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과 죄론에 대한 재림교회의 공식적 입장이 칼뱅주의의 원죄설에 입각한 죄론이 아닐진데, 어찌하여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그러한 개념을 부분적 혹은 전체적으로 받아들인 사상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그것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선 데이브 피들러(Dave Fiedler) 장로의 논문 「재림교회와 월터 마틴」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미주 한인 재림교회 (KASDA) 게시판에서 원색적인 원죄설에 입각한 죄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거의 모두 한국 재림교회 분들이었는데, 아마 한국 연합회 재림마을 웹사이트에 실려있는 「만져본 구원」이라는 글에 포함된 사상과 일치하거나 그러한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결과이지 않나 생각된다. 성경과 증언 말씀의 전반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재림교회의 기본 신조와도 상충되는 원죄론적인 안목에서 죄를 논한 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한국 연합회의 재림마을 웹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는 (저자가 명시되지 않은) 「만져본 구원」이라는 글이다. 여러 한국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주장에 담긴 인용구들이 이 「만져본 구원」에서도 그 죄론을 지탱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어찌하여 이렇게 원죄론에 기초한 인간론/죄론이 한국 재림교회의 공식 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아니 되지만, 성경과 증언 말씀들의 일관성있는 가르침과 비교하면서 「만져본 구원」에 있는 다음의 글을 한번 주의하여 대조해 보는 것은 재림신앙의 정수를 추구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정통적인 재림신앙이 제시하는 죄의 개념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검토해 볼 기회를 제공하리라 생각된다.
죄인이 되는가? 아니면 죄인으로 출생하는가?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성경을 강의하고 있는 제가 죄인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저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일 제가 여러분 집에 가서 무엇인가를 가져갔다면 저는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예, 저는 죄인입니다. 이와같이 일반적으로 죄인이란 어떤 불법적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의미에서 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은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이에 대하여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은 시험에 실패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였으므로 그의 모든 후손은 죄인이 되었다"(원고 126, 1905). "아담은 실패하였고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죄를 양도하였다."(편지 1331, 1900). 여기서 죄를 양도하였다는 말은 원문에 entail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한사상속(限嗣相續)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한사상속이란 법률용어로서 “상속인을 한정하여 양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인이 되고, 그 죄를 후손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하고,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범죄함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8장 3절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은 태어날 때는 죄인이 아니며, 스스로 범죄함으로서 죄인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견해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범죄하기 전까지는 구주가 필요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또한 일말이라도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가 전혀 속절없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고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마음을 버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게 될 것이다"(가정과 건강 340. 이하 모두 영문 쪽수임).
[만져본 복음, "죄인이 되는가? 아니면 죄인으로 출생하는가?"]
여기서 이 글의 저자는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개의 성경절과 증언 말씀들을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 인용된 구절들이 정말 이 저자가 견지하는 원죄론적인 입장을 지지하는지 우리가 한번 주의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 「만져본 구원」의 주장: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의미에서 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성경은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로마서 5:12-19절이 이러한 원죄론적인 입장을 결코 지지하고 있지 않다. 더욱이 이 로마서 5:12-19절에 대한 엘렌 화잇의 해설은,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 후손들 자신의 선택이었음을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또한 이 「만져본 구원」의 저자는 성경이 다른 의미에서 죄를 정의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1 기별, p. 320) 라고 언급한 증언 말씀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주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만져본 구원」의 주장: “이에 대하여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담은 시험에 실패하였다. 그가 하나님의 율법에 반역하였으므로 그의 모든 후손은 죄인이 되었다.’” (원고 126, 1901).
그런데 바로 이 글 다음의 문장에서 엘렌 화잇이 그렇게 후손들이 죄인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음을 「만져본 구원」의 저자는 간과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명이 한 때 남녀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에 품어 키워나간 죄들이 그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명을 희미하게 만들어 거의 지워버렸다. 죄로 인해 새겨진 자국들이 계명의 흔적들을 점차로 손상해 버리게 된 것이다.” (원고 126, 1901;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29) 아담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한 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에 품어 키운 죄, 즉 그들의 선택임을 엘렌 화잇이 이 문장에서 부연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재림교회 안에서 원죄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며 주창하는 사람들의 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특징은, 그들이 증언 말씀의 단편적인 문절을 국부적으로 잘라 인용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만져본 구원」의 저자가 인용한 이 구절의 경우처럼, 이러한 인용절이 담긴 예언의 신 글 주위 문맥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대부분 그 인용된 글을 통해 화잇 여사가 의도한 바가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원죄론적인 사조를 지지하고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된다.
(3) 「만져본 구원」의 주장: “’아담은 실패하였고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죄를 양도하였다.’ (편지 143, 1900; Manuscript Releases, vol. 6, p. 2). 여기서 죄를 양도하였다는 말은 원문에 entail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한사상속(限嗣相續)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한사상속이란 법률용어로서 ‘상속인을 한정하여 양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죄인이 되고, 그 죄를 후손에게 양도했기 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양도하였다(entailed sin)”라는 말을 “아담의 모든 후손은 나면서부터 죄인이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이 저자가 원죄론적인 선입견을 품고 이 문절만을 단편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온 결과이다. 만일 엘렌 화잇이 이 문장을 정말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였다면,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라는 말과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들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들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Counsels on Health, p. 37) 라는 그녀 자신의 말과 모순되는 주장이 되고 만다. 더불어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며 아비도 아들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니, 의인의 의는 그에게 있고 악인의 악도 그에게 있으리라” (에스겔 18:20)라고 언급한 성경 말씀과도 정면으로 대치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과 증언 말씀이 이런 식으로 상충되고 있지 않음을 믿는데, 이러한 불필요한 모순은 이 「만져본 구원」의 저자가 자신의 원죄론적인 선입견으로 증언 말씀의 단편적인 문절에 주관적인 해석을 가한 결과에서 기인했을 뿐이다.
위에 인용된 증언 말씀이 보여주듯이, 엘렌 화잇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기 전에 의지의 선택이 선제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마음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엘렌 화잇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칭하고 있으며, 또 부모가 건강법칙을 거스린 결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비참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견책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모들의 책임인 “비참한 유산”때문에 그들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고 그녀가 결코 주장하고 있지 않은 바이다.
그런데 이 「만져본 구원」의 저자는 “죄의 양도 (entailment of sin)”를 “죄의 유전 (inheritance of sin)”과 동일시하는 원죄론적인 안목으로, 화잇 여사의 단편적인 문장에 그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개념을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저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영어의 “entail” 이라는 단어는 한사상속이라는 법률적인 개념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상속자가 그 상속물을 받거나 거절할 수 있는 선택의 의미가 내포된 단어라는 점이다. 웹스터 신세계 영어사전에 인용된 “The plan entails work” (계획은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한 작업/노력을 수반한다) 는 문장이나 재림교회에서 발행하는 2009년 6/7월호 종교 자유지에 언급된 “The freedom to believe entails the freedom to doubt” (신앙의 자유는 불신의 자유를 수반한다) 라는 문장이 내포한 것처럼, 후자의 결과가 전자의 존재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뒤따름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후자의 결과를 성사시키려는 의지의 개입이 존재할 때에만 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담은 실패하였고 그는 그의 후손들에게 죄를 양도하였다”라는 말을 다른 여러 증언 말씀과 더불어 일관성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앞에서 인용한 1900년 6월 27일자 영문 시조의 글을 조금 부연하여 읽어보면 될 것이다 :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그의 후손들)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후손은)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었던 반면에 (그 자신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4) 「만져본 구원」의 주장: “그러므로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말하고, 예수께서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가 범죄함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8장 3절은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5)라는 성경절이 아담의 죄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이 불가피하게 죄인으로 태어남을 가르치는 구절로 이해될 수 없다. 이 성경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떤 성경 번역본들은 그렇게 적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 성경을 번역한 이들의 신학적 해석이지 정확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말하는 바는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배었을 때 죄인이었으며 자기 또한 현재 죄인이라는 고백일 뿐이다. 이 구절을 포함한 성경 말씀의 그 어떠한 구절도 결코 죄인 됨의 과정을 자유의지의 범주로부터 제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좀 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한 아기가 가정에서 도둑질을 가르치고 연습시키는 도둑 부모들에게서 태어났다고 하자. 그러면 이 아기는 도둑질 속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출생 자체로 인해 이 아기가 도둑이 되었는가? 아니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죄 안에 태어났다고 해서 그 자체로 인해 태어난 아기가 멸망을 당하는 정죄함을 받은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직 출생 때부터 극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됨을, 그리고 그대로 놓아두면 분명히 죄인으로 귀착함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시 58:3)라는 성경절도 악인(wicked)에 대해서 말한 것이지 모든 인류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악인의 자녀들이 부모의 돌보지 않음과 그들의 악한 모본을 따라 태어난 후 곧 그들도 유사한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단 이러한 경우에도 그 악인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정죄되지 그들이 물려받은 성향에 의해 정죄됨을 받는 것이 아닌 바이다. 다음 예언의 신 말씀을 참조하면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해진다: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이 무서운 사실이 죄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해야 한다.” (부조와 선지자, 306)
또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요 8:44)는 예수님의 말씀도 「만져본 구원」의 저자가 주장하는 대로 “우리가 범죄함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는 원죄론적인 관념을 지지해 주는 보편적인 말이 아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진리를 거부하며 자신을 죽이려고 공모하던 이미 죄를 범한 죄인들 (바리새인들) 에게 한 말이다. 그들이 이미 죄를 범하였기에 그 죄의 원조인 아비 마귀에서 난 행위를 하는 죄인들임을 질책한 말일 뿐이다.
(5) 「만져본 구원」의 주장: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서부터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은 태어날 때는 죄인이 아니며, 스스로 범죄함으로서 죄인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 견해에는 치명적인 함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범죄하기 전까지는 구주가 필요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또한 일말이라도 사람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줍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자만을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가 전혀 속절없이 우리의 상태를 깨닫고 자신을 의지하는 모든 마음을 버릴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게 될 것이다’ (가정과 건강 340. 이하 모두 영문 쪽수임).”
우리 자신을 올바로 알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은 원죄론적인 안목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를 증오하며 버리고 싶은 마음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그러한 죄를 범했다는 자신의 책임성을 깨닫게 될 때 더 절실해 지는 것이다. 그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죄를 전수해 받았다는 것과 그리고 그 전수된 죄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공식을 인식하는 그 자체로서는 죄를 증오하며 버리고 싶은 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되지 못하는 것이 미련한 인간의 실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공식하에선 그 죄에 대한 책임성의 강도가 희석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저자의 주장은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통감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지, 우리가 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원죄론적인 관념을 받아들이는 데서 구원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러하다. 물론 죄를 스스로 극복하기엔 너무나 처절하게 타락해 버린 인간 본성의 상태를 강조하려는 선의에서 이러한 원죄론적인 주장을 한다고 생각되지만, 우리가 한가지 기억할 점은 바로 지옥으로 가는 신작로가 수많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과 증언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된 설명을 넘어서 이렇게 타락된 본성에 필요 이상의 산만한 색조를 가미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역사를 돌아보면 그 아무리 좋은 의도에서 기인했다 하더라도 심각한 해악적 부작용을 기독교회 안으로 불러왔음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덕률 철폐론(antinomianism)이 그 하나요, 칼뱅주의의 산물인 예정론(predestination)이 또 그 한 결과이며, 만인 구원론(universalism) 또한 이 원죄설에 기반을 둔 “정죄된 본성론”의 한 부산물로 출현되었던 바이다.
그리고 「만져본 구원」의 저자는 또한 “사람은 태어날 때는 죄인이 아니며, 스스로 범죄함으로서 죄인이 된다고 가르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이 범죄하기 전까지는 구주가 필요없는 것으로 만듭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증언에 기록된 대로 세상의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하심을 계속적으로 필요치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공격하던 “새로운 신학” 옹호자들의 주장과 비슷한 것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권능만이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하는”(마태 1:21)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용서함이 제공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용서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를 사해 주시는 역할과 더불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절실히 필요되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해 포괄적인 이해를 담은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들에 대해서는 필자의 칼럼 「구원을 위한 십자가 은혜의 두가지 기능」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만져본 구원」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인간이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원죄론적인 주장에 오히려 더 치명적인 함정이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을 전할 사명을 부여받은 재림교회의 (한국 및 미주 한인 교회들을 포함한) 대부분이 현재 처해있는 열약한 상황을 한번 예로 들어보자. 성령의 권능을 체험하며 이 세상과 구별되는 순수한 믿음의 삶이 강조되기보다는, 세상의 타락한 교회들이 고안해 낸 인간의 육적인 성향에 호소하는 각종 예배양식과 선교방법들이 교회 내에서 굿판을 벌이며 아까운 시간과 재정을 잠식해 왔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따라서 남은 무리의 교회가 왜 이러한 지경이 되었는지 한번 심각하게 우리의 믿는 바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 지난 몇 십 년간에 걸쳐 교회 안으로 유입된 원죄론적인 복음주의파 사조가 많은 이들의 신학과 신앙을 변조해 버린 결과로 이러한 현상이 도래한 것이 혹시나 아닌가 하고 이 필자는 솔직히 질문해 보고 싶은 바이다.
혹시 이러한 원죄론적인 사조를 받아들인 이들에 의하여, 우리 인간의 본성이 너무 타락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그 본성을 결코 회복하거나 복구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적 가르침이 복음으로 그동안 재림 성도들에게 제시되어 오지 않았는가? 우리 인간의 본성이 물론 타락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존해 그 타락된 본성이 이생에서 변화되고 정복되며 개조되어 기품이 있게 부드러워 질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아 고상하게 성화되어 그 본래의 순결함을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성품과 합하여져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고 하나님의 대언자인 엘렌 화잇이 분명하게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유의 재림신앙을 오히려 완전주의로 비하하며 질타해 오지는 않았는가?
또한 혹시 이러한 원죄론적인 사조를 받아들인 이들에 의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 죄 범함을 그칠 수 없기에 우리는 칭의 즉 용서 받음으로써만 구원을 얻게 되며, 성화의 추구는 훌륭한 자세이지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되는 것은 아니라는 비성서적인 가르침이 “새로운” 복음으로 재림 성도들에게 그동안 제시되어 오지 않았는가? 성화를 불러오지 않는 칭의는 그 자체가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거짓 칭의임을 증거할 뿐이라고 하나님의 대언자인 엘렌 화잇이 분명히 증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하여 성화와 올바른 생활양식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이러한 불미스러운 경향이 교회와 성도들의 전반적인 풍토를 어지럽게 만들었으며, 교회의 영성과 사명의식을 또한 약화시켜 온 것이 혹시나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작금에 우리의 근본적인 교리들까지 노골적으로 부인하고 공격하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들이 소위 고등교육을 받았다고 하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인터넷 게시판들에서 난무되는 현상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결론적으로 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이 「만져본 구원」의 저자가 견지하는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재림교회의 사명을 소멸시키려는 마귀의 현혹에서 기인한 것인지 우리가 진실로 한번 심각하게 재고해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