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되고 있는 몇 증언 구절들에 대한 탐구

증언말씀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기인된 가르침이 일부 인사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타고난 이기적 본성으로 인해 정죄된 상태로 태어남을 화잇 여사의 글이 밝히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1886년에 기록된 다음의 증언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기심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새겨져 (inwrought)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유산으로 주어진바 되었다.” (Historical Sketches, pp. 138, 139)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기심은 죄 (selfishness is sin)”라고 언급한 1891년 4월 13일자 영문 시조의 글을 이들은 또한 제시하곤 한다. 한마디로 우리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개념이다.

유산으로서의 이기심

이러한 인용구들을 접할 때, 우리는 이 구절들을 주의 깊게 고려하여 그것을 잘못 적용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먼저 위의 두 구절들 중 첫 번째 구절이 담긴 문장의 전후 문맥을 좀 더 넓게 잡아 인용하며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 중 많은 이들에게는 성취해야 할 큰 과업이 있다. 우리의 마음과 품성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품성처럼 되어야 한다. 이기심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유산으로 주어진바 되었으며, 많은 이들에 의해 한 귀중한 보배로 마음속에 품어 키워져 왔다 (cherished by many as a precious treasure). 이 자아와 이기심이 극복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사업이 아무것도 성취될 수가 없다. 많은 이들에게 있어서는 그들 자신과 연결된 모든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자아가 그들의 중심이요 모든 것들이 그 주변을 돌며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Historical Sketches, pp. 138, 139)

성취되어져야 할 과업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우리의 마음과 품성이 그리스도의 마음과 품성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바로 이 일이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 져야만 될 과제임을 모두 다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문장은 자아와 이기심의 이슈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 자아와 이기심이 극복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사업이 아무것도 성취될 수가 없다“고 언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면 이 문장의 주위 문맥을 고려하면서, “이기심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한 유산으로 주어진바 되었다”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이 구절이 “한 유산으로 주어진바 되었다”는 말로 끝나고 있지 않음을 주목해야 하겠다. 더 계속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한 유산으로 주어진바 되었는데, 많은 이들에 의해 한 귀중한 보배로 마음속에 품어 키워져 왔다 (cherished by many as a precious treasure)” 는 것이 완결된 문장이다. 이 문장은 단지 이기심만을 다룬 것이 아니고, 취하여 마음속에 품어서 키워진 그 무엇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문장은 우리에게 자아와 이기심은 극복되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들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종국에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과 대면하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유예기간 동안 이 자아와 이기심은 분명히 극복되어져야만 하고 또 그렇게 극복되어질 수 있는 바이다.

만일 여기서 논해지는 극복의 대상이 우리의 타고난 본성, 즉 우리가 지니고 태어난 “고장난 인간 유기체 (Disordered Human Organism)”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존재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타고난 본성은 유예의 기간이 끝난 후 그리스도께서 영광으로 이 땅에 당도하실 때까지는 변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증언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인간이 거룩한 육체를 받을 때에는 저들은 이 지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며 하늘로 데려감을 입을 것이다. 이생에서 죄가 용서함을 받기는 하지만 그 죄의 결과는 이생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빌 3:21)실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다. 그리스도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 오시어 죽은 자들을 감옥에서 불러내실 그 때에, 성도들이 드디어 거룩한 육체를 받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것이고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가 믿는 모든 자들 가운데서 칭송함을 받게 될 것이다.” (General Conference Bulletin, April 23, 1901)

화잇 여사가 여기서 그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인디애나 주의 “거룩한 육체 운동 (Holy Flesh Movement)”이 사실 요즈음 일부 인사들이 설파하고 있는 정죄된 본성의 개념과 유사한 오류를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 1900년대 초에 일어났던 이 “거룩한 육체 운동”의 가르침은 바로 정죄됨이 우리의 타고난 본성과 밀착되어 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기위해서는 타고난 이 본성이 거룩한 육체로 바뀌어야만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죄된 본성을 거룩한 육체로 바꾸기 위해 인디애나 주의 “거룩한 육체 운동”이 취했던 방법은 광란적인 음악과 흥분의 고조를 통해 사람들에게 극한 감정적인 경험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예배 인도자들이 모인 회중들을 극도의 흥분적인 분위기로 몰아가면서, 결국 회중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넘어져 기절하여 의식을 잃게 되곤 하였는데, 그러면 그 실신한 사람들을 예배 단상으로 옮겨 놓은 후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 실신한 사람들을 가운데 두고 둘러서서 안수하며 큰소리로 열광적인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일단 실신했던 자가 의식을 회복하면 그를 겟세마네 동산의 체험을 가진 자로 인정해 주며 그 사람은 이제 거룩한 육체를 가지게 되었고 변화된 믿음을 가진 자로 간주되었다.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죄를 질 수도 없고 결코 죽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승천할 준비가 된 것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 광신적인 “거룩한 육체 운동”이 해결하려던 주된 이슈는 바로 죄와 죄책으로 물든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었다. 이들에 의해 죄와 동일시된 이 타고난 본성은 제거되어야만 하였는데, 그리하여 그들은 위에서 간략히 묘사된 의식을 통하여, 겟세마네 동산을 통과한다는 체험과 더불어 거룩한 육체로 본성이 변화되었음을 주장하는 일련의 과정을 밟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오류에 대하여 증언의 말씀은 “이생에서 죄가 용서함을 받기는 하지만 그 죄의 결과는 이생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라고 지적하였던 바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몸이 영화(榮化)롭게 될 재림의 때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화잇 여사는 이 주제에 대한 그녀의 일관된 생각을 여러 가지 다른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반복하고 있다:

“사단이 통치하는 한 우리에게는 복종시켜야 할 자아가 있을 것이다.” (사도 행적, pp. 560, 561)

“식욕과 감정(appetite and passion)은 성령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 영생 이전인 이생에 있을 동안은 전쟁이 끊일 새 없이 있을 것이다.” (부모와 교사와 학생들에게 보내는 권면, p. 20)

우리는 분명히 죄를 이기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무질서해진 본성은 영광의 날까지 우리에게 남아있게 될 것이다. “자아와 이기심”도 물론 극복되어야만 된다. 이 이기심이 우리 존재 자체에 새겨져 있다고 화잇 여사가 말 하였는데, 이 “새겨져 있다 (inwrought)” 는 단어가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는 모르나 그 이기심이 극복되지 않는 한 “하나님을 위한 그 어떤 특별한 사업이 아무것도 성취될 수가 없다”고 화잇 여사가 더불어 강조했음을 우리가 주지하여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생애 중 그가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이러한 이기심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경험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가 태어날 때 좀 더 정확히 무엇을 물려받았으며, 그와 반면에 우리가 자유의지의 선택을 통해 좀 더 정확히 무엇을 배양하였단 말인가?

인간의 본성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사실 우리의 타고난 본성을 논할 때, 화잇 여사의 글들은 아주 신중함을 보여 주는데, 다음의 글이 그 한 예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가 모든 사람의 일상 경험 가운데서 확연히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본성에는 악으로 기우는 성향 (a bent to evil), 곧 인간이 스스로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교육, p. 29)

또한 그녀는 아담의 죄의 결과로 나타난 이러한 연약함과 악을 행하려는 경향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오해의 여지가 없이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고상한 재능들을 위탁하신 사람들은 하나님과 밀접한 연결을 유지하지 않는 한 큰 연약함을 지닐 것이며, 영혼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큰 범죄들과 관련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그들의 한 부분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훈육에는 결점이 있어왔다. 영혼을 수양하는 일이 진보에 진보를 거듭하지 못해왔다. 그리하여 타고난 경향들이 제지를 받지 않았으며, 그것이 영혼을 저하시켜왔다 (inborn tendencies have not been restrained, but have degraded the soul). 온갖 선천적 약점들 (all natural weaknesses)을 위하여 예수께서는 충분한 대비책을 마련하셔서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그것들이 정복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런 약점은 만약 정복되지 않으면 폭군, 정복자가 되어 그들을 정복할 것이며, 하늘의 빛은 흐려지고 꺼져버릴 것이다.” (Testimonies on Sexual Behavior, p. 91)

“그들은 자녀들 가운데서 재현된 그들 자신들의 불완전함을 보면서 굴욕적인 질책을 종종 느끼곤 한다. 그들 자녀들에게 있는 악으로 기우는 유전적인 경향들(hereditary tendencies to evil)을 정복하고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부모들은 그들을 돕기 위하여 곱절이나 되는 인내심과 불굴성과 사랑의 정신을 일으켜야 한다.” (재림신도의 가정, p. 173)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유전적이며 배양된 악의 성향들(all hereditary and cultivated tendencies to evil)을 이기며 자신의 품성을 당신의 교회에 새기는 거룩한 능력으로서 성령을 주셨다.” (시대와 소망, p. 671)

이렇게 화잇 여사는 아주 신중하게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는데, 그녀는 우리가 죄책이나 정죄됨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거나 또는 우리가 정죄 받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다. 예언의 신 글이 담긴 CD-ROM을 검색해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 진다.

또한 예언의 신 글들을 우리가 좀 더 주의 깊게 연구해 보게 되면 이 유전됨에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이기심을 물려받았으나 부모들은 자녀들의 본성으로부터 이 악한 경향을 띤 모든 소질을 근절시키기 (to uproot every fiber of this evil tendency from their nature) 위하여 힘써야 한다.” (새자녀 지도법, p. 132)

“모든(all)” 이라고 하지 않고 “대부분(many)”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동일한 주제를 다루는 다음의 글에서는 이렇게 물려받게 되는 이기심이 이기적으로 흐르는 경향으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기적으로 흐르는 모든 경향을 좌절시키기 (to counteract every inclination to selfishness) 위하여 부모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자녀들을 다루어야 할 것인가!” (새자녀 지도법, p. 133) 더불어 이러한 이기심이 하나의 씨앗처럼 시작되는 것으로 화잇 여사는 제시하고 있다: “많은 가정에서 거의 유아 시절에 자녀들의 마음에 허영심과 이기심의 씨가 뿌려진다. 그들의 귀여운 앳된 언행들이 그들이 있는 데서 평을 받고 칭찬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과장하여 반복된다.” (새자녀 지도법, p. 140) 이러한 이기심의 씨앗이 거의 유아 시절에 그들의 마음에 뿌려진다고 하였는데, “귀여운 앳된 언행들 (cunning little sayings and doings)”을 할 정도의 나이 때부터 벌써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기우러진 상태와 연약함들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그러한 경향들을 화잇 여사가 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성향 (propensity)”이라는 단어를 이와 유사한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사단은 인간 본성의 가장 저속한 성향(the lowest propensities)에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성향은 경작이 필요 없다. 엉겅퀴와 찔레 덤불과 같이, 이기심, 자아 사랑, 질투, 시기, 악한 억측과 자존심 등은 그대로 내버려 두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라난다. 그 반면에 최고의 고상한 기능(the highest, noblest faculties)은 제대로 계발되기 위해서는 계속적으로 활용될 필요가 있다.” (1888 Materials, p. 419)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그 속에 이처럼 저속한 성향들로 새겨져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성향들은 구태여 특별한 경작이 필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여기에 언급된 저속한 성향들 중 하나인, 이기적인 성향은 “그대로 내버려 두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라나”게 됨을 알리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이기적인 성향이 제지를 받아 그 진로가 바뀌지 않는 한 계속 자라서 무성해지는데, 이러한 묘사는 우리에게 한 성향이 작은 씨앗으로 시작되는 동시에, 본질적으로 그 씨앗의 성장이 자동적으로 뒤따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의 씨앗이 왕성히 자라 무성해진 나무가 됨과 같이, 단순히 하나의 저속한 성향에 불과했던 것이 그대로 방치될 때 완전히 장성해 버린 이기적인 품성으로 화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증언 말씀들을 고려할 때, 타고난 이기심이란 것은 사실 타락한 인간의 고장난 본성 속에 발견되는 하나의 성향을 지칭하고 있음을 우리가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를 받지 않고 그대로 방치된 이러한 성향은 자연히 우리 본성의 아우성과 이끌림을 쫓기로 작정하게 되며, 드디어 그 본성을 기꺼이 받아들여 결합함으로 의지의 선택에 의해 그 고장난 인간 유기체와 하나 되는 결과를 이루게 된다.

바로 이 면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그의 고장난 인성과 결속시키지 않으셨으며, 그 악한 성향들을 자기 것으로 취하지 아니하셨음에 반하여,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할 다른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사도 바울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롬 3:23)게 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선택하여 안일한 길을 택하였으며, 이기심과 같은 저속한 성향들이 무성하게 자라도록 방치하였던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이기심을 우리의 핵심 면목중 하나로 채택하고 말았는데,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러한 길을 택하지 않으셨던 바이다.

이기심은 죄

그러면 “이기심은 죄 (selfishness is sin)”라고 한 화잇 여사의 글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필자는 어떤 이들에 의해 이 문구가 “모든 이기심은 죄 (all selfishness is sin)”로 인용되어지는 것을 접한 적도 있다. 그러나 이 문구도 사실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런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이 문구가 있는 실제의 문장은 교인들이 서로 어떻게 잘 어울려 지낼 것인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통하여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재하게 되면, 형제들 간에 하나됨의 연합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화합의 상태로 부터 멀어지도록 이끄는 미소한 모든 충동들 조차로 부터 우리는 마음을 단속하여야만 한다. 이기심을 탐닉함으로 인해 (by the indulgence of selfishness) 우리의 영혼을 훼방하고 그 능력을 손상시켜서는 아니 된다. 이기심은 죄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애통하게 하며 몰아내 버린다. 우리가 불친절한 생각들을 품고 우리 형제들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빛과 사랑의 통로로 부터 우리 자신들을 차단시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Signs of the Times, April 13, 1891)

이 문절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년들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어떠한 종류의 이기심을 여기서 조명해 주고 있는가? “불친절한 생각들”을 품고 (cherishing of unkind thoughts) “우리 형제들을 의심하는 마음을 가지는” (harboring of suspicions against our brethren) 이러한 것들은 책임성을 지닌 사람들의 선택된 죄들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어둠의 소행을 들어내는 사람에게는 이기심이 분명히 죄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이기심은 화잇 부인이 새자녀 지도법에서 언급했던 씨앗이나 성향이라는 형태로서의 이기심과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이기심은 잘 급수되어 자란 묘목으로서의 이기심, 즉 마음에 품어 아끼며 키워 배양한 품성의 용인된 일부를 지칭하고 있다.

그와 반면에 “모든(all)”이라는 단어가 담겨있는 증언 말씀은 바로 다음의 글이다:

“우리가 이생에서 취하는 선택은 무한한 영생의 기간을 통해 유효한 선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영생이나 영멸 중 한가지만을 받게 될 뿐이다. 중간의 위치는 없으며 두 번째의 유예기간은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던 바대로 우리는 이생에서 승리하도록 청함을 입었다. 하늘은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이기셨던 것처럼 이기어 그의 보좌에 함께 앉게 되도록 우리에게 풍성한 기회와 특권들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이기는 자들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 가운데서 육적인 성향들을 애무하는 일이 절대로 있어서는 아니 된다. 모든 이기심(all selfishness)은 뿌리째 뽑혀 져야만 된다.” (Seventh-day Adventist Bible Commentary, vol. 6, p. 1112)

그렇다. 현 생애동안에 모든 이기심이 뿌리째 뽑혀 져야만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된 후에라도 우리는 영화(榮化)롭게 되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의 고장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게 될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뿌리째 뽑혀 져야만 될 이기심은 우리의 품성으로 수납된 이기심을 말한다. 우리의 타락한 인성과 그에 포함된 저열한 성향들은 계속 남아 있게 되지만,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의지한다면 종국엔 이타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품성 속에 이기심을 아끼고 껴안고자 하는 발판이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증언말씀이 논하는 “뿌리째 뽑혀져야만 되는” 이기심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선택한 이기심을 가리키는 것이지 우리의 타고난 본성에 새겨진 이기적인 성향이나 경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일부 인사들이 나름대로 좋은 의도를 가졌겠지만 어떻게 화잇 여사의 글들을 잘못 적용하여 왔는지를 살펴보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영감의 말씀이 전혀 지지하지 않는 개념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단발적인 문구들이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보게 되는 바이다.

방법의 문제점들

어떤 이들은 필자가 왜 이렇게 화잇 여사의 글들에만 국한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그러한 염려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어떠한 이슈에 대해 논하면서 성경 말씀으로 부터 시작하는 대신 화잇 여사의 글로 곧바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법은 결코 화잇 여사가 의도치 않았던 일인데, 이 사람들은 먼저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여 심오한 통찰력을 구하기보다는, 자주 화잇 여사의 글들이 주는 전반적인 증언에 대한 충분한 이해 없이 그녀의 글들이 담긴 CD-ROM에서 단발적인 인용구들을 검색해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코자 한다. 물론 화잇 여사의 글들을 연구함으로 우리가 큰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한 통찰력은 그녀의 글들이 주는 전체적인 증언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좀 더 포괄적인 연구를 통하여 구할 때 얻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성에 호소를 하기도 하는데, 그 어떤 주제에 관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들의 면밀한 탐구를 그들은 원치 않고, 자신들이 이미 견지하고 있던 이해만을 보존코자 한다. 그 목적으로 그들은 어느 한 문구를 또 다른 유사한 한 문구와 더불어 제시하곤 하는데, 그러한 시도 가운데 그 문구들의 좀 더 폭넓은 주위 문맥들이 자주 무시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와 관련이 있는 다른 여러 문구들이 또한 간과되기도 한다. 필자도 단순성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그 단순성이란 명분하에 동일한 주제에 대해 조명하는 여러 다른 영감의 정보들을 우리가 간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의 연구는 심도가 깊어야 한다. 시간과 기회가 허락한다면 그 어떤 한 주제에 대해 깊게 밑바닥까지 파고들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가 연구하는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나누는 (딤후 2:15)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한 탐구의 결과들이 그것을 접하게 되는 모든 영혼들에게 가치 있는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 론

그러면 이기심, 정죄 그리고 타고난 본성에 대해 예언의 신이 우리에게 주는 전반적인 증언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나며 그러한 이기심 때문에 이미 정죄된 상태로 태어난다고 화잇 여사가 가르치고 있는가? 아니다! 예언의 신의 가르침은 우리가 이기심의 성향을 가진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이고, 어린 아이가 장성해 가면서 자연히 그의 품성을 이러한 타락된 본성과 결속하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바이다. 성령이 간여하지 않는 한, 이 어린 아이는 자신이 지니고 태어난 고장난 본성의 이기심을 자기 자신의 이기심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택함으로 하나님의 적인 반역자로 화하게 되며, 그 자신의 고장난 본성과 결속하여 연합함으로 해서 자기 자신을 정죄케 한다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더불어 여기서 한 가지 명백히 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길로 가기로 선택했을 경우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 지속되는 순종이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증언 말씀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많은 남녀들이 죄짓기 일쑤인 그들의 경향에 대해 허다한 변명을 늘어놓곤 하는데, 이들에 의해 죄는 극복할 수 없는 그 어떤 불가피한 하나의 악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죄는 불가피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로 부터 성년에 이를 때 까지 이 세상에 사는 그 기간 동안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유혹들을 싸워 물리치셨다. 그리하여 그 분은 모든 어린 아이들과 젊은이들과 장년들에게 한 완벽한 귀감이 되고 있다.” (Manuscript Releases, vol. 18, p. 331; The Faith I Live By, p. 219)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거짓을 반박하시면서 실제적인 사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신데 대하여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위대한 교사는 인류의 선두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이 가능함을 보여 주시면서 인간을 향상시키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평생의 순종이 가능함을 증명하셨다.” (Manuscript 1, 1892)

“그리스도께서는 유아와 유년기 및 성년의 경험을 통과하시면서 그의 성품에 단 한가지의 오점도 남기지 아니하셨다. 그 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고 유익이 되고자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심으로 생애의 매 순간마다 인간이 그 주인의 뜻을 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Review and Herald, October 24, 1899)

그리스도를 우리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였을 당시 우리가 삶의 어느 지점에 있던지 간에,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이기심을 뿌리째 잘라내도록 하나님과 협력하라는 청함을 하늘로 부터 받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제거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가 물려받은 고장난 본성은 잔존하더라도 우리의 품성은 자유함을 누리게 되고, 우리의 영역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아지게 된다. 이타성이 우리 성품 안에서 온전히 재현되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우리의 타고난 본성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타고난 본성으로 인해 우리가 정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동안 우리 생애를 마귀의 왕국을 선전하는 대형 광고판으로 만들어 버렸던 배양된 육적 특성들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회개함을 주셨을 때 우리가 그 선물을 영접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변화됨을 우리에게 선사하셨을 때 우리가 기꺼이 “예!” 라고 화답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피로 사신 우리의 의지와 하늘로 부터 내려지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지점까지 오래 참으시며 우리를 인도해 오셨던 결과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합의 성취에 대한 모든 영광과 찬양은 당연히 우리의 하나님께로만 돌려지게 될 것이다.


래리 커크패트릭(LARRY KIRKPATRICK) 목사는 서던 재림 대학교(Southern Adventist University) 신학부를 졸업하고 유타-네바다 합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수여받고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사역을 거친 후 현재 미시간 합회에서 목회에 임하고 있다. 대쟁투 웹사이트(GreatControversy.org)를 1997년 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강의와 저술 활동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