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한 목사님께서 저술하신 서적에 담긴 원죄론적 주장에 대해 생애의 빛 독립 선교단체에서 그 내용을 비평하는 뉴스레터를 재림교인들에게 배포한 적이 있다. 그러자 이 목사님은 카스다 게시판에 그 비평에 대해 일종의 불만을 표하면서 자신의 원죄론적인 생각을 다시 밝혔었다. 다음 글은 이 목사님의 글을 읽은 후 카스다 게시판에 필자가 올렸던 글이다.


김OO 목사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저도 목사님께서 최근에 집필하신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몇 주간 출퇴근하면서 정독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전 생애의 빛에서 목사님의 책을 비평한 글도 접하게 되어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느낀 점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말씀을 성공적으로 목회를 하시고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께 드린다는게 무척 죄송스럽습니다만, 제가 볼때도 목사님의 이 책은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국부적으로 읽어 곡해한 부분도 적지 않게 있고 또 그릇된 전제로 시작하여 전개한 논리적 취약성도 여러군데 산재해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섭리에 대하여 마지막 시대를 사는 재림성도들을 잘못 인도할 내용이 다분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제가 요사이 시간적 여유가 별로 없어 일일히 언급은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곳에서 목사님이 제시하신 반론에 담겨있는 한 두가지 점에 대해서만 외람되지만 나름대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너그러이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김OO 목사님 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로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고 하셨다. 그러므로 죄인이 아닌 사람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 만일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 구주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말이다. 죄인이 아니면 구주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목사님의 주장은 소위 새로운 신학을 받이들인 미국인 재림교인들로 부터 저도 여러번 들어 보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전혀 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겠는가?”라고 자주 그들이 주장했지요. 화잇여사의 말대로 세상의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하심을 계속적으로 필요치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이들이 비난하곤 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런 주장을 하시는건, 구원을 위한 구주의 두가지 측면을 간과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구원의 측면에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능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능이 또한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하는”(마태 1:21)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지요.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용서함이 제공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용서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를 사해 주시는 역할과 더불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에게 계속 절실히 필요하니까, 과거에 죄를 지어 죄인이 었는지 몰라도 회개하여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더라도, 그 구주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은 계속 필요해 지는 겁니다.

김OO 목사님 글: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다른 증언을 보자. “부모들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책무를 가지고 있다. 자녀들의 유산이 죄의 유산이다. 죄는 저들을 하나님과 분리시켰다. 예수께서 끊어진 고리를 하나님께 연결시키려고 그의 생명을 주셨다. 첫 아담과 관련하여 사람은 그로부터 죄와 사망 선고를 받는다. (Parents have a more serious charge than they imagine.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Sin has separated them from God. Jesus gave His life that He might unite the broken links to God. As related to the first Adam, men receive from him nothing but guilt and the sentence of death.)”(9MR 236.1) (inheritance는 생물학적으로는 유전 형질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유전된다는 말씀이 아닌가?

이 예언의 신 말씀도 목사님께서 잘못 이해하고 계신 점이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글이 새자녀 475쪽에도 있지요.

화잇여사가 “자녀들의 유산은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sin)” 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이라고 하신 점을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이 두가지 말 사이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전자는 죄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죄에서 기인한 유산 혹은 죄의 결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입니다. 화잇 여사는 물론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원죄론 적으로” 오해하는 것처럼, 아담에게서 죄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화잇여사는 그녀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그녀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쓰는 체계가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 기록된 화잇 여사의 글은 목사님께서 인용하신 이 글이 목사님의 주장을 대변해 주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무는 그들 부모가 삶의 법칙을 범하여 후손들에게 너무나 비참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모들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을 지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방향을 수정해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다.” (Counsels on Health, p. 37)

즉, 조상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받지만, 조상의 전례를 스스로 택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그 조상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지 않는다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 라는 사상입니다.

김OO 목사님 글: 만일 인용된 예언의 신의 글이 이 글을 쓴 분이 말하는 의미라면 빛을 받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주어지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짓을 해도 죄가 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재림교회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빛을 주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죄가 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주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닌가?

예언의 신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없이 분명합니다. 예언의 신은 빛에 무지한 사람들에게 구주가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 무지에 의해 범해진 죄들이 그들의 죄로 간주되어 저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생애의 빛 분들도 그런 뜻으로 목사님의 글을 비평했을 뿐이라고 보여집니다. 다음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무지한 가운데 범해진 죄들에 그분의 저주가 결코 임하지 않는다.” (영문 시조, 1899년 11월 1일)

“이 기별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지성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예수께서 법궤 앞에 서서 아직도 자비를 베풀 모든 사람과 무지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시다. 이 속죄는 죽은 의인과 살아 있는 의인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죽었으나 계명에 대한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계명을 범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초기, p. 254)

그리고 바울은 사도행전17:30에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합니다. 무지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일들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뜻을 어길 수 있습니다. 이 성경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시거나 혹은 너그럽게 간과해 주신다고 알려줍니다. 용서하신다고 않고 간과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빛과 지식이 이를 때, 악은 비로서 죄책화 되며 깨닫고 난 후에는 지은 죄에 대하여서 그 죄인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화잇여사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무지의 죄에 대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나 고의적인 맹목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45)

그 어떤 죄가 정말 무지의 죄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만일 빛과 진리가 그 사람에게 제시되었다면 그것이 분명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주거민들에게 확인하셔야 됩니다. 의도적인 무지와 나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용서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2:3).  재림교회가 전도를 하여야 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예언의 신 말씀에 있는 사상은 분명히 죄가 우리의 자유의지인 선택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칼뱅주의적인 원죄론 개념인데, 화잇 여사는 절대로 칼뱅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다음의 몇 글을 인용해 드립니다: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만일 아담의 후손들이 아담의 지은 죄를 물려받아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상이 성경이 말하는 것이라면, 다음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5-7)

목사님의 입장에 따르면, 가인이 벌써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데, 어찌하여 이 곳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가인안에 내재해 있지않고) 문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원한다고 주의를 주었을까요?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를 했나요? 이는 분명히 죄가 가인의 의지적 선택과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성경절이 아닌가요?

그리고 목사님의 책이 담고있는 내용에 대해 생애의 빛이 신랄하게 비평을 하였다고 일종의 불평을 표하시는데, 사실 그런건 불평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됩니다. 따지고 보면 목사님의 책도 목사님과 다른 입장을 표하는 교회내의 목사나 지도자들이 지닌 견해에 대해 여러모로 신랄한 비평을 담고있더군요. 아이디어는 그런 아이디어를 가진 이의 인격과는 별개의 존재로 비평과 비판의 대상이 분명히 될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