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말씀의 가르침을 논하는 신학적 논증에 있어서, 그릇된 한 전제가 시작된 후 그 전제를 입증키 위해 온갖 오류적인 이론과 변증들이 총동원되어 결국 오류의 한 신학 체계를 이룬 사례들이 기독교의 역사 중 존재함을 우리가 보게 된다. 로마 천주교의 교부들을 통해 기독교안으로 침투되고 일반 개신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원죄설”, “예정설” 및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라는 것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칼뱅주의 신학체계가 바로 그 한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남은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별자는 이미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그녀의 통찰력있는 관찰을 글로 남겼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지막 시대를 사는 재림성도들을 올바르게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에 또 한번 놀라움을 가지게 될 뿐이다:

“사람들은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출발함으로써 오류에 빠진다. 그런 다음에는 오류가 진실로 입증되게 하고자 모든 일을 유도한다. 어떤 경우에 근본 원리는 오류가 혼합된 어느 정도의 진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오도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원칙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그들은 사단의 방법을 택한다.” (엘렌 화잇, 증언 7권, 181 페이지)

“사단은 우리를 거짓된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항상 노력하고 있다. 또한 사단은 무엇이 믿음을 구성하는 요소인지에 대하여 오해할 때 혼란과 실망을 낳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단은 남녀들을 설득하여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추리하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에 매우 기뻐한다.” (엘렌 화잇, 가려뽑은 기별 2권, 345 페이지)

그런데 칼뱅주의의 원죄설과 그 기본적 전제를 인정해 오지 않은 재림교회 안에서, 요즈음 원죄설의 전제에 바탕을 둔 죄론과 인간론 및 구원론의 주장이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서적을 통해 강론되고 있는 현상을 보게 된다. 물론 이 “원죄” (original sin) 라는 용어가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에게 막대한 거부감을 주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기본적인 공정감이 그 어떤 상태와 행위들을 스스로 택하지 않은 이들에게 죄책을 부과하는 개념을 혐오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그들의 주장을 생명과 사망을 논하는 철학적인 논조로 우회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며 포장하여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또 증언 말씀을 문맥을 무시하며 국부적으로 혹은 화잇 여사의 기본적인 의도를 완전히 무시한 방법으로 인용하여 자신들의 원죄론적인 주장이 마치 화잇 여사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는 것 처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 교인들이 그러한 주장의 진면목을 올바로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이 원죄설의 전제에 기초를 둔 일부 신학자와 목회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물론 엘렌 화잇의 가르침과도 정면으로 충돌하는 입장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원죄론적인 주장은 엘렌 화잇을 비롯한 재림 신앙의 선조들이 처음부터 확연히 오류로 거부한 사조들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칼뱅주의의 죄론을 용인하지 않는 아르미니우스-웨슬리(Arminian-Weslyan) 계통에 속한 재림교회의 기본교리와 상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과 증언 말씀이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증거의 무게”와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견들임을 우리가 또한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 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은퇴한 원로 목회자이신 김명호 목사가 집필하여 몇 년전 한국연합회 목회부를 통해 출간된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이라는 책이라고 보겠다. 필자의 이 글은 그 책이 담고 있는 (도저히 역사적인 재림신앙뿐만 아니라 현재의 재림교회가 28개 기본신조를 통해 공식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교리와도 상충되는) 칼뱅주의적 견해들을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과 대조하면서 비교 분석한 일종의 서평이다 (참고: 기본 신조문을 통해본 재림교회의 인간론과 죄론 기사).

물론 필자는 이러한 서평을 발표함에 대해 적지않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비록 이 원로 목회자께서 그동안 밝혀온 여러가지 신학적 입장에 대해 필자가 공감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분의 성실한 목회 관록에 대해 필자는 대체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한 필자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 원로 목회자께서 그의 책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통해 밝히고 있는 가르침은 기본적인 재림신앙과 상충되는 입장으로서, 개인적인 감정과 고려때문에 간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 책이 담고있는 견해를 뒷바침하기 위해 사용한 저자의 논리에 너무나 많은 취약성이 내재함은 물론이며, 자신의 칼뱅주의적 입장을 부각하기 위해 (칼뱅주의자가 절대로 아니었으며 철저한 아르미니우스적 신앙관에 기초하여 재림신앙의 가르침을 설파했던) 엘렌 화잇의 글들을 국부적으로 또는 그녀의 의도와는 반대되는 방법으로 취사선택하여 인용하고 있음을 자주 목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자신의 견해와 반대되는 입장을 견지한 재림교회 목사들의 자격이나 평신도들의 신앙을 너무 쉽게 폄하하고 있는 저자의 태도를 엿보면서 필자는 일말의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저자는 자신의 책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을, 한 두해전에 김중훈 목사가 번역하여 시조사에 의해 출간되었던 진 주커(Jean R. Zurcher) 박사의 저서인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 (Touched with Our Feelings)」가 제시한 견해를 반박하기위해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가 “쥐르셰”라고 호칭한, 지금은 고인이 된 주커 박사는 유럽-아프리카 지회의 성서 연구소 회장이었으며, 세계의 여러 재림교회 대학들에서 신학교수로 역임하였던 분이다. 그리고 재림교회 기독론 역사를 총망라하며 분석한 그의 저서인 「Touched with Our Feelings」는 본 교단의 리뷰와 헤럴드 출판소의 편집검증을 거쳐 출간된 책으로써, 그리스도의 “타락된 인성론 (post-fall nature)” 입장을 재림신앙의 고유한 기독론으로 주커 박사가 강조한 역사적 비평의 정확성에 대해, 평소 그러한 입장을 견지한 재림교인들을 향해 독설을 거침없이 품어왔던 로이 아담스 조차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저서임을 우리 한국인 재림성도들은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오히려 그 책이 엘렌 화잇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이설적인 기독론을 담고 있는 책으로 조명하고 있음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참고로 밝히면, 이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은 (필자처럼 원래 장로교인이었다가) 재림교회로 입교한지 얼마되지 않은 한 자매가 필자에게 읽어보라고 건네준 책이었다. 지금 믿음의 스승으로 받들고 있는 이 원로 목회자의 가르침을 필자에게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서 그리하였다고 생각된다. 원래 이 저자의 다른 책들도 과거에 읽어본 적이 있어 어떠한 신학적 가르침을 설파하고 있는지 이미 파악하고 있던 필자는, 솔직히 그와 유사한 가르침을 담은 책을 다시 읽고 싶지는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가장으로서, 다른 읽고 싶은 책들도 많이 있지만 시간을 제대로 할당하지 못하는 형편인데, 이미 오랫동안 조심스럽게 성경과 증언 말씀으로 비추어 확인해 본 후 버렸던 장로교회의 칼뱅주의적 신학을 설파하는 내용에 시간을 더 낭비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자매의 마음을 생각하여 나름대로 시간이 날 때 마다 그 책을 읽어보게 된 것이다. 이 서평은 그러한 참으로 우연한 과정을 거치면서 산출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필자의 이 서평은 완성된 작품이 아님을 여기서 밝혀둔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은 죄의 이해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성 같은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로 문제가 되는 점들을 많이 담고있는 서적이기에 비평의 대상이 되는 부분들이 산재된 책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비평문은 이 책에 담긴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에 대해서만 살펴 보고자 한다.

죄의 정의와 원죄설

칼뱅주의 교리의 총서라고 할 수 있는 장로교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n the Presbyterian Book of Confessions)는 그들이 견지하는 원죄설 교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 .범죄 하였다. . .이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 가졌던 의를 잃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끊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안에서 사망이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여러 분야들이 전적으로 썩게 되었다. 그들은 인류의 뿌리인 고로 그 첫 범죄에 대한 죄책이 전가되어 그 동일한 사망과 썩어지는 본질이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 후손들이 그들에게서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썩어짐으로 인하여, 인간은 모든 선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선을 행함에 무능해지며, 모든 선에 역행하고, 모든 악을 전적으로 좇게 되는데, 이 원초적 썩어짐으로 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함들이 나오게 된다.” (Chap. VI, sec. 1-4)

이 칼뱅주의 신앙고백서가 서술한 원죄설 교리의 정의를 다음에 인용된 「죄, 예수 그리고 구원」 에 담겨진 죄론과 나란히 비교해 보는 것은 독자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의 원죄설 정의, 예수 그리고 구원 책의 죄론
우리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범죄 하였다…..이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 가졌던 의를 잃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끊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죄안에서 사망이 되었고 영과 육의 모든 기능과 여러 분야들이 전적으로 썩게 되었다. 그들은 인류의 뿌리인 고로 그 첫 범죄에 대한 죄책이 전가되어 그 동일한 사망과 썩어지는 본질이 모든 후손들에게 전달 된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 후손들이 그들에게서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초적인 썩어짐으로 인하여, 인간은 모든 선을 전적으로 배격하고, 선을 행함에 무능해지며, 모든 선에 역행하고, 모든 악을 전적으로 좇게 되는데, 이 원초적 썩어짐으로 부터 모든 실제적인 범죄함들이 나오게 된다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in the Presbyterian Book of Confessions, Chap. VI, sec. 1-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6, 17). 이 말씀은 선악과를 먹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 하지 않았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은 것을 죄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는 날에 너는 죄인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죽는다고 하셨는가?. . .하나님은 죽는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그것을 죄를 지은 것으로 해석한다. .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죄 짓는 것이라 하지 않고 “정녕 죽으리라”고 표현하신 것이다. 이런 사실에 의하여 생각하면 죄는 곧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일이 결코 어렵지 않다. 「죄=사망」 이다. 죄를 지으면 사망이 되는 것은 죄의 본질이 사망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라면 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사망인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46-47)

첫 아담에게서 이어지는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사망할 때 까지 썩어져가는 과정에 있는 상태일 뿐이다. 거기서 나온 것으로 썩어짐의 종노릇 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본질이 사망이기 때문이다. 아담에게서 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다 썩은 씨들이다. 아담은 사망의 나무가 되었다. 즉 죄의 나무가 된 것이다. 거기서 열리는 열매는 죄들이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그의 모든 후손들도 죄의 나무 사망의 나무로 태어났다. 거기서 열리는 것은 다 썩어져가는 구습인 사망의 열매들만 열린다. (상게서, p. 73-74)

이렇게 나란히 비교해 보았을 때, 죄와 인간의 본질에 관한 이 저자의 견해는 장로교회의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에 기술된 그들의 칼뱅주의적 원죄설과 근본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이 저자는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의지적 선택으로 마귀의 말을 믿어 하나님께 배역했던 죄의 결과인 사망과 그 상태를 죄 자체로 대체하고 있을 뿐인데, 마치 이것은 어느 사람이 도둑질하기로 결심하고 이행한 것이 죄가 아니고 그 범행의 결과로 받게된 형사 처벌이 죄라고 주장함과 다를바 없다. 한마디로 수레를 말(馬) 앞에 두는 본말이 전도된 불합리한 논지라고 생각된다.

더욱이 죄가 사망이라거나 죄의 본질이 사망이라는 개념은 한마디로 성경과 증언 말씀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가르침이다. 예를 들어 “죄는 사망 (sin is death)” 이라는 어구를 영문 예언의 신 CD-ROM 이나 화잇재단 사이트를 통해 독자가 직접 한번 검색해 보시기 바란다. 하나같이 로마서 6:23절을 인용한 “죄의 삯은 사망 (the wages of sin is death)” 아니면 “죄의 형벌은 사망 (the penalty of sin is death)” 이라는 문장의 일부로만 사용되고 있으며, 사망이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음을 독자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죄의 본질에 대하여도, 증언 말씀은 다음 기록들을 통해 확연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자가 그 회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도록 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죄의 빗나가게 하는 영향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성품과 행실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모두가 개별적으로 올바른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해졌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의 가르침을 그들의 일상 업무들 속에서 실천하면서, 인간은 자신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영을 조심스럽게 분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적인 충동과 자연적인 성향을 따르는 대신,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그들이 아담의 후손들을 다스릴 원칙들을 배우게 될 것이다.'” (Manuscript Releases 5, p. 348 – Letter to W. A. Colcord, June 22, 1896)

“나는 잠시나마 죄의 본질, 즉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란 사실에 대해 숙고하였다.” (The Upward Look, p. 189)

한마디로 죄의 본질은 부여된 의지의 결정으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 즉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이지,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영적 혹은 육적 사망 자체가 아님을 영감의 말씀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한 사실이다. 병의 원인을 오진하면 병을 고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와 사망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처음부터 잘못된 전제로 출발하여 원죄론적인 선입관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의 희생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의 모든 선택 가운데서 실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단순명료한 구속 사업을 자연히 오해하고 만다. 그리고 이런식의 불필요한 철학 개념의 전개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속의 청사진을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됨에 이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이 크다.

그런데 이 저자는 이렇게 「죄=사망」 이라는 착오된 전제로 시작하고 나서, 나름대로 일반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원죄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타락한 도덕성을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 같다. 이것을 원죄라고 명명(命名)한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44)

“원죄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 그러나 일반 개신교에서는 이 말을 쓴다. 아우구스티누스[어거스틴]가 원죄를 아담안에서 물려받은 도덕적 타락성으로 정의한 것 같다.” (상게서, p. 215)

하지만 원죄설의 일반적 정의에 대한 이 저자의 설명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원죄설을 받아들이지 않는 많은 기독교인들도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후손들에게 타락된 본성(fallen nature)이 전수 되었음을 믿기 때문이다. 원죄설의 핵심적인 전제는 그러한 타락된 본성 그 자체를 죄로 치부하며 아담의 죄책(guilt)을 그 후손들이 물려 받았기에 그들이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죄된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주장이다. 원죄설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아담의 후손들이 물려받고 태어나는 타락된 본성을 죄로 규정하는 이러한 전제를 단지 거부할 뿐이다. 따라서 이 저자가 제시하는 원죄론의 정의는 아주 협소하며 불충분한 정의로서 일종의 곡해적인 정의라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저자가 사용하는 “타락된 도덕성” (fallen morality) 이라는 용어도 일반 신학에서 원죄설이 논의될 때 잘 사용되지 않는 말이다. 그대신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타락된 본성” (fallen nature) 인데, 타락의 결과로 인간의 본성에는 육신의 소욕인 저등세력과 성령의 소욕인 고등세력이 적대관계로 내재한다고 성경 말씀은 밝히고 있다 (마태 26:41; 고전 9:27; 고후 10:5; 갈 5:16‐17). 따라서 원죄설이 신학적으로 논의되는 대부분의 경우, “타락된 본성”은 이 육신의 소욕인 저등세력을 일반적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자유의지와 연관된 인간의 도덕적 성품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나중에 더 분명히 밝히겠지만, 성경 말씀과 화잇 여사의 글도 전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이러한 두가지 면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저자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죄적인 존재임을 강조하려는 원죄론적 안목 때문에 인간의 본성을 도덕적 성품으로만 직결시키고 있는데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79, 88), 이 또한 칼뱅주의적 원죄설 교리 옹호자들이 가진 안목과 매우 유사한 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하여튼,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이렇게 죄의 정의부터 자명한 성경말씀의 계시에서 벗어나 그릇된 전제로 시작한 후, 화잇 여사의 말대로 그 전제를 입증하기 위해 모든 일을 유도하고 있다. 그로인해 인간의 본질, 예수의 인성 및 결국 구원론에 있어서도 죄로 만연된 세상의 삶 중에서 실제적인 구원의 도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책은 결코 올바른 신앙의 길잡이가 되지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구원의 신기루만을 제시한다는 느낌을 필자는 버릴수 없었다.

로마서 5장의 해석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는 또한 로마서 5장 12절인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는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가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가르치는 것은 한 사람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을 다 사망이 되게 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표현이 이 사실을 명확히 표현한다. ‘죄를 지었으므로’는 과거형 동사이다. 모든 사람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가? 바울이 이 글을 쓸 당시에 살던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이 말씀 자체가 그렇게 한정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아담에게서 생육하는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를 다 포함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제일 마지막에 태어나는 사람까지 이미 죄를 범하였다. 로마서 3:23에도 같은 말씀이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말씀도 과거형 동사이다. ‘죄를 짓는다’ 는 동사는 ‘하마르타노(hamartano)’ 인데 이 두 곳에 쓰인 말은 과거 직설형 동사로서 ‘헤마르톤(hemarton)’ 이다.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 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 108)

그런데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저자의 주장은 일종의 추측적인 공론으로서, 그런 뜻이기를 바라는 원죄론적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이 구절에 무리하게 주관적인 해석을 가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저자의 원죄론적인 입장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로마서 5: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for all have sinned)” 라는 말 대신, “아담이 죄를 지었으므로 (for Adam has sinned)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고 기록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주장은 바로 이 로마서 5:12절에 대해 원죄의 유전적 선입견이 아닌 전례와 선택의 안목으로 설명한 화잇 여사의 주석과도 정면으로 충돌되는 견해임이 다음 증언 말씀에 비추어 보면 자명해 진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엘렌 화잇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희랍어의 부정 과거형 (aorist) 혹은 과거 직설형 (aorist indicative) 동사는 이 저자가 제시하는 그러한 용도로만 쓰이는 동사가 아니다. 문맥에 따라 과거 혹은 현재 완료형 등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사용되는 동사이다. 분명한 것은 이 동사형은 주어의 전반적인 행동 혹은 활동을 조망(眺望)하는 견지에서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동사임에는 틀림없다. 한 성서 희랍어 사전 웹사이트는 이 저자가 칼뱅주의적 원죄론 안목으로 해석하는 로마서 5:12절과 동일하게 사용된 로마서 3:23절의 “죄를 지었다 (hemarton)”는 부정 과거형 동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로마서 3:23절에 쓰여진 ‘헤마르톤(hemarton)’은 분명히 바울이 로마서 1:18-3:20에 걸쳐 묘사한 인간의 집합적인 죄악 행위들을 요약하는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것은 집합적인 역사적 사실을 나타내는 부정 과거형 동사(aorist)이다. 연속된 죄악 행위들이 바울이 이 말을 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기에, 그 역사적 사실과 바울의 이 말을 한 사이에 그 어떤 공백 기간이 있음을 뜻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이 동사형은 영어의 현재 완료형(‘have sinned’)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한 그 시점에서 보아, 일 개인의 죄는 과거의 행위이며 더불어 이러한 개별적인 죄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총집합체인 죄도 과거의 사실로 간주되는 것이다…..이 ‘헤마르톤(hemarton)’ 동사는 바울 사도가 말하는 그 시점의 견지에서 보아 과거에 계속되어온 죄들을 지칭하고 있으며, 미래에 범해질 죄에 대해서도 그와 동일한 원칙이 그 당시에 같은 문법적 시제(時制)로 적용됨을 암시해 주는 말이다.” (Section 54 of “The Aorist Indicative,” Burton Moods Tenses)

즉 로마서 전반부 (1-3장)에 걸쳐 바울이 인간의 총체적인 죄악 행위들의 역사를 요약하여 증거를 제시한 후에, 로마서 3:23절과 5:12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고 객관적으로 납득이 가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5:12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라는 구절에 대해, 「이것은 ‘과거에 이미 단번에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한 사람 아담 안에서 아담의 모든 후손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라는 이 목사님의 해석은 다른 여러 성경 절들과도 모순되며 너무 무리한 논리적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려면 (출에굽 32:31-33; 신명기 1:34-39; 이사야 59:1-8; 에스겔 18:5-20; 야고보 1:14-15; 야고보 4:17; 요일 3:4 등등 참조), 이 구절을 “한 사람인 아담에 의해 죄가 이 세상 안으로 들어왔고, 그와 더불어 영적인 사망, 즉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영적 결합이 파괴된 상태가 또한 왔는데, 그 후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아담이 지은 죄에 개별적으로 모두 참여하여 하나님을 거부하는 죄를 지었으므로 그러한 영적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라고 이해하는 편이 성서적으로나 인간사적 측면에서도 훨씬 더 실제성과 합리성을 보여주는 해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선과 악의 대쟁투 속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공의를 담은 세천사의 기별을 전파하는 남은 무리의 사명과 일치하는 성서적 죄론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부연하자면, 로마서 5:19절은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shall many be righteous)” 고 하여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될 것이라는 미래형의 동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인이 될 사람들은 “더욱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 (those who receive)” 이라고 명시한다. 이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예비해 두신 구원을 받는 선택함을 통해서만 개인의 구원이 성취됨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모든 사람에게 강제로 부여한 무조건적인 본의 아닌 구원 (involuntary salvation)을 이 로마서 5장이 가르치고 있지 않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만인 구원론이란 이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같은 장의 구절인 5:12절을 인용하며,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무조건적으로 그들 각자의 선택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닌 죄(involuntary sin)를 부여했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일관성이 결여된 주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양식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죄론으로 진정 하나님의 공정성과 사랑을 나타내는 복음을 제시할 수 있을까?

재림교회 성경주석 12권에 수록된 한 재림 신학자의 다음 글은 이러한 필자의 관점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죄가 아담을 통해 전수되었는지 혹은 어떻게 의가 예수님을 통해 전수되었는지를 발견코자 하는 의도로 로마서 5:12-19절을 읽는다면,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구절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죄가 진실로 인간의 경험에서 현존하는 실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또한 실제임을 발견하려는 의도로 이 구절을 읽는다면, 우리는 그 죄가 이미 패망된 적임을 알 수 있게 되고,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생애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다는 기쁨에 넘치는 발견에 우리가 도달하게 된다. 로마서 5:12-19절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죄가 아담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다는 보편적 실체와 또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분리됨을 가져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담의 죄 때문에 이 분리됨과 함께 육체적 쇠퇴 (physical degeneracy)뿐만 아니라 죄의 성향 (a propensity to sin), 그릇된 경향 (wrongful tendencies), 변태된 식욕 (perverted appetites), 천해진 도덕성 (debased morals) 등을 우리가 물려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죄로 기우는 경향이나 죄의 유혹을 느끼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죄에 굴복하여서 죄의 행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키며 하나님 앞에서 정죄됨을 받게 되는 바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한 바는 그 죄의 사함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가납되어짐이 ‘의를 통하여 군림하여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인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로마서 5:21) 해주시는 은혜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제공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John M. Fowler, Sin, SDA Bible Commentary, v. 12, p. 257)

더불어 일반 개신교의 저명한 신학자였던 에밀 부르너 또한 이렇게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로마서 5장에 대한 원죄론적인 이해가 기본적으로 성서적 가르침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아담의 타락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어 그의 죄가 계속 이어지는 세대들에 양도된다고 하는 교회의 교리는 어떤 의미로든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한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신학의 표준구(標準句)처럼 여겨져 온, 예외적으로 보이는 로마서 5장12절의 내용 조차도, 후세대들에 의해 추종되었던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로마서 5장에는 죄의 본질에 대해 묘사하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인간론의 정석이었던 원죄론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동떨어진 사상이다. .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행위, 즉 ‘타락’으로서, 신성한 시작에 대한 자발적인 결별로서, 그리고 신의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역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 .죄란 행위이다 – 그것이 죄에 대해 언급할 첫 번째 사실이다. 그리고 난 후에야만 두 번째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행위는 동시에 항상 행위 속의 존재인 한 상태, 즉 그 안에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노예의 상태라고 말이다.” (에밀 부르너, 「창조와 구속에 대한 기독교 교리」, 98,99,103,109 페이지).

결론적으로 이러한 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고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초적으로 타락된 본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죄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죄가 시작되 것이 루시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타락된 본성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게 된 것도 그들이 타락된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사랑과 공의의 법이 절대 바뀌지 않은 것처럼, 죄의 정의가 결코 인간의 타락 전이나 후를 통해 바뀌지 않았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죄가 본성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자유 의지에 달린 것임을 우리가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루시퍼의 반란으로 시작된 대쟁투의 근본적인 이슈가 우리의 타락된 본성이 아닌,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된 자유 의지의 선택과 직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하여튼 구원론과 직결된 이 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를 원하는 재림성도들은 역사적인 재림신앙의 관점에서 자세히 분석/조명한 「선택으로 말미암는 죄인」, 「이기심, 정죄, 타고난 본성에 관한 고찰」 기사들을 숙독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죄, 예수 그리고 구원」의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칼뱅주의적 원죄설에 입각한 죄론, 기독론 및 구원론이 재림교회안으로 들어오게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좀 더 밝은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재림교회와 월터 마틴」 기사를 숙독해 보시면 된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