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성서적 혹은 개신교적 복음이 무엇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주장하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여러 분분한 견해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중 최근에 들어 몇몇 이들에 의해 기존의 재림 신앙이 제시하는 복음이 개신교적이라기 보다는 사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복음관과 흡사하다는 한 도전적인 주장이 제기되었는데, 필자는 이 간략한 논문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재림 신앙의 복음관이 진실로 성서적이요 개신교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로마 캐톨릭 교회의 복음관과 개신교의 복음관 사이에 있는 실질적인 차이점들을 명확하게 대조해 보이고자 하는 바이다.


지난 몇 년간에 걸쳐 우리 재림 교인들에게 한 도전장이 던져졌다. 복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우리가 정말 개신교적인가 아니면 우리의 이해가 로마 카톨릭교의 복음관에 더 가까운가? 이러한 도전은 사소한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구원에 대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이해는 명확히 비성서적이어서 만일 우리가 부지중에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복음관을 견지하고 있었다면 이는 분명히 복음에 대해 오류적이고 위험한 개념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형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복음관이 성서적인지 아니면 왜곡된 가짜 복음인지 우리가 한번 신중히 재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 전

재림 리뷰지에 실린 한 기사에서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시험하기 위해 한 짧은 퀴즈가 주어지고 있다. 이 퀴즈는 홀수와 짝수의 번호가 주어진 질문들로 제시되었는데, 다음의 몇가지 질문들이 그 예가 되겠다:

홀수: “우리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성취해 주신 공로 (what Christ has done for us) 에만 의존한다. 맞는가, 틀리는가?” 
짝수: “우리의 구원은 우리를 위해 성취해 주시고 우리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공로 (what Christ has done for us and in us) 에 의함이다. 맞는가, 틀리는가?” 

홀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만 의지하여 의롭다는 칭함을 받게 된다. 맞는가, 틀리는가?” 
짝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는 물론 우리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의롭다는 칭함을 받는다. 맞는가, 틀리는가?” 

홀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인 후에 믿는 자는 거듭남을 경험하며 그의 생애와 성품이 변화되는 결과가 뒤따르게 된다. 맞는가, 틀리는가?” 
짝수: “그의 생애와 성품이 변화되는 거듭남을 경험한 후, 믿는 자는 하나님앞에서 의롭게 되는 칭함을 받게 된다. 맞는가, 틀리는가?”

이러한 퀴즈 질문들을 제기한 후 이 기사의 저자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을 이렇게 강조하였다: “만일 모든 홀수 질문들이 맞는다고 답하고 모든 짝수 질문들이 틀렸다고 답하였다면, 당신은 전통적으로 개신교회가 주장해온 복음관을 지니고 있는 분이다. 반면에 전반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짝수 질문들에 긍정적인 반응을 하였다면, 당신의 복음관은 16세기의 트렌트 종교회의 후 카톨릭 교회가 채택해온 가르침으로 어느 정도 기우는 경향이 있다.” (클리프 골드스틴, 1999년 9월 23일자 Adventist Review지에 실린 기사)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관점은 위에 열거된 주장들 중 어느 것들이 성서적인 구원론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겠다. 이 점에 관해 위에 언급된 리뷰지 기사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계속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홀수의 주장들은 모두 구원론에 대한 성서적인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데,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 (혹은 설사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그 어떤 것) 도 제외한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삶과 죽음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 이루어 주신 공로에만 의존함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짝수의 주장들은 우리의 구원이 우리에게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공로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서 이루시는 것들에 달려있다는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후자의 입장은 로마 카톨릭과 일부 재림 교인들을 포함한 몇몇 기독교 집단들에 의해 선호되어 왔는데. . . .하나님의 신성함과 당신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높으신 기대감을 강조하려는 욕구로 인해 많은 신실한 신자들이 성경이 뒷받침해 주지 않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바이다.” (클리프 골드스틴, 1999년 9월 23일자 Adventist Review지에 실린 기사)

또 그 후에 다시 이 저자는 참된 복음에 대한 그 자신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확충 설명하고 있다: “종교 개혁 후 루터 교파를 포함한 거의 모든 개신교도들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declare)하시는 행위로 주장해 왔었다. . .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 안에서 (in us) 이루시는 것이 아닌 우리를 위해 (for us) 하시는 그 어떤 것으로 가르쳤는데, 이 두 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내재한다. .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상관없이 우리 밖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것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 . . .개신교도들은 ‘칭의의 은혜’를 전적으로 사법적인 선고에 국한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와 반면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칭의를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 즉 내적인 회복의 과정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클리프 골드스틴, 2000년 6월 22일자 Adventist Review지에 실린 기사)

다른 한 저자도 이 보다 먼저 실렸던 리뷰지 기사에서 위의 저자의 의견과 유사한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음을 본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해 죄인을 의롭다고 간주해주는 (account, reckon) 것에 그치는 믿음으로만 말미암는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를 죄인의 내부에서 성화시키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죄인을 의롭게 만드는 (make) 칭의의 개념으로 대체시켰다. . . .다시 말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은 죄인이 의롭다 여겨짐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죄인 속에서 역사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드로우 위든, 2000년 5월 25일자 Adventist Review 지에 실린 기사)

몇가지 근래 역사적 사건들의 회고

약 20여년 전[1], 데스몬드 포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포함한 여러 가지의 재림 신조들에 대해 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한 적이 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 영국 성공회파의 한 목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하여 그 당시 재림 교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던 논쟁을 상세히 기술한 책을 저술했었다. 그 책에서 이 목사는 칭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분석을 제시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칭의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내적 회복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롭게 만드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반면에,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를 믿는자 밖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의에만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으로 가르쳤다.” (제프리 팩스턴, The Shaking of Adventism, Zenith Publishers, Wilmington, DE, 1977, 39페이지)

이 제프리 팩스턴 목사는 “내부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개념은 종교 개혁주의가 주창한 칭의의 교리를 저버리는 짓이다” (같은 책 42페이지) 라고 말했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하나님과 관련되어졌지 믿는 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결코 제시된 적이 없다” (같은 책 40페이지) 라고 주장하였음을 보게 된다.

이 근래의 역사적 사실에서 보듯이, 현재 제기되는 주장들과 동일한 도전들이 이미 70년대 후반에 한 소위 개혁주의적인[2] 학자에 의해 주장된 적이 있었던 바이다. 지금처럼 비슷한 이슈가 그 당시에도 제기되었으며, 동시에 지금과 같이 개신교적인 복음과 카톨릭교적인 복음 사이를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는 요구가 그 때에도 제시되었던 것이다. 단순하고 기초적인 이러한 도전에 의하면, 회개하는 죄인 속에 내재하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하심이 구원에 앞서며 필수적인 것으로 우리가 믿으면 우리의 복음관이 카톨릭적인 것이고, 구원을 죄인을 의롭다고 명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법적인 선고만으로 믿는다면 우리의 복음관은 개신교적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칭의관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성경 말씀으로 가야하며, 그 후에 예언의 신에 나타나 있는 증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오직 영감을 받은 기록들로 부터만 우리가 구원이라는 아주 중대한 주제에 대한 올바른 결론을 안전하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칭의에 관한 사도 바울의 한 전형적인 말씀이 로마서 5장 1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  로마서 3-5장의 맥락은 분명 칭의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 에 관한 것인데, 이 칭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게 함으로서 우리의 마음에 평화를 제공한다. 로마서 4:7-8은 이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면 어떤 일이 있게 되는지 잘 묘사하고 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4:7-8) 즉, 칭의는 죄의 용서요, 죄를 가리워서 믿는자의 죄로 인정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엘렌 화잇은 이 용서 받음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편 10절) 라고 기도했을 때 용서의 참 뜻을 깨달았다.” (산상 보훈, 114페이지)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인식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용서가 법률적인 선고인 한 사법적 행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만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동시에 용서는 마음을 변화시키는 내적인 역사이며 우리 속에 새로운 마음과 영의 창조를 의미하고 있다고 영감의 글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글에서 엘렌 화잇은 이와 비슷한 내용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시는 그런 방법으로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가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리뷰와 헤랄드, 1890년 8월 19일자) 죄로부터의 용서받음 후에 새로워짐이 뒤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용서 자체가 새로워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용서는 바로 새 마음과 직결된다. 다시 말해 사면, 용서, 새로워짐과 변화사이에는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것은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동일한 섭리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디도서 3:5-7에서 우리는 칭의에 대해 아주 명확한 설명을 접하게 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3:5-7) 이 성경 구절에 의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신다고 했는가? 성령에 의한 마음의 새로워짐과 중생으로 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의 경험에 성령의 역할이 깊이 연루돼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 새로워짐의 진행이 의롭다 함을 입는 칭의로 이어지는 것이다 (7절에 언급된 칭의가 사실적으로 5절에서 언급된 새롭게 하심에 앞선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음을 안다. 하지만 5절은 분명히 새롭게 하심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임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받기 이전에 칭의가 존재한다고 우리가 정말 주장할 수 있는가? 이러한 주장은 구원의 과정에 필요 되는 칭의의 결정적인 위치를 파기하는 짓이다). 이 성경 구절은 새롭게 하심과 중생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쓰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분명히 설파하고 있으므로, 칭의는 단순한 사법적인 선언이나 간주됨 이상의 것임이 자명해 진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6:11 은 구원의 과정에 대해 독특한 안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washed)과 거룩함(sanctified)과 의롭다 하심(justified)을 얻었느니라.” (고린도 전서 6:11)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순서를 혼동하여 잘못 기록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보다는 아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서구적인 논리의 선입견으로 인해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지 않는 그 어떤 경직된 과정의 순서를 우리가 창출해 내었을 가능성이 더 많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씻음(washing), 거룩해짐(sanctifying)과 의롭다 하심(justifying), 이 모두가 서로 상이하기 보다는 같은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면들이 통일된 구원의 한 가지 과정을 설명하고 있으며,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비해 구원에 있어 더 필요 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없음을 이 성경 구절은 말하고 있다. 역시 구원은 성령에 의해 수반되는 내적인 역사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로마서 8:1절, 9절,10절에서도 우리의 주의를 끄는 유사한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 .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로마서 8:1,9,10 – 흠정역 성경 번역)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영에 거함을 뜻하고, 또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당신 속에 거하심을 의미하며 그 말은 바로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 계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한 개념들을 인위적으로 분할하여 이 중 어떤 것들은 우리를 의롭다 하는 칭의인 반면 다른 것들은 오직 그러한 칭의의 열매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신학적인 선입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 말씀을 곡해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하겠다.

위에서 검토해 본 성경 말씀 외에도 이러한 개심의 과정을 훌륭하게 표현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예언의 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능력에 이끌린 죄인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부복할 때에 그는 새로 창조함을 받는다. 그는 새 마음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게 된다. . .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롬 3:26) 하시는 분이시다.” (실물 교훈, 163페이지)  대속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앞에 부복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 죄인을 새 마음을 가진 피조물로 새롭게 창조하시며, 엘렌 화잇은 이 전반적인 과정을 의롭다함을 입는 칭의로 묘사하고 있다.

“입혀지는 그리스도의 의를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을 통하여 받음으로” (SDA 성경 주석, 6권 1098페이지)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이 문구는 구원에 관해 논하는 현대 학자들의 글들이 철저하게 구분하고 있는 개념의 용어들을 오히려 결합해서 사용하고 있다. 입혀짐 (imputed) 이 칭의와 관련되고 변화됨 (transforming) 이 성화와 관련되어 쓰여지고 있는데, 이 문구에서 우리는 입혀지는 의(칭의)를 우리가 성령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을 통하여 받게 됨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 표현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바로 변화됨과 칭의가 하나요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문구들 중 가장 명백한 말은 다음의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부여하심으로 우리들을 의롭게 만드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Having made us righteous through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 God pronounces us just).” (가려뽑은 기별 1권, 394페이지) 여기서 우리가 주지할 바가 있는데, 현재 통용되고 있는 신학 사조가 이와 반대로 “그리스도의 의를 부여하심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의롭게 만드셨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엘렌 화잇의 이 말씀은 복음에 대해 재림신앙이 오랫동안 견지해 왔던 입장에 지금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이들로서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다. 그러나 엘렌 화잇의 의도를 곡해하기에는 이 문구는 너무나 명확하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내적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며 (입혀지는 칭의), 그리고 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미 이룩하신 역사를 단순히 선포하실 뿐이다.

중생에 대해 설명한 성경의 가장 유명한 장은 요한복음 3장이다. 이 중 위의 진술들과 조화되고 있는14, 15, 3, 6절들의 말씀들을 한번 주지해 보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 .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요한 복음 3:14, 15, 3, 6) 이 성경절들에 의하면 영생은 거듭남 (중생)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중생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온다는 것이 명확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변화의 내적인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4:22-2절에서도 동일한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본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22-24) 이 성경절에 의하면, 우리가 멸망되는 죄인으로 지칭되는 “옛 사람” (old man)의 상태에서 벗어날 때,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짐을 의미하는 “새 사람” (new man)으로 창조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은 잃어버린 상태에서 구속된 상태로 바뀌어지는 과정을 항상 새롭게 됨 혹은 새로운 창조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내적인 변화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또 갈라디아서 2:16,17절도 같은 점을 역설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16,20) 이 성경절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입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장 뚜렷한 주장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이것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한 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칭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동일함을 의미하며, 이 모든 것들은 잃어버려진 상태에서 구원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을 묘사하는 같은 의미의 표현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3:11, 2, 3절에서 우리는 이 칭의에 대한 또 한 가지의 이해를 얻게 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 . .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라디아서 3:11, 2, 3) 성령은 칭의의 과정 속에 깊이 관련돼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칭의의 역사를 성령이 시작하였다고 했는데, 이것은 칭의가 바로 내적인 변화의 과정임을 자동적으로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의 칭의관

우리에게 도전을 던진 이들은 카톨릭 교회가 짝수 번호의 진술로 대변된 구원론을 주장한 반면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은 홀수 번호의 진술로 표현된 구원론을 가르쳤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마틴 루터가 “칭의에 대한 성숙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형식적 혹은 법적 선언을 통하여 회개하는 신자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개념이다” (Hans LaRondelle, Ministry 잡지, 2000년 11월호) 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용서함과 의롭게 만드는 것은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Hans Heinz, Ministry, 2000년 11월호) 라고 역설한다. 우리는 이들로 부터 루터와 그 외 종교 개혁자들이 회개하는 죄인을 의롭게 만드시는 개념이 아닌 그저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사법적인 선언으로서의 칭의를 믿고 있었다는 주장을 듣고 있는데, 마틴 루터가 이 칭의에 대해 주장한 몇 가지 대표적인 글들을 우리가 한번 주의깊게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 . .이 칭의의 활동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34권, 177페이지 [1536])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 . .따라서 이것을 가리켜 로마서 5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고 했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32권, 235-236페이지 [1521])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잡고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거하시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인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며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129-130페이지 [1535])

“그러나 칭의란 그리스도와 내가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어서 그가 내속에 내가 그 속에 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 . .믿음의 개념이 올바로 전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믿음에 의해 당신이 그리스도와 굳게 접합되어 그와 당신이 한 개체로 됨으로서 도무지 분리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 .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와 나를 남편이 아내와 결합되는 것 보다 더 밀접히 결합한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167-168페이지 [1535])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는가?. . . .성령이 바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준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208페이지 [1535])

“이러한 믿음은 당신을 의롭다고 칭해주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속에 머물러 사시며 군림하시게 한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7권, 235-172페이지 [1519])

그리고 중생(거듭남)을 묘사한 요한복음 3장에 대한 설교의 서두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 장은 아주 숭고한 주제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의롭게 제시하는 오직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2권, 275페이지)

더불어 요한 칼뱅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함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근본적인 결합을 이루어 우리의 속성이 되며, . . .하나님의 성스러운 본성의 진수가 우리 속으로 진입된다”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1975, 3권 11항, #5) 라고 저술하였다.

위에 열거된 이 모든 진술들은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동일한 점을 말해주고 있다. 칭의가 우리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신다는 것이요, 칭의는 바로 그리스도가 내안에 거하시고 내가 그리스도안에 거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굳게 접합시킴으로 우리가 분리될 수 없는 상태가 됨을 뜻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칭의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며, 새로운 중생의 경험이 바로 칭의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진술들이 칭의의 본질을 내적인 의로 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구원론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는 이들에 의해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순전히 사법적인 선언에 의해서 회개하는 신자의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상”이 루터가 가졌던 성숙한 칭의의 개념이라고 주장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바이다.

이러한 오해가 도대체 어디서 유래했는가? 어떻게 되어 이들이 주요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에 대해 그릇된 제시를 하고 있는가? 다음의 글이 아마 그 원인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루터파 교인들은 의롭다고 선언되는 사건(칭의)과 의롭게 되어지는 과정(성화, 갱생) 사이를 점차적으로 지나치게 구분하기 시작했다.” (Raoul Dederen, Ministry, 2000년 11월호) 바로 루터의 후예들이 의롭다고 선언되어 지는 것과 의롭게 되는 것 사이에 지나친 구분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학자는 이것에 대해 더 솔직하게 언급하고 있다. “믿는 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내재로서의 루터가 가진 칭의의 개념. . . .이 모든 것들이 그의 뒤를 이은 추종자들에 의해 거부되거나 철저하게 변조되었다.” (Alister McGrath,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2권, 32페에지) 맥그라스는 이 책에서 이러한 변천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멜란히톤(Melanchthon)이 사법적인 인정만으로서의 칭의를 주창했다. (같은책 23-26페이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마틴 캠니쯔(Martin Chemnitz)가 카톨릭의 공격으로 부터 루터를 옹호하기 위해 멜란히톤의 논법를 따랐다. 캠니쯔는 내면화된 의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고,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Christ in you) 라는 말은 비유적인 언어에 불과하며 우리가 실제적으로는 의롭지 않더라도 우리를 의롭게 여겨주시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책 29페이지) 이런 과정을 거쳐 정통적 루터 교회는 이 칭의의 쟁점에 있어 캠니쯔의 논리를 따르게 되었고 결국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게 된 것이다. (같은 책 44-45페이지)

이 사실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문제점이 바로 루터의 가르침을 변조했던 그의 후예들에 있음을 알게 된다. 사법적인 인정만으로 서의 칭의는 사실적으로 종교 개혁 후에 출현된 신학자 중심적 루터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불행하게도 바로 이러한 칭의의 이해가 지금의 교회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공인된 견해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제 일부 재림 교회 신학자들마저도 이러한 견해가 성서적이고 종교 개혁자들이 견지하고 있던 입장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냉엄한 사실은 위의 퀴즈에서 홀수 번호의 질문들로 대변된 입장이 결코 성서적이거나 개신교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개인적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이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뚜렷한 일련의 신조들을 가진) 요즈음의 복음주의파 신자들(Evangelicals)이 주장하고 있는 복음관이다. 위의 퀴즈에서 (짝수 번호의 질문들로 대변된) 카톨릭 복음관이라고 단정된 것이 사실은 성서적이고 개신교적인 입장인 것이다.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칭의

그러면 구원에 대한 진짜 카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 사실 그 입장은 처음에 인용된 리뷰지 기사들에서 잘 설명돼 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 .로마 카톨릭 교회가 베푸는 거룩한 성사(sacraments)들을 통해 신자들의 생애에 실제적으로 주입된다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 구원하는 공로가 우리밖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것, 즉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의 공로로 가납되는 변화라고 가르친다. . . .카톨릭의 교리문답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영생을 얻는데 필요 되는 은혜들을 받을 공로를 쌓을 수 있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 . .’카톨릭 교회는 새 언약의 성사(聖事, sacraments)가 신자들의 구원에 필수적임을 공언하는 바이다.’ . . . .로마 카톨릭 제도는 그리스도가 개인을 위해 이미 이루었고 지금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교회 자체를 통해 전달된다는 결정적인 개념에 기초해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은. . .오직 카톨릭 교회와 그 성례의식들과 사제들만을 통해 신자들에게 나누어진다는 주장이다.” (클리프 골드스틴, Adventist Review, 2000년 6월 22월호)

“교회의 성사(聖事)를 통해 신자에게 주입되어지는 하나님의 성화시키는 은혜. . . .이 내재하게 되는 ‘주입된’ 의가 참회하는 신자로 하여금 칭의를 얻는 공로적인 토대를 이룬다. . . .카톨릭 교회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임명된 사제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일곱 가지의 성사(聖事)를 통해 나누어지는 은혜로 표방된 방대한 성례의식 중시주의의 종교 체계이다. 이 체계에서는 성사(聖事)와 인간 사제들이. . .구원하는 은혜의 통로인 것이다.” (우드로우 위든, Adventist Review, 2000년 5월 25일호)

위에 인용구들에서 잘 표현돼 있는바 대로, 구원에 대한 다음의 몇가지 분명한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들을 우리는 여기서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주입 (infused) 된다는 가르침. 주입이란 피의 수혈때 일어나는 그러한 사건을 뜻한다. 이것은 마치 다른 한 사람의 피가 내 혈관 속으로 투입되어 두 피들이 하나로 섞여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되는 상태와 같다. 이처럼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 속에 주입시킴으로 그 하나님의 의가 우리와 분리될 수 없게 되고, 그럼으로 해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일부가 된) 이 주입된 의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며 선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분과 연결돼 있는 한 매 순간마다 그의 능력과 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심을 뜻하는 ‘나누어 주는 의’ (imparted righteousness) 가 아니다. 나누어 주는 의 (imparted righteousness)의 개념에 의하면,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게 되면 의의 연결이 끊어져 우리에게는 도무지 어떠한 의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우리에게는 우리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자생하는 내부적 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사(聖事)를 통해서만 신자들이 의를 주입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 이것이 카톨릭 교회 복음관의 결정적인 핵심이다. 그리스도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 굴복함으로서 그의 의로움과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제들에 의해 베풀어지는 성례의식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성례의식들이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의를 신자에게 전해 준다는 것이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입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납될 수 있는 공로 (merit)를 가지게 되었고 이 주입된 의를 가지고 행한 우리의 선한 행실들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공로가 된다고 캐톨릭 복음관은 가르치고 있다.

구원은 사제직에 의해 베풀어지는 교회의 중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가르침. 이 가르침에 의하면, 신자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감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실질적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인 것이다. 이 교리는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에 대한 것이 아니며,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가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이해에 촛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카톨릭의 가르침이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칭의로 인도한다는 이해를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선포되기 전에 새롭게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는 이해가 그 중심점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복음관은 무엇보다도 교회와 성사(聖事) 그리고 사제의 중요성에 촛점을 두며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러면 이제 이 논문의 서두에서 인용된 퀴즈로 돌아가 보자. 개신교적이고 성서적이라고 주장된 입장들이 사실적으로는 복음주의파의 입장이고, 카톨릭 교회의 입장으로 제시된 것들이 사실은 원래 개신교적이고 성서적 입장임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실제적인 카톨릭 교회의 구원론은 이 퀴즈에서 인용된 질문들과는 아주 동떨어진 입장임을 또한 깨닫게 되었다 (원문의 퀴즈에 개신교와 카톨릭 교회의 신조들에 대해 올바르게 구별 짓는 일부 질문들이 포함돼 있지만, 이 논문에 인용된 질문들이 우리의 연구 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왜 이 모든 것들에 주의를 기우릴 필요가 있는가? 그 이유는, 만약 성서적인 복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기 전에 중생함을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실제적으로 의롭게 만드는 내적인 경험에 대한 것이라면, 이 신학자들이 이러한 성서적인 가르침을 카톨릭 교회의 복음관으로 오도하면서 그러한 이해를 버리라고 우리에게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톨릭적인 복음이라는 명명 하에 우리가 이 성서적인 복음관에 적대감을 가지도록 유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성서적인 복음이라는 명명 하에 실제적으로는 [칼뱅주의적인] 복음주의파의 복음(evangelical gospel)인 그 어떤 다른 복음을 우리가 믿도록 종용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러한 술책은 아주 교활한 속임수인데, 성경에 나타난 참된 복음을 분명히 해롭고 오류적인 카톨릭 교회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연관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 중 한 입장이 아주 분명히 위험하다는 근거로 두 입장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이들은 명하고 있다. 내적인 칭의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기 전에 성령께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다는 입장이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는 주입된 의로움, 성사(聖事), 신자의 공로 및 면죄와 동일한 것이라고 이 신학자들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주의 깊고 교묘하게 작성된 기사들과 정답을 유출하기 어렵게 만든 한 퀴즈를 이용하여, 이들은 우리로 하여금 성서적인 복음관을 버리고 복음주의파의 복음관 (evangelical gospel)을 채택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파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칭의는 용서한다는 단순한 법적인 선언만을 의미하고 실제적인 마음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데 (이들은 이 마음의 변화를 성화에 포함시키는 동시에 이 성화가 이 생애 중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고 믿음), 따라서 이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는 믿는 자가 어느 정도 계속적으로 짓는 죄들을 덮어주게 된다. 사실, 이들 복음주의파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본성을 가진 죽을 수밖에 없는 육체를 소유한 우리 인간이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택하신 자들”이 어떻게 미혹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곤 했다. 우리 재림 기별이 너무나 명확하고 견고한 성서적인 근거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 그 기별을 가진 이들이 미혹됨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우리는 믿었었다. 그런데 지난 20여년 동안 각종 오류적인 교리의 풍조들이 우리 주위를 휩싸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이러한 오류의 풍조들이 우리 교회의 여러 계층에 침투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예전에 오류로 취급되어 거절되었던 입장들이 일부에서 주류적 사조로 인정되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제 이들은 구원에 관한 정통적 재림신앙의 가르침들이 실은 위험한 카톨릭적 사조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지난 70년대에 포드, 브린스미드 및 팩스턴이 주창한 복음관이 참된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당시 우리가 그것들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기에 이제라도 분명히 수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참으로 이 기만의 풍조들이 아주 유혹적이어서 오늘날의 “택하신 자들” 까지도 쉽게 그것에 휩쓸려 갈만 하다.

최종 결론

필자는 오늘날 재림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평한 한 교육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연구 논문을 종결짓고 싶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에 관한 한, 오직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흐름만이 있을 뿐이다. 한편에는 요한 계시록 14:7에서 설명된 영원한 복음의 참된 사조의 흐름이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는 복음주의파 복음관의 신전에 안치되어 있는 사조의 흐름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사조는 모두 절대적으로 완벽하며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개념들이다. 하지만 화잇 부인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출발한 후 그런 다음에는 그것을 입증하고자 모든 일을 유도하는데 바로 복음주의파 개신교가 이런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잘못된 개념들이 침례교단, 그리스도 교단과 다른 좀 더 보수적인 그룹들 속으로 침투되었으며, 이제는 놀랍게도 이런 것들이 재림 교회안으로도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이교적이고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주의적이며 카톨릭적이고, 복음주의파 개혁주의로 범벅이 된 개념들을 재림 신앙과 접목하려 한다면, 우리는 재림 신앙의 황무지에 처하고 만다. 한 쪽의 일부와 다른 쪽의 일부를 동시에 채택하는 그 곳에는 일관성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글래시어 뷰에서 우리의 지도자 형제들이 포드의 종말론적 해석을 옳지 않다고 거부하면서 동시에 그의 구원론적인 개념들에 대해 동일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다. 포드의 주장이 이 두 가지 부분에서 모두 옳던지 아니면 모두 틀린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당시 글래시어 뷰의 회의를 주관하던 이들이 이러한 국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여 포드의 (하늘 성소와 심판에 관련된) 종말론과 구원론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코 우리는 영원한 복음의 일부와 복음주의파 복음의 일부를 동시에 채택하면서 안전을 기할 수 없다. 이런 경우 항상 결국 오류가 이기기 때문이다. 오류와 진리가 복합될 때 오류가 종국에는 승리자가 되고 만다.

오늘날의 많은 재림 교회 목사들이 영원한 복음과 복음주의파 개신교회의 복음을 뒤섞은 잡종 신학 체계의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 예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을 가지고 성육신했다고 믿으며, 유아 세례를 거부하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가능성을 믿는 목사들이 있다. 이러한 교리들은 모두 복음주의파 개신교의 개념과 상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목사들이 복음주의파 교도들의 교리에 부합된 설교들을 하는데, 칭의만 요구되는 구원을 강조하고 우리의 죄가 하나님으로 부터 우리를 분리시키지 않는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사들이 그들이 가진 복음주의파 교리들을 영원한 복음의 일부와 혼합하려고 시도할 때, 그들은 내부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복음을 제시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복음을 함께 소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이 이러한 부조리들을 구별할 충분한 지식이 부족하기에, 서로 상반된 이해를 가진 교인들이 이러한 목사들의 설교에서 그들이 믿고자 하는 대로 골라잡아 받아들이며 이 설교들이 제시하는 복음이 아름답다고 찬사를 보내는 형편이다.

우리 재림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함에 게을리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제시되어지는 설교나 서적들 속에 함유돼 있는 내적 모순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더욱 더 상실하게 되고 말 것이다. (Colin Standish, Our Firm Foundation, 1996년 11월호)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에 내재한 모순들을 인식하지 못할 때, 행습에 내재한 모순들도 자연히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교리에 대한 우리의 혼란이 예배 형식, 교회 성장 방법, 음악, 오락, 교회 표준 등등에 대한 혼란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아마도 에베소서 4:13-15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훈계가 이 연구 논문이 내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결론과 권유가 될듯 하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에베소서 4:13-15)

각 주

[1] 역자주:  1979-1980년 기간을 말함.

[2] 역자주: 여기서 “개혁주의적”이란 용어는 종교 개혁을 승계했다는 일반 개신교적 이라는 의미. 주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중요성을 경시하며 하나님의 주권성 (Sovereignty of God) 을 강조하는 칼뱅주의 사조에 속한 신학적 경향을 지칭함.


데니스 프리비(DENNIS PRIEBE) 목사는 50년 동안 목사, 교사, 그리고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11년 동안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후, 30년 이상을 어메이징 팩트 선교 기관의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