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서는 2019년 3월 22-23일 새크래멘토 중앙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개최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완전주의 신학 평가」라는 서적에 대한 비평 내용이다. 한글 자막이 첨부된 심포지엄 동영상을 시청하시려면 이 문서 아래에 있는 영상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원문 출처: “New Books, Old Error” ]

역자: 김정대 (Justin Kim)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완전주의 신학 평가」 서적에 대한 비평

서 문

지난 20년 동안 재림교회의 기관 출판사들은 마지막 세대 신학 (Last Generation Theology 혹은 LGT)에 대해 다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018년에 다음과 같은 몇 권의 새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지리 모스칼라, 존 페컴 편) [1]
  •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 (조지 나이트 저)
  • 구원: 재림교회 구원론의 윤곽 (마틴 해나, 다리우스 얀키에비치, 존 리브 편)
  • 겸손한 마음으로: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반기 (라인더 브루인스마 저)

나무들이 종이로 제조되어 이러한 책들이 존재할 수 있게된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내용들이 담긴 이 책들 모두에 대해 우리의 시간을 다 소진할 수는 없기에, 이 중 첫 번째 책이 담고 있는 주장들에 대해 답변을 해보려 합니다. 조지 나이트의 책과 함께 이 책들이 북미지회 소속의 많은 목회자들에게 배포되었는데,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가 담고 있는 주장들은 이견(異見)과 왜곡(歪曲)이라는 두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리뷰하기 전에 우리 한번 재확인해 봅시다. 여러분이 지닌 예리한 분별력의 안경을 쓰고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까요?

[1] 역자주: 한국연합회 성경연구소는 이 책을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완전주의 신학평가」라는 주관적인 부제를 첨부해 번역하여 출판했음.

나이트-위 (Knight-Whidden) 논조

우리 목회자들과 교사들은 교단의 학교들에서 수료받는데, 그런 과정에서 재림교회 역사에 대한 필수 정독 서적들을 배정받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재림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특히 조지 나이트(George Knight)와 우드로우 위든(Woodrow Whidden)이나 그들의 관점에 동조하는 이들의 저술들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1957년  「교리에 대한 질문(QOD)」 출판부터 1980년 데스몬드 포드가 해임되기까지의 기간에 변경된 신학적 지형이 꼴지어졌는데, 예수님, 순종, 죄의 극복, 은혜 시기의 마침, 인침과 같은 전형적인 재림신앙의 이해는 이 새로운 신학적 기류에 잘 어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서 나이트-위든의 논조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나이트-위든의 논조는 복음주의 교파들[2] 주장에 좀 더 근접한 수정된 구원론의 이해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들의 논조는 존스(AT Jones), 와그너(EJ Waggoner), 앤드리어슨(ML Andreasen), 심지어 엘렌 화잇을 포함한 주요 재림교회 인사들의 가르침을 갱신된 설명이 필요한 대상으로 삼아 왔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책 출간, 기사, 강의실 및 집회 강론들을 통해 이 나이트-위든의  논조는 스스로를 재림 교회내에서 제도적인 자기 이해로 구축해 왔습니다.

조지 나이트는 그의 책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에서 두 가지 인사들의 리스트를 제시하는데, 엔드리어슨의 지지자로 다음과 같은 인사들의 명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79페이지) [3] :   

허버트 더글러스 (Herbert Douglass)
콜린 스탠디시 (Colin Standish)
러셀 스탠디시 (Russel Standish)
데니스 프리비 (Dennis Priebe)
래리 커크패트릭 (Larry Kirkpatrick)

그리고 다음 리스트는 위의 인사들에 대한 “반응자”로 조지 나이트가 명시한 다른 견해를 대중화한 사람들의 명단입니다 (82-86 페이지):

에드워드 헤펜스톨 (Edward Heppenstall)
데스몬드 포드 (Desmond Ford)
모리스 벤덴 (Morris Venden)
한스 라론델 (Hans K. LaRondelle)
조지 나이트 (George Knight)
우드로우 위든 (Woodrow Whodden II)

[2] 역자주: 재림교인들이 일반 개신교회로 부르는 칼뱅의 구원론을 견지하는 기존의 개신교파들을 지칭함
[3] 역자주: 이 문서에 표기된 페이지 번호는 별도의 언급이 없으면 영문 책자의 페이지를 지칭함.

네, 여러분들이 바로 보셨습니다. 조지 나이트는 여기서 데스몬드 포드가 이 목록에 포함된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나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포드와 헤펜스톨이 공통적으로 의견일치를 본 한 분야는 구원론이었다. 여기서 포드는 자주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포드는 신약에 나타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만 국한되며 성화는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을 조명함으로 교단에 공헌을 했다.”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 84페이지).

이 주장에 내포된 의미의 중대성을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나이트는 자신과 포드의 구원에 관한 신학적 입장을 이 점에서 재림교회가 오랫동안 견지해 왔던 신학적 입장과 대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나이트-위든 논조를 펼치는 저자들이 존스, 와그너와 앤드리어슨 등의 인사들을 일종의 악당으로 제시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우며, 재림교회의 역사에 대한 이 새로운 이해가 지난 40여년에 걸쳐 대중화되었습니다. 이 새로 출판된 책들에 포함된 모든 자료들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역사적 사건들의 중요한 국면에 대한 이해로 이 나이트-위든의 논조는 무분별하게 교회의 독서가 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북미주의 주요 출판사들이 재림신앙의 기별과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적대적인 논조를 견지한 책들인,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와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라는 책들을 2018년에 발간하는 시점까지 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재림교회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다운받을 수 있는 자료들을 정리해 준비했습니다.  론 더필드 (Ron Duffield)가 재림교회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취급한 두 권의 특별한 책을 저술했는데, 「늦은비의 재현 (The Return of the Latter Rain, vol. 1)」과 「친구들의 집에서 입은 상처 (Wounded in the House of His Friends)」가 바로 그 책들입니다. 다운받을 수 있도록 준비한 자료는 더필드의 책에서 조명한 나이트, 위든과 그 밖의 다른 인사들이 범한 재림교회 역사에 대한 사실의 왜곡과 허위 진술들을 명시한 각주와 페이지들을 열거한 자료입니다. 이 자료가 나이트-위든 논조를 지탱하는 역사가들에 의해 제시되어온 착오점들을 교정할 수 있는 한 출발점이 되었으면 하고, 론 더필드(Ron Duffield)와 데이브 피들러 (Dave Fiedler)의 서적들이 그 필요한 교정을 위한 긴 여정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문서: 나이트-위든 논조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기초 자료 문서 (부록 A 참조)

일반적 관찰

자 이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대한 세 가지 일반적인 관찰부터 시작해 봅시다.

먼저 이 책은 저자들의 주관적인 의견으로 점철된 서적으로서, 종종 “~처럼 보인다”,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일수도 있다”는 서술로 아이디어를 서로 연결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열거된 이러한 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 . 그렇다면 인간은 완벽하게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 .  (17페이지)
  • . . . 이는 인간의 행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 . (18페이지)
  • . . . 일부 LGT 옹호자들은 죄를 단순한 행동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 . (20페이지)
  • . . . 그는 그런 사람들의 선구자인 것처럼 보인다. . . (24페이지)
  • . . . 어빙(Irving)은 그리스도의 타락 후 인성론에 있어 와그너와 존스 신학의 주요 원천으로 보인다. (24-25페이지)
  • . . . 라는 결론을 내림이 안전할 것처럼 보인다. . . (25페이지)
  • . . . 우리는 아마도 이 질문에 결코 답할 수 없을 것 같다. . . (25페이지)
  • . . . 어빙(Irving)이 기여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인 것처럼 보인다. . . (26페이지)
  • . . . 모든 것이 . . .에 달려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 . (28 페이지)
  • . . .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 . 명확한 증거가 없다. . . 어떻게 됐든. . . 그것은 분명하다. . . (31 페이지)
  • . . . 앤드리어슨이 와그너에 의해 저술되고 출판된 기사와 서적들을 읽었을 수도 있었다. (34 페이지)
  • . . . 그것 또한 그럴 수도 있다. . . (34 페이지)
  • . . . 따라서 그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주 적절해 보인다. . . (34 페이지)
  • . . . 앤드리어슨과 와그너 저술 사이에 완전하고 직접적인 문학적 의존성이 있다고 추론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가진 개념적 유사성이 너무나 현저하여 서로간에 어떤 종류의 영향력의 연결고리가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 . (35 페이지)
  • . . . 그것들은 . . .을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 . (37 페이지)
  • . . . 그러한 논증은 인간의 순종이 그리스도의 충분한 순종에 무엇인가를 더한다는 것을 암암리에 제시한다. . . (114 페이지).
  • . . . 이러한 태도는 쉽게 율법주의와 완전주의로 이어진다. . . (117 페이지)
  • . . . 글의 의도를 그들이 교묘히 왜곡함은 지지할 수 없다. . . (195 페이지)
  • . . . LGT 옹호자들이 제시하는 마지막 세대의 활동은 자기 중심적인 것처럼 보인다. . . (203 페이지)
  • . . . 그것은 위대한 일을 성취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해내려는 자기 중심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시도이다. (206 페이지)
  • . . . LGT는 죄를 단순한 행동으로 줄이는 경향이 있다. . . (272 페이지)
  • . . . 이를 통해 LGT는 최소한 인간이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 . (272 페이지)
  • . . . 이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으로 보인다. . . (272 페이지)
  • . . . 혼동하고 심지어 혼합하는 경향이 있다. . . (272페이지)
  • . . .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 . (273 페이지)

두 번째로, 이 책은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그릇된 묘사와 인위적으로 합성된 횡설수설, 그리고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으로 가득차 있습니다.[4] 예를 들어,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다음과 같이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해 최소한의 정의를 부여하는 인위적 합성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재림교인들은 소위 마지막 세대 신학(Last Generation Theology, 약어로 LGT)이라고 알려진 내용에 동의한다. 다음 장에서는 이 마지 막 세대 신학에 관한 역사적 및 신학적 개요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선 단지 이 신학에 대해, 하나님의 성품을 옹호할 근거를 제공하여 대쟁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절대적으로 죄 없이 “완전하게’’ 되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가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로 조심스럽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지막 세대 신학은 사탄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역 외에 추가적인 구속의 단계가 필요 하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죄를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옹호할 근거를 마련해 주고 대쟁투에서 승자를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될 완전히 죄가 없는 마지막 세대의 인간들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탄은 십자가에서 패배하지 않은 셈이 된다. 사탄이 패배하기 위해서는 일단의 사람들이 완전하게 죄 없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 번역본 20페이지)

이 문장에 포함된 거의 모든 부분이 허위 진술입니다! 지구상에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관점을 허위적으로 묘사하고 제시한 후에 쉽게 해체하려는 시도이겠지요?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나타난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한 불공정한 묘사의 또 다른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은 “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하지만, 그 희생은 완전한 충분성과 공로를 가진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묘하게도, 마지막 세대 신학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불충분하며 구원을경험하는 데 자신의 순종이라는 가치를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순종은 틀림없이 공로인 것이다.” [5]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 번역본 158-159페이지)

[4] 역자주: 허수아비 때리기 논법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곡해하여 그와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허수아비’를 세우고 그것을 공격하는 논법. 공정하고 윤리적인 토론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5] 역자주: 마지막 세대 신학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진실로 영접하고 굴복한 신자에게 그 분의 영이 들어와 신자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주제한다고 가르치며, 그 결과로 신자가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빌립보서 2:12-13: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그 곳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에도 더욱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이러한 순종은 그리스도의 영이 전적으로 신자 안에서 행하신 것이기에 그 신자의 공로로 여겨질 수 없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이러한 성서적인 순종의 가르침을 죄인이  스스로의 힘에 의존해 이루려는 율법주의적인 순종이라는 허수아비로 대체한 후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면 이 저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는 분명한 성경말씀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죽은 믿음은 구원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서 이 저자는 제가 쓴 「정결과 종결 (Cleanse and Close)」에 대해 논평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실제로 기술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거듭나게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지킬 수 없다.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간절히 우리에게 당신의 능력을 부여하고자, 재창조하고자 하시는지 아는가? 그분은 우리를 찾고 계시며 우리를 믿음의 통로로 만들길 바라신다! 그분은 율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믿음이나 순종도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구원하지 않지만, 또한 믿음의 순종이 없이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순종하는 믿음 없이는 진정한 기독교는 불가능하다. . . . 내 구원을 향한 모든 공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온다. 그의 공로는 [나를] 구원하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두 부분으로 구성된 계획의 객관적인 한 부분이다. 나의 순종 또한 필요하다. 그 순종 자체로서는 나를 구원하기에 부족하다. 그것은 구원을 이루는 공로가 되지 못하는 한 조건, 필요하지만 불충분한 조건이다.” [6] (래리 커크패트릭, 「정결과 종결」, 65-66페이지)

[6] 역자주: 이러한 입장은 성경말씀 및 엘렌 화잇의 글과 부합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아무도 구원에 조건이 없다는 말을 하지말라. 확실한 조건들이 있다. . . . 우리를 파멸로부터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슴을 내어주신 그분께서 규정하신 조건들을 우리의 영혼을 걸고 알아야 한다.” (MR, vol. 13, p. 22); “순종은 영생의 첫번째 대가이다.” (1888 Materials 1477); 그분의 의는 순종하는 자에게만 나누어 주신다.” (6BC 1072) “절대적인 순종이 구원의 조건이다.” (ST 11-15-1899);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약속된 영생에 대한 조건은 분명하다. . . . 내 계명을 지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 조건이다.” (4RH 331);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파되어야 하는 복음은 진리를 명확하게 제시하여 영생을 구하는 조건이 순종임을 보여줘야 한다” (7BC 972); “계명의 요구에 대한 완전한 순종에 의해서 인간은 의롭다함을 입는데, 오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그러한 순종이 가능하다” (IHP 146);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조건적이다. . . . 우리가 진지하게 순종하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탄원을 들으실 것이다; 그러나 불순종 가운데 있는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을 것이다.” (ST 6-16-1890)

세 번째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대부분은 그들이 공격하는 명시된 동시대 LGT 저자들의 구체적인 진술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총 936개의 각주가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데, 14개의 장 중 9개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LGT 출처 문서를 그 어디에서도 언급조차 않고 있습니다. 각 장들의 말미에 첨부된 주석의 절반은 LGT 출처 문서보다 조지 나이트나 우드로우 위든을 훨씬 더 자주 인용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비판

이제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하여 가해진 비판들의 구체적인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해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들이 퍼붓고 있는 6가지 공격 포인트를 요약한 유인물을 받았습니다. 그 요약문에는 4개의 칼럼이 있는데 첫째 칼럼은 이 책의 저자들이 가한 비판의 범주를 분류한 것이고, 둘째 칼럼은 이들의 비판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며, 셋째 칼럼은 이 책의 저자들과 조지 나이트의 글에서 인용한 그들의 주장과 참고 문헌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넷째 칼럼은 이에 반해 마지막 세대 신학의 관점을 보다 정확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문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있는 마지막 세대 신학 비판 내용 분석 도표 (부록 B 참조)

그러면 이제 이들이 던지는 6가지 공격 포인트에 대해 논평해 봅시다.

인간에 의존한다?

마지막 세대 신학(LGT)이 하나님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든다는 비난부터 검토해 봅시다. 몇 년 전 「정체성의 추구 (A Search for Identity)」라는 책에서 조지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역자주: 이 책은 한국에서 「재림교회 신앙의 정체성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바 있음) :

“앤드리어슨의 마지막 세대 신학은. . . 하나님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칭의와 최종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재림 교회에 의존하게 만든다.” (조지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152페이지)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조지 나이트가 주장했던 대부분의 다른 비판 내용들과 더불어 이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선, 그 신학은 대쟁투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한낱 피조물들의 충실함에 의존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와 활동이 대쟁투에서 승리를 거두기에 충분하지 않아서 인간의 활동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 번역본 20페이지) [7]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타락한 인성, 죄에 대한 승리, 중생을 포함하는 칭의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들이 인간 중심적이라고 여기길 바라고 있는데, 한마디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한 나이트의 이견을 재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7] 역자주: 조지 나이트나 존 페컴과 같은 신학자들의 이런 주장을 보면서, 이 사람들은 이 주제에 대한 성경의 진술과 엘렌 화잇의 기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하나님 품성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옹호된 사실과 마지막 세대가 그리스도의 품성을 완전히 반영하여 그 옹호에 실중적으로 참여한다는 주장은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12절은 용(사탄)에 대해 승리를 거두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면서 그와 동시에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사탄을 이긴 마지막 세대의 형제들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승리에 기반을 둔 이들의 승리로 인해 사탄이 패배됨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11절의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는 언급은 이 마지막 세대가 하나님의 품성(사랑)을 옹호하기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계 5:12) 그리스도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여 하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계시록에서 요한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승리에서 그를 죽기까지 따르는 마지막 세대의 승리로 그 어떤 주저함 없이 옮겨가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죽기까지 따른 마지막 세대의 이런 이차적인 승리가 그리스도와 사탄사이의 대쟁투에서 하나님 품성의 옹호에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지지하는 엘렌 화잇의 증언은 많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예언의 신 말씀들을 참조하면서 신실한 재림성도들은 신학자들의 무모한 주장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역자는 생각한다: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의의 원칙을 순종할 때 이르러 올 결과를 보여줌으로써 사단의 참소를 반박하고자 하신다.” (실물교훈 296)

"바로 우리 앞에는, 사단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살후 2:9, 10)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막 13:22)하는 대쟁투의 마지막 싸움이 놓여 있다. 만일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증가되는 빛이 필요한 한 백성이 지금껏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율법의 보관자가 되고 당신의 품성을 세상 앞에서 옹호하도록 부르신 백성이다. 그처럼 거룩한 위탁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믿노라고 공언하는 진리들을 통하여 신령해지고, 고귀해지고, 생기로워져야 한다." (교회증언 5권 74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계명을 존중함으로써 당신의 명예를 옹호하는 한 백성을 이 땅 위에 두실 것이다. 그분의 계명들은 가혹한 것이 아니며 속박의 멍에가 아니다." (믿음과 행함 42)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첫째가는 구별된 백성, 한 교회를 갖고 계신다. 그들은 진리를 가르치고 하나님의 율법을 옹호하는 일에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신성하게 임명하신 대리인들을 갖고 계신다. 그 인물들을 하나님께서는 인도하시며, . . . 모든 사람이 이 선택된 대리인들과 연합하여 마침내 성도의 인내를 가진 이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 그리고 예수의 믿음을 가진 이들 속에서 발견되는 인물이 되도록 하자."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58)

"그리스도의 명예는 그 분의 선택된 백성들의 품성이 완전해 짐으로 완전무결되어야 한다." ("고별사", 영문시조 1897-11-25)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그분의 품성을 옹호하여야 한다. 그대는 지켜주시는 은혜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주님을 확연히 드러낼 수 있다." ("주님을 찬양하라", 바이블 에코 1888-1-1)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곧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시대의 소망 671)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시작하신 사업을 영광스러운 완전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 296)

“하늘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그들의 품성은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졌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각시대의 대쟁투 425)

그런데 이러한 비판을 한번 고려해 봅시다. 무한한 존재가 인간에게 의존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기 의무 때문입니다. 그분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며, 당신이 하신 약속/언약들에 항상 진실하십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실성이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딤후 2:13,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자신의 행동 방침을 제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데, 그것은 그분이 소유한 신성한 주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그분이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으시고자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자신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자유를 가지고 계시며, 분명히 당신 백성의 역사를 통틀어 그분은 자주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사심이 없으며, 따라서 죄와 이기심에 변함없이 반대하십니다. 그분은 조건을 정하시고 그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갈보리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사탄이 새로운 공격을 제기했을 때 (시대의 소망, 762-763페이지), 하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주장에 답을 하지않은 채로 남겨 둘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당신 율법의 타당성과 공정성, 그리고 신자들이 죄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당신의 권능이 가진 효력과 유용성에 대한 실증에 참여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처럼 진실하고 정직하며 나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욥 1:8, 현대인의 성경)고 사탄에게 물으셨을 때 그 분의 신성한 주권을 행사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시록 14:12)라고 선포하실  마지막 때에 그 분의 신성한 주권을 다시 행사하십니다.

욥은 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의 실증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발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신 한 사람 안에서 역사하신 하나님 은혜의 실증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발상이었습니다.

마지막 세대는 교회 신자 전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실증이 될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발상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에 충족되어야 할 조건을 자신에게 부과하기로 선택하시는데, 그분은 당신의 율법이 예수님을 위해 온전히 사는 한 무리에 의해 지켜질 수 있음을 실증하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구속받은 자들은 사탄의 세력과 악의를 보아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권세 외에는 어떤 능력도 그들을 승리자가 되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과거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깨닫는다. 그 빛나는 무리들 가운데는 마치 자기 자신의 능력과 선행으로 승리한 것처럼 구원을 자기 공로에 돌리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그들이 어떠한 일을 하고 어떤 고난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오직 모든 찬미의 내용과 모든 찬양의 주제는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다는 것이다.” (대쟁투, 665페이지)

하나님은 속죄를 주십니다. 신성하지 않은 인간은 속죄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분의 중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에게 맡겨졌다. . . . 우리가 필요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적과 손잡고 잘못된 편에 서게되면, 우리가 창조된 계획에 실패하고 만다고 생각만해도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영문 시조, 1903년 4월 22일자)

우리가 어떻게 필요되었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고, 그분의 무한한 성품을 유한하게 재현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우주에 반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거울을 파괴하고자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은 인간들에게 자유로운 선택권을 주어 우주를 확보하는 과제를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게 임무로 부과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왈과왈부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욥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그의 일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죄에 대한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가? (타락한 인간의 상태를 초월할 수 있는가?)

이 주제의 이슈는 간단히 말해 원죄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첫 번째 죄는 자발적인 것이었으나 그 후 그와 그의 자손은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 . 죄는 ‘행동 및 우리가 태어난 상태 (타고난 부패성)’로 인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의 결핍’이다.” (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번역본 71페이지) [8]

[8] 역자주: 여기에 기술된 “비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 혹은 ”죄는. . .우리가 태어난 상태 (타고난 부패성)로 인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응의 결핍”이라는 주장을 다음 예언의 신 말씀들과 대조해 보고 누구 말을 더 신뢰하고 받아들일지 각자가 선택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이 저자는 죄를 자기나름대로 원죄론적인 개념으로 다시 정의하고 있다:

“만일 사랑으로 역사하여 죄의 모든 오점으로부터 심령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목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영문 시조, 1887년 11월 24일)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저열한 욕정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신(flesh)’ 또는 ‘육신의(fleshly)’ 또는 ‘육신의 정욕들(carnal lusts)’이란 말은 그 저열하고 타락한 성격을 포함한다. 육신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 . .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해야 한다. 부패한 생각은 추방되어야 한다.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한다. 모든 동물적인 경향은 심령의 더욱 높은 능력 아래 복종되어야 한다.” (가정, 127)

"아무리 시험이 크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영혼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크다 할지라도 범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행위이다. 이 세상의 권세나 지옥의 권세라 할지라도 억지로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사단이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넘어질 필요는 없다. 아무리 공격이 맹렬하고 불시에 닥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도우시는 손길을 준비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부조, p. 421)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담의 타락된 본성을 타고 났기에, 우리가 지닌 본성적인 결함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잘못을 찾으려하며 자기들이 제공할 능력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와 동일한 불평을 하늘에서 사단이 하였는데,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영문 시조, 1892년 8월 29일)

"특별히 최초의 타락에 관한 설명을 포함해서, 수많은 성경절들은 죄란 도덕적 악이라는 것, 곧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범한 결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 (창 3:1-6, 롬 1:18-22). . . 죄의 정의.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기본 교리 28을 설명하는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89폐이지) 

그러나 성경 말씀은 분명합니다. 타락한 우리 인간들은 현 시대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예수님의 권능으로 초월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죄 문제는 가장 중요한 이슈입니다 (마태복음 1:21). 죄에 대한 승리가 부재한 기독교는 신약의 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절망적으로 읊조리고 있습니다:

“이 책의 앞 장에서 살펴보듯이, 만약 죄가 우리의 존재와 성품 자체의 감염을 포함한 단순한 행위 이상의 것이라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죄라는 이 속박하는 외적 세력에 의해 심각하게 강요당하는 상태에 있다 (참조 롬 6:6,12,13,16-18; 7:14,17-20).” (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번역본 424페이지)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자신의 이 암담한 견해를 부정하는 로마서 6:15와 같은 성경의 내용을 언급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로마서 6:15, 현대인의 성경)

더불어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장에서 중요한 성경절로 로마서 5장 16, 18, 19절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우리의 죄를 아담의 죄와 연관시키지만, 결코 그 죄의 책임이 무의식적으로 전수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와 우리의 죄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담의 죄가 연약함을 초래했다고 말합니다(로마서 5:6; 8:3). 그러나 또한 그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그리스도인에게 신성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 그로 하여금 이전에 있던 죄의 습관 패턴을 따를 필요가 없도록 만들어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2-13):

“형제 여러분, 우리가 빚진 사람들이지만 육신의 빚을 지고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지만 성령님을 통해 육적인 악한 행위를 죽이면 살 것입니다.” (로마서 8:12-13, 현대인의 성경)

아담의 죄가 일련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아담의 죄를 뒤따르는 죄들은 아담이 의도하여 범했던 죄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선택에 의해 범해진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연약함을 전수받지 않았을 겁니다. 그의 죄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더 나쁜 쪽으로 변질된 인간 본성을 물려받는데, 엘렌 화잇은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가 모든 사람의 일상 경험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악(性惡)인 것이다. 사람의 본성에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 곧 인간이 자신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인간이 이러한 힘에 대항하여 싸우며, 진심으로 유일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힘으로부터이다. 그 힘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은 이 힘과 더불어 협력하는 것이다.” (교육, 29페이지)

우리 각자에게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저항할 수 없는 “악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편향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성향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협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의도적이고, 고의적이며, 사전 계획된 선택을 통해 이 힘에 굴복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개입없이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파괴 할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각 사람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는 존재로서 죄를 범하면 자발적인 결정으로 반역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유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가장 가까운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예수님의 승리를 그들의 삶에 이루게 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는 성령을 통해 여러분에게 가능해 집니다. 그래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신 일을 효력 있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마음을 순결하게 만드신다. 성령을 통하여 신자는 거룩한 품성을 나누어 가지는 자가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에의 성향들을 이기며 당신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당신의 성령을 주셨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193페이지; 시대의 소망 671페이지)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롭게 만드실까요?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승리한 삶을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자동적으로 우리를 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아에게 충성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충성을 바칠 것인지 결정해야만 합니다. 「정로의 계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의 생각은 그에게 있을 것이요 그를 생각함이 우리의 가장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우리의 몸을 다 그에게 바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의 형상을 입고 그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의 뜻을 행하여 범사에 그를 기쁘시게 하기를 원할 것이다.” (정로의 계단, 58페이지)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인간은 죄를 짓도록 강요 당할 수 없으며 먼저 동의해야합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는 실제로 의로우시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됩니다. 우리가 자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첫 아담이 범한 것와 같은 종류의 죄를 우리 자신 안에서 재현하기로 선택하는 겁니다. 모든 죄는 실제적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우리는 옳은 일을 할 힘이 없지만 우리는 그분을 우리 마음에 초대하고 그로 인해 그분은 우리에게 내주하십니다. 그분의 임재는 실제적인 의로움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결코 그분의 실제적인 의로움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의는 실제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소유로 주장할 수 있는 의로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필요로하며 그 분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결코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새자녀 지도법」 475페이지에 있는 엘렌 화잇의 글,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에는 없다”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 번역본 71페이지). [9] 그러나 우리가 잠시 멈추고 그 주위 문장 전체를 검토해 본다면, 그녀는 여기서 자녀 양육의 어려움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현명한 자녀 양육을 통해 “사단의 능력이 깨어지고” 자녀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독자들에게 단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 책이 인용한 원고 발간 (Manuscript Releases) 9권 236페이지 전문을 직접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0]

성경은 믿는 자에게 죄에 대한 승리를 약속합니다. 유다서 1장 24절은 “여러분을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셔서 자기의 영광 앞에 흠 없이 큰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 (현대인의 성경)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서는 죄에 대한 실제적인 승리는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개정된 복음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9] 역자주: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이다. . .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는 새자녀 지도법 475 페이지 글을 인용했는데, 엘렌 화잇이 “자녀들의 유산은 죄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SIN)” 라고 하지 않고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이라고 언급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영문 사이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죄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죄에서 기인한 유산 혹은 죄의 결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엘렌 화잇은 물론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일부 사람들이 “원죄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아담에게서 죄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화잇 여사는 그녀의 생각을 표현함에 있어 그녀 나름대로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쓰는 체계가 있었다. 이 글은 원죄론적 죄의 개념을 견지한 이들의 주장을 대변해 주는 그런 종류의 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0] 역자주: Manuscript Releases, vol. 9, 236 - “우리가 아담에게서 받은 것과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 – 부모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다.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이다.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파괴된 고리를 연결시키기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와 사형 선고밖엔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실패한 곳에 들어오시고 인간을 대신하여 모든 시험을 견디셨다. 그분은 그 시련을 더럽혀짐 없이 통과하여 아담의 수치스러운 실패와 타락을 만회하였고 이로인해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유리한 위치에 서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그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연결되고, 사람이 그의 아들과 딸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도록 훈련시키는 일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본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 사탄의 능력이 깨어지는 것은 경계에 경계를 더하고 교훈에 교훈을 더하여 마음과 뜻을 그리스도께 바치는 방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침으로 되는 것이다.”

칭의는 의롭다는 사법적 선언 이상을 의미한다?

또 다른 논쟁은 칭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칭의는 엄밀히 말해 의롭다고 간주되는 사법적인 선언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견해는 루터의 사망 이후 변질된 루터교 신학 형태와 거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저자의 칭의 신학은 시종일관 루터교의 신학적 이해인데, 루터가 주장했듯이 시물 유스투스 에트 페카토르 (simul justus et peccator), 즉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한글 번역본 89, 115, 119, 129, 147페이지), “외부로부터 온 그리스도의 의”를 논하고 있고(한글 번역본 89, 122페이지), 우리가 “아담 안에서” 범죄했다고 표명하며(한글 번역본 102, 103, 121), 또 의롭게 간주된 우리 신분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눈에” [혹은 “하나님 앞에서”]만 그렇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한글 번역본 89페이지). 그는 심지어 칭의를 통해 하나님이 믿는자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생각은 로마 카톨릭의 견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본 92, 93, 98페이지). 그러나 초기 재림교회의 가르침과 엘렌 화잇의 저술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가 표방하는 루터교 신학과 일치하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루터에 대한 화이트의 가장 긍정적인 진술은 1520년대의 사건들을 언급했을 때 뿐입니다.

이 저자는 엘렌 화잇의 “타락한 통로” 진술을 인용 한 후 우리의 성화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한글 번역본129페이지), 그가 제일 좋아한다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본질”을 요약한 엘렌 화잇의 다음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 바 된다.” (정로의 계단, 62페이지)

정로의 계단 62페이지에 있는 이 진술은 모두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저자는 거기서 인용을 중단하는데, 우리는 [계속되는] 엘렌 화잇의 다음 진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을 변화시키신다.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마음 가운데 거하신다. 그대는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그대의 마음을 항상 그에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대가 이렇게 하는 동안에는 그는 그대의 원하고 행하는 것을 당신의 기쁘신 뜻대로 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 성령이시니라”(마 10:20)고 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대의 마음 가운데서 역사하시면 그대는 같은 정신을 나타낼 것이며 또한 같은 행실-의와 순종의 행실-을 행하게 될 것이다.” (정로의 계단, 62-63페이지)

엘렌 화잇의 관점에서 볼 때, 칭의에는 그리스도께서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법적 선포]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저자는 그의 주요 텍스트에 연속되는 화잇의 이 진술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렌 화잇 글의 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저자의 시도는 반복되는데, 이 저자는 화잇의 다음 글을 또 인용합니다:

“한 백성으로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해 잘못된 사상들을 받아들일 때의 위험이 나에게 반복해서 제시되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사단이 이 관점에 대하여 마음을 혼란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았다.” (믿음과 행함, 18페이지)

이 믿음과 행함 장에서 엘렌 화잇이 강조하는 핵심 포인트는 우리의 행위로 인해 구원의 공로를 이루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단순히 사법적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같은 장에서]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성전은 신성하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정결해야 한다.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것이 되고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에 있어서 협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는 일을 생각과 감정에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과 신령한 행동의 법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를 하나님과 함께 하는 동역자로 만든다. 그것은 인간을 신성과 연합시켜 그가 하나님의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간다. 인성은 인성과 접촉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힘이 결합될 때 완전한 성공이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것을 이루기 때문이다.” (믿음과 행함, 27페이지)

그리스도의 의가 모든 것을 이룹니다. 하나님과 함께 협력하는 것이 우리의 행위에 구원의 공로가 있음을 의미하는 바가 아닙니다. 하지만 엘런 화잇이 “이런 유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신성이 인성으로 들어와야 한다.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고후 6:16)” 라고 기술했는데, 이는 바로 변화됨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4장의 가장 실망스러운 특징 중 하나는 칭의에 관해 자신의 의견과 동의하지 않는 재림교인들은 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는 저자의 비난 입니다(한글 번역본 91-94페이지).

저자가 칭의에 관해 종교개혁 교권자들의 관점을 요약한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의 글을 인용하면서 (한글 번역본 91-92페이지), 맥그래스의 기념비적 서적인 「하나님의 칭의론」(Iustitia Dei)에 포함된 다음과 같은 날카로운 관찰을 간과한 것은 유김스러운 일입니다:

“1530년 후의 개혁파와 루터교회와 연루된 칭의의 교리에 대한 가장 정확한 서술은 그들의 이해가 “전가된 의”에 관해 바울이 역설한 개념을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 체계안에 정착시킨 극단적인 재해석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Alister E. McGrath, 「하나님의 칭의론」, 209).

맥그래스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울리히 쯔빙글리가 칭의를 정확하게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Alister E. McGrath, 「하나님의 칭의론」, 213). [11]

[11] 역자주: 칭의에 대한 루터와 칼뱅의 서술들:  “이 칭의의 활동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34권, 177페이지 [1536]);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에게로 이끄시며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 . 따라서 이것을 가리켜 로마서 5장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라고 했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32권, 235-236페이지 [1521]); “따라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붙잡고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거하시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인데, 이로 인해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며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129-130페이지 [1535]); “그러나 칭의란 그리스도와 내가 아주 밀접한 관계 속에 있어서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 . 믿음의 개념이 올바로 전수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 믿음에 의해 당신이 그리스도와 굳게 접합되어 그와 당신이 한 개체로 됨으로서 도무지 분리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 . 이러한 믿음은 그리스도와 나를 남편이 아내와 결합되는 것보다 더 밀접히 결합한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167-168페이지 [1535]); “그러면 무엇이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는가?. . . 성령이 바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준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6권, 208페이지 [1535]); “이러한 믿음은 당신을 의롭다고 칭해주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 속에 머물러 사시며 군림하시게 한다.” (Luther’s Works, Concodia Publishing House, Saint Louis, 1963, 27권, 235-172페이지 [1519]) “우리를 의롭다고 칭함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근본적인 결합을 이루어 우리의 속성이 되며, . .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의 진수가 우리 속으로 진입된다” (Calvin, Institutes of Christian Religion, Eerdmans Publishing Co., Grand Rapids, 1975, 3권 11항, #5).

그리고 “나중의 개신교에서 주장하는 ‘칭의와 성화의 구별’을 루터가 하지 않았다. . .” (위의책 227)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맥그래스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본질적으로 칭의에 대한 이 후 종교개혁 교리의 두드러진 특징은 칭의와 중생간에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구별” (위의책 217) 이기에 그러합니다.

즉, 기독교의 첫 천년 반 동안, 칭의는 중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루터의 가장 활동적인 시기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칭의를 성화와 분리되는 것으로, 단지 의롭다고 간주하는 사법적인 선포라는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언급되게 되었지요. 멜랑히톤(Melancthon)에서 켐니츠(Chemnitz)의 활동 기간에 이르러서야 중생은 칭의와는 별개의 것이고, 인간적이며 영원히 부족하다는 가르침이 통상적으로 전해졌습니다. 따라서 칭의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구원에 무엇이 포함되는지 않은지에 대해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절대적인 완전을 이루어야 하는가?

이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담긴 다른 공격 포인트로 넘어가봅시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따르면, 나와 다른 사람들은 구원 받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절대적인 완전”을 이루어야 하며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으로 그 상태를 달성하여 우리가 “더 이상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까지 영적으로 도달해야 함을 주장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다음과 같이 우리의 견해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세대 신학은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옹호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죄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표방하는 것이다. 완전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이 완전하게 “성화되”고, 그래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필요하지 않을 때 영광화 직전의 단계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 . 만약 그들이 “중보자 없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영광화에 이르기 직전에 그들이 죄를 완전히 극복했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더 이상 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한글 번역본 21,24페이지)

이러한 근거없는 주장은 수년 전에 조지 나이트가 한 다음의 주장과 같은 맥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앤드리어슨]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업적에 근거하여 중재자없이 설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필요로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조지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151페이지)

나이트는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에서도 이 근거없는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데 (31 페이지), 이 새로운 책들도 [이 주장에] 비누칠과 헹구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우리가 절대적인 완전에 도달해야한다고 가르친 적이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는 절망적으로 잃어버린 바됨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안에서 의로움에 구하고 도달할 수 없고, 영원토록 더 이상 그리스도가 필요하지 않은 위치에 이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 공기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우리는 영적 삶을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12]

[12] 역자주: 마지막 세대 신학의 관점과 일치한 대총회장들의 글과 설교문을 우리가 참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마지막 세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 그들은 그분이 이기신 것처럼 이겨낼 것이며, 주님의 승리하는 살아있는 표본이 될 것이다. 이러한 삶과 성품을 이루도록 가능케 하는 권능은 예수님으로부터 온다. 오직 그분의 입혀주시고 전해주시는 의를 통해서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고 로버트 피어슨 16대 대총회장, on the back cover of W.D. Frazee, Ransom and Reunion Through the Sanctuary – Wildwood, GA: Pioneers Memorial, 1994; We Still Believe – Washington, D.C: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n, 1975, p. 243)

“이 지구상에서의 시간은 짧습니다. 은혜의 시기가 곧 마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고 죄를 버림으로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어 만날 준비를 지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각시대의 대쟁투」 425페이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늘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그들의 품성은 피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졌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인용문을 잘못 해석하여 예수님이 필요없이 여러분 스스로의 공로로 구원을 이룰 것이라고 한순간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에 의해서만 영생을 얻게됨을 믿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시기가 마칠 때, 중보자의 사역은 끝이 납니다. 여러분의 성품은 정해지고 여러분의 운명은 영원히 결정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 성경연구와 그리스도와 기도로 연결됨을 통해 부흥되고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칭의와 성화를 통해 모든것을 아우르는 그분의 의를 매일 받아야 합니다. 그분의 권능을 통해 우리는 점점 더 그분을 닮게 됩니다.” (테드 윌슨 현 대총회장의 설교, “Message, and Mission and Their Attempted Neutralization by the Devil”, October, 12, 2014 during the Annual Council)

조지 나이트와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를 쓴 그의 동료/제자들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베푸신 십자가 은혜의 두 가지 기능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는 용서함이 제공된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필요하다. 십자가의 은혜로 가능해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권능만이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로부터 구원하는”(마태 1:21) 복음이다. 따라서 용서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를 사해 주시는 역할과 더불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가 계속 절실히 필요하다. 이 점에 관해 포괄적인 이해를 담은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들에 대해서는 본 사이트에 있는 「구원을 위한 십자가 은혜의 두가지 기능」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새로운 형태의 책들이 “절대적 완전(absolute perfection)”, “절대적으로 죄 없음(absolute sinlessness)”, “완벽하게 죄가 없는(perfectly sinless)”, “죄 없이 완전한(sinlessly perfect)” 그리고 “죄 없는 완전(sinless perfection)”이란 문구들을 마치 우리가 주장한 것처럼 우리 입에다 틀어 넣고 있을까요?

저는 이 문구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데니스 프리비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허버트 더글러스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M. L. 앤드리어슨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A. T. 존스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E. J. 와그너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엘렌 G. 화잇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어느 누구도 그것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들이 마치 마지막 세대 신학(LGT)의 신학적 관점을 대표하는 양 제시되고 있는데, 그러한 문구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서 69회,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에서 18회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이 문제를 다루는 우리 쪽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이 이런 문구들 중 일부를 사용하는 걸로 압니다. 그렇지만 한 개인의 경솔한 문구 사용을 근거로 전체 그룹에 먹물을 뿌리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습니까?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두 책에서 발견된 자료의 저자들에 따르면, 마지막 세대 신학(LGT)을 믿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완전하게 죄가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절대적으로 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그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우리와 똑같이 되셔야 했다고 주장한다. . .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우리와 같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 한글 번역본23페이지)

반복하지만, 이 주장의 문제점은 마지막 세대 신학(LGT)이 가르치는 바를 공정하거나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부연 설명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많은 측면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영원하시며 인간으로서의 체험 이전에 이미 존재하셨다 (요 1:1-3; 8:58)
  • 그분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 (히브리 7:26)
  • 그분의 성품은 공로가 있는 순종의 삶으로 모든 인류를 구속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 (롬 5:10-11)
  • 그분은 인간의 육체로 죄를 정죄하셨다 (롬 8:3)
  • 그분은 아버지와 동등하다 (빌 2:6)
  •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 한 분이다 (신 4:35; 사 45:5-6)
  • 만물이 그분께 복종하게 된다 (히브리서2:8)
  • 그분은 모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맛보셨다 (히브리 2:9)
  • 예수님만이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히브리 2:17)
  • 그분은 자신의 생명 버리고 다시 취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요 10:18)
  • 그분만이 죄를 용서할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마 9:6; 막 2:7, 10; 눅 5:21, 24; 요한1서 1:7, 9)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와 같습니다:

  •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마 8:17)
  • 우리의 병을 짊어지셨다 (마 8:17)
  • 그분은 종의 형상을 취하셨다 (빌 2:7)
  • 그분은 사람의 모양으로 지음을 받았다 (빌 2:7)
  • 그분은 우리와 같은 모든 점에서 유혹을 받으셨다 (히브리 4:15)
  • 그분은 죽을 수 있다 (히브리 2:14)
  • 그분은 천사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의 씨를 스스로 취하셨다 (히브리 2:16)
  • 인간으로 하신 그분의 경험은 우리에게 승리의 모범을 보여준다 (히브리 2:18)
  • 그의 마음과 생각과 태도가 우리 인류 안에 울려 퍼질 수 있다 (빌립보 2:5)

그래서 엘렌 화잇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취하신 것처럼 믿게 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성을 쓰셨다. 주님께서는 실제로 인성을 소유하셨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히 2:14)셨다.” (가려뽑은 기별 1권, 247페이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은 그리스도와의 연결을 통해 우리가 지닐수 있는 인성과 동일한 것이다. . .그리스도는, 타락했지만 부패되지 않은,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탄의 말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부패됨을 당하지 않을 것이었다.” (승리하신 그리스도 <Christ Triumphant> 208페이지)  

그렇습니다. 재림 신앙, 즉 마지막 세대 신학(LGT)의 가르침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의 인성과 같다는 우리의 이해가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엘렌 화잇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셨읍니다. [13]

[13] 역자주: 히브리서 2:17-18, 현대인의 성경 -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점에서 자기 형제들과 같이 되셔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비롭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들의 죄가 용서받도륵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넉넉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구주께서는 연약한 인성을 취하시고 죄없는 생애를 사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성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절제 생활, 107페이지)

“우리의 미래, 영원한 행복은 우리의 인성과 그에 속한 모든 능력과 힘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신성의 통제하에 놓이게 하는데 달려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이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은 쉬웠다. 그분은 신성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은 우리와 같이 모든 면에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선언한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고양된 마음에 따라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 유혹에 굴하지 않아 자신의 신성한 권능을 약화시키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그분의 생애는 예수님 안에서 부여된 특권과 기회를 통해 사람들이 성취할 수 있는 생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상이다.” (영문 시조, 1897년 10월 14일).

묻겠습니다. 이것이 이설인가요?

우리가 재림을 지연시켰습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담긴 가장 빈약한 내용은 재림의 촉진과 지연을 다룬 장입니다. 이 장은 재림의 지연/촉진에 대한 엘렌 화잇의 주요 글들을 논의하려는 시도조차 없습니다. 이 장의 전반부는 주제와 상관없는 내용에 소진하고, 후반부는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권위적으로 읊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의 시기가 신자의 행실에 달려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선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한글 번역본, 405페이지). 이 장의 저자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문제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1. 개인적인 구원
  2. 하나님의 백성을 통한 하나님의 성품 입증

구원 받는 것과 하나님께서 당신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 것이 옳음을 보여 주도록  하나님 성품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참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몇 사건들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님의 구원을 지연시키거나 촉진시킴을 보여줍니다. 민수기 13장과 14장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연시켰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4:26-29에는 농작물이 익자마자 수확하는 농부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후서 3장은 재림에 대한 확실성을 공언하면서 그 재림의 도래를 재촉하기 위해 어떠한 백성이 되어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 지연되거나 촉진되는 것을 뒷바침하는 성서적 증거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에스더 왕비와 백성들의 기도가 개입하여 하만이 죽임을 당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사형령이 집행되기 전에 그에 반하는 법령이 반포될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 5-9장). 그리고 다음과 같은 엘렌 화잇의 글이 있습니다:

“만일 재림신도들이 1844년의 큰 실망 이후에 저희 믿음을 지키고 연합의 정신으로 밝혀지기 시작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며 셋째 천사의 기별을 받아들이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기별을 온 세상에 전파하였다면 저들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을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의 노력과 함께 큰 능력을 베풀었을 것이고 사업은 이미 끝났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 즉시 보상을 받아야 할 당신의 백성을 영접하시기 위하여 오셨을 것이다. . .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도록 계획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가나안 땅으로 직접 인도하실 것과 그곳에서 거룩하고 건전하며 행복된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약속의 말씀을 처음으로 들은 자들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히 3:19)다. 그들의 마음이 불평과 반역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과 맺으신 당신의 언약을 성취시킬 수 없으셨다. 불신, 불평 및 반역이 40년 동안이나 고대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은 것이었다. 동일한 죄들이 현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지연시키고 있다. 두번 다 하나님의 허락에 모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 가운데 있는 불신, 세속적인 욕망, 비헌신적인 정신 및 신자들 간에 있는 다툼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우리들을 오랫동안 남아 있게 하는 것이다.” (가려뽑은 기별, 68-69페이지)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함으로 우리 주의 강림을 촉진시킬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시는 날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그날을 재촉해야 한다(벧후 3:12 상단 참조).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께서 명하신 바와 같이 맡겨진 사업을 이루었다면 온 세계는 벌써 경고를 받았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께서는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시대의 소망, 68-69페이지)

이 증언의 글 중 어느 것도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의 장에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민수기나 마가복음의 구절도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은 잠깐만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결 론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도달할까요?  마지막 세대 신학(LGT)에 대한 비난의 절반은 비교적 간단한 견해 차이에 불과하며, 나머지 세 가지는 부당하고 불공정한 허수아비 때리기 식의 허위 진술 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책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마지막 세대 신학(LGT)을 극도로 곡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가르침에 대한 직접적인 견해 차이가 있는 곳에서 이 책의 내용은 특별한 도움을 주지 않으며, 그리고 이 책에 포함된 결정된 허위 진술 때문에 유해무익합니다. 때문에 실제로 마지막 세대 신학(LGT)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2018년에 출판된 이 새로운 책은 나무의 불필요한 낭비일 뿐입니다.

우리 출판사들에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단지 나만의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교회 교인들 중 조지 나이트의 관점을 재방송하는 “~하는 경향이 있다”, “~으로 보인다” 식의 의견들로 가득찬 책을 사려고 아우성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마지막 세대 신학(LGT)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몰두해야 하며, 엘렌 화잇의 글을 읽어야 합니다. 또한, ML 앤드리어슨이 저술한 「성소봉사(The Sanctuary Service)」와 그리고 본인의 소책자, 「정결과 종결: 마지막 세대 신학의 14요점 (Cleanse and Close)」을 추천합니다. 이 서적들은 널리 보급되어 있는데, 마지막 세대 신학(LGT)의 진리 또는 거짓에 대한 공정한 분석은 이러한 출처들의 구체적인 내용을 비평해야지, 우리의 아이디어로 인식 할 수 없는 허위 진술들을 조작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14]

[14] 역자주: 2015년 12월에 있었던 재림 신학회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회의 중 질의응답 시간에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테드 윌슨 대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명확한 답변을 주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에 완전히 기대어,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그분의 권능을 통해 죄에 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임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빌 4:13; 롬 12:1,2).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힘이 없습니다. 빌립보서 2장 5절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합니다. . .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치고 그분과 그분의 말씀과 가까이 있도록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일하시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실물교훈(69페이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씀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하게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찾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출처: 테드 윌슨 대총회장 질의응답 페이스북 페이지; 이 실물교훈에 있는 엘렌 화잇의 말씀은 마지막 세대 신학을 대변하는 인용구로서, 테드 윌슨 대총회장의 설교들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인용문이다)

나이트-위든의 논조(KWN)는 정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논조는 진정한 재림 신앙의 입장과 현격한 대조를 이룹니다. 한 깊은 골짜기가 성경 말씀과 엘렌 화잇의 글을 읽는 평신도들을 학자들로 부터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재림신앙에 대한 여러 가지 개념들이 있습니다만, 이 2018년의 책들의 간행은 너무 지나칩니다. 내가 바라는 바, 우리의 젊은 학자들 중 일부가 스스로 생각하게 되어서 마지막 세대 주제에 대한 조지 나이트의 묘사를 재고하게 되는 때가 이르기를 바랍니다.

내가 보기엔, 기본적 재림신앙 대 나이트-위든 논조의 대립입니다. 기본적 재림신앙은 자신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2018 년 책들은 불공정하고 부정확하며, 신학교와 출판사와 교회의 수치입니다.

교회는 진정한 재림 메시지가 선포되는 곳에서는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신 우리가 출발하게된 목적에서 길을 잃고 헤매이면, 우리는 위축되어지고 세상의 표준과 비교하면서 우리가 유의미한지 회의하며 불안해 하게 됩니다. 우리는 담대해야 할 때 소심해 집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왜 당신의 교회를 일으켜 세우셨는지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바로 이와같은 때를 위해 어떻게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셨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부록 A: 나이트-위든 논조를 바로잡기 위해 필요한 기초 자료들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지 나이트와 우드로우 위든 및 다른 이들이 재림교회의 역사에 대한 한 견해를 저술하고 가르쳐 왔으며, 그들의 견해가 제도적으로 받아들여진 견해가 되었다. 그것은 나이트-위든 논조 (KWN) 으로 지칭되곤 한다. 그러나 이 견해가 어느 점에서는 와그너(EJ Waggoner)와 존스(AT Jones) 그리고 1888년 기별의 특정 측면들을 부당하게 폄하하고 있는데, 그런 면들은 신중하게 검토될 필요가 있다. 다음은 론 더필드의 책 「늦은비의 재현 (The Return of the Latter Rain, vol. 1)」과 「친구들의 집에서 입은 상처 (Wounded in the House of His Friends)」에 있는 각주 항목들로서, 존스를 공격하거나 1888년 기별에 대해 특정한 묘사를 하고 있는 조지 나이트와 다른 이들의 진술을 더필드가 언급한 자료이다. 나이트의 여러 의견들이 편향적이거나 오류일 수 있기에 아래 참조 문헌들이 재검토를 용이하게 해줄 것이다.

RLR1 pp 9-12 How KWN relates to key Adventist theological concepts. In contrast, the LGT view is described on pp 12-14.

RLR1 fn 39 p 82 GK condemn ATJ EJW

RLR1 fn 43 pp. 101-103 Reliability of books by GK questioned by RD

RLR1 fn 3 p 121

RLR1 fn 12 pp 122-123 RD warns about GK

RLR1 fn 36 pp. 125-128

RLR1 fn 41 pp 128-130 RD warns about approach of WW and GK

RLR1 fn 58 p 133-134

RLR1 fn 64 pp 159-161

RLR1 fn 67 pp 161-162 GK using statement fragments out of context to discredit ATJ and EJW

RLR1 fn 6 pp 174-175 RA attacks ATJ and EJW completely using GK excerpts

RLR1 fn 18 p 176

RLR1 fn 20 p 176

RLR1 fn 22 p 176

RLR1 fn 42 p 177

RLR1 p 197, 200

RLR1 fn 2 p 212 Original sin. WW and GK

RLR1 fn 8 p p 238-239

RLR1 fn 10 pp 239-241 WW GK

RLR1 fn 18 pp 242-244

RLR1 fn 31 pp 250-251

RLR1 fn 39 p 252

RLR1 fn 7 p 269

RLR1 fn 15 pp 270-272 GK ridicules ATJ, “[S]ome today seek every possible occasion to criticize both Jones and Waggoner, rewriting history, if necessary, to do so.”

RLR1 fn 5 p 302 GK mislabels US ??

RLR1 fn 43 p 304 GK

RLR1 fn 44 pp 304-305 RD accuses WW of going to great lengths to misrepresent EJW, GK of misrepresenting history, and of promoting Ford theology

RLR1 fn 45 pp 305-308 WW supporting Ford theology

RLR1 fn 52 p 309 GK misquotes to attack EJW

RLR1 fn 75 p 311 WW and GK

RLR1 fn 79 pp 313-314 WW forcing history through KWN

RLR1 fn 82 pp 314-316 RD again points out how so many authors base their attacks on ATJ and EJW on writings of GK

RLR1 fn 23 pp 356-357

RLR1 fn 32 pp 357-359 note on 359 four Ford errors LM

RLR1 fn 33 p 385

RLR1 fn 45 p 389

RLR1 fn 46 pp 389-390 GK assertions wrong

RLR1 fn 60 p 416 GK drawing his positions from Dan Jones

RLR1 fn 24 p 435 GK misuse EGW diary entry

RLR1 fn 69 pp 468-469 RD quotes GK: “I was doing my very best to demonstrate that Jones was aberrant from beginning to end.”

Wounded fn 10 p 18 “Although Whidden’s observations here are worthwhile, much of the rest of his biography of E. J. Waggoner follows the same questionable editorial approach as George Knight’s biography of A. T. Jones. One could possibly conclude that both writers have been more interested in promoting their own Evangelical theology than in being honest with our Adventist history.”

Wounded fn 5 p 27-29 pp 68-69 GK

Wounded fn 30 pp 51-52 GKs tainted interpretation

Wounded fn 40 p 58 GK claims EGW agreed with ATJ and EJWs concept of righteousness by faith which GK holds is same as the Evangelicals

Wounded fn 29 p 68-69 GK attacks ATJ

Wounded fn 5 pp 74-76 RD warns about GKs “far-fetched claims.” “Once again, Knight’s accusations are not only unfounded but also appear dishonest and misleading.” “Apparently the authoritatively inspired Ellen White saw something in Jones’ 1893 and 1897 sermons that the evidently prejudiced George Knight does not.”

Wounded fn 10 p 78

Wounded fn 40 p 89

Wounded fn 51 p 94 “Ellen White had declared that the confused ideas on the teaching of righteousness by faith were the result of those opposing the 1888 message. Furthermore, she also stated that Jesus, through His delegated messengers (Jones and Waggoner, etc.), was standing at the door with the true remedies for the church. Now, 125 years later, modern Adventist historians such as Desmond Ford, Burt Haloviak, George Knight, and Woodrow Whidden inform us that it was in fact Jones and Waggoner who brought the message of confusion into the church, beginning as early as the year 1889.”

Wounded fn 52 p 95 The “personal Evangelical theological agenda” of “some modern Adventist historians.”

Wounded fn 24 p 118

Wounded fn 7 pp 138-140 RD dissects and exposes GKs unethical attempt to link ATJ with fanaticism

Wounded fn 26 p 152

Wounded fn 8 p 159 GK spins EGW letter supporting ATJ but “Not one valid example can be given supporting Knight’s suppositious claim.”

Wounded fn 15 pp 164-165 GK decades of criticism of Jones regardless of historical evidence

Wounded fn 22 p 168

Wounded fn 32 p 172

Wounded fn 12 pp 195-196 GK distorts details about Anna Rice to discredit ATJ. Duffield documents GK’s changing wording, and concludes, “What license has George Knight for such apparent dishonesty and his rewriting of Adventist history?”

Wounded fn 15 p 197

Wounded fn 20 pp 199-200 GK “misrepresents the facts and the sequence of events…”

Wounded fn 21 pp 200-201 GK tries to establish false point as a fact several times in AUFG1888. GK “exaggerated revisions of Adventist history.”

Wounded fn 31 pp 203-204 Bill Knott misrepresentations ATJ

Wounded fn 35 p 205 GK attacks on ATJ

Wounded fn 49 p 211 GK misrepresentations 1892-1893 revival

Wounded fn 11 p 235 Same

Wounded fn 3 p 243

Wounded fn 15 p 250

부록 B: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있는 마지막 세대 신학 비판 내용 분석 도표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마지막 세대 신학이 6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거짓 교리를 가르친다고 비판하고 있다. 다음은 이 책 16-19, 272-281 페이지에서 통합한 항목들을 마지막 세대 신학이 가르치는 사실적 견해와 비교한 것이다.

비판의 범주 비판 내용「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에 있는 비판 인용구마지막 세대 신학의 사실적 견해
왜곡대쟁투의 종결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든다.“하나님께서 친히 대쟁투에서 승리하시며, 이러한 승리가 한낱 피조물들에 의해 추가된 어떤 것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글 번역본 19페이지, 비교: 영문 원서 278, 280 페이지)  

비교: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인간 중심” (151페이지); “인간 지향적” (151페이지) “그것은. . . 하나님을 인간에게 의존하게 만든다” (151페이지)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 지혜로, 타락한 인간들의 삶에서 죄를 극복하는 그분 권능의 유효성을 먼저 입증하기 전에 대쟁투의 전쟁을 끝내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죄를 극복하는 권능은 그리스도의 권능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대속하기에 충분하며, 타락한 인간의 협력은 아무리 성별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공로가 있을 수 없다.
이견타락한 인간의 상태는 이생에서 초월될 수 있다; 죄는 선택되어 지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정죄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죄가 자유롭게 선택된 행동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한다면, 즉 그것이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지닌 인간의 상태라는 구부러진 기질이라면, 인간은 그 자체로써 죄에 오염된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의지력으로 (이런 넓은 의미에서) 죄를 완벽하게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글 번역본 21페이지)  

비교: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불충분한 죄의 교리” (150페이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 전서 10:13)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유다서 1:24)
이견칭의는 사법적인 선언 그 이상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칭의는 의인으로 여기거나 간주하는 것이지. . . 의인으로 만드는 게 아니다.” (한글 번역본 127페이지)  

비교: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존스와 와그너의 가르침에 화잇이 동의한 칭의의 개념은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아니고 복음주의자들이 가르쳐 온것과 동일한 것이다.” (106페이지)
“하나님의 용서는 단순히 우리를 정죄에서 면하게 해주는 사법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죄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죄로부터 완전히 돌아서게 한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구원하는 사랑의 표현이다.” (산상 보훈, 114페이지)
왜곡사람들이 절대적 완전을 이루어야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고 주장한다.“마지막 세대 신학은 완전주의를 옹호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절대적으로 죄 없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표방하는 것이다. 완전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람이 완전하게 “성화되”고, 그래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가 필요하지 않을 때 영광화 직전의 단계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사람은 절대적으로(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를 수 있다.” (한글 번역본 21페에지)  

비교: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실제로, 그[앤드리어슨]의 신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업적에 근거하여 중재자없이 설 수 있는 그리스도를 필요로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151페이지)
마지막 세대 신학은 타락한 인간이 절대적 완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인간의 완전은 항상 하나님의 완전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것이다. 타락한 인간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본질적인 성품의 변화는 불가능하다. 모두가 죄를 범했기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한 용서를 영원히 필요로 한다. 영원의 모든 시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필요치 않는 때가 결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미 범한 죄들에 대해 베푸신 그분의 용서를 우리가 영원히 필요하며, 더불어 죄를 극복하기 위한 그분의 권능도 영원히 필요하기에 우리는 그분의 모본과 귀감을 영원히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극복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필수 요소이다.
왜곡에수님이 우리와 똑 같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러한 점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세대 신학의 주장과 말접하게 연관된어 있다. 그 주장에 의하면, 예수께서 완전하게 죄가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절대적으로 죄 없는 상태가 될 수 있다. 그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해여 우리와 똑같이 되셔야 했다고 주장한다.” (한글 번역본 23페이지)  

비교: 나이트, 「정체성의 추구」: “마지막 세대 신학 옹호자들은 예수님이 아담이 타락한 후에 지니게 된 모든 죄된 성향들을 가진 육신으로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한다.” (145페이지)
마지막 세대 신학은 항상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같고 다른지 구분하여 왔다 [본 비평문에 있는 진술 참조]. 우리 재림교인들은 첫 번째 100년 동안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 자신의 인성과 같았다고 강조해 왔는데, 이는 [아담의]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정죄되었다고 가르쳤고, 그로인해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부터 신학적으로 예수님을 격리시켰던 그 당시의 대중적인 기독교파들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견재림이 신자들의 불충실함에 의해 지연되었다고 주장한다.“예수께서 오실 수 있을만큼 우리가 충분히 좋아질 때가 과연 있을까?. . . 우리가 기울이는 가장 고상한 노력일지라도 죄가 잠식하는. . . 그 위대한 재림은 우리의 완전함에 달려있지도 않을 뿐더러 존재하지도 않는 인간의 의같은 것 때문에 우리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일도 없다.” (한글 번역본 407, 410, 416)  

비교: 나이트, 「종말 사건과 마지막 세대: 폭발적인 50년대」: “마지막 세대 신학은 기본적으로, 사탄의 주장이 것짓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옳으심을 온 우주에 증명할, 완전한(죄없는) 재림교인들의 출현이 있기까지는 예수님께서 재림할하실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14페이지)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 반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가 되리라” (민수기 14:33)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베드로 후서 3:11-12)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마가복음 4:28-29)

「하나님의 성품과 마지막 세대」는 재림 신학의 입장에 대해 오랫동안 비판해온 조지 나이트의 주장들을 반복하고 있다.


래리 커크패트릭(LARRY KIRKPATRICK) 목사는 서던 재림 대학교(Southern Adventist University) 신학부를 졸업하고 유타-네바다 합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수여받고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사역을 거친 후 현재 미시간 합회에서 목회에 임하고 있다. 대쟁투 웹사이트(GreatControversy.org)를 1997년 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강의와 저술 활동에 임하고 있다.

래리 커크패트릭 목사의 서적 비평 영상 (한글 자막 첨부 - 출처: MIGHTYC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