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데니스 프리비 목사 저서 「참된 복음과의 대면」 4장에서 발췌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하여 명확하게 정의내리고 설명한 이 글은 이 주제에 관해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신실한 재림성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역자: 장윤형 (Fred Chang)
요즘 ‘완전’이란 단어는 골치아픈 단어처럼 보인다. 그 완전이란 것이 도데체 무슨 뜻인가? 우리가 첫번째로 해야할 말은 ‘완전’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마지막 결과라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방법이나 근거가 아니라, 칭의와 성화라는 과정의 결론이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의 주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은 영적으로 유해하다고 믿는다. 그들은 ‘죄없음’ 혹은 ‘완전’에 대해 거론하는 것은 그리스도로 부터 영광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구원의 확신을 빼앗아 버리는 것이며, 예수의 오심이 환영받기 보다는 두려워지게 까지 만든다고 주장한다.
퍼시픽 유니언 대학(PUC)에서 내가 가르치던 과목의 한 학생이 완전에 대한 이런 견해를 매우 확실하게 요점정리한 글을 썻다. 그는 완전이란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에 죄를 정의하지 않고는 정의내리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 학생의 주장은 이러 하였다. 우리는 죄가운데로 출생하였으므로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물려받은 잘못된 욕망들이고 그것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바로 그때까지 죄를짓는 일외에는 아무것도 할수 없게 만든다. 전적으로 굴복된 그리스도인 조차도 그의 죗된 본성때문에 그의 환경에 의해 제기된 잘못된 생각들을 할것이며, 이는 그를 완전에 미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또한 그 학생은 그리스도의 죄없는 삶이 그의 죄없는 본성으로부터 왔다고 언급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수준에서 시작한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의 모본이 아니고,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수준에 이르기를 기대할 수 없다. 이 학생이 자기의 논문에서 내린 결론은, 완전은 예수님 재림때 오직 우리의 죗된 본성이 변화됨으로만 가능해 질 것이며,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인이므로 이생에서 죄짓는 일을 멈출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죄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결론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모든 분야에 관한 결론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여러분은 아시겠는가? 위에서 내가 요약한 이 학생의 발상이 진리라면, 우리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 오랫동안 믿고 가르쳐온 것들의 대부분을 재정립하여야만 한다. 만일 이 발상이 진리가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이 왜 진리가 아닌지 알 필요가 있다. 증거에 대해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의 (Definitions)
우리가 죄(sin)와 죄없음(sinlessness)과 완전(perfection)이란 단어에 대해 가능한한 주의깊게 정의내리는 일은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만약에 죄의 우선적 의미가 ‘죗된 본성’(sinful nature)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때 죄인이 된다. 그러나, 만약에 죄의 우선적 의미가 ‘죗된 품성’(sinful character)이라면, 우리가 옳고 그름을 선택할수 있게된 후에 우리가 하는 선택으로 인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만약 죄가 우리의 본성 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제 할수 없고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인이다. 만약 죄가 우리의 품성 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택들에 대한 통제력을 갖게되고 우리는 선택에 의해 죄인이 되는 것이다.
같은 근거로 만약 죄없음이 ‘죄없는 본성’(sinless nature)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오직 재림때에만 가능해 질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때까지 우리의 죗된 본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죄없음이 ‘죄없는 품성’(sinless character)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때 가능해 진다. 우리가 죄를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만약에 우리가 ‘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재림때까지 죄없음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죄’라는 단어가 품성을 의미한다면 죄없음은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하나의 가능한 일이 된다.
이러한 정의들을 염두에 두고 ‘완전’이란 단어를 분석해 보자. 여기에는 완전에 대해 최소한 네개의 적절한 정의가 존재한다. 그 첫째는 ‘절대적 완전’(absolute perfection)이다. 종종 우리는 인간으로서 결코 절대적으로 완전할수 없다고 한다. 이것은 맞는 말인데, 왜냐하면 절대적 완전은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외에 다른 절대적으로 완전한 존재는 없다. 그러므로 절대적 완전은 피조물들에게 – 인간이든 천사든 – 결코 가능하지 않다. “천사의 완전은 하늘에서 실패하였고, 인간의 완전은 에덴에서 실패하였다.” (Our High Calling, P. 45)
루스벨이 처음에 하나님은 불공정하다고 혐의를 제기 했을때, 천사들의 거의 반이 그에게 귀를 기울였으며 그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The Story of Redemption 참조, p. 18).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회의를 소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 되심에 대한 사실을 설명 하셨으며, 그리하여 루스벨의 도전이 근거없는 것임을 보여 주셨다 (부조와 선지자 참조, P. 36). 그 회의 후에 대략 삼분의 일 가량의 천사들이 루스벨의 편에 가담했으며 그들은 하늘로 부터 쫒겨났다 (증언 3권 참조, p. 115).
이는 루스벨에게 귀기울이고 그가 옳을 것이라 생각했던 상당한 수의 천사들이 그들의 생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적 완전이라는 용어를 하나님과 루스벨에 대하여 생각을 바꾼 이러한 천사들에게 적용할 수 없다. 사실상, 천사들은 십자가 사건이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옳고 사단이 틀렸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납득할 수 없었다. 그 시점까지 천사들 중 일부는 명백히 사단의 비난이 거짓임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하였으며, 십자가에 이르러서야 사단은 그 천사들의 호의로 부터 완전히 제거되었다. 그에 대한 천사들의 동정심은 십자가에서 끝이나게 되었다 (시대의 소망, pp. 758-761). 그러다면 확실히 ‘절대적 완전’은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며 천사들에게 조차 적용할 수 없는 것이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할 때 적용할 수 있는 용어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완전’에 대한 두번째 정의는 ‘본성적 완전’(nature perfection)이다. 우리의 죗된 본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제거될 것이며, 그후에는 내면으로 부터의 죗된 자극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부터 나오는 유혹의 제거를 포함하는 본성적 완전은 오직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만 일어날 것이다. 그전에는 우리가 본성적 완전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죄’와 ‘죄없음’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품성에 촛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능한 ‘완전’의 의미를 논의해 볼수 있다. 거기에는 ‘완전한’ 혹은 ‘완전’이라는 단어에 의해 묘사될수 있는 품성에 관한 최소한 두가지 측면들이 있다. 첫번째 측면은 품성의 굴복(character surrender)이다. 이것은 회심의 순간에 우리가 우리의 삶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굴복시킬때 일어난다.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때 우리의 완전은 완성 되지만 우리는 단지 그순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일을 시작하게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이해하는 만큼, 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만큼 전적으로 굴복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순간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아는 모든 것에 대한 전적인 굴복을 받아 들이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드리는 품성의 굴복이 완전한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 완전함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검토해 보아야 하는 또하나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품성의 성숙이다. 만약 우리가 죄는 선택을 근거로 생긴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또한 우리가 죄짓지 않기로 선택할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품성의 성숙은 간단히 말해 개인의 삶에서 수확할 곡식들이 익었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에 대항해서 죄를 선택하지 않을때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반역하기로 선택지 않으며, 그러한 선택이 어느때에라도 일어날 수 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칭의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의 삶을 통제하실 때에 우리는 죄짓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죄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뜻과 조화 되지않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으신다. 우리가 죄를 지을때, 우리는 사단의 지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서 사단이 운전대를 잡도록 선택하는 것이다.
이 개념은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법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가 들어오시면 (Christ in) – 죄는 나가고 (Sin out), 죄가 들어오면 (Sin in) – 그리스도께서 나가신다 (Christ out). 우리는 그리스도와 죄가 삶의 보좌위에서 동시에 군림하도록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나뉘어진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성숙된 품성 속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전적으로 지배하시며, 따라서 우리는 반역적인 선택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역하기로 선택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지 내가 할수 없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타락한 인간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여러시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왜 하나님의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가? 왜 가능한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할수 없단 말인가?
우리가 살펴본 정의들 중 우리의 연구를 위해 가장 중요한 정의는 우리의 통제행사가 가능한 범주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죄는 선택에 의해 생긴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순종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것이다. 우리는 굴복하기로 선택할 수 있고, 성숙함에로 장성하기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승리를 위한 능력을 제공하시기 때문에 죄없는 품성은 모든 굴복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이란 조심스럽게 정의 되었을때 실제로 가능한 하나의 현실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연구해야할 분야는 우리가 통제력을 행사하는 영역이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완전을 가져오는데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항상 충분한 것이다. 우리는 그 굴복의 근거하여 구원받는다. 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을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변하지 않지만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굴복은 일정치가 못하다. 끝낼수 있고 또 끝내야만 하는 것이 바로 그 방해행위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항상 전적으로 우리를 지배하시도록 해야하기 때문이다. 변수는 우리 굴복의 일관성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일정하지만, 우리의 관계가 때때로 흔들린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죗된 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선택을 하지 않기로 결심할 수 있다. 우리는 실재로 죗된 본성속에 죄없는 품성을 가질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주 중요함을 알게된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성령의 지배하심에 의하여 그의 죗된 본성의 충동들을 극복하셨다면, 같은 방법이 우리에게도 가능하여진다. 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성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 방법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정죄됨은 우리의 본성때문에 짊어지게 되는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하는 선택과 그로인해 계발된 품성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재확인 하는 것은 중요하다.
성경이 말하는 완전
유다서 1장 24절은 그리스도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고 있다. “이제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시고 넘치는 기쁨으로 자신의 영광이 있는 곳 앞에 흠 없이 너희를 제시하시는 분”(한글 킹제임스역). 그리스도는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수 있는가? 유다는 영감아래서 그리스도가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주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넘어지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불가피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넘어지지 않게 지켜 주실 수 있다. 빌 4:13에서 우리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또다른 언급을 발견한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한글 킹제임스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일이 가능한가? 죄에 대한 승리가 가능하다는 것은 정말 사실인가?
벧후 2:9은 “주께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은 시험들에서 건질 줄 아시고”(한글 킹제임스역) 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유혹으로 부터 건져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자신을 유혹으로 부터 건질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께서는 만약 우리가 기꺼이 따르고자 한다면 피할 길을 제공하실 것이다. 고전 10:13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하나님은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한글 킹제임스역).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넘어짐이 불가피할 정도로 우리가 지기에 너무 힘든 어떤 유혹도 우리가 당하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는 모든 유혹에 대한 피할 길이 마련 되어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오는 시련중 죄짓는 것을 불가피하게 하는 단 하나의 유혹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우리가 그분을 신뢰한다면 우리에게 모든 유혹으로부터 피할길을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다.
벧전 2:21,22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참으로 너희가 심지어 그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나니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남기사 너희가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한글 킹제임스역).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없는 삶을 사셨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그가 또한 우리의 모본이 되시며 그 발자취를 따라오도록 초청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길 원치 않는다. 물론, 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우리가 태어난 같은 방식으로 태어났으며 우리가 느끼는 유혹을 느끼시고 우리의 욕망을 경험하셨던 사실을 가정으로 한다. 만약 그 모든 것이 사실이고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는 우리를 위한 모본이 되실수 있는 것이다.
요일 3:2-9은 회심후의 우리의 위치에 관련된 중요한 구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 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는 율법도 범하나니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누구든지 죄를 짓는 자는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 . . 죄를 범하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죄를 짓느니라. . . .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의 씨가 그 속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으므로 죄를 지을 수 없느니라.” (한글 킹제임스역)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분께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으며 죄는 반역이다. 우리가 그분안에 거한다면 우리는 죄짓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속에서 죄짓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죄짓지 않는다는 이전의 진술로 돌아온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계속적으로 거한다면 그분은 우리속에서 죄짓지 않으실 것이며,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는 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반역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 3:21 에서 굉장한 말씀을 발견한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이기는 일의 모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는 그분께서 이기시듯이 이길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그분의 힘과 능력에 의존해야만 하지만 우리가 그분께서 이기시듯 이길 것임은 여전히 사실이다. 고후 10:5은 또다른 대표적인 진술이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상은 우리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생각 조차도 복종하여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생각과 태도를 통제하실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갈 5:16 은 덧붙이기를, “내가 이르노니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한다. 만약 성령이 지배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계속 되풀이 해서 넘어지거나 실패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약속은 우리가 이길수 있고 육신과의 전쟁에서 계속적인 승리를 얻을수 있다는 것이다.
예언의 신이 말하는 완전
엘렌 화잇은 성숙에로의 장성함에 대해 명백하고 강력하게 말한다: “우리는 이길수 있다. 그렇다. 완전히, 전적으로.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피할 길을 만드셔서 우리가 모든 악한 기질과 죄와 모든 유혹을 이기고 마침내는 그와 함께 앉도록하시기 위하여 죽으셨다” (교회증언 1권, p. 144). 모든 죄가 극복될 것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라.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언급들을 읽을때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계속적으로 우리안에 거하도록 허락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함을 통하여 극복한다는 사실이다. “ 만약 당신이 엠마뉴엘 군주의 피뭍은 깃발아래 서서 그분을 충실히 섬긴다면 결코 유혹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당신을 넘어짐으로부터 보호하실수 있는 한 분이 그대곁에 서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Our High Calling, p. 19). 얼마나 놀라운 언급인가. 우리는 어떠한 유혹에도 굴복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넘어짐에서 지켜줄 수 있는 한 분이 우리편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단의 능력보다 더 강하다. 만약에 우리가 그분을 계속적으로 마음의 보좌에 모시면 우리는 결코 넘어질 필요가 없다.
“죄를 범하는 데에 핑계란 있을 수 없다. 거룩한 기질, 그리스도와 같은 생애가 모든 회개하고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루어질 수 있다” (시대의 소망, p. 311). 그러나 이 말씀의 인접한 문맥을 들여다 보자.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장 높은 인간의 생각이 이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아지게 되는 하나님의 이상에 대해 말하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인용한다. 그녀는 이 명령이 하나의 약속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사단의 권세로 부터 전적으로 자유케 되기를 원하신다고 말한다.
“유혹자의 힘이 그릇된 행동에 대한 구실로 간주 되어서는 안 된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공언하는 자들이 품성의 결함에 대하여 변명하는 소리를 들을 때에 환호한다. 죄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핑계이다” (시대의 소망, p. 311). 이러한 생각들에 비추어 엘렌 화잇은 죄를 범하는 데에 대한 아무런 변명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나는 매일 죄를 지어. 난 어쩔수가 없어. 죄짓는게 내 본성이야. 죄 짓는 것을 피할길이 없어” 라고 말할때 핑계를 대는 위험속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자신들의 삐뚤어진 품성들에 대해 변명하려 할때 사단을 환호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죄짓는 것에 대한 핑계란 있을 수 없다. 죗된 세상에 태어나고 죗된 본성을 유전받은 것에 대해서는 확실히 핑계댈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에 대해 선택권이 없고, 그것을 우리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짓는 일에 대하여 우리는 선택권이 있고 통제할 수가 있다. 이것이 엘렌 화잇이 완전과 죄없음을 언급할때 의미하는 바이다.
엘렌 화잇은 만약에 우리가 예수께서 그러하셨듯이 하나님께 굴복하면 우리도 그분의 완전한 인성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시대의 소망, p. 664). “단 하나의 생각도 그분께서는 유혹에 굴복치 않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와같이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p. 123). 우리가 예수님에 의해 계속 지배받으면 단 하나의 생각도 유혹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개념이다. “남녀들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분의 교훈 아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셨던 생애를 살 수가 있다. 사단과의 싸움에서 그들은 그분께서 가지셨던 모든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그들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주신 분을 통하여 정복자 이상이 될 수가 있다.” (교회증언 9권, p. 22)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갖지않은 것 중 그분에게 허용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의 능력은 성령께서 그분의 삶을 지배하심으로 부터 왔으며, 우리가 그분께서 하셨듯이 하나님께 굴복하면 우리도 같은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3장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사셨나?’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께서 하신것 처럼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12년 7월 4일자 참조).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애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이루어지던 동일한 품성과 동일한 업적을 드러낼 것이다.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율법의 모든 조목과 조화를 이루게 될 것이다.” (산상보훈, p. 78) 이러한 진술은 (1) 하나님의 법은 순종할 수 있으며, (2) 그 순종은 오직 유전에 의해 타고난 우리의 약하고 죗된 본성을 침투하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힘있는 능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다.
다음의 진술은 성육신의 목적들 중 하나를 눈에 띄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약하고 타락한 본성을 소유하시고 오셔서 우리가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은 이유로 용기잃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격려하시기 위하여 인류가 신성에 의하여 지배된다면 삶속에서 죄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다. “구주께서는 연약한 인성을 취하시고 죄없는 생애를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인간성의 약점 때문에 승리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그리고 그분의 생애는 인성이 신성과 연합할 때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치료봉사, p. 180)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셨으므로 남녀들 또한 그분의 은혜를 통해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구원에 필요한 것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6년 3월 15일자) 그리스도가 한것은 그의 완전한 순종을 포함하여 무엇이든지 그분이 사용한 같은 극복 방식을 사용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엘렌 화잇은 우리의 실패와 죄의 원인이 우리의 약해진 인간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기인한다고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실물교훈, p. 331 참조). “구속의 경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강한 것일지라도 모든 죄의 습성을 정복하고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놓으셨다.” (가려뽑은기별 1권, p. 82). 그녀의 글에서 모든 유혹이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제지될수 있다는 말은 반복적으로 되풀이 된다. 만일 정말로 모든 유혹이 의지에 의하여 거절되어 버린다면 그 결과는 필연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될 것이다.
다음 세 진술들의 촛점은 정확히 죄짓지 않는 삶에 대한 것이다.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죄를 짓게하는 어떠한 유혹보다도 더 강하다. “사단의 안락의자에 앉아서 ‘해봐도 소용없어’, ‘죄를 그칠수 없어’, ‘죄를 이길힘이 당신에겐 없어’ 라고 말하지 말라.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당신 스스로는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당신 맘속에 모시는 것은 당신의 특권이며, 당신이 그분의 노력에 협력할 때 그분께서 당신 안에서 죄를 이기실 수 있다.” (Our High Calling, p. 76) “전적으로 하나님께 굴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법에 순종 하므로써 죄없이 사는 특권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6년 9월 27일자) “그리스도께서는 그대로 하여금 죄를 그치는 것이 가능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돌아가셨는데,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94년 8월 28일)
엘렌 화잇은 하나님께서 도덕적 완전(moral perfection)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죄로 이끄는 유전되거나 배양된 성향들 때문에 표준을 낮추어서는 결코 안된다. 사실상 품성의 불완전은 죄이며 마땅히 교정 되어야 한다. 개인이 완전한 품성을 향하여 움직일때 이것은 그자체가 “행위에 있어서의 완전”으로 나타난다 (실물교훈, pp. 330-332).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들은 사람의 행동에 아주 결함이 많을지라도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동기와 욕망이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룰때 외적 행동역시 자연히 조화를 이룰 것이다.
엘렌 화잇이 지구 역사의 마지막 사건들에 대해 기록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개인적인 죄들에 대해 계속 승리를 얻어나가게 될 것이라고 자세히 말하였다. “그러나 그 때가 오기 전에 우리 안에 불완전한 모든 것은 드러날 것이며 버려질 것이다. 모든 시기와 질투 그리고 악한 추측과 이기적인 계획은 생애에서 추방될 것이다.” (가려뽑은기별 3권, p. 427) 이 진술은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 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의 바로 그 순간까지 죄짓고 있지 않을 것임을 증거하고 이쑈다. 재림전에 죗된 동기와 감정까지도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해서 극복될 것이다.
완전의 목적
우리는 이제 완전이라는 주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극히 중요한 원칙과 대면하게 된다. 완전이 왜 중요한가? 그것이 무엇을 증명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재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명예, 곧 그리스도의 명예는 당신의 백성의 품성을 온전케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시대의 소망, p. 671) “그리스도의 명예는 그의 선택받은 백성의 품성이 완전해짐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영문시조, 1897년 11월 25일자) 품성 완전의 목적은 우리가 그로 인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이미 칭의시에 품성의 굴복에 의해 성취 되었다. 완전은 하나님 말씀의 신뢰성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율법이 타당하고 준수될 수 있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사단은 바로 이주장에 도전했으며, 마지막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하나님의 남은 백성들은 그분 말씀의 신뢰성을 옹호하는데 있어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실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분의 법을 완전히 순종하기에 필요한 신적 능력을 제공하므로써 그분 자신의 이름을 옹호하실 것이다. “만일 하늘로부터 끊임없이 증가되는 빛이 필요한 한 백성이 지금껏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율법의 보관자가 되고 당신의 품성을 세상 앞에서 옹호하도록 부르신 백성이다.” (교회증언 5권, p. 746)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생애가 아니면 세상이 개화될 방법이 있겠는가?. . .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에 그분 영광의 밝은 빛을 반사할 것이다. .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하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그분께서 이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도록 준비를 해놓으셨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4년 1월 28일자)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계발된 완전한 품성은 그리스도와 사단사이에 있는 대쟁투의 마지막 해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사실상, 하나님의 마지막 세대 백성들가운데 이루어지는 완전의 개념을 강조하는 이러한 이유가 바로 궁극적인 쟁점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주장은 전적인 순종이 가능 하다는 것이고, 사단의 주장은 죗된 본성과 품성이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누가 진실을 말하는가? 오직 하나님의 남은 자손만이 사단이 거짓말장이인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
우리중 누구라도 흠이있는 품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을 받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 영혼의 성전에 어떤 얼룩이나 더러움이 있을 수 없다 (교회증언 5권, p. 214 참조).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하고 계시는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여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 구주께서는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 . .사단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셨다. 그러므로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대쟁투, p. 623)
완전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 한가지 중요한 개념은 완전이 결코 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완전이란 어떤 고원의 평지가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간주되었지만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셨다. . .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안에서 계속적으로 자라날 수 있다.” (교회증언 1권, p. 339)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분이요 순결케 하시는 분으로 좌정해 계신다. 그러므로, 그분의 형상이 그들에게서 완전히 반사되면, 그들은 완전하고 거룩하며, 승천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은 큰 사업을 하도록 요청을 받고 있다. 우리는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스스로를 정결케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완전히 이루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 (교회증언 1권, p. 340)
완전함이란 ‘성장'(growth)이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더이상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을 때 조차도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 배워야 할 많은 것이 있다. 발전은 영원을 통해서 조차 계속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부터 반역이 제거되고 그리스도인이 사단의 감언이설에 더 이상 넘어가지 않게 될 때, 그가 완전함 가운데 위를 향하여 움직일수록 그 품성의 성장은 지극히 경이로울 것이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우리가 재림전의 이생에서 죄없게 될 것이라고 엘렌 화잇이 결코 언급한 적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다음의 두 진술은 재림전에 일어나는 죄없음에 대해 매우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이 죄 짓기 이전에 살았던 죄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In Heavenly Places, p.146; SDA 성경주석 6권 p. 1118 영문 참조) 이 놀라운 진술은 죄짓기 이전의 아담의 죄없는 상태에 우리가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말은 명백하게 엘렌 화잇이 품성과 관련된 죄없음의 정의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우리가 죄없는 본성이 아닌 죄없는 품성을 가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교회의 성화를 위한 모든 대비를 해 놓으셨다. 그분은 모든 영혼이 죄와의 전쟁에서 정복자 그 이상이 될 은혜와 힘을 풍부하게 준비해 놓으셨다. . .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죄없는 삶을 사심으로 인해, 그의 능력 안에서 백성들 또한 죄없는 삶을 살게 하셨다. 그분은 그들이 진리의 원칙들을 이행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성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세상에 보여주길 원하신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2년 4월 1일자) 이 말의 문맥이 성화요 죄에대해 계속되는 전쟁임을 주목하라.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전의 이 준비의 시간, 다시말해 이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는 죄없는 삶을 살 수가 있다. 엘렌 화잇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서 죄없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죄없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명백히 거라낌없이 말하고 있다. 다시한번 이 말은 죄없음의 정의가 죄없는 품성임을 나타낸다.
그리스도 재림시에 한가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는데 , 그것은 바로 품성이다. 은혜의 시기 동안에 형성된 우리 품성의 특질들은 재림에 의해 바뀌어 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때 형성해 왔던 같은 기질들을 하늘에서도 가지게 될 것이다. 품성은 재림때 바뀌지 않을 것이므로 품성의 변화가 지금 매일의 삶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재림신도의 가정, p. 16 참조).
이러한 높은 표준으로 인해 어떤 신실한 그리스도인도 낙담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우리에게 기대하실 때 그분의 은혜로 그것을 제공 하신다는 약속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우리의 구주께서는 어떤 영혼에게도 불가능한 것들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실행할 은혜와 능력을 기꺼이 제공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것도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매우 높고도 거룩한 특권을 배푸신 이들에게 부어줄 모든 완전한 은혜를 준비하고 있지 않으셨다면, 그들에게 완전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실 것이다. . . .우리의 과업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사시면서 품성의 모든 측면에서 취득하셨던 완전을, 우리 행위의 영역에서 취득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God’s Amazing Grace, p. 230)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완전하도록 만드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는 확실한 조언을 얻는다. 그분은 우리를 완전하게 하실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자신을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본으로 바라보아야 하며 그분이 설계하신 계획을 따라야 한다.
어떤 이들은 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논의가 오늘날 성경 학도들의 시간과 정력을 차지해야 하는지 의아해 한다. 아마도 다음의 진술들은 이 주제의 중요성을 보여줄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품성의 완전을 요구하신다. . .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표준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속물과 보증으로써 오셨을 때 그것은 인간으로써 그렇게 되신 것이었다. . . .그분의 신성이 인성의 베일에 가려진 채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듯이, 만일 우리가 힘을 달라고 강한자를 붙잡으면 우리도 그와같은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영문시조, 1897년 3월 4일자)
당신은 그리스도가 가지신 본성과 순종하시기 위해 사용하신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가? “아무도 자신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품성의 완성에 도달하기에 실패할 필요가 없다. .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의 표준에 도달하라고 초청하시고 우리 앞에 그리스도의 품성의 모본을 두신다. 끊임없이 죄악을 저항하는 생애로 온전하여진 인성을 쓰신 구주께서는 신성과의 협력을 통하여 인간이 이 세상에서라도 품성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셨다. 이것은 우리도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보증이다.” (사도행적, p. 531)
만약 그리스도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과 다르거나 혹 그가 죄를 이기기위해 사용하신 방법이 우리가 사용할수 있는 방법과 다르다면, 그가 하신일을 우리도 할수 있다는 말은 그 어떤 타당한 가능성의 범주를 넘어선 것처럼 보이다. 하지만 그분의 본성이 우리의 본성이고 그분의 방법이 우리의 방법과 같은 방법이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있어서 완전한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갖게된다. 그분께서는 어떻게 불가능을 가능케 하셨는지 그분의 능력을 통해서 보여 주셨으며 그분의 모본을 통해 격려하셨다. “주님의 생애와 품성으로서 하나님의 품성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알려주고 있다.” (가려뽑은 기별 1권, p. 349) “그분은 모든 의를 이루시고 인류의 우두머리로써 사람들에게 그들도 똑같이 할수 있으며 하나님의 요구의 모든 조항들을 만족시킬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려 오셨다. . . . 품성의 완전은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얻어질 수 있다.” (God’s Amazing Grace, p. 141)
엘렌 화잇은 완전한 삶을 사는 가능성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들을 질책함에 있어서 매우 단호하였다. “정확한 순종이 요구된다. 완전한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공정하고 옳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Manuscript 148, 1899) 그녀가 완전의 가능성을 믿는것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유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개인적 죄를 변명하는 심리적 위험 때문이고, 둘째는 그 어떤 그리고 모든 죄를 승리하게 할 그리스도의 능력을 마음속에 최우선으로 지녀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죄를 사랑하고 마음에 품는것은 그죄의 창시자이며 그리스도의 치명적인 원수를 사랑하고 마음에 두는 것이다. 만일 그들(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사람들)이 죄를 변명하고 비뚤어진 품성에 집착한다면 그들은 사단에게 애정의 한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Our High Calling, p. 321)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죄로부터 지킬수 있다는 충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해줄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리뷰 앤드 헤랄드, 1904년 3월 10일자)
이것이 엘렌 화잇의 완전과 죄없음에 관한 일반적 진술들이다. 그녀는 계속적으로 극복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우리가 유혹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존하므로 그분이 승리하셨듯이 승리할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국을 쫓아갈 수 있다. 엘렌 화잇은 거듭 되풀이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런 문맥에서 ‘죄없음’(sinlessness)이란 용어를 거리낌없이 사용하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묻고있는 질문은 누가 이런 품성의 완전을 이룩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중 누가 완전하단 말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선지자(에녹)의 경건한 품성은 그리스도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을'(계 14:3) 자들이 달성해야 할 거룩한 상태를 대표한다.” (부조와 선지자, p. 88) 그녀는 에녹을 도덕적 오염이 그의 주변에 충만하던 시대에 살면서도 그의 마음을 하나님과 하늘의 것들에 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얼굴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비취던 빛으로 밝았고, 그가 호흡하는 대기는 죄와 타락으로 얼룩졌지만 그는 거룩한 삶을 살았으며 그 시대의 편만한 죄악으로 더럽혀지지 않았다. (교회증언 2권, p. 122 참조) 명백히 에녹은 죄짓지 않기로 선택했다. 이 세상 역사 중 아주 좋지 않았던 한 시대 가운데서도, 그는 그의 삶을 그리스도의 삶과 조화되도록 살기로 선택하였다.
“아담 이후로 매 세대마다 다소의 사람들이 그의 모든 책략을 대항하고 인간의 능력 안에서 행하고 되어지는 것에 대한 고상한 대표자로 나섰다. . . .에녹과 엘리야는 인간이 선택만 한다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인류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올바른 대표자들이다. 사단은 이들 고상하고 거룩한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싼 도덕적 오염 중에서도 오점이 없이 섰으며 의의 품성을 완성하였고 하늘로 승천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 사실 때문에 크게 당황하였다. 사단의 유혹을 극복하였으며 도덕적 능력에서, 고상한 정직성에서 뛰어나므로 그는 그들을 죽음의 권세 아래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그는 그의 유혹으로 모세를 정복할 능력을 가졌으며 그의 탁월한 품성을 손상시킬 수 있었고 그로 하여금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속한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는 죄를 범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음으로 승리하였다.” (리뷰 앤드 헤랄드, 1874년 3월3일자)
승천이전에 에녹과 엘리야에 의해 개발된 품성에는 명백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죄를 저항하기로 선택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아름다운 구절을 보게된다: “우리의 시대에도 에녹과 같은 자들이 있다” (실물교훈, p. 332). 그렇다면 이런 유형의 품성의 완전을 성취한 이들이 있는가? 그 대답은 자명하다.
우리가 완전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엘렌 화잇의 대답은 매우 확실하다. “그대가 예수께로 더 가까이 갈수록 그대의 허물이 그대의 눈에 더 많이 드러나 보일 것이니 대개 이는 그대의 시력(視力)이 더욱 밝아져서 그대의 불완전한 것이 예수의 완전하신 품성에 대조되어 더욱 뚜렷이 나타나 보이게 되는 까닭이다. 이것은 사단의 미혹이 그 힘을 잃어버리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성신의 생기 있는 감화가 그대를 각성시키고 있는 증거이다.” (정로의 계단, p. 64) 우리의 삶이 예수님과 더욱 조화되면 될수록 우리는 자신들 속에서 선한것을 점점 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이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오면 올수록 우리는 더욱 무가치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예수께 더욱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분의 품성의 순결을 더욱 분명히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더 죄의 극악함을 알게 되고 자신들을 높일 마음이 더욱더 적어질 것이다.” (사도행적, p. 561)
그러면 우리가 완전하고 죄없다고 주장할수 있을 것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품성을 참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들이 죄없다고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성화된 생애, p. 7) “우리는 우리의 거룩함을 자랑하지 않을 것이다. . . . 우리는 이 수치스러운 몸이 변화되어 그분의 영광스런 몸처럼 변형되기 까지는 ‘나는 죄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영문시조, 1888년 3월 23일자) “삶의 투쟁이 끝나고, . . . .하나님의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는 그때에 가서야 비로서 우리가 구원 받았고 죄 없다고 주장하기에 안전해 질 것이다.” (영문시조, 1895년 5월 16일자)
이러한 글들은 죄 없다는 ‘주장’, 즉 우리맘 속에 우리가 죄 없다는 생각과 관련된 말들이다. 우리가 오직 영화롭게 되어지는 때에 가서야 우리가 구원받았고 죄없다고 주장하기에 안전해 질 것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라. 우리는 바로 지금, 죽더라도 구원받을 그런 구원받은 상태에 있는가? 나는 성경이 우리에게 바로 지금 그리스도안에서 구원받았음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우리에게 영광화의 때까지는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안전치 못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것'(being saved)과 ‘구원받았다고 주장하는것'(claiming that we are saved)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죄없이 되는것'(being sinless)과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 하는것'(claiming that we are sinless)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거룩하다고 주장하는 아무도 실제로 거룩하지 못하다. 하늘 책에 거룩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며, 그들 자신들의 선함을 자랑하기를 지극히 싫어할 사람들이다.” (The Faith I Live By, p. 140)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부르시는 사람들이 결코 거룩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죄없는 것과 죄없다고 주장하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죄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과 가장 조화롭게 사는 사람은 결코 죄 없다는 주장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는 점점 아무런 주장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광, 자랑 그리고 우리가 성취한 그 무엇이라도 십자가 아래 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오늘날 조차도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반역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아주 조화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 시기의 종결
만약 우리가 은혜의 시기에 끝이 있고 하나님이 은혜의 시기가 끝난 이후에 뭔가 증명해 보일 특별한 것이 있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는 죗된 욕망에 굴복하지않고 사는것을 의미하는 완전한 품성의 성숙도 함께 믿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은혜의 시기가 끝난 이후에는 “그들의 희생과 고백과 기도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 줄 대제사장이 성소에 없기 때문이다” (초기문집, p. 48). “또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환난의 때에 대제사장이 성소에 없는 상태에서 주의 안전에서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맞고 환난의 때에 보호함을 받게 될 자들은 예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하여야 한다. . . .그 때에는 준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처지를 변호해 줄 중재자도 없을 것이다.” (초기문집, p. 71) “하늘성소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업이 그치게 될 때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 없이 서게 될 것이다. 그들의 옷은 흠이 없어야 하고, 그들의 품성은 피 뿌림을 통하여 죄에서 깨끗해졌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 자신의 꾸준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악과의 투쟁에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대쟁투, p. 425)
은혜의 시기의 끝 이후에 하늘에는 달라진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한 제사장의 봉사가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버지 앞에서 죄인들을 위해 변호해 줄 중보자도 중재자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지구상에 있는 그분의 백성안에 거하시는 권능을 부여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제거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죄를 사하시는 제사장의 봉사가 은혜의 시기가 마침으로 종결된 것이다. “이처럼 두려운 시기에 의인들은 중보자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한다” (대쟁투, p. 614). “예수님의 중보가 끝난 후에 성도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중보자 없이 살아야 한다” (The Story of Redemption, p. 403).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이 끝났다는 것은 은혜의 시기가 마친 후에 더 이상 죄의 용서가 없을 것을 의미한다. 만약 죄에 대한 용서의 사역이 끝난다면, 은혜 시기의 끝 이후에는 하나님께로 인을 맞은 자들가운데 죄짓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귀결이다. 우리는 오직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때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전에 있을 중보자 없이 짧은 지체됨의 주된 이유는, 자신들의 의지를 전적이고도 영원히 그분의 뜻과 연합한 자들의 삶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온 우주 앞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권능의 실제를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나는 믿는다. 이전에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단의 말에 동의하므로 신성한 신뢰를 저버렸던 그 당사자들이 정말로 죄에 대하여 핑계할수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드러내 보이게 될 것이다. 은혜 시기의 끝은 하나님이 그분의 우주 앞에서 보이시는 마지막 실물 논증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인 즉슨,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는 것은 가능한 것이며, 참으로 그법은 의롭고, 선하고, 거룩하다는 것 말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이기라는 성경의 훈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은혜 시기의 마침이라는 실제와 144,000의 도전을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죄없이 사는 삶에 대한 진실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을 논의할 때 우리는 목표 – 즉 마지막 결과에 대하여 말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관심은 칭의와 성화에 두어야 하는데 이는 그것이 구원을 받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분은 능력과 승리를 가지고 우리의 삶에 들어오신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에 집중할 때에 마지막 결과 혹은 목표는 자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분의 사역을 하시도록 할 때에 이루어지는 자연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마치 운동선수가 육상경기에서 경주의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을 테이프를 기억하며 앞의 몇 야드를 집중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경주의 끝에 다다를 목표가 있을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것이다.
성서적 완전의 요약
먼저 우리는 완전의 의미라고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확실히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완전이 무엇인지 이해 하려면, 완전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에 반대되는 개념들을 철저히 멀리해야 한다. 나는 완전의 교리에 대한 대부분의 반대 의견들이 완전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이던지 재림 이후던지 완전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완전이란 결코 그리스도와의 동등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완전이란 연약함이 없는것을 의미하지도, 유혹으로부터 자유스러움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완전이란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나 혹은 정신적인 혹은 육체적인 실수가 없음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완전한 그 누구도 자신이 완전하다고 결코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완전주의'(perfectionism)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엄격히 말해 단어 그 자체에는 아무 부정적일게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완전에 대한 믿음을 묘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생각속에 ‘완전주의’란 극단적이고 왜곡된 완전에 대한 개념을 의미한다. 이런 부정적 의미에서 완전주의란 더이상 발전될 여지가 없는 하나의 절대적인 위치를 말한다. 이런 사상은 사실상 성경보다는 헬라 철학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 왜곡된 완전주의는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는 상관없이 존재할수 있는 사람의 특질에 촛점을 맞춘 것이다.
우리는 극단적인 완전주의에 관여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아를 다시한번 마음의 보좌위에 두고 그리스도께서 삶을 지배하시지 못하도록 하는 자아중심적 율법주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종을 강요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런 사람은 자기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순종하게 된다. 이러한 왜곡된 완전주의는 극히 위험하지만, 또한 완전해질 수 없다고 하는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위험한데,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성령의 능력을 제공하시는 임재를 통해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가리워 버리도록 인간의 죗됨과 무력함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완전이 실제적으로 가능한 목표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실 살아있는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완전해 질 수 없다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지켜질수 있으며, 사람이 지금 바로 여기서 정말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셨던, 인간의 완전한 대속물인 동시에 모본되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완전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이 완전주의와 불완전주의의 두 극단과는 다르다고 믿는다.
이미 완전이 아닌것에 대하여 언급했으므로 이제 완전이 무엇인지 말해야된다고 생각된다. 완전이란 그리스도와 아주 긴밀한 관계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이 죄에 대한 외적 혹은 내적 충동들에 반응 하기를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완전이란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협력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자아에 대해 계속적으로 죽고 자기자신의 독립된 의지와 성향을 거부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이기주의와 자만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인간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와 융합하여 성령께서 전적이고 최종적으로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완전이란 영혼을 모든 죄의 얼룩 혹은 하나님께 대한 불충성으로부터 깨끗하게 지키는 끊이지 않는 믿음의 실행이다. 완전은 예수님의 삶을 반사하는 그 사람의 동적이며 자라나는 삶의 방식을 나타내며, 그로인해 더이상 반역하는 일이나 죗된 욕망에 굴복하지 않는것을 말한다. 완전이란 예수께서 하셨듯이 관계를 하나님과 연합시키는 것이며 그분께서 나타내 보이셨던 품성의 특질들과 연합 하는것 즉,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을 말한다. 완전이란 성령의 풍성한 열매를 가지고 그로 인해 죄없이 살면서 성령 안에서 성숙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완전이 올바로 이해 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품성의 성숙이라는 관점에서 보게될 것이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과 조화되게 사는것을 의미한다. 그분께서는 우리안에 거하시고, 우리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이와같은 임재는 반역과 죗된 욕망이 맘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차단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스스로 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실 것이다.
비록 이 교훈이 신약과 엘렌 화잇의 글에서 확실하게 보일지라도 어떤 이들은 그래도 우리가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죄없음을 기대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리기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아마도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말하려 하는것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의도적이거나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는게 아닐찌 모른다. 이런 오류는 죄의 의미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사셨던 방법에 대한 오해와 더불어 시작 되었으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오해속에 영구화 되어버렸다. 보시다시피, 만일 예수께서 오직 인간의 대속물만 되시고 모본이 되시지 못한다면 그분께서 하신데로 우리도 따라가려는 도전 정신은 엄청나게 감소될 것이다. “사단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치명적인 궤변으로 그들을 속이려고 항상 힘쓰고 있다” (대쟁투, p. 489).
옳게만 이해된다면, 사람들을 타락하는것으로 부터 지켜줄 하나님의 능력안에서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란 한 사람의 삶에 있어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자발성을 주는 긍적적인 힘이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의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는 이제 그의 삶에서 무엇이 성취 될 수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그는 최상의 기쁨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에서 찾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메시지는 엄청나게 단순해 진다. “예수께서 하셨으므로 하나님께 의지하여 나도 할 수 있다. 나도 그분께서 하늘 아버지를 믿음으로 사신 것처럼 살 수 있다.” 이러한 경험속에 우리는 삶의 어떤 분야에서도 불순종의 생각 없이 살게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죄짓는 것이 가능한 이 타락한 본성에서 품성의 완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더이상 수시로 자아방종의 영역으로 드나들 필요가 없다. 우리는 예수께서 모든 유혹에 대해 “NO” 라고 말하셨듯이 우리도 모든 유혹에 “NO”라고 말 하게될 것이다. 아마도 예수께서는 신이셨기에 죄가 없으셨지 않겠냐는 끈덕진 의문을 잠잠케하기 위하여, 마지막 세대는 타락한 본성을 가진 남녀들도 죄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해 보일 것이다. 이 마지막 실물 논증은 하나님의 품성과 그분의 정부와 그분의 공의와 자비를 옹호하는데 기여할 것이며, 대쟁투는 이제 그 종막에 매우 가깝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남녀들에게 그들이 ‘죄 없이 살 수 있다’(live without sin)는 것을 보여주고 그들의 말과 행동과 정신이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시고 세상의 증오를 짊어지셨다. 우리는 만약 이 능력을 우리의 삶에서 나타낼 수 만 있다면 ‘완전한 그리스도인'(perfect Christians)이 될 수가 있다.” (The Upward Look, p. 303).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에 대한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다. 이 약속 때문에 성서적 완전은 결코 좌절시키는 주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앞에 이제껏 놓여진 가장 영광스러운 가능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우리를 타락으로 부터 지켜 주실 수 있으시다.
데니스 프리비(DENNIS PRIEBE) 목사는 50년 동안 목사, 교사, 그리고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11년 동안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후, 30년 이상을 어메이징 팩트 선교 기관의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데니스 프리비 목사의 세미나 동영상 (한글 자막 첨부 - 출처: MIGHTYC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