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구원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은혜로 인해 멸망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셨다. 하지만 그 구원의 공식에는 우리 죄인이 담당해야 할 몫이 있다. 많은 이들이 거부하기를 원하는 그 몫 말이다.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는 용어가 어떤 이들에 의해서 “공의로 인한 방종”으로 해석되어 지고 있다. 그러한 이들은 하나님의 “아낌없고”, “넘쳐흐르며”, “풍성한” 혹은 “극도의” 은혜에 대해서 열심히 말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논하면서 이러한 지나치게 과장된 형용사들이 도용되어지는 것을 볼 때마다, 저 위의 어디에선가 하나님의 공의가 사기 당했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꼭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묘사해야만 하는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분의 공의에 손상을 가하면서 전해진다면,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마귀가 주장하는 근본적인 요지가 바로 하나님에게 조차 이타적인 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마귀의 주장은 결론적으로 은혜나 공의 및 자비는 물론 하나님의 그 어떤 특성들이 하나의 궁극적으로 올바른 절대성에 의해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은 하나의 철학적인 뒷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폐기코자 하는 한 교묘한 수법임을 당신은 인식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는, 그것을 우리의 삶 중에 받아들일 때, 우리로 하여금 결코 멸망당하게 하지 않는다. 죄를 정죄하고, 순종의 능력을 부여하며,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의 삶을 의로 가득 채우는 은혜는 진실로 우리를 구원한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종류의 은혜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교묘하게 뒤틀려진 은혜, 즉 진짜 은혜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있는 곡해된 유령의 화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은혜의 개념이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왜곡시키는 마귀의 공격으로 부터 면제되어 있는가? 이 은혜라는 단어가 그 자체가 가진 어떠한 불가사의한 힘 때문에 그 본래의 개념이 조작되고 도용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는 말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은혜는 이러한 사람들로 부터 필요 이상의 과장된 그 어떤 치켜세움을 받고 있다. “은혜”에 관하여 단순하게 말하는 것이 불충분하여 과장된 형용사들로 그 은혜에다 양념을 치지 않을 때, 우리가 말하는 은혜는 그들이 말하는 은혜와 같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데, 너무나 많은 은혜의 변종들이 우리 가운데 떠돌아다닌다는 사실이다.
이 은혜의 그 어떤 변종을 당신은 신봉하고 있는가?
이 은혜에 관해 파멸적인 착각에 빠져 있으면서 은혜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은혜로 인해 멸망당하는 지점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거짓 은혜, 바로 그것이다.
은혜에 갖다 처바르는 이러한 과장된 형용사들은 사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이 은혜의 포장아래 여분의 그 무엇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한 주제에 대한 정보를 그 누가 조작하고자 할 때 그것으로부터 뭔가를 삭제함으로도 할 수 있고 또 그 무엇을 추가함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제시되고 있는 은혜의 개념에는 그 어떤 올가미들이 함유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구원과 함께 동반하는 동시에 그 후에도 지속된다고 보지 않고 그것을 구원받은 다음에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만 보는 그릇된 식견이 그 한 예가 되겠다. 이러한 은혜의 개념은 구원의 한 중요한 조건인 순종을 교묘하게 제거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 새로운 은혜의 개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책임성을 걸러내고 그 자리에다 인간이 원하는 무책임성을 세워 놓는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의 씀씀이에 헤픈데 (사람들이 정말 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헤프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은혜를 이렇게 값싸게 만드는 거짓말의 진로를 막고 있다. 이러한 은혜를 포용하려면 당신은 먼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먼저 비웃고 난 후에나 당신은 이러한 은혜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은혜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차지할 수 있는 역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에게 기꺼이 거짓말 하는 이 자비는 죄인에게도 분명히 감언이설로 속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는 죄인은 이러한 가짜 은혜로 인해 멸망케 되고 말 것이다.
어린 아이들로 부터 과자를 빼앗아 먹는 짓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저질의 행습으로 여겨진 때가 있었다. 오늘날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의 정도는 이보다 벌써 몇 단계를 넘어섰지만, 만약 졸음이 오는 눈으로 교회의 좌석이나 따뜻하게 데우며 않아 있는 공부하지 않는 교인들에게 값싼 은혜를 팔아 이 잘못된 개념을 좋게 여기도록 하는 것이 나쁘다면, 이런 영적인 뱀기름을 어린 아이들에게 파는 짓은 얼마나 더 악한 일인가?
이미 데스 포드 이후 제시된 혼란스럽고 조리 없는 신학의 죽에 영향을 받아, 재림 신앙에 대한 새로운 견지를 채택한 많은 이들은 이제 생활 표준들이나 순종 등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세울 근거가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아래서 순종은 가능한대로 속히 내 던져 버려져야 되었다. 그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성서적 기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을 고집한다는 것은 아주 난처한 일이었던 것이다. 과거에 낳아진 해충의 알들이 이제 부화되는 순간에 우리가 도달해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신학적인 메뚜기들이 땅에서 올라와 모든 것을 먹어치워 버리는 때 말이다.
이러한 때에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가? 콘코던스 (성서 용어 색인)을 가지고 책상 앞에 앉아 직접 성경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다. 그 누가 저술한 그 어떤 성경 연구 가이드도 필요 없다. 콘코던스에 열거되어 있는 166개의 은혜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하나하나 찾아 숙독하고 이해해 나가기만 해도 된다. 주위에 나도는 과장된 표현들에 신경을 끄고 성경 말씀의 튼튼한 기반으로 돌아가 보라.
은혜, 참된 진품의 은혜가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깨어서 경계하며 조심하라.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그 은혜로 인해 멸망당하지 마시기 바란다. 과장된 표현들로 포장된 거짓말에 안주하지 말며, 탈취된 언어들이 당신의 진리 탐지기를 통과하지 않도록 하라. 잘못하면 당신이 그것들의 희생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래리 커크패트릭(LARRY KIRKPATRICK) 목사는 서던 재림 대학교(Southern Adventist University) 신학부를 졸업하고 유타-네바다 합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수여받고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사역을 거친 후 현재 미시간 합회에서 목회에 임하고 있다. 대쟁투 웹사이트(GreatControversy.org)를 1997년 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강의와 저술 활동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