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으로 이르는 넓은 대로는 수많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는 명언이 있다.

에덴의 낙원으로 부터 쫓겨난 후에 아담이 하와를 향해, “쳐들어가 우리의 낙원을 되찾자!” 라고 말했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런데 바로 이런 제안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동안 예루살렘 주위의 열심당원들에 의해 외쳐지고 있었다. “우리의 이스라엘을 다시 되찾아 로마의 학정으로 부터 우리 자신들을 해방시키자!” 라고. 그 당시 이 열심당원들 일부가 하늘 왕국에 관한 예수님의 영적 기별을 곡해하여 지상 왕국의 건설을 위한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와 병합하고자 하였고, 그 예수님을 자기들의 혁명적인 대열로 이끌어 들이려고 헛된 노력을 많이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한 그들에게 많은 낭패감을 준 것은 주님이 그들의 이러한 계획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이와 유사한 어리석은 일들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지 않는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악한 사람들(부패한 통치자, 독재자 혹은 공직자나 아니면 고용주 등등의 사악하고 부당한 사람들)로 부터 핍박을 당하고 그들에게 종속되는 지경에 빠지도록 허용할 때, 대부분 우리의 첫 반응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통해 무엇을 하시고 계신가?” 혹은 “이런 일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라고 상고하며 우리 자신을 돌아 보는 자세가 아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대부분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올 때 우리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궁지에서 벗어날까?”라고 궁리하는 자세인 것 같다. 그 결과 우리 자신의 자만심에 사로 잡힌 궁여지책으로 초조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가운데 역사코자 주신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육적인 해결 방법들을 짜내어 실행하기 시작하곤 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바를 철저히 놓치고 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바로 이러한 사고 방식이 가롯 유다로 하여금 결국 그리스도를 배반하도록 이끈 요소중 한 부분이 아닐까? 그 분을 이용하여 하나의 정치적인 구상을 진전시키고자 하다가 빗나간 결과를 초래한 그릇된 열성과 계획, 바로 그것 말이다. 혹자는 가롯 유다의 배신이 단순한 탐욕과 재물의 사랑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만일 유다가 재정적인 소득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의 죽음이 확정된 후 어찌하여 그가 받았던 은전 삼십냥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 주려고 하였겠는가? 만일 유다가 원했던 것이 오직 재물이었다면 왜 그는 받은 은냥 삼십냥을 가지고 자기 갈 길을 가지 않았는가? 더우기 그가 단지 한 사기꾼에 불과했다면 왜 그는 이렇게 돈도 별로 없는 이들과 함께 있기로 작정하였겠는가?  어찌하여 부자들의 재물을 등쳐 먹기 위해 돈이 많은 자들에게 붙지 않았을까? 틀린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다의 배신에 있어서는 재물에 대한 사랑 이상으로 많은 요소들이 깔려 있음을 보게 된다. 그가 뉘우쳤다고(돈을 돌려 주려고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만, 그 후 나가서 스스로 목매어 목숨을 끊은 것을 볼 때 그의 행위를 참된 개심의 표현으로 보기가 힘들다. 적어도 닭이 운 후에 시몬 베드로가 했던 그러한 회개는 아니었다고 본다. 유다와 베드로 그 둘은 똑 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었다. 한 사람은 그의 행위로 다른 하나는 말로 예수님을 배반한 후, 그러한 자신들의 처신을 똑 같이 후회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후 마침내 성육하신 예수님의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의 육적인 구상을 포기했다는데 있다. 그는 이곳 세상으로 부터 다가올 하늘나라로 자신의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그와는 달리, 가롯 유다는 단지 계획했던 혁명적 과업 달성에 완전히 실패한 자로 자신을 보았으며 그러한 과정 중 무고한 한 사람의 생명을 잃게 했다는 죄책감에 빠졌던 것이다.

2001년 9월 11일에 뉴욕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후, 미국은 테러주의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끈임없는 전쟁을 치뤄오면서 점차로 “새끼양이 용처럼 말하는”(계 13:11) 탈바꿈이 가속화되어 왔다. 그리고 그에 편승해 세속화된 기독교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 18:36)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타락한 세상을 바꾼다는 명분하에 서로 다투어 정치로 뛰어 들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그 세상의 일그러지고 타락된 도덕성에 의해 교회가 더욱 심하게 변질된 것을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바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는 마키아벨리의 논리는 이제 신앙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많은 예수의 빠돌이와 빠순이들에 의해 하나의 불문의 강령이 되어 있는 느낌이다. 도덕적인 법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지극히 비도덕한 소시오패스들과 친구먹고, 정의를 위해 불의를 행하고, 진실을 밝힌다며 거짓을 서슴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절망하게 되고 통곡의 벽앞에서 하나님께 탄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을 왜 믿는지에 대한 고뇌없이, 편의주의와 쾌락과 자만심에 의해 움직여 지며, “그리스도적”, “보수적” 그리고 “애국적” 혹은 “사회 정의” 및 “사랑” 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면 그들의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아무것이나 (그것들이 옳고 그르든지 성서적이든 아니든 상관않고) 다 무조건 지지하는 맛이간 기독교인들의 범람으로, 이제 기독교는 개독교로 사람들(구도자들)에 의해 폄하되며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예수님의 대의를 위해 우리의 추구하는 바를 버리는 대신, 예수님 당시의 열심당원들 처럼 지금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짓들을 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솔직히 인정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우리 모두는 다 삶의 왕좌를 그 자리에 합당한 오직 한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굴복하며 온전히 내어 드리는 과제에 맞부딪혀 있으면서도, 자기 스스로 모든 걸 해결해 보겠다는 통제광(control-freak)들임을 말이다. 가롯 유다의 경우가 우리에게 잘 보여 준 것 처럼, 예수님과 근접해 있다는 것과 그 분을 따른다는 것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진정으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영생의 새로운 삶을 위해 칭의의 은혜를 입었다. 하지만 이러한 용서함의 은혜는 우리의 옛 생애가 지녔던 우상들과 인간적인 구상들을 버리는 회개의 경험없이는 우리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나는 지금 정치계와 종교계등을 움직이는 지도자들을 무조건 헐뜯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러한 공동체의 다수를 이루는 일반 구성원들을 격려하여 그들의 사려깊은 생각을 조장하기를 원할 뿐인데, 그 이유는 우리 자신들이 (우리에 의해) 선출되고 지지받는 지도자들의 반영이 아니고, 그 지도자들이 우리들 진 면목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다른 인간을 존경하고 따를 수 있기위해 지도자들의 개심이 필요되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운데 우리 모두를 인도하여 하늘나라로 이끌기 위해 우리 각자 자신들의 개심이 필요되어 지는 것이다.

교회안에서 조차 우리 자신들의 욕심과 허영심을 BB크림으로 치장한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불의는 간과하고, 또 그러한 죄악들에 피해자되어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사정과 억울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명예와 입지에 대한 이기심때문에 외면하고, 그리고 그러한 비겁한 자세를 사랑과 중용의 이름으로 도배하면서도, 교회의 행정적인 개혁, 교리적 개혁, 사회 정치적 개혁 혹은 선교를 위한 교회 분위기/예배 개혁등을 외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을 대신하려하고 하고 우리의 발가벗음을 가리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임을 말하고 싶다.

만일 여러분이 좀더 나은 미래와 세상을 바라며 기도한다면, 이 지상의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인간의 우상적인 이념들과 구상들을 버리고,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 18:36)고 하신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새로운 생애로의 고귀한 부르심을 겸손히 받아들이기를 권해본다. 이러한 삶은 허영심과 자기 찬사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남들의 주목을 피하면서 자신이 사는 곳에서 꾸미지않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진수인 십계명의 가르침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온전히 이루는 믿음의 삶인 것이다.

우리가 가롯 유다의 비극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6:25) 그러므로, 베드로처럼 우리도 우리의 시선을 지금 이곳의 세상적인 야심과 구상으로 부터 하늘의 것으로 돌리어, 우리와 이웃들을 그 곳으로 데려갈 오직 유일한 지도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 심령의 눈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 3:13-14)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