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죄와 본성에 대해 증언 말씀의 전체를 통해 나타나 있는 엘렌 화잇의 이해 (즉 저등본성과 고등본성으로 세분한 묘사)를 분석하여 제시한 후에 한 두분에 의해 비평적인 반응이 있음을 보는데, 화잇 여사의 이러한 이해와 그녀의 이해에 대한 필자의 분석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증도 없이 막연히 이러한 이해를 철학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지만 철학을 그 어떤 개념에 대해 인간적인 이론을 펼치는 것이라고 볼 때, 의와 죄를 “존재”와 “비존재”의 이슈로 부각시키는 것이 오히려 철학적인 논리전개라고 생각되는데, 그러한 존재와 비존재의 논리를 펴는 분께서 그와 반대입장을 취하는 필자의 입장을 오히려 철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음이 참 아이러니하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요즈음 재림신앙인들 (특히 목회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두드러지게 만연되어 있는 문제점은 다른 것이 아닌것 같다.

어떤 주제에 대해 자신들이 견지한 사고방식과 선입견이 우리가 영감적이라고 믿는 증언말씀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그 증언말씀을 간과하거나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신들의 선입견을 지지해 주는 쪽으로 왜곡한다는 점이다. 재림신앙의 길을 선택한 후 정말 신앙을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여러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보면서 겪은 본인의 경험에 의하면, 우리가 특히 신학자들의 글을 접하게 될 때 조심스러운 안목을 가질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소위 보수적이라는 평해지는 학자들 조차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이해에 (성경은 물론 증언말씀을 포함한) 영감의 글과 동일하거나 더 우수한 비중을 부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진실로 겸허한 학자는 자신의 모든 연구결과와 그에 기준한 자신의 이해를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과 그 말씀을 준 동일한 영의 지도로 우리에게 주어진 증언말씀아래 종속시키는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영감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간적인 학구성과 경험으로 상쇄하거나 자기의 입장을 합리화시키려는 그 어떠한 노력도 그 자신은 물론 많은 이들의 영혼에 해로움을 초래할 것이다. 증언말씀이 정말 우리 재림신앙인들의 신앙적 삶에 지침이 된다면, 그 글들을 읽을 때 자신의 선입견을 그 글들에 주입하여 오해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말고, 그 증언말씀으로 하여금 그 자체를 해석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마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듯이 증언들 자체가 이미 주어진 기별들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1 기별, 42) 라고 화잇여사가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성경말씀의 이해에 있어 화잇의 이해 범주를 벋어나지 못하는 자”라는 비난이 물론 있을 것임을 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분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싶다. 나도 소위  “배운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상의 학위를 위해 공부도 하고 그렇게 취득한 학위덕도 많이 본 사람이다. 그리고 모태로 부터 재림신앙인이 아니고, 성년이 되어 재림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따라서 나는 화잇여사의 글에 대한 신뢰성을 기정사실로 가지고 출발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하나님의 품성을 더 알기위한 마음이 솟구쳐, 여러가지 방법들로 그 말씀을 접근해 보았지만 성경은 나에게 있어서 극히 어둡고 혼란스러운 책이었는데, 내 마음을 비우고 증언말씀을 통해 그 도움을 받으며 접근했을 때, 내가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빛과 깨달음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그 어떤 성경주석가와는 비교도 되지않는 영적인 깨달음이 엘렌 화잇이라는 세상적 기준으로는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의 글들에 담겨져 있음을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나를 지도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행 8:31)라고 빌립에게 토로했던 이디오피아 내시처럼, 세상의 교육으로 영적인 눈이 어두어져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없던 나같은 사람이 세상의 교육을 받지못한 한 여성을 통해 영적인 깨우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은, 특히 한국인들 사이에선, 세상의 학위를 가진자들이 대우를 받고 으시댐을 누리는 것이 당연지사인 것 같다. 그래서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한 못배운 여성으로 부터 무언가를 배워야 되며 자기가 펼치는 논리의 제약을 받아야 된다는 것이 도저히 이 세상의 관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임이 분명하다. 나 또한 그렇게 강한 반감을 가지고 한 때 화잇여사의 글들을 대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배운자들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하는 편이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선택하심은 지혜로운 자들로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선택하심은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이라”(고전 1:27)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구원의 청사진은 죄를 존재와 비존재라는 철학적인 차원에서 논해야만 풀리는 그러한 논제가 아니다. 시편 기자를 통해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시편 119:130) 라고 했고, “성경은 매우 평이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원하는 자는 모두 이해하게 될 것이다”(3기별, 359)라고 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죄에 대한 정의는 성경말씀과 또 그에 대한 엘렌 화잇의 주석이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주고 있으며, 그것은 배운자나 배우지 못한 자들이 모두 너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재림교회내에서, 특히 조지 나이트 박사나 김명호 목사등의 신학자/목회자들이 죄를 그 이상의 무엇으로 (성경과 증언말씀에 있는 정의를 초월하고 무시하는) 그 어떤 전제를 제시하며 시작하고 있는데, 이러한 그들의 논리는 엘렌 화잇과 우리 재림신앙의 선구자들이 버렸던 (더불어 나 자신도 버렸던), 일반 기독교의 복음주의파 구원론의 길로  다시 접어들자는 “세이렌”의 유혹하는 손짓임을 우리는 제대로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복음주의파의 구원론을 다시 접수한다면, 이 재림교회는 결국 그 정체성과 존재목적을 필히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다. 신학의 여러 요소들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걸 신학에서는 조직신학이라고 한다), 구원론과 직결되는 원죄론적 차원의 존재/비존재식의 죄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요소가 구원론은 물론 재림교회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종말론 및 생활 양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재림신앙까지 그 올바르지 못한 영향이 파급되게 되어 일반 기독교와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이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한 현상들이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은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일개 평신도로써 이러한 생각을 밝히면, 목회자와 신학자들로 부터 교만하다고 핀잔을 듣게 될 것을 잘 안다. 특히 유명한 어떤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책이 주장하는 점들을 비판하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러한 책들을 나는 비평하기 위해 읽은게 아니다. 나도 무언가 진리를 깨닫고 배우려고 그들의 책을 읽었었는데, 성경과 증언말씀과 조심스럽게 비교해 보니 그들의 글이 너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서 많이 실망했고 어떤 면에서는 분노하게 되는 느낌을 가진적이 있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이런 생각을 밝히는 필자가 이들 교회의 사상적 지도자되는 사람들에게 겸손하지 못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욕할지 모르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분들의 “잘못되고 부족한” 의견들과 관념들에 함구할 정도로 겸손을 보일 의무감을 느끼고 있지 않다. 그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반 개신교인들에 의해 20세기 선지자로 여겨지는 토저 목사는 그의 독자들에게 “아무도 당신의 도사로 받아들이지 말라. 아무도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들지 말라. 오직 그리스도만이 당신에게 필요한 존재이다.”(the Warfare of the Spirit)라고 권하였다. 나도 여러 재림성도들에게 그의 권면을 반복하고 싶다. 신학자 숭배자가 되지 말고, 유명한 목사/강사들을 추종하며 그들의 말을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사람 되지 말고, 또한 그들의 좋은 설교만 쫓아다니는 “설교 중독자 (Sermon Junkie)”됨을 그치고, 성경말씀과 예언의 신 말씀을 비교하며 직접 연구하여 성숙한 신앙을 발전시키는 하나님의 마지막 세대 백성이 되시길 간절히 바라면서, 화잇 여사의 다음 권면을 그러한 당신에게 진심으로 권하는 바이다:

“우리는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정신력을 다 사용하고 하나님의 오묘를 이해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우리의 이해력을 써야 한다.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온순하고 순종하는 마음이 배우는 자의 진정한 정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경상 어려운 문제들은 철학적인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우리는 과학의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는 것과 동일한 자부심을 가지고 성경을 연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경건하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가지고 연구해야 한다. 우리는 겸손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신으로 나가서 위대하신 영원 자존자(永遠 自存者)에게서 지식을 얻고자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악한 천사들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우리 마음을 굳어지게 함으로 진리의 감동을 받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학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오묘라고 선고해 버리거나 별로 중요하지 아니한 것으로 지나쳐 버리는 성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위로와 교훈으로 충만해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실천하기를 원치 않는 진리에 대하여 그들의 눈을 감아 버리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연구에 사용되는 지성의 능력에 의존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전심 전력하는 태도, 곧 의를 열렬히 사모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대쟁투, 599)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