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5)

우리 인간들의 타락된 상태를 제대로 파악치 못하고 있는 이에게 그것을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한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보훈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어 인용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이 처해있는 진면목이다” 라고 제시하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산상보훈에서 언급된 덕목들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들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행실들을 대변하는 그러한 속성들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산상보훈 설교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는 팔복의 대상이 된 덕목들과 같은 그 어떤 속성도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 우리는 발견할 수가 없다. 가난한 심령 대신 극도의 교만함만이 존재하고, 애통하는 자들 대신 열락을 추구하는 자들이, 온유함 대신 오만함이 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으며, 의에 주리고 목마름 대신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고 외치는 자들의 소리만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리고 긍휼의 정신 보다는 잔인함으로, 청결한 마음 보다는 추잡한 생각들로, 화평케 하는 자들 보다는 남을 원망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들로 이 세상은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또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 보다는 자기 수중에 있는 모든 무기들을 대동하여 맞붙어 싸우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겐 당연지사로 여겨지고 있는 실정이다.

소위 우리의 문명사회는 이런 왜곡된 도덕관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분위기로 우리의 세상이 가득 차 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그러한 도덕관념을 어머니의 젖과 함께 마시고 숨 쉬면서 터득하고 자라왔다. 인간의 교육과 수양이 어느 정도 추한 인간성을 순화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이것이 결코 그 죄스러운 본성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정말이지 이 세상 문학 전반이 이러한 삶을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정상 생활로 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바로 우리 인생이 이러한 인간의 죄스러운 속성들 때문에 그처럼 쓰라린 고통의 길이 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심신의 고통들이 바로 이러한 죄악들에서 기인하고 있지 않은가! 교만함과 오만함, 원망하는 정신과 죄악적인 생각들, 그리고 적개심과 탐욕의 정신이 우리 육신을 아프게 하는 그 모든 병들보다 더 큰 고통을 우리에게 가져다주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세상에 산상 보훈을 통해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로 부터 온 한 놀랍고 기묘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임재하고 있는 바이다. 예수님 외에는 그 아무도 감히 표현할 수 없는 이 하늘의 원칙들이 그분에 의해 제시될 때, 우리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이 산상 보훈에 담긴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진리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당신의 그 어떤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은 말씀은 듣는 사람에 의해 거절될 수 있는 그 어떤 한 개인의 사견이 아니며, 우리 인간들이 직감적으로 제시하는 추측 같은 것도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셨고 지금도 알고 계시는 분이다. 그분의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인간들의 예리한 통찰력이나 훌륭한 지혜의 절정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한 신성의 충만함으로 말씀하셨고 그러하기에 그분의 말씀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 한마디로 “복이 있나니” 라고 하실 때 예수님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계신 분인데, 그것은 바로 그분이 인류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하늘로 부터 내려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도 이룰 수 없었던 엄청난 그분의 행적들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느 때처럼 예수님은 이 산상보훈 설교에서 “온유함” (溫柔 – meekness) 이라는 단어를 그분의 간결하고 명쾌한 말씀 안에 담고 있으며, 후에 그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같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이 온유함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계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상반된 개념, 즉 짐와 쉼, 을 접하게 된다. 여기서 언급된 무거운 짐은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접했던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전 인류가 지고 있는 짐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그 어떤 정치적인 압제나 가난 혹은 혹사적인 노동에서 오는 어려움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물질적인 부요함이나 안위함이 결코 이 짐을 해소시켜줄 수 없기에, 부자나 가난한 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무게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 인류가 지고 있는 짐은 참으로 무겁고 파괴적인 실체이다. 예수님께서 짐이라고 표현한 말은 “사람을 기진맥진한 상태까지 끌고 가는 무거운 짐이나 극심한 고생” 을 의미하며, 쉼이란 한마디로 그러한 짐으로 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 쉼은 우리 인간이 스스로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 자신의 노력이 중지될 때 실현된다. 즉, 예수님 자신의 온유함, 바로 이것이 우리의 쉼이다.

그러면 우리가 지고 있는 이 무거운 짐의 여러 측면들을 한번 살펴보자. 이 짐은 전적으로 내면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타격을 가하며 내부로 부터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다. 먼저, 우리가 지고 있는 교만(驕慢 – pride)의 짐이 있는데, 이 자아 사랑의 고역은 참으로 무거운 짐임에 틀림없다. 한번 당신 자신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 보라. 당신이 경험했던 서운한 느낌의 대부분이 당신을 무시하는 듯이 느껴진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기인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당신 자신을 섬김의 대상이 되는 한 작은 신으로 세워 놓을 때, 당신의 이 자아(self)라는 우상의 면목을 실추시키는 일을 즐기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그 어떤 내면적 평온을 누리려고 당신이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친구와 적들이 던지는 불쾌한 평가들로 부터 자신의 위태로워진 체면을 감싸며 그 어떤 모욕들로 부터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마음의 격렬한 노력은 심적인 안식을 결코 당신에게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투쟁이 오랫동안 지속됨에 따라 그것이 초래하는 심적 부담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화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사람들은 이 무거운 짐을 계속 지고,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걸고넘어지며, 던져지는 비판의 소리에 움츠려 들기도 하고, 자신이 당하고 있다고 여기는 각종 가상적인 모욕들에 분개하는 동시에, 또 남들이 자기보다 우대받는 것 때문에 밤잠을 설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러한 무거운 짐을 우리가 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안식으로 들어오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데, 그 쉼에 들어갈 수 있는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온유함인 것이다. 온유한 자는 그 누가 자기보다 더 큰지 신경 쓰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이 주는 높임에 대해 추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 내렸기 때문이다. 이런 온유한 자는 자연스러운 유머 감각을 지니고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에게 꾸짖으며 교만의 짐을 벗는 사람이다. “오, 네가 지금 무시당했다고? 너보다 다른 사람이 더 높임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그네들끼리 쑥덕거리며 네가 아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그 말에 왜 네 마음이 상했니? 그와 똑 같은 말을 네가 지금까지 너 자신에게 해오지 않았었니? 바로 어제도 너는 네가 땅속의 벌레같이 별 볼일 없는 존재라고 하나님께 말했었다. 도대체 네 언행이 이렇게 일치되지 못하니 어찌된 거냐? 자네, 좀 더 겸손해 져서 다른 사람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해 무관해 질 수 없는가?”

이런 차원에서 온유해진 사람은 열등감에 절여있는 비굴한 겁쟁이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은 그 자신의 도덕성에 관한한 사자나 삼손과 같이 용감한 자이다. 단지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된 평가를 내리거나 기만당하지 않을 뿐이요, 그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선언한대로 자신이 약하고 무력한 존재임을 깨닫고 있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천사들보다도 더 귀중한 존재로 비치고 있음을 조용히 감지하고 있다. 스스로는 무(無)요 하나님 안에서는 전부라는 사실을 이 온유한 사람은 항상 기억하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듯 세상이 결코 여겨주지 않을 것임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는 그런 것에 대해 더 이상 개의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의 가치를 사물들에 부여토록 기꺼이 맡기면서 살아가는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 진짜 가격표가 붙여져 그것들의 실제적인 가치가 드러나게 될 그 날을 조용히 인내하며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 때가 오면 의로운 자들이 아버지 나라에서 드디어 빛을 발할 것이기에, 이 온유한 자는 그 날을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는 진정한 심령의 안식을 누릴 것이다. 이러한 온유함 속에 살아가면서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변호를 기꺼이 맡길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변호하려고 발버둥치는 노력을 멈추고 온유함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그가 이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온유한 자는 허세(虛勢 – pretense)의 짐으로 부터도 해방을 얻을 것이다. 이 허세는 위선이라기보다는, 인간이면 그 누구에게나 내재하고 있는 되도록이면 남들에게 자신을 잘 꾸며 보여 자신의 내면적 부족함을 세상으로 부터 가리고 싶어 하는 공통된 욕구라고 볼 수 있다. 죄는 우리에게 여러모로 사악한 장난들을 저질러 우리 마음에 일종의 왜곡된 수치감을 주입시켜 왔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남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기위해 꾸미지 않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들어내 보이는 이들이 거의 없는 편이다. 자기 자신의 부족한 실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마음을 졸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교양 있는 자는 언제 자기보다 더 교양이 풍부한 사람을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불안해한다. 학식 있는 자는 자기보다 더 학식이 풍부한 사람을 만나게 됨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부자는 자기의 옷과 자동차와 저택이 어느 다른 부자의 그것들과 비교되었을 때 천하게 보이지 않을까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소위 우리의 사회가 이런 종류의 동기 유발 하에 움직이고 있는데, 가난한 계층에도 이러한 풍조는 별로 다른 바가 없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은 그저 웃어 넘겨버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짐들이 실제로 존재하며, 그 사악하고 부자연스러운 삶에 얽매인 사람들의 생명을 점차적으로 빼앗아 가는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허세의 짐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참된 온유함이 하나의 꿈과 같이 허황하고 하늘의 별같이 멀리 떨어져 있는 개념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질환을 앓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서로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그 어떤 다른 것이나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않고 그것들에서 절대적인 만족감을 누리기 때문이다. 오직 이 어린아이들이 나이가 좀 더 들어 그들의 마음속에 죄가 소용돌이치게 되면서 시기심과 질투심이 그들의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이 자기들 것 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자기들의 소유물을 순수하게 즐길 수 없게 되고 만다. 이렇게 비교적 어린 나이에 연약한 그들의 심령에 엄습한 이 부담스러운 짐으로 인해, 나중에 예수님에 의해 자유롭게 되기 전까지는 결코 그들이 쉼을 얻지 못할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는 또 다른 짐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인위성(仁爲性 – artificiality)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부주의함이나 우연한 기회를 통해 친구나 적들에게 자기의 초라하고 알맹이 없는 영혼이 노출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떨며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결코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같다. 총명한 이들은 혹시나 잘못 실수해 평범하고 우둔하게 여겨지는 어떤 말을 토해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항상 조심하며 긴장이 고조되어 있음을 본다. 외방으로 많이 여행해 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여행자들은 혹시나 자기들이 전혀 가본 적이 없는 그 어떤 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마르코 폴로 같은 다른 여행자를 만나게 되지나 않을까 긴장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는 죄로 인한 우리 인간의 슬픈 유산의 일부임에 틀림없지만, 이 인위적인 상태가 지금 우리의 전반적으로 일그러진 생활 방식으로 인해 너무나 만연되고 악화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요즈음 우리 가운데 만연되고 있는 광고들이 바로 이런 인간의 허세적인 습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파티에서 한번 반짝 빛을 내보겠다는 인간들의 욕구에 호소하는 여러 종류의 교육 강좌들이 요즈음 번성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인간의 인위성에서 기인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가 아닌 꾸며놓은 그 어떤 모습을 나타내 보이려는 이런 욕구들을 계속적으로 이용하여 많은 책들이 팔리고 있으며, 각종 옷들과 화장품들이 판매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인위성의 저주는 우리가 예수님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그분의 온유함에 우리의 자아를 굴복시키는 바로 그 순간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상관 않고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우리의 관심사가 될 것이며, 남에게 어떻게 비추어 질 것인지에 대한 염려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않게 될 것이다. 죄 밖에는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한번 반짝 빛을 발해보겠다는 사악한 욕구만이 우리로 하여금 남들에게 우리 자신을 인위적으로 치장하여 들어내 보이도록 몰아쳐 가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심장은 바로 이러한 교만과 허세의 무거운 속박아래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예수님의 온유함 외에는 우리가 이런 우리의 무거운 짐으로 부터 헤어날 길이 도무지 없다. 훌륭하고 예리한 이성의 소유가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가진 이 악습은 너무 강하여서 한 쪽을 눌러 제압시키면 다른 쪽으로 그 습성이 다시 표출될 뿐이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사람을 향해 예수님은 지금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이 쉼은 바로 온유함의 안식이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인위적인 허세를 중지할 때 오는 복스러운 휴식, 바로 그것 말이다. 이러한 쉼의 길로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 데는 분명 어느 정도의 용기가 요구된다. 하지만 이 새롭고 쉬운 멍에를 든든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과 함께 메고 가는 것을 우리가 배우게 될 때, 곧 승리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하여 도움을 주실 것이다. “나의 멍에”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그 멍에의 한편에 서 계시고 그리고 우리는 그 다른 편에 서서 함께 동행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여, 저를 어린아이와 같이 되게 해 주소서.
세상의 신분과 명성과 지위로 인해
사람들과 경쟁하려는 충동으로 부터 저를 구해 주소서.
어린 아이처럼 단순하고 순진해지기를 원합니다.
꾸미거나 허세적인 자세 취하지 않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자신만을 생각하고 집착했음을 용서해 주시며,
자신을 잊어버리고 당신만을 바라보며 참된 평화를 발견토록 도와주소서.
저의 이 기도가 가납되길 바라며 하나님 앞에 제 자신을 비웁니다.
저에게 당신께서 가지신 자아 망각의 쉬운 멍에를 메워 주시어
그것을 통해 당신의 참된 안식을 맛보게 해 주소서. 아멘. 


아이든 윌슨 토저(A.W. TOZER, 1897-1963) 목사는 크리스천 미셔너리 얼라이언스 (C&MA)교단의 목사로 개신교인들에 의해 ’20세기의 선지자’로 불리는 목회자다.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2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목사와 저자 및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한 그는 내면의 깊은 믿음생활, 성령의 역사,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강조하였으며, 세상과 타협한 교회의 타락한 예배행습을 규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