾸짖으셨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중에서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이 바리새인같은 마귀에게서 난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개인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마귀에서 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 2:2-3)

어떤 이들은 에베소서 2장 3절을 인용하며 우리가 본질(본성)적으로 죄인이라는 그들의 원죄론을 옹호하고자 한다. 그런데 단순히 “본질상”이라고 번역된 “by nature”라는 용어 때문에 그렇게 해석한다면, (동일한 성경기자인 바울에 의해) 그와 똑 같은 용어가 사용된 다음의 성경절을 접하게 되면 이러한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때 (do by nature the things contained in the law)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3-15)

본성으로 죄인이라면 그 똑 같은 본성으로 어찌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바울이 사용한 “본성” 혹은 “본질”로 번역된 nature라는 용어는 우리가 선택의 여지없이 물려 받게 된 타락한 본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에베소서 2장 3절에 나오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구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자명해 진다.

이 본문의 뜻은 아담의 원죄 때문에 자동적으로 태어나면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죄로 기우는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것에 굴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여 세상의 풍조를 따르고 마귀를 따라서, 그리고 육체(타락된 본성)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그것의 원하는 것을 하였기에 그렇게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이다. 개인의 선택과 의지와 연관된 행동이 열거되어 있기에,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우리가 선택하여 계발시킨 본질의 부분을 말하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그녀의 여러 글에서 이러한 본성을 인간과 동물이 다 함께 공유하는 “저등 본성 (lower nature)”이 아니라 “고등본성” (higher nature, higher power 등)으로 지칭하곤 하였다. 로마서 2장 13-14절에 나오는 본성도 바로 이 고등본성에 속한 본성이 되겠다 (참조: “엘렌 화잇이 묘사한 인간 본성의 구조“).

참고로 에베소서 2장 1-3절과 원죄론에 대해 성서적으로 아주 잘 분석한 한 비재림교회 목회자의 글이 있는데, 독자들이 꼭 한번 검토해 보시도록 권한다 (참조: “에베소서 2장 1-3절이 원죄론을 옹호하는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롬2:12)

이 성경절 전의 6-10절을 보면 바울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하며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을 가지지 않았던 이방인을 막론하고 악과 선한 행위대로 심판하심을 알리는 성경절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롬 2:6-10)

그리고 13-15절을 보면,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율법의 원칙을 알려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여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심을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사람이 태어나면서 악인이라고 하지 않고 율법을 행하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0)

로마서에서 바울은 처음부터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로마서 3:10)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같은 맥락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23절)라고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바울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 인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의인이 하나도 없음을 지칭하는 것이다.

[12]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13]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으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 [15]그 범죄와는 다르지만, 그 값없는 선물도 그러하도다.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였느니라. [16]또 그것이 범죄한 한 사람에 의하여 비롯된 것과 같지 않은 것처럼 그 선물도 그러하도다. 이는 한 사람으로 인한 심판은 정죄에 이르지만 많은 범죄로 인한 값없는 선물은 의롭다 하심에 이르기 때문이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더욱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 안에서 군림할 것이니라. [18]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값없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2-19)

원죄론을 가르치는 김명호 목사는 「죄, 예수 그리고 구원」에서 로마서 5장 12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한 사람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을 다 사망이 되게 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표현이 이 사실을 명확히 표현한다. ‘죄를 지었으므로’는 과거형 동사이다. 모든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에 살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이 말씀 자체가 그렇게 한정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아담에게서 생육하는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나는 사람까지 이미 죄를 범하였다. 로마서 3:23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씀도 과거형 동사이다. ‘죄를 짓는다’ 는 동사는 ‘하마르타노(hamartano)’ 인데 이 두 곳에 쓰인 말은 과거 직설형 동사로서 ‘헤마르톤(hemarton)’ 이다.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 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108)

그런데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이 목사의 주장은 일종의 추측적인 공론으로서, 그런 뜻이기를 바라는 원죄론적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에 무리하게 주관적인 해석을 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저자의 원죄론적인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로마서 5: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for all have sinned)” 라는 말 대신,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for Adam has sinned)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고 기록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 로마서 5:12절에 대해 원죄의 유전적 선입견이 아닌 전례와 선택의 안목으로 설명한 화잇 부인의 주석과도 정면으로 충돌되는 견해임이 다음 증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자명해 진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엘렌 화잇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희랍어의 부정 과거형 (aorist) 혹은 과거 직설형 (aorist indicative) 동사는 이 저자가 제시하는 그러한 용도로만 쓰이는 동사가 아니다. 문맥에 따라 과거 혹은 현재 완료형 등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사용되는 동사이다. 분명한 것은 이 동사형은 주어의 전반적인 행동 혹은 활동을 조망(眺望)하는 견지에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동사임에는 틀림없다. 한 성서 희랍어 사전 웹사이트는 이 저자가 칼뱅주의적 원죄론 안목으로 해석하는 로마서 5:12절과 동일하게 사용된 로마서 3:23절의 “죄를 지었다 (hemarton)”는 부정 과거형 동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3:23절에 쓰여진 ‘헤마르톤(hemarton)’은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1:18-3:20에 걸쳐 묘사한 인간의 집합적인 죄악 행위들을 요약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것은 집합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 동사(aorist)이다. 연속된 죄악 행위들이 바울이 이 말을 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기에, 그 역사적 사실과 바울의 이 말을 한 사이에 그 어떤 공백 기간이 있음을 뜻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동사형은 영어의 현재 완료형(‘have sinned’)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한 그 시점에서 보아, 일 개인의 죄는 과거의 행위이며 더불어 이러한 개별적인 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총집합체인 죄도 과거의 사실로 간주되는 것이다. . .이 ‘헤마르톤(hemarton)’ 동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그 시점의 견지에서 보아 과거에 계속되어온 죄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미래에 범해질 죄에 대해서도 그와 동일한 원칙이 그 당시에 같은 문법적 시제(時制)로 적용됨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Section 54 of “The Aorist Indicative,” Burton Moods Tenses)

즉 로마서 전반부 (1-3장)에 걸쳐 바울이 인간의 총체적인 죄악 행위들의 역사를 요약하여 증거를 제시한 후에, 로마서 3:23절과 5: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고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5:12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구절에 대해,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라는 이 목사의 해석은 다른 여러 성경 절들과도 모순되며 너무 무리한 논리적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려면 (출에굽 32:31-33; 신명기 1:34-39; 이사야 59:1-8; 에스겔 18:5-20; 야고보 1:14-15; 야고보 4:17; 요일 3:4 등등 참조), 이 구절을 “한 사람인 아담에 의해 죄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고, 그와 더불어 영적인 사망,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이 파괴된 상태가 또한 왔는데, 그 후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아담이 지은 죄에 개별적으로 모두 참여하여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그러한 영적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성서적으로나 인간사적 측면에서도 훨씬 더 실제성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대쟁투 속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공의를 담은 세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남은 무리의 사명과 일치하는 성서적 죄론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로마서 5:19절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shall many be righteous)” 고 하여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라는 미래형의 동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인이 될 사람들은 “더욱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 (those who receive)” 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예비해 두신 구원을 받는 선택함을 통해서만 개인의 구원이 성취됨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부여한 무조건적인 본의 아닌 구원 (involuntary salvation)을 이 로마서 5장이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만인 구원론이란 이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같은 장의 구절인 5:12절을 인용하며,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들 각자의 선택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닌 죄(involuntary sin)를 부여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양식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죄론으로 진정 하나님의 공정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서 로마서 5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생명과 사망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적인 삶과 죽음이 아닌 영생과 영멸을 지칭하고 있다. 이 점은 17절에서 명백해지는데, 그 절은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 안에서 군림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백히 이 구절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래에 누리게 될 영원한 치세의 도래(계 5:10)를 가리키고 있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의 다른 장에서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과 죽음을 논하며 일시적이 아닌 영원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롬 8:13), 여기서 그는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 19:17, 누가 10:28)고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명하셨던 그 의미와 동일하게 생명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로마서 5:12절의 초점은 (물론 육신의 사망도 그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육신의 사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어린 아기들이 육신적인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도 죄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은 이러한 육신적인 죽음이 짐승들에게도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 논리성이 여지없이 타파될 뿐이다.

18절에서 발견되는 “심판이 임하여”와 “값없는 선물이 임하여”라는 문구는 희랍어 성경 사본에는 없으며 역자들에 의해 보충된 문구들이다. 그래서 영어 흠정역 성경은 이 문구들을 이탤릭체로 명기하고 있다. 이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그 이유는 아담의 정죄 됨과 그리스도의 죄 사함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선택여부와 상관 없이 적용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자주 이 두 구절이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충된 문구를 고려치 않고 18절을 읽게 되면, 이 구절은 죄와 구원의 방침에 있어서 선택의 결정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위 로마서의 다른 구절들과 더 쉽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재림교회 성경주석 12권에 수록된 한 재림 신학자의 다음 글은 이러한 필자의 관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죄가 아담을 통해 전수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의가 예수님을 통해 전수되었는지를 발견코자 하는 의도로 로마서 5:12-19절을 읽는다면,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구절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죄가 진실로 인간의 경험에서 현존하는 실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또한 실제임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죄가 이미 패망된 적임을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생애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기쁨에 넘치는 발견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다. 로마서 5:12-19절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다는 보편적 실체와 또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분리됨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담의 죄 때문에 이 분리됨과 함께 육체적 쇠퇴 (physical degeneracy)뿐만 아니라 죄의 성향 (a propensity to sin), 그릇된 경향 (wrongful tendencies), 변태된 식욕 (perverted appetites), 천해진 도덕성 (debased morals) 등을 우리가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죄로 기우는 경향이나 죄의 유혹을 느끼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죄에 굴복하여서 죄의 행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정죄됨을 받게 되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바는 그 죄의 사함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가납되어짐이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로마서 5:21) 해주시는 은혜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John M. Fowler, Sin, SDA Bible Commentary, v. 12, p. 257)

더불어 일반 개신교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에밀 부르너 또한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로마서 5장에 대한 원죄론적인 이해가 기본적으로 성서적 가르침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아담의 타락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어 그의 죄가 계속 이어지는 세대들에 양도된다고 하는 교회의 교리는 어떤 의미로든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한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신학의 표준구(標準句)처럼 여겨져 온, 예외적으로 보이는 로마서 5장12절의 내용 조차도, 후세대들에 의해 추종되었던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로마서 5장에는 죄의 본질에 대해 묘사하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인간론의 정석이었던 원죄론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동떨어진 사상이다. .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행위, 즉 ‘타락’으로서, 신성한 시작에 대한 자발적인 결별로서, 그리고 신의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역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 .죄란 행위이다 – 그것이 죄에 대해 언급할 첫 번째 사실이다. 그리고 난 후에야만 두 번째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행위는 동시에 항상 행위 속의 존재인 한 상태, 즉 그 안에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노예의 상태라고 말이다.” (에밀 부르너, 「창조와 구속에 대한 기독교 교리」, 98,99,103,109 페이지).

결론적으로 이러한 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초적으로 타락된 본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죄가 시작되 것이 루시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타락된 본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된 것도 그들이 타락된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랑과 공의의 법이 절대 바뀌지 않은 것처럼, 죄의 정의가 결코 인간의 타락 전이나 후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죄가 본성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의지에 달린 것임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루시퍼의 반란으로 시작된 대쟁투의 근본적인 이슈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된 자유 의지의 선택과 직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5장의 주제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아담이 이 세상을 죄로 인도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죄로부터 인도해 내는 방책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따른 것임을 이 로마서 5장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 곧 ‘과녁에서 빗 나간 것’(하나님의 목적에서 어긋난 것)을 근원적인 죄로 정의하고 있습니다.(롬3:23 참조) 예수님은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라고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명확히 정의를 해 놓으셨습니다.”

한 인터넷 논객은 죄를 우리의 선택과 무관한 그 어떤 “근원적인 죄”라는 식으로 정의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하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과녁에서 빗나간 것”이란 뜻의 희랍어 “하마르티아 (Hamartia)”에 대해 재림교회 성경주석 12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마르티아’는 신약에서 죄를 뜻하며 쓰여진 단어 중 가장 많이 사용되었는데,  약 175번에 걸쳐 출현한다. 문자적으로 사격연습에서 ‘과녁을 벗어나감’ (missing a mark)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고전 헬라언어에서는 이 단어가 양성적인 범법이라기 보다는 음성적인 실패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에 대적하여 그분으로 부터 떨어진 곳에 죄인을  놓아두는 아주 심각한 규모의 그 무엇을 묘사하고 있다. ‘하마르티아’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개인의 고의적인 실패를 함축하는 말이다 (마태 1:21; 롬5:12, 13; 요일 1:9). 더 나아가 ‘하마르티아’는 또한 하나님께 적개심을 나타내는 인간의 결정을 뜻하기도 한다 (요한 9:41, 19:11, 요일 1:8). 이 ‘하마르티아’라는 죄는 보편적이며 (롬3:23), 그 권능이 인류를 그 속박아래 묶어 두었음을 의미한다 (롬3:9). 이 ‘하마르티아’라는 죄의 권능이 너무 흉악하고 그것의 지배가 너무 광포하였기에, 사도 바울은 이 ‘하마르티아’를 마치 인격화하여 우리 인간을 다스리고 (롬 5:21) 군림하여서 (롬 6:14) 우리를 그것의 노예로 전락시키는 (롬 6:6,17,20) 존재로 묘사하였다.” (영문 재림교회 성경주석 12권에서 발췌)

따라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것, 곧 ‘과녁에서 빗 나간 것’(하나님의 목적에서 어긋난 것)”의 원인이 개인의 “고의적” 실패, 하나님꼐 적개심을 나타내는 인간의 “결정”때문에 온 결과임을 이 희랍어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는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롬 14:23)는 말씀이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히브리서 11:6) 등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함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그러한 믿음으로의 초청을 택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음을 알리는 성경구절들일 뿐이다. 이것은 인간의 선택에 선재하는 그 무슨 신기루같은 “근원적인 죄”를 증거하는 구절이 될 수 없다.

원죄론을 지지하기 위해 오용되는 예언의 신 말씀들

“부모들은 대개 그들의 자녀들이 이 악습에 대하여 어떤 것을 깨닫고 있을까를 의심해 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에 부모들이 진정한 죄인들이다. 그들은 그들의 결혼의 특권을 남용하였으며 방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동물적인 욕정을 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강하여 짐에 따라 도덕적 지적 능력은 약하게 된다. 영적인 것은 야수적인 것에 의하여 위압을 당하여 왔다. 부모들 자신의 성격적인 특징이 그들에게 전하여졌으므로 아이들은 더욱 발달된 동물적인 경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 .이러한 부모들에게서 난 자녀들은 거의 틀림없이 본성적으로 이 역겨운, 은밀한 악습에 빠지게 될 것이다. . .부모들이 자신의 음탕한 경향의 특질을 자녀들에게 전하였으므로 부모들의 죄가 그들의 자녀들에게 씌워질 것이다.” (자녀 442)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성질과 성벽을 물려받으며, 부모를 본받는다. 그같이 하여 부모의 죄는 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하여 행하여진다. 이와 같이 함이 나타낸 비열함과 불경을 그의 자손들이 되풀이하였으며 여러 세대 동안 걸쳐 그들에게 저주를 가져왔다.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전 9:18)한다.” (부조 118)

이 인용문들에서 우리가 먼저 파악할 수 있는 점은 자녀들이 부모들의 “죄”를 물려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부모들의 “동물적인 경향”과 “성질과 성벽”로 표현된 본성을 물려받는다는 점이다. 즉, 우리가 아담이 죄를 범한 결과인 “죄로 기우는” 타락한 경향의 본성을 물려받는 것과 같은 뜻이다. “죄로 기우는” 타락한 본성을 죄로 동일시 하고 있지 않다. 사람들이 “죄로 기우는” 타락한 본성을 죄로 동일시 하는 원죄론적인 개념에 자신의 생각을 고정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구들이 죄 그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그런데 화잇 부인이 이와 비슷한 경우에 대해 다른 곳에서 쓴 말씀을 살펴보면 이 인용문들에서 그녀가 뜻하는 바를 우리가 좀 더 분명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둘째 계명은 거짓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금하는 동시에 참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명령한다. 그분을 미워하는 자들에 대한 노여움이 삼사 대까지밖에 미치지 않지만 그분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천대까지 긍휼이 약속되어 있다.” (부조, 306).

여기서 화잇 부인이 말하고자 하는바는 다음과 같다:

(1)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으면 부모의 죄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 즉, 자녀들이 부모의 죄를 따르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다.

(2) 본성(성질과 성벽)의 유전과 모본으로 자녀들이 대체로 부모들의 잘못된 발자취를 따라서 (선택하여) 그들 자신이 죄를 짓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3) 그러한 모본을 따르기를 중단하면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이 삼사대까지밖에 미치지 않지만, 올바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하나님의 긍휼이 천대까지 약속된다. 즉 이러한 부모의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죄)”에서 비롯된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은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또 화잇여사는 다른 글에서 같은 점을 역설하고 있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무는 그들 부모가 삶의 법칙을 범하여 후손들에게 너무나 비참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모들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을 지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방향을 수정해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다.” (Counsels on Health, p. 37)

위의 글을 자세히 보면, 화잇 여사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칭하고 있으며, 또 부모가 건강법칙을 어긴 결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비참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견책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모들의 책임인 “비참한 유산” 때문에 그들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고 그녀가 결코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부모들이 물려준 죄의 결과를 자녀들이 수정해서(선택하여)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 올바른 위치에 설수 있다는 엘렌 화잇의 말은 그녀가 원죄론의 사조를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점을 좀 더 현실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알코올 중독자 부모에게서 한 아기가 태어난다고 하자. 현대의 의학에 의하면 그 아기는 부모의 영향으로 알코올 중독에 좀 더 쉽게 빠지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아기에게 알코올 중독자라는 레벨을 붙이지 않는다. 그 아기가 자라서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알코올 중독으로 쉽게 이끄는 성향/성벽에 굴하여 그 자신이 알코올에 중독될 때 그가 비로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이다. “유전 형질이 어떤 종류의 알코올 중독에 관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당신으로 하여금 위스키 병을 사게 하며 그 술을 유리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키게 강요할 수는 없다.” (Wray Herbert, “Politics of Biology,” U.S. News & World Report, April 2l, l997, p. 78). 이것은 아주 합리적이고 공정한 논리다. 하나님은 공정하고 합당한 분이심을 우리가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불합리적이고 부당한 분으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가?

더불어 원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부조와 선지자에 있는 다음 글 앞 부분을 고려하면 우리는 이 글을 통해 화잇 부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쉽게 알수 있게 된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성질과 성벽을 물려받으며, 부모를 본받는다. 그같이 하여 부모의 죄는 대대로 그 자손들에 의하여 행하여진다. 이와 같이 함이 나타낸 비열함과 불경을 그의 자손들이 되풀이하였으며 여러 세대 동안 걸쳐 그들에게 저주를 가져왔다.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괴케”(전 9:18)한다.” (부조 118)

이 문장 바로 앞에 다음과 같이 화잇 부인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아들들의 품성과 운명을 고정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각자 선택한 생활과 그들이 계발시킨 품성의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품성과 행동을 참작하여 그들과 그들의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표한 것이었다.”

부모의 본성을 물려받지만 그것이 그 자녀들의 품성과 운명을 고정시키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인용구들의 문맥을 간과하지 않고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화잇 부인의 글은 그녀 자신의 글로 이해를 하게될 때 우리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바를 원죄론적으로 오해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이다.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고리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 (새자녀, 475)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죄책과 죽음의 유산, 즉 불순종의 유산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다." (Manuscript Releases, vol. 13, p. 14)

우선 화잇 부인이 여기서 “자녀들의 유산은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sin)” 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이라고 하신 점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두가지 말 사이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전자는 죄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죄에서 기인한 유산 혹은 죄의 결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화잇 부인은 물론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 글을 인용하는 이들이 “원죄론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아담에게서 죄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화잇 부인은 그녀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그녀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쓰는 체계가 있었다.

이러한 증언 말씀들을 우리가 접할 때마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미 인용한 바대로 “마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듯이 증언들 자체가 이미 주어진 기별들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1기별, 42) 라고 엘렌 화잇이 언급한 중요한 해석 지침을 상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연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화잇 여사의 글들을 접하게 될 때 어느 한 쪽만을 취사선택 하기보다는, 좀 더 깊게 파고들어 그와 연관된 모든 영감의 말씀들을 참조하여 그 자체로 하여금 문제가 되는 단어와 개념들을 좀 더 충분히 정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연구서에서 우리는 이미 죄가 인간 의지의 선택과 상관없이 불가피하게 선제된 상태가 아님을 성경 말씀들(에스겔 18:20, 아고보1:14, 15; 4:17)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5 증언, p. 177) 라고 명시한 여러 예언의 신 말씀들에서 보았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 대해 언급하며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새자녀, p. 475)라는 위에 인용된 화잇 부인의 글을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 자신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1888 Materials, p. 1011)고 지적한 다른 예언의 신 말씀들과 나란히 대조하며 그 뜻을 조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라고 분명하게 계시한 성경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을 언급한 위에 인용된 새자녀 지도법의 증언 말씀은 이 아이들이 그러한 상태를 그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유산의 이슈에 대해 조금 후에 더 논의하겠는데, 이 글에서 유산과 분리됨을 언급한 두 문장이 나란히 적혀 있지만 그 문장들이 반드시 동일한 대상을 논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증언의 다른 여러 말씀에서 이 하나님과의 분리됨이 우리의 선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죄와 그 결과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 말씀이 위에 인용된 글들을 우리가 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무는 그들 부모가 삶의 법칙을 범하여 후손들에게 너무나 비참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모들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을 지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방향을 수정해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다.” (Counsels on Health, p. 37)

위의 글을 자세히 보면, 화잇 여사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칭하고 있으며, 또 부모가 건강법칙을 어긴 결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비참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견책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모들의 책임인 “비참한 유산” 때문에 그들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고 그녀가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화잇 부인이 새 자녀 지도법 475페이지에서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of sin)”이라고 말했을 때 이 유산이 죄로 인한 결과로서의 유산임을 뜻한 것이지 자녀들이 죄 그 자체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즉, 조상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받지만, 조상의 전례를 스스로 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그 조상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지 않는다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물론 위에 인용된 증언 말씀이 아담에게서 우리가 받은 것은 “죄책과 사형 선고밖엔 없다”라고 하며, 우리가 “죄책의 상속자”라는 사실과 “죄책과 죽음의 유산, 즉 불순종의 유산”을 우리가 물려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상기할 바는, 바로 이 문장 시작에서 “사단의 세력을 깨뜨릴 수 있다“라는 언급과 이 문장 바로 뒤에 나오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 들어오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모든 시험을 견디셨다…. 사람이 그의 아들 딸을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본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사단의 능력이 깨어지는 것은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마음과 뜻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다.”라는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죄책과 사형 선고가 필연적이지 않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죄와 죄책을 우리가 선택함으로 체험하게 됨을 증언의 다른 부분에서 화잇 부인이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음이 그 몇 가지 예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책을 더럽혀지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That I May Know Him, p. 140)

“유혹은 죄가 아니다. 죄는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에 있다.” (Our High Calling, p. 87)

이처럼 태어남 그 자체에 죄가 있다고 엘렌 화잇이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위에 인용된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 및 질병과 죄로 말미암은 “비참한 유산”은 물론 선택의 결과인 죄책에 관한 글들을 모두 종합해 보게 되면, 엘렌 화잇이 묘사한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은 사실적으로 이러한 불순종과 죄책의 결과로서의 유산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죄 있다함과 죄책의 부과를 뜻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처럼 영감의 말씀 어디에도 본의 아닌 죄나 죄책(involuntary sin or guilty)을 가르치는 글이 존재하지 않는다. 엘렌 화잇은 “인간은 아무도 거룩함을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을 수 없다”(1 기별, p. 310)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그녀는 우리가 죄를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는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엘렌 화잇에 의하면, 우리가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는 것은 죄 그 자체가 아닌 죄로 기우는 경향이다 (가정, pp. 241,256; 부조, p. 306).

또 우리가 인식할 바는,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도 이 유산을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물려받는 그 무엇으로 항상 언급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녀가 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물려받는 것으로, 다른 경우엔 자의로 물려받게 됨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 단어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그 문맥의 전후 상황과 증언 말씀들의 일치성을 고려하게 되면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여러 구절이 하나님 백성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 경우 그 유산이 믿음에 근거한 순종의 조건하에 전수됨을 밝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시편 37:29; 이사야 60:21; 마태 5:5, 25:34; 누가 10:25; 고전 6:9; 갈라디아 3:29; 디도서 3:7; 히브리 9:15; 계시록 21:7). 엘렌 화잇도 이와 동일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구주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은총으로 가납하셔서 넉넉히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 충성하게 되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보좌로 끌어올리시어 당신 자신의 피로 산 그 유산의 상속자로 삼으실 것이다.” (Spiritual Gifts, vol. 3, pp 176-177)

“그분은 [그리스도는] 그들을 죄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릴 수 있으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즉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로 인정받을 수 있다.” (구호 봉사, p. 93)

“그분은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하늘의 베틀로 짠 당신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신다. . . .우리는 하늘 가족으로 입양되어 순종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처소를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이다.” (That I May Know Him, p. 108)

그리고 다음 증언 말씀은 이러한 두 종류의 유산들 사이에서 우리가 분명히 선택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그들은 [성도들은] 이 세상의 친척들과 절교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과 바꾸어 얻어진 보상 –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보라. 고상해지며 높임을 받아 구원에 참여하는 자, 즉 불멸의 유산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다…..이렇게 오류를 진리로, 어둠을 빛으로, 병약함을 능력으로, 죄를 의로, 그리고 썩어 없어질 이름과 유산을 영원히 누릴 불멸의 보배로 바꾼 이 사실로 인해 감히 우리가 희생을 감수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리뷰와 헤럴드, 1859년 4월 28일)

그러므로 이러한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 증언 말씀들은 죄와 죄책의 결과들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영원한 유산 대신 멸해질 유산을 받고자 한 선택을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실질적인 죄와 죄책을 의지의 선택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전수받는다는 결론은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이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은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초기, 149)

이 글 바로 앞부분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그들이 동산 밖으로 쫓겨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막히어 그들이 생명과를 따먹고 죄와 불순종하는 상태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후손들도 육신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 각자가 죄를 지어 용서를 받은 후에라도 그 죄로 인해 발생한 결과는 남아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경우를 생각하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죄와 죄의 형벌은 궁극적인 멸망인 “두번째 사망”을 말하는 것이지 흙으로 돌아가는 “첫쨰 사망”인 육신의 자연적인 소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성경의 수많은 기록에 있어서 육신의 자연적 죽음이 영멸인 “두번째 사망”을 자동적으로 의미하지 않은 것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마치 순간의 일처럼 말씀하셨다.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란 잠자는 것이며 한 순간의 침묵과 어두움에 불과한 것이다.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으며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요 8:51, 52; 골 3:4).” (소망 787)

만일 육신적인 죽음이 죄에 대한 주되고 직접적인 형벌이라면, 화잇 부인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소한 문제”가 결코 될수 없다. 

따라서 이 글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인한 결과로 인해 후손에게 전수되는 자연적인 육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그 후손들이 아담과 하와의 죄로 두번째 사망인 영멸을 전수 받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위에 인용된 글 후에 예수께서 자신을 대속물로 주어 인간을 용서하고 구속하는 길을 열어서 아담과 하와는 물론 그 후손들이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힘입어 인간이 율법에 순종하면” 영멸을 당하지 않도록 한 다음 진술에서 분명히 들어나고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청하여 인간의 용서를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대속물로 주어 대신 죽기로 합의했으며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공로를 힘입어 인간이 율법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그 아름다운 동산으로 다시 부름을 받아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게 될 것이라는 말을 천사들에게 해주셨다.” (초기, 149)

결론적으로 죄의 결과(consequence)와 죄의 삯(penalty)의 차이를 우리가 분명히 인지하게 되면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언급된 “죽음”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우리가 올바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사망이 온 인류에게 이르렀다. 모든 사람은 빠짐없이 무덤으로 내려간다"(대쟁투 544)

여기서 언급된 “사망”은 예수님이 잠으로 표현한 육신의 죽음 (첫째 사망)을 의미한다. 영문에서는 “아담이 범죄함으로”라고 번역된 부분이 “In consequence of Adam’s sin”으로 되어 있어,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아담의 죄로 인한 결과로”가 되겠다. 즉, 육신의 죽음 (잠, 첫째 사망)은 아담이 죄로 인한 결과이지, 영원한 죽음 (들째 사망)이 부여되는 죄책 혹은 정죄됨이 아니다. 육신적 죽음 (첫째 사망)을 죄에 대한 정죄로 보는 원죄론적인 편견때문에 이러한 구절을 인용하며 원죄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담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완전한 순종을 바치도록 요구되었다. 만일 그가 당하게 될 큰 시련의 기간 동안 유혹의 시험을 견디어 내고 창조주에 대한 그의 충성됨을 보존하게 되면, 그의 순종은 그에게 하나님의 총애와 가납됨을 보증해 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은 영원히 성결됨과 행복 속에 정착될 것이며, 이러한 축복이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도 베풀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그 시험을 견디어 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반역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이 죄인이 되고 말았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29)

화잇 부인의 설교를 망라한 2 설교, 180페이지에서도 똑 같은 글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글 다음의 문장에서 화잇 부인이 그렇게 후손들이 죄인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이 한 때 남녀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에 품어 키워나간 죄들이 그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명을 희미하게 만들어 거의 지워버렸다, 죄로 인해 새겨진 자국들이 계명의 흔적들을 점차로 손상해 버리게 된 것이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29)

아담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에 품어 키워나간 죄들”, 즉 그 후손들이 의도된 마음의 선택을 통해 죄를 지었음을 이 문장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아담에 의해 죄가 전수되어 그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설명이 절대 아니다.

재림교회 안에서 원죄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주창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은, 그들이 증언 말씀의 단편적인 문절을 국부적으로 잘라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문이 담긴 예언의 신 글 주위 문맥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대부분 그 인용된 글을 통해 화잇 부인이 의도한 바가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원죄론적인 개념을 지지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아담이 불순종한 결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 아래 팔려 계명을 범한 자가 되었다” (in Heavenly Places, p. 146)

이 문구가 있는 문장은 계속하여 서술하기를,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는 한 인간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사단을 섬기게 되고 원수의 기만에 빠져 여호와의 계명에 누를 끼치는 증인으로 화하고 만다”라고 말하며, 성령의 개입으로 “회개하는” 선택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그들의 죄를 범하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첫 문장에 있는 “죄 아래 팔려 계명을 범한 자”가 되는 과정을 그다음 문장이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뜻하는 바는 증언 말씀의 다른 글들과 함께 이해되어 져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죄가 마음에 존재하기 전에 의지의 선택이 선제 되어야 한다고 엘렌 화잇이 여기서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마음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위에 언급된 문장들은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죄인 됨이 그들의 개인적 선택과 상관없이 일어난다고 결코 말하고 있지 않은 바이다. 로마서 5:12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될 뿐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다시 말해,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엘렌 화잇은 이 로마서 5:12절에 대해 해설하면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더불어 엘렌 화잇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그 당시에 인류가 타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도덕성에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고결한 상태로 머물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형언할수 없는 비극을 불러온 아담의 범죄를 사람들이 개탄하면서도, 그들은 아담이 했던 바와 똑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의 계명을 범하지 말기를 경고해 주는 아담의 경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였다. 인간이 아담과 함께 몰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타락에 타락의 연속이 계속되어 오고 말았다.” (리뷰와 헤럴드, 1875년 3월 4일)

"사단은 그의 계획을 이행하는데 대체로 성공하였다. 마음과 마음을 통해 작용하는 영향력의 수단을 활용하여, 그는 아담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인간 본성은 그 원천에서 부터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이래로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을 통해 전해지면서 죄가 그의 사악한 일을 계속하여 왔다. 범해지는 모든 죄는 처음 범해진 원죄의 반향을 계속 일깨우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901년 4월 16일)

“마음에서 마음을 통해”라는 어구는 태어나면서 타고나는 피치 못할 그 무엇이 아닌 개인적 선택의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이다. 아담을 통해 이 세상에 들어온 죄가 “그 후 이래로” 본성으로 유전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죄가 (의도적 결정과 영향력의 과정이 함유된)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을 통해 전해지면서” 사악한 일을 계속해 왔다는 것을 서술하고 있지 않은가? 이 문장이 아담의 죄로 인해 부패된 본성 그 자체가 죄가 되어 후손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어서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말이 아님은 바로 이 문장 뒤에 나오는 글을 읽으면 자명해 진다.

“상호 의존은 일종의 불가사의한 것이다. 상호적인 영향력이 주의깊게 연구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한치의 의혹도 없이 우리가 누구 편에서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분명히 파악해야만 한다. 올바른 일에 영향력이 행사되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능력이 되며, 악한 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것은 사단을 위한 능력이 된다. 사단의 지배하에 있는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죄로 유혹하는 한 도구가 되고 만다. 그리하여 악은 아주 막대한 비율로 증가하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901년 4월 16일)

이 말은 아담 이후 세대가 지나면서 죄가 증가된 현상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 이유가 아담의 타락된 본성이 전수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고, 개인에서 개인으로 마음(의지)를 통해 유혹이 작용하여 그들이 스스로 아담이 했던 바와 같은 죄를 범하게 됨으로 그렇게 되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엘렌 화잇의 다음 글을 읽게 되면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그 당시에 인류가 타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도덕성에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고결한 상태로 머물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을 불러온 아담의 범죄를 사람들이 개탄하면서도, 그들은 아담이 했던 바와 똑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의 계명을 범하지 말기를 경고해 주는 아담의 경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였다. 인간이 아담과 함께 몰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타락에 타락의 연속이 계속되어 오고 말았다.” (리뷰와 헤럴드, 1875년 3월 4일)

"아담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운 품성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일에 실패하였그의 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본성은 타락되어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게 되었다. 또 우리는 죄가 많고 거룩하지 못하므로 거룩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를 응할 만한 자신의 의는 조금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 (정로, 62)

아담의 타락으로 우리가 죄로 기울기 쉬운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그 “타락한 본성”이 죄라는 원죄론적 죄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이다. 이 타락한 본성을 소유한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능력이 개입되지 않으면 당연히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렇게 범법하는 걸 피할 길을 열어 주셨다는 말이다.

이 인용문 바로 전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음을 우리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영생을 얻는 조건은 지금도 옛날 – 에덴 낙원에서 우리의 시조(始祖)가 타락하기 전 – 과 똑같으니 곧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완전한 의가 요구된다.” (정로, 62)

즉, 영생을 얻느냐 영멸을 당하느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아담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위해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도록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바치는 선택할 수 있다고 화잇 부인은 이 인용문 다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지금 우리 죄를 벗기시고 당신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려 하신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신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대의 마음을 항상 그에게 바침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그대가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그대는 같은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같은 행실-의와 순종의 행실-을 행할 것이다. . .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뿐 아니라 의지(意志)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 즉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애정을 하나님께 두는 그것이 신앙이다. ” (정로, 62-63)

한마디로 이 글은 원죄론의 개념을 논하는 글이 아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왔다. 우리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다." (소망, p. 203)

"우리는 본질적으로 (by nature)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성신은 우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진술하였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 . .성한 곳이 없'(사 1:5, 6)다.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인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그에게 사로잡힌 자'(딤후 2:26)이다." (정로, p. 43)

어떤 이들은 위의 두 진술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분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요일 3:4) 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러한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진술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완결하도록 우리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이렇게 분리된 상태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닌 선택에 의해 얻어진 결과임이 명백해진다. 위에 있는 첫 번째 진술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쇠잔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 .그대가 완쾌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의 말씀을 믿으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를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소망, p. 203)

여기서 화잇 여사가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그녀는 이러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에 속박됨이 출생을 통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즉 선택에 의해 그렇게 속박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위의 두 번째 진술도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 놓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는 전적 변화 즉 우리 온 본질의 갱신(renewing of our whole nature)이 요구되는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정로, p. 43)

이 구절의 바로 전 부분에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by nature)”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기술했는데, 지금 여기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온 본질의 갱신 (renewing of our whole nature)”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필자의 다른 문서에서 언급했지만, 영감의 말씀은 육적인 저등 본성과 의지의 선택과 관련된 고등 본성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란다 (참조: “엘렌 화잇이 묘사한 인간 본성의 구조“).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우리 온 본질의 갱신됨은 고등 본성의 갱신됨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영감의 글 다른 부분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육적인 저등 본성은 우리가 이생에 사는 동안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기 때문이다. (교사, p. 20; 사도행적, pp. 560-561; SDA Bible Commentary, vol. 2, p. 1032). 그러므로 이 증언 말씀에서 언급된 “본질적으로 멀리 떠나감”은 태어나면서 받은 죄의 경향이 아니라 의지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그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었으며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이다." (정로, p. 33)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고자 위와 같은 또 다른 하나의 증언 말씀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 말씀의 주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언급된 “사람(man)”이라는 단어가 선택함과 무관하게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 말씀의 주위 문맥을 살펴보면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정로, p. 32)고 회개하는 일을 지체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으며,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정로, p. 33)고 엘렌 화잇이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정로의 계단에 있는 증언 말씀의 요지는 죄를 짓거나 아니 짓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주위 문맥에서 우리가 인간이 출생 때 물려받는 불가피한 상태로서의 죄라는 개념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바이다.

더욱이 성경 말씀은 이사야 서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아담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되게 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언명하고 있다. 화잇 부인도 다음과 같이 이 성경 말씀과 동의하고 있음을 본다:

“그분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순간,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7년 7월 12일)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 (1 기별, p. 23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으신다. 단지 그 백성이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자신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1888 Materials, p. 1011).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존하는 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한, 그들은 하늘 천사들의 보호아래 있게 되어 마귀가 그들을 파멸시킬 목적으로 그들 위에 사악한 계교를 행사토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자들은 그 큰 위험에 당면하게 된다.” (마라나타, p. 95).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법적인 행위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발람의 모든 사술이 행할 수 없었던 일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일을 행하였다.” (부조, p. 455)

우리는 위에 언급된 증언 말씀들에서 인간이 단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주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분리된 상태가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임을 위의 인용문들이 명백히 밝히고 있을 뿐이다.

"아담은 실패하였고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죄를 양도하였다." (편지 143, 1900; Manuscript Releases, vol. 6, p. 2)

“죄를 양도하였다(entailed sin)”라는 말을 “아담의 모든 후손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원죄론적인 선입견을 품고 이 문절만을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만일 화잇 부인이 이 문절을 정말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였다면,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라는 말과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들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들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Counsels on Health, p. 37) 라는 그녀 자신의 말과 모순되는 주장이 되고 만다. 더불어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며 아비도 아들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니, 의인의 의는 그에게 있고 악인의 악도 그에게 있으리라” (에스겔 18:20)라고 언급한 성경 말씀과도 정면으로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과 증언 말씀이 이런 식으로 상충되고 있지 않음을 믿는데, 이러한 불필요한 모순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죄론적인 선입견으로 증언 말씀의 단편적인 문절에 주관적인 해석을 가한 결과에서 기인했을 뿐이다.

위에 인용된 증언 말씀이 보여주듯이, 엘렌 화잇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기 전에 의지의 선택이 선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마음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엘렌 화잇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칭하고 있으며, 또 부모가 건강법칙을 거스린 결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비참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견책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모들의 책임인 “비참한 유산”때문에 그들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고 그녀가 결코 주장하고 있지 않은 바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죄의 양도 (entailment of sin)”를 “죄의 유전 (inheritance of sin)”과 동일시하는 원죄론적인 안목으로, 화잇 여사의 단편적인 문장에 그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개념을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영어의 “entail” 이라는 단어는 “상속인을 한정하여 양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한사상속(限嗣相續)이라는 법률적인 개념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상속자가 그 상속물을 받거나 거절할 수 있는 선택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라는 점이다. 웹스터 신세계 영어사전에 인용된 “The plan entails work” (계획은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한 작업/노력을 수반한다)는 문장이나 재림교회에서 발행하는 2009년 6/7월호 종교 자유지에 언급된 “The freedom to believe entails the freedom to doubt” (신앙의 자유는 불신의 자유를 수반한다)라는 문장이 내포한 것처럼, 후자의 결과가 전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뒤따름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후자의 결과를 성사시키려는 의지의 개입이 존재할 때에만 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실패하였고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죄를 양도하였다”라는 말을 다른 여러 증언 말씀과 더불어 일관성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앞에서 인용한 1900년 6월 27일자 영문 시조의 글을 조금 부연하여 읽어보면 될 것이다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그의 후손들)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손은)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반면에 (그 자신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결론과 호소

예언의 신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하여 규명하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1 기별, p. 320)

“‘죄를 짓는 자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이것이 성경이 주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리뷰와 헤럴드, 1890년 7월 15일)

“만일 사랑으로 역사하여 죄의 모든 오점으로부터 심령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목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영문 시조, 1887년 11월 24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지음을 멈추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영문 시조, 1890년 3월 3일)

물론 우리의 선천적인 본성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의의 상태가 아님은 분명하다. 다만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 전에서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냐, 용서나 심판의 대상이 되느냐, 다시말해 구원 및 믿음으로 말마암는 의에 해당이 되느냐 하는 이슈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한 본성의 상태를 “죄”로 규정하는 원죄론의 개념을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에 있는 죄의 정의가 거부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예언의 신에서 말하는 죄와 용서, 심판, 구원 및 믿음으로 말마암는 의와 관련된 모든 용어들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바탕을 둔 의지적으로 선택된 “율법을 범하는” 죄에 적용되고 해당되는 것이다. 반면에 인간의 타락된 본성은 주님의 십자가 은혜에 의지해 죄를 이긴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재림시 재창조로 해결해 주신다고 예언의 신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타락된 본성은 우리가 선택해서 받거나 제거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우리 의지의 영역 밖에 있기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육신의 소요를 매일 매순간 십자가에 못박는 것 뿐이다. 화잇 여사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

“저열한 욕정 (the lower passions)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flesh) 또는 ‘육체의’ (fleshly) 또는 ‘육체의 정욕들’ (carnal lusts) 이란 말은 그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 (the lower, corrupt nature)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신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할까! 아니다.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해야 한다. 부패한 생각은 추방되어야 한다.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한다. 모든 동물적인 경향 (all animal propensities)은 심령의 더욱 높은 능력 (the higher powers of the soul) 아래 복종되어야 한다.” (재림신도의 가정, 127-128)

“마음과 뜻과 영혼(the mind and heart and soul – 고등 본성)이 저등본성(the lower nature)을 이길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살아 계신 구주와 개인적으로 접촉해야 한다.” (실물, 388)

“정신적 기능이 보다 높은 능력으로서 육체의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선천적 식욕과 정욕은 양심과 영적 애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치료봉사, 399)

“악한 말을 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것으로 시작된다. . .하나의 불결한 생각이 방관되고, 하나의 거룩치 못한 욕망을 맘속에 품으면, 그 영혼은 오염되고, 그것의 순결함은 타협된다. . . .모든 거룩치 못한 생각들은 즉시 물리쳐 져야 한다. . .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가장 훌륭한 사람들 조차도 사단에 의해 암시되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물리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특별히 대쟁투에 있는 다음 글은 자발적인 “선택”이 죄와 하나님의 속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판단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노예적인 굴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께서 사랑을 받으실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충분히 깨달은 후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특성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분께 이끌려가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대쟁투, 541)

“자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정복당할 수 없다. 유혹자는 사람의 의지를 지배하거나 죄를 범하도록 강제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 그는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는 번민케 할 수는 있으나 죄에 물들게 할 수는 없다.” (대쟁투, 510)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과 판단을 강요하지 않으시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충분히 깨닫고 순종하는 자발적인 선택을 귀중히 여기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분이 죄를 인간의 선택을 무시하고 아담이라는 조상의 죄를 떠않고 책임지라는 “본성적인 죄”로 정의하시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 않겠는가?

성경은 영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 19:17; 눅 10:25-28). 그러나 동시에 그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처음부터 의와 죄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음을 또한 분명히 하고 있다. 성경 기록에 따르면 에덴에 생명 나무와 선악과 나무를 모두 두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창 2:9).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는 초대장이 주어지고 있다. 교회 역사의 기록은 교회가 죄와 구원의 문제에서 자유의지를 분리시킬 때, 궁극적으로 희생되는 것은 자유 그 자체임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는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가르침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청사진은 죄를 존재와 비존재라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논해야만 풀리는 그러한 논제가 아니다. 시편 기자를 통해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편 119:130) 라고 했고, “성경은 매우 평이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는 모두 이해하게 될 것이다”(3기별, 359)라고 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죄에 대한 정의는 성경과 또 예언의 신 말씀이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주고 있으며, 그것은 모두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원죄론의 가르침을 우리가 받아들여야하는 이유로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구원이 시작되기 때문이라는 신박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화잇 부인의 다음 글을 인용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가 전혀 속절없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고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마음을 버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게 될 것이다” (가정, 340)

그런데 우리 자신을 올바로 알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은 원죄론적인 안목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를 증오하며 버리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그러한 죄를 범했다는 자신의 책임성을 깨닫게 될 때 더 절실해 지는 것이다. 그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죄를 전수해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그 전수된 죄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공식을 인식하는 그 자체로서는 죄를 증오하며 버리고 싶은 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인간의 실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식하에선 그 죄에 대한 책임성의 강도가 희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은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통감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지,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론적인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물론 죄를 스스로 극복하기엔 너무나 처절하게 타락해 버린 인간 본성의 상태를 강조하려는 선의에서 이러한 원죄론적인 주장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우리가 한가지 기억할 점은 바로 지옥으로 가는 신작로가 수많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과 증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설명을 넘어서 이렇게 타락된 본성에 필요 이상의 산만한 색조를 가미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역사를 돌아보면 그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기인했다 하더라도 심각한 해악적 부작용을 기독교회 안으로 불러왔음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덕률 철폐론(antinomianism)이 그 하나요, 칼뱅주의의 산물인 예정론(predestination)이 또 그 한 결과이며, 만인 구원론(universalism) 또한 이 원죄설에 기반을 둔 “정죄된 본성론”의 한 부산물로 출현되었던 바이다.

사실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원죄론적인 주장에 오히려 더 치명적인 함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은 재림교회의 (한국 및 미주 한인 교회들을 포함한) 대부분이 현재 처해있는 열약한 상황을 한번 예로 들어보자.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며 이 세상과 구별되는 순수한 믿음의 삶이 강조되기보다는, 세상의 타락한 교회들이 고안해 낸 인간의 육적인 성향에 호소하는 각종 예배양식과 선교방법들이 교회 내에서 굿판을 벌이며 아까운 시간과 재정을 잠식해 왔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따라서 남은 무리의 교회가 왜 이러한 지경이 되었는지 한번 심각하게 우리의 믿는 바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지난 몇 십 년간에 걸쳐 교회 안으로 유입된 원죄론적인 복음주의파 사조가 많은 이들의 신학과 신앙을 변조해 버린 결과로 이러한 현상이 도래한 것이 혹시나 아닌가 하고 이 필자는 솔직히 질문해 보고 싶은 바이다.

혹시 이러한 원죄론적인 사조를 받아들인 이들에 의하여, 우리 인간의 본성이 너무 타락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 본성을 결코 회복하거나 복구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가르침이 복음으로 그동안 재림 성도들에게 제시되어 오지 않았는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물론 타락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존해 그 타락된 본성이 이생에서 변화되고 정복되며 개조되어 기품이 있게 부드러워 질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 고상하게 성화되어 그 본래의 순결함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성품과 합하여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하나님의 대언자인 화잇 부인이 분명하게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유의 재림신앙을 오히려 완전주의로 비하하며 질타해 오지는 않았는가?

또한 혹시 이러한 원죄론적인 사조를 받아들인 이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죄 범함을 그칠 수 없기에 우리는 칭의 즉 용서 받음으로써만 구원을 얻게 되며, 성화의 추구는 훌륭한 자세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되는 것은 아니라는 비성서적인 가르침이 “새로운” 복음으로 재림 성도들에게 그동안 제시되어 오지 않았는가? 성화를 불러오지 않는 칭의는 그 자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거짓 칭의임을 증거할 뿐이라고 하나님의 대언자가 분명히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성화와 올바른 생활양식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경향이 교회와 성도들의 전반적인 풍토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며, 교회의 영성과 사명의식을 또한 약화시켜 온 것이 혹시나 아닌가?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일부 신학자, 목사, 교인들에 의해 수용된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재림교회의 사명을 소멸시키려는 마귀의 현혹에서 기인한 것인지 우리가 진실로 한번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호소와 함께, 화잇 부인의 다음 진술을 독자들께서 개인적으로 신중히 고려하길 바라며 이 글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담의 타락된 본성을 타고 났기에, 우리가 지닌 본성적인 결함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잘못을 찾으려하며 자기들이 제공할 능력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와 동일한 불평을 하늘에서 사단이 하였는데,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영문 시조, 1892년 8월 29일)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