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리 교회 성도님들, 지난 주간도 주님과 함께 평안 하셨나요? 좋은 안식일 입니다.

저는 포트리 교회가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건강하고 은혜로우며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한 교회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교우님들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그러한 교회가 되도록 정진했으면 합니다. 오늘 안식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심령의 위로와 영적으로 재무장하는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의 주제 성경절은 요한복음 14:21절과 로마서 2:13절의 말씀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 14:21)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로마서 2:13)   아멘

어떤 학자가 여행 도중 퀘이커 교도 노인의 집에서 유숙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학자는 노인에게 자기가 어떻게 학문을 닦는지 자랑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공부를 시작하고, 옷을 입으면서 시를 암송하고, 면도를 하면서 희랍어 단어들을 공부한다고. . . .그렇게 하루 종일 공부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런대 그 말을 듣던 노인은 그 학자의 자랑에 감명을 받기는 커녕, “그러면 선생은 도대체 언제 생각이란걸 하시오?” 하고 나무랐다고 합니다.

이 예화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많이 읽고 암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정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고 있는가 하고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훌륭한 책은 우리가 단번에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깊게 생각하게 하여서 그 책을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갈구하는 그 무엇을 찾고 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자주 봉독하여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의 한 구절을 읽고 기도하며 그 구절이 우리의 삶에 요구하는 하나님의 뜻을 깊게 명상하면서 적용할 때, 우리가 참된 제자되는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읽고 암송하는 성경 말씀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하고 성장시켜 주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 신앙의 척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107페이지에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이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존전에 있음을 느끼면서 경외심을 갖고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모든 경박하고 사소한 것들을 제쳐 놓아야 한다. 말씀의 어떤 부분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다른 부분의 참된 의미는 쉽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끈질긴 연구와 묵상, 그리고 열렬한 기도가 있어야만 한다. 모든 연구자는 성경을 펼칠 때에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깨우쳐 주실 것이란 약속은 아주 분명하다. 성경 연구에 임하는 정신 상태에 따라서 그대 곁에 가까이하는 조력자의 성격이 결정될 것이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는 자들 곁에 빛의 세계에서 온 천사들이 함께 할 것이다. 반면에 자부심을 갖고 불경스런 태도로 성경을 펼치게 되면, 그 마음속에 편견을 품으면, 사단이 그대 곁에 임하여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왜곡된 빛 가운데서 제시할 것이다.” (목사에게 보내는 권면 107)

명백한 성경 말씀이 왜곡되어 주장되는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율법주의”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계명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율법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부 몰지각한 기독교인들이 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율법주의”의 참된 성서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율법주의란 무엇인가?

마귀는 오랜 교회의 역사를 통해 기독교의 “믿음, 은혜, 사랑” 같은 여러 용어들에 그의 변질된 의미를 주입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마귀의 도구로 사용된 분별력 없는 기독교인들에 의해 이러한 변질된 용어들이 많이 쓰여지고 전해져 왔습니다. 그 중 “율법주의” 라는 용어가 그렇게 일부 기독교인들에 의해 곡해되어 쓰여지고 있는데, 하지만 우리는 “율법주의”라는 용어가 아직도 여러 표준 사전들에서 다음과 같이 비교적 정확하게 정의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 웹스터 신세계 사전 (Webster’s New World Dictionary) – “신학에서 선행에 의한 구원을 주장하는 설”
  • 리더즈 다이제스트 백과사전 (Reader’s Digest Great Encyclopedic Dictionary) – “신학에서 은혜에 의하지 않고 선행이나 엄격한 종교적 규약의 준수를 통한 구원을 주장하는 설”

여기 인용된 일반적 사전들의 정의를 보더라도, 우리는 이런 율법주의적 구원론에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가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율법주의에 대해 엘렌 화잇은 위의 정의들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명확하게 그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적 신앙에 따라 살려는 시도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계명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노력하에 속박된 노예 정신을 불러일으킨다” (SDA 성경주석, 6권 1077 페이지).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절은 바로 “우리 자신의 힘으로” 라는 구절인데,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존재가 임재하지 않는 율법주의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로마서 7:25에서도 한 때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이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외적/내적 죄악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율법주의자의 좌절감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5)

”내 자신이”, “혼자서”, “내 자력으로”,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하려는 노력 – 바로 이것이 율법주의의 올바른 의미입니다. 오랫동안 신학 사전들에서는 이렇게 율법주의의 뜻을 올바로 밝히고 있었는데, 이러한 정의를 접하면서 우리는 몇가지 분명한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1) 율법주의란 그 어떤 한 계명과 관례에만 적용되고 다른 계명과 관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이 율법주의라면,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요, 일요일에 그와 똑 같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2) 율법주의는 행위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태도와 동기와 직관합니다. 자기 자신의 힘에 의존해서 자기 혀를 다스리려는 사람은 율법주의자 이지만, 이 똑 같은 말조심을 그리스도의 도움에만 의존해 성사시키는 신자는 율법주의자가 아닌 것입니다. 이 둘에 있는 차이는 그들의 태도이지 밖으로 들어나는 행위가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갈라디아서 4:22-23에 있는 바울의 비유에서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라디아 4:22-23)

이 성경 구절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이 하가와 가진 관계의 결과와 사라와 가진 관계의 결과 사이에는 겉으로 들어나는 차이가 없습니다. 똑 같이 아들들이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행위가 아닌 그 행위를 있게 한 아브라함의 태도와 동기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한 행위은 자기 자신의 구상에 의지하여 성사시킨 행위, 즉 율법적인 행위였으며, 그의 또 다른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이룬 행위였던 겁니다. 이처럼 율법주의란 행위에 있지 않고 그 행위를 있게 한 태도나 동기에 있습니다. 두명의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해진 같은 행위가 그 행위를 한 그들의 태도와 동기에 따라 율법주의적일 수도 있고 믿음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두번에 걸쳐 행한 같은 행위도 그 때 그 사람의 태도와 동기에 따라 그 행위가 율법적일 수도 있고 믿음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존재가 없는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함부로 매도하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올바르지 못한 행습입니다. 율법주의는 사람의 태도및 동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또 그 태도와 동기는 사람의 마음에 존재하는데, 우리 인간의 안목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동기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때, 어느 한 사람이 (마치 자신에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읽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듯이) 다른 어떤 형제를 율법주의자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무서운 행습들을 생각없이 함부로 하고 있는 이들은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이사야 14:14) 고 한 마귀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지나 않는지 조용히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올바르게 읽고 판단하는데도 실수를 많이 하는 한심한 존재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이 약점과 관련된 무의식적이고 비의도적인 율법주의에 있습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도움없이도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우리가 준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그 누구도 분명히 “아니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자명한 진리의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진리를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매순간 동행하는 개인적 관계에 부주의함으로 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능력을 상실하여 그리스도인 삶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부주의함에서 오는 율법주의에 대해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애써 지키고 우리의 동기를 주의깊게 돌아보며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분리되지 않도록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자주 언급되고 있는 율법주의의 의미는 이러한 부주의함에서 초래된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지금 진실한 신앙인들을 향해 공격적으로 주장되는 “율법주의”의 개념은 도덕률 철폐주의 (antinomianism)를 방불케하는 현대 캘빈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이 지니고 있는 율법주의의 개념은 정통적인 기독교의 개념 (즉, “그리스도의 도움없이 인간의 힘에 의존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세”) 가 아닌, 그 어떤 동기에서 유래하던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그 자체를 율법주의로 규정하는 곡해된 개념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죄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설상 그리스도의 도움이 있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율법주의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더럽혀지지 않은 삶을 살려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율법주의자로 정죄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하여 그리스도를 닮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율법주의적인 것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높은 표준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주의자가 되고 그냥 세속적인 타락된 기독교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논조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논조는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안식일을 조금씩 범한다” 혹은 “율법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간음도 조금씩 하련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방식이 가능해 지도록 할 것입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어 가고 었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한 일서 2:6) 고.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기만에 넘어가지 맙시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보내신 신실한 대언자들을 통해 준 많은 권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타락된 캘빈주의의 논조들을 너무나 명백하게 제거하는 훌륭한 거짓말 탐지기입니다.

화잇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비축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제공되어 있다. 우리가 냉랭하고 깜깜한 불신의 동굴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있으면 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믿음을 공언하는 것 이상을 요구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주시는 은혜을 의지해 죄를 극복하려는 간절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리뷰와 헤랄드, 3권, 14)

또 히틀러에 의해 순교된 루터파 교회 목사요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회퍼는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며, 오직 순종하는 자만이 믿는다”고 제자됨의 댓가에서 서술했으며,

개신교인들에 의해 현대의 선지자로 불리는 복음주의파 목사, A.W 토저는 다음과 같이 강론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양면임은 성경에서 항상 함께 언급되는 진실이다. . . .그러나 이제 소위 믿음만이 구원의 모든것이 되었고 순종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그 결과 작금의 기독교인들 가운데 만연된 풍조는 도덕적 나약함과 영적 안목의 손실은 물론 초대교회의 신앙으로 부터 멀어져 가는 현상이다…구원하는 믿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드리는 취소불가능한 완전한 헌신이다. 성경은 순종으로 인도하지 않는 그 어떤 믿음도 인정하지 않으며, 믿음에서 기인하지 않는 그 어떤 순종도 알아보지 못한다. . . . 믿는다는건 한번만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생각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 나오는 태도로서 믿는자로 하여금 십자가를 들고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능력을 부여한다.”

이와 반대로 메마른 율법주의의 표상은 지금 이 세상의 타락한 기독교인들과 교회들이 세상의 도덕적 모본이나 빛이 되지 못하면서, 국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생각하는 신앙과 도덕적 개념을 강요하고자 정치에 뛰어드는 그러한 행위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명한 구원의 표준을 우리 인간의 생각 수준으로 끌어내려 우상을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강제하여 그것에 절하며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죄의 의미를 바꾸며 구원의 조건을 없애는 시도들이 바로 엄격한 의미에서 율법주의인 것입니다. 죄인들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자 하나님의 방법과 상관없는 자기 맘대로의 구원 방법을 만들고 있는 행습들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힘으로 자신들의 타락된 심성과 욕구의 충족을 위해 만들어 놓은 우상숭배적인 구원을 성취하려는 율법주의입니다.

우리 정신 똑똑히 차리고 세상의 마지막 때에 들어날 “짐승의 표”인 이러한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도록 합시다!

그 대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들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이행하면서 진리로 변화된 삶을 살아 갑시다!  진리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굴복하는 마음을 가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지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도록 허용하며 살아갈 때에만, 우리 마음속 깊숙히 내면화 된 진리로 인해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게 되며,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매일의 생활 속에서 그 분과 동행하면서 그 분의 지도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게 절실히 필요되는 사람들은 불타 사라질 인간의 지식으로 무장된 신학자나 거짓 교사들이 아니고, 성령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선지자적 정신을 지닌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그 일꾼들이 목회자이던 평신도이던 구분이 있을수 없지만, 이러한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자신의 평판과 입지에 신경쓰지 않고 과감히 하나님을 대변할 수 있기만을 저는 바랄 뿐입니다. 엘렌 화잇은1902년 2월 25일자 리뷰와 헤럴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 아래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부흥과 개혁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다. 부흥은 영적 생애를 새롭게 하며, 정신과 마음의 능력을 소생시키는 것으로 영적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재조직, 곧 사상과 이론, 습관과 행습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그것이 성령의 부흥과 연결되지 않는 한, 의의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RH, 1902. 2. 25)

바로 이러한 주님의 일꾼들이 되도록 우리 모두 생애와 품성을 가꾸어 나갑시다. 그리고, 여러분, 그리스도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참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합니다. 여러분이 갈바리를 바라볼 때에 영혼이 아무 일도 행함이 없이 잠잠히 있거나 잠들게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믿음 곧 권능이 있고 이기심의 타락에서 영혼을 순결케 하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창조해 줄 것입니다.

한 과일 가계를 운영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동네 교인들이 숱하게 전도하려 애썼지만 난공불락의 고집 앞에 물러서곤 했습니다. 그랬던 그 과일장수 아주머니가 어느 날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교회에 나왔어요. 놀란 교인들이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우리 가게에 일주일에 세 번 들르는 신사분이 있는데 그분은 늘 덜 싱싱하고 흠집 난 사과만 골라 가십니다. 미안해서 몇 개 더 집어 드릴라치면 그분은 손사래를 치시며 ‘당장 먹을 것이니 괜찮습니다’ 하시면서 ‘대신 다른 손님들에게 싱싱한 사과를 주세요’ 하셨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분이 저에게 예수님을 믿으라 하였습니다. 그런 분이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좋은 분이라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포트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이렇게 지속적인 사랑의 역사로 전도하는 신사분처럼 매일 살아가시길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하심이 여러분들과 늘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 우리 함께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마치는 기도

공의롭고 자비로운 하나님,

죄악이 넘치고 인간의 욕심과 교만과 헛된 영광이 지배하는 이 세상
그리스도와 사단의 대쟁투가 벌어지는 이 세상 가운데
항상 그리스도의 편에 서고자 마음먹지만
나태함과 연약함과 이기심때문에 자주 실족하는 저희들
이렇게 주님께 나와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자복합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구원의 욕구만에 치중하여온
지극히 부족한 저희 죄인들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옵소서.

조용한 가운데 양심에 속삭이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려는 성령님의 음성을
우리 각자가 들을 수 있도록 영적인 눈과 귀를 밝혀 주시고
또 그 음성을 듣고 실천할 수 있도록 능력과 용기를 부어 주시옵소서.
여기 모인 상처를 많이 받은 성도님들 서로 사랑하게 도와 주시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옵소서.
더불어 하나님의 사업에 온 성도님들 합심하여 전념할 수 있도록,
건강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 주소서.

오랜 팬더믹 기간동안 믿음의 침체를 경험하며
아직도 교회에 함께하지 못하는 교우님들에게도
격려와 축복하여 주시고 속히 우리와 함께 주님께 예배드릴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이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님의 감동 감화하심이
지금부터 세상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설교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