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지남 2014년 3월호에 어느 목회자가 구원과 양심에 대해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결론을 내렸다:

“양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천만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한 기독교인이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심지어 존경받는 세계적인 유명한 성직자도 ‘양심대로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안타까운 소리를 한다. 단언하건대 구원은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 . . 물론 율법과 양심의 거룩함을따라 살면서 이를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살아간다면 그는 분명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천연계와 건강 법칙, 예언의 성취를 통해 점진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존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당연히 구원받을 자를 애타게 찾는 분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라는 중보자가 분명히 드러난 이 시대에, 이를 애써 무시하고 다른 불을 찾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선과 악의 대쟁투가 결말을 향해 치닫는 이때에 우리는 더욱 만군의 미가엘이신 예수를 바라 보자.” (미주 지남 2014년 3월호 권두언)

신학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올바른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실제적인 적용에서 아주 쉽게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곡해되고 이행될 수 있는 관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가 알려진 요즈음엔 “가시적으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주의자들의) 개념인데, 이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 “가시적인 그리스도”를 전하는 매개체인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산재한 문제점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 보자.

어느 그리스도인의 이웃 중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정말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친절한 정신을 품고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나 도움이 되고 희생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이웃들과 사회에 축복이 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한 그 이웃에게 그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성경 말씀으로 소개하고 영접하도록 전도했다. 하지만 이 “훌륭한 불신자” 이웃은 그리스도인이 전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리스도인은 그 이웃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 (가시적으로) 알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단정하였다.

위의 목회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그리스도인의 생각은 맞다. 그런데 만일이 “세상적으로 훌륭한 불신자”가 참된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고, 그 그리스도인 이웃이 전하는 “위조 불량품 예수”를 거절한것이라면 어찌하겠는가? 이 불신자 이웃이 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참된 그리스도의 원칙과 형상을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그가 믿는다고 공언하는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할 필요성을 못 느껴서 거절하였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 불신자가 정말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일까? 정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일까? 나는 요즈음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기에 구원이 없다”고, 이렇게 쉽게 단정하기가 솔직히 두려워 진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의 관념에도 많은 이질감을 느끼게 됨이 솔직한 심정이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지금까지 약하고 가냘픈 빛만을 비춰 왔다. 빛이란 무엇인가? 빛은 곧 경건이요, 선이요, 진리요, 자비요,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품과 생활속에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복음이 적극적으로 전파되는 여부는 신자들 각 개인의 경건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선교 봉사, 21페이지)

비 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선함은 비록 그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해도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예수님의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하지 않음을 우리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러 성경 절들에 따르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새 언약의 기본이다 (예레미야 31:31-34; 히브리서8:8-10). 이와같은 맥락에서 다른 성경절들은 또한 진정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논하고 있다 (신명기 30:14; 시편 119:11; 고린도 후서 3:2-3). 따라서 마음에 율법을 새긴 자들을 가리키며 성경의 하나님은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되리라”(히브리서 8:10)고 선언하셨지 않은가? 또한 성경은 하늘에 승천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구주에게 “당신의 손에있는 이런 상처는 무엇입니까?”(스가랴 13:6)라고 질문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명백하게도 거기에는 예수의 지상 생애나 그들의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모르며 구원받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이처럼,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시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의 능력에 참여한 자들인 것을 알려준다. 요즈음의 세상에도 이렇게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존재함을 우리는 겸손하게 시인해야 하겠다.

따라서 글과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진리를 강론할 때, 영적/사상적 지도자들은 그들이 논하는 주장을 듣는 신자들이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들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적용하게 될지 종국적인 결론까지 한번 신중히 생각해 본 후에, 표현을 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구원과 양심의 주제를 논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주장이 어떤 실제적인 적용들과 상황을 내포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막연한 하나의 추상적인 표어에 머물 수 밖에 없게 된다.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은 분명히 다음과 같이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번도” 하나님을 소개받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이 있었으며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인정하였고 구원하였다는 글이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 2:13-15)

“심판 때에 그리스도께서 칭찬하실 자들은 신학이란 학문을알지 못했을는지도 모르나 그리스도의 원칙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거룩한 성령의 감화를 통하여 그들은 주위에 있는 이들에게 축복이 되었다. 비록 이방인 가운데서일지라도 친절한 정신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으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 전에라도 그들은 선교인들을 도와주었으며 저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섬긴 자들이 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 민족들에게서 그리고 이방인 가운데서 미천한 자들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구주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을 때 얼마나 놀랍고 기쁜 일이 될 것인가! 그분을 따르던 자들이 칭찬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놀라움과 기쁨으로 쳐다보는 것을 바라보실 때 무한하신 사랑의 소유자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은 얼마나 기쁘실 것인가!” (시대의 소망, 638)

이 말씀들은 오늘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나는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미주 지남에 글을 쓰신 목회자는 오늘날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라는 중보자가 분명히 드러난 시대”이기 때문에 위에 인용된 성경의 말씀과 예언의신 말씀이 오늘날은 적용될 수 없다는 인상을 주는 주장을 하시지만, 가시적인 그리스도를 전하는 매개체들에게 문제점들이 있어 현대의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이 말씀들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적용되는 진리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아직도 하나님은 자연의 법칙과 양심을 통해 성령으로 역사하여 (예수님을 믿고 전한다는 우리가 인정하던 말건)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시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 양심의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기에 결국은 양심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 아니겠는가?

“당신의 피조물 중에서도 가장 걸작품인 인간에게만 거룩한 율법의 신성한 요구들을 인식할 수 있는 양심과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율법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억지로 순종하도록 강제하지 않으시며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 대우하신다.” (가려뽑은 기별 1권, 216)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양심을 주셨다. 그분의 말씀 속에 대원칙들이 놓여져 있으며, 그것은 우리의 그리스도인적 삶과 일반적인 행실에 있어서 우리를 인도하기에 충분하다.” (교회증언 3권, 523)

“우주의 위대한 통치자인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당신의 율법아래 두셨다. 작은 꽃과 높이 솟은 참나무 그리고 모래알과  망망한 바다는 물론 햇빛과 소나기 및 바람과 비, 그 모두가 자연의 법칙을 준수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보다 더 높은 법 아래 놓여 졌다. 오직 인간에게만 (당신의 자녀들이 그 형상대로 되기를 바라는 표현인) 하나님의 위대한 도덕률이 제시하는 강력한 요구들을 볼수 있는 지능과 느낄 수 있는 양심을 주셨다.” (영문시조, 1901년 7월 31일자)


[정숙희 지음 “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에서]

한국 불교계에서 유명한 미국인 현각 스님이 설법중에 한 이야기다.

얼마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어떤 사람이 악을 쓰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말을 들어 보니 “오직 믿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스님 바로 앞까지 와서 외치다가 스님을 향해 왜 안 믿느냐고 소리쳤다. 그래서 스님은 대뜸 “너 놈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말해 청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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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과장수가 있었다. 동네 교인들이 숱하게 전도하려 애썼지만 난공불락의 고집 앞에 물러서곤 했다. 그랬던 그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어느 날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나왔다. 놀란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가게에 일주일에 세 번 들르는 신사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덜 싱싱하고 흠집 난 사과만 골라 가십니다. 미안해서 몇 개 더 집어 드릴라치면 그분은 손사래를 치시며 ‘당장 먹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하시면서 ‘대신 다른 손님들에게 싱싱한 사과를 주세요’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예수님을 믿으라 하였습니다. 그런 분이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좋은 분이라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