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문서는 앤드류스 대학 캠퍼스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복음 연구회 (Gospel Study Group)에 제출되어 발표된 폴 에반스 (PAUL M. EVANS) 박사의 발표문이다. 이 문서는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역사적-맥락적 분석을 담은 그의 박사학위 논문 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신학적 분석을 담은 좀 딱딱하고 건조한 내용이지만, 이 주제에 대해 보기드문 학자의 공정한 안목으로 마지막 세대 신학과 엘렌 화잇의 견해 사이에 있는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요즈음 열심당원의 열정으로 마지막 세대 신학을 공격하고 있는 존 페컴 (John Peckham)과 지리 모스칼라 (Jiri Moskala) 그리고 조지 나이트 (George Knight) 같은 신학자들이, 마지막 세대 신학이 엘렌 화잇의 가르침과 어긋난다는 기만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어지러운 논조와는 크게 대비되는 여유로움과 정결함을 에반스 박사의 이 발표문에서 접하게 된다.

사실 역자가 마지막 세대 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한 후 그 내용을 살펴 보았을 때, 그것은 바로 역자가 재림신앙으로 받아들였던 “남은 교회 (Remnant Church)”의 신앙과 동일함을 알게 되었다. 조만간 역자가 이해한 마지막 세대 신학의 주안점에 대해 기사를 작성하고 게재할 생각이다. 참고로 테드 윌슨 대총회장도 이 마지막 세대 신학의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분이다. 본 사이트에 게재된 “테드 윌슨 대총회장의 마지막 세대 신앙” 기사를 참고 하시기 바란다.


서 론

앤드류스 대학 캠퍼스에서 진행되는 복음 연구회 모임에 발표문을 제출해 달라는 요청은 나에게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이 회의에 직접 참석하고 싶지만, 내가 지금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한국의 삼육대학교에 와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1888년 대총회의 기별과 그 여파에 대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져 왔다. 1990년대 후반 나의 신학교 시절, 오늘날의 많은 재림교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마지막 세대”의 관점에 앤드리어슨의 영향이 크다는 견해에 나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나는 이러한 전제에 의문을 가졌는데, 이 “마지막 세대 신학”이 주로 엘렌 화잇의 글에 바탕을 둔 보편적인 재림신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의 주제로 앤드리어슨의 견해를 역사적 맥락에서 조사해 보고자 쉽게 선택하였다. 하지만 이 발표문에서 나는 마지막 세대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에 중점을 두고자 한다. 그녀가 앤드리어슨의 견해를 공유했는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공유했는가? 이러한 주제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사학위를 위한 연구 과정에서 나는 엘렌 화잇과 엔드리어슨의 서적들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옹호한다는 개념을 비교하는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있다. 그 비교적 짧은 논문을 작성하기 위해, 나는 엘렌 화잇의 글에서 “옹호”(vindication)라는 단어와 그와 관련된 형태의  단어들만을 검색할 시간밖에 없었다. 그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을 옹호하는 일에 성도들의 몫이 있음을 엘렌 화잇이 비록 인정했더라도 그 대쟁투에서 하나님을 옹호하는 역할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그녀가 훨씬 더 자주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나는 이러한 그녀의 관점을 1937년에 저술된 「성소봉사」의 “마지막 세대”라는 장에서 밝힌 앤드리어슨의 견해와 대조하였는데, 거기서 엔드리어슨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옹호에 마지막 세대의 성도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는 걸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나는 단순히 엘렌 화잇의 저술에서 발견되는 “옹호”라는 형태의 단어들을 검색하는 것을 넘어 더 많은 것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래도 언어의 범위때문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데 핵심어와 용어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만, 관련 문장을 검색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와 구절들은 마지막 세대와 관련된 엘렌 화잇의 진술에 대해 내 시야를 크게 넓혀 주었다. 물론 나는 여전히 그녀의 견해와 앤드리어슨의 견해 사이엔 차이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엘렌 화잇의 글에 대한 더 광범위한 조사와 연구를 거친 이 박사학위 논문에서는, 단순히 “옹호”라는 형태의 단어들만을 검색했던 이전의 내 연구서와는 달리, 그녀의 견해가 앤드리어슨의 입장과 더 가깝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앤드리어슨 견해의 요약과 한 가지 중요한 질문

이 발표를 듣는 사람들은 앤드리어슨의 견해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의 견해를 간단히 요약하면서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저술에서 내가 얻은 통찰력을 추가하는 것 외에는 앤드리어슨의 견해를 검토하는 데 시간을 많이 할당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세대 신학과 연관된 앤드리어슨의 기본적 입장은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이 죄악을 완전히 극복할 것이며, 이것이 계명에 대한 피조물들의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부당하다는 사단의 고소에 대해 그분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결과를 이끌어 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1936년의 대총회기 아침 성경 연구 시간에 주어진 앤드리어슨의 다음 진슬이 내 주의를 끌었다 (RH 6-18-1936, 298-299):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능력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가? 교우들이여, 우린 그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도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필요로 하지만, 더불어 우리는 올바른 종류의 성화도 필요로 한다.” 앤드리어슨은 그의 강론을 듣는 교우들에게 성소로 부터 죄의 용서뿐만 아니라 죄의 도말이 진행되는 지성소에서의 그리스도 사역으로 나아가도록 호소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로 용서함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마지막 시대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죄를 극복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 칭의가 효능이 있는지에 대해 앤드리어슨이 미묘한 의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점에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1888년 기별의 주안점에 대해 앤드리어슨이 얼마나 그 진가를 인정하고 있었는지 더욱 궁금해졌다. 수세기에 걸쳐 신학자들이 면밀하게 구분시켜왔던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주는 “입혀주시는(imputed) 의”와 우리를 성화시키는 “나눠주시는(imparted) 의”의 개념을 이 1888년 기별 무렵에 엘렌 화잇이 통합시켰음을 내가 주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앤드리어슨이, 이생에서의 죄악의 완전한 근절과 대쟁투 중 그로인해 성취되는 하나님의 정당성 옹호라는, 존스(A.T. Jones)와 와고너(E.J. Waggoner)의 견해를 선뜻 받아들였지만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앤드리어슨이 주장한 마지막 세대의 옹호개념이 주로 와고너에서 기인했다고 결론지었다), 엔드리어슨이 그들의 전체적인 기별에 얼마나 똑같이 공감하였는지 궁금해졌다. 1888년 논쟁의 양측 입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던 그의 생애를 고려헤 볼 때 이것은 내게 아주 흥미로운 질문이다.

아마도 이것은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세대 성도들에 대한, 앤드리어슨의 관점과 비교되는, 엘렌 화잇의 조금 뜻밖의 표현들을 우리가 살펴보는 동안 이 점을 명심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엘렌 화잇과 마지막 세대에 대해 고려할 두 가지 질문

마지막 세대에 관한 앤드리어슨과 엘렌 화잇의 견해를 비교 검토할 때, 두 가지 주요 질문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 마지막 세대가 죄를 완전히 극복할 것이라고 엘렌 화잇이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 그녀는 마지막 세대의 이 완전한 극복이 대쟁투의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이해했는가? 즉, 하나님은 우주 앞에서 그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은 (적어도, 죄의 완전한 극복에 대한 기대와 관련하여) 비교적 대답하기 쉬운 반면에, 두 번째 질문은 대답하기가 좀 더 어려운 편이다.

마지막 세대에 대한 엘렌 화잇의 초기 견해

엘렌 화잇은 분명히 마지막 세대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144,000인에 대해 여섯 번이나 언급한 1846년 1월 24일자 데이-스타(Day-Star)지에 실린 그녀의 가장 이른 편지에서 부터, 엘렌 화잇은 동시대의 재림교인들과 구원의 역사에서 담당할 그들의 특별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 계명과 안식일을 발견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 특별한 그룹이 독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하늘 성소에 그들 144,000명의 이름이 “금 글씨로 석판들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초기 19). 따라서 그녀는 이 마지막 세대 성도들의 경험에 있는 독특성을 강조하며, (1)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과 (2) 그들의 독점적 접근으로 성소와 연결지었다. 또한 계명의 중요성이 그녀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그녀는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 졌을 때 그들의 얼글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고 말하였다 (초기 15). 그러나 그녀는 더불어 재림하시는 왕 앞에 설 수 있는 능력에 대해 걱정하면서 “나의 옷은 흠이 없는가?”라고 묻는 그들을 주목하였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서도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능히 설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도다.”(초기 16)라고 말하신 그리스도의 대답에서  칭의와 성화의 실제성을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잇여사가 보고한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마지막 세대와 관련된 그녀의 글에서 중요한 주제를 강조한다: 즉, 깨끗한 손과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설 수 있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태의 마지막 세대를 위해 표준이 낮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에게 능력을 주어 그 표준을 충분히 만족시키게 됨을 그들에게 확신시켜 준다.

그리스도가 성소를 떠나기 전에 완전해짐

1849년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물러나” 하늘 성소의 지성소를 떠나시는 때에 관해 성도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초기 36). 같은 해에 그녀는 그리스도가 성소를 떠나실 때 모든 죄가 이미 도말되어 졌을 것이며, 더 이상 “그들의 희생과 고백과 기도를 하나님의 보좌 앞에 드려 줄 대제사장이 성소에 없”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초기 48). 그 사역은 주로 고백과 관련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1851년 5월, 그녀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직면하여 “잎사귀처럼 흔들리는”는 이상을 보았으며, “우리가 얼마나 두려운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안전에서 살 수 있도록 아주 거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나는 많은 사람들이 환난의 때에 대제사장이 성소에 없는 상태에서 주의 안전에서 살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6MR 168; 초기 71)라고 하였다. 그녀는 몇 달 후 “환란의 때에 보호받기 위해” 성도들이 “예수의 형상을 충만하게 반사하여야 한다”(초기 71)고 기술했다. 그녀는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했다: “어느 누구도 저지르기 쉬운 모든 죄와 교만과 이기심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모든 옳지 못한 말과 행동을 극복하여 승리를 얻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코 ‘새롭게 함’을 얻지 못할 것을 나는 보았다.” (초기 71)

엘렌 화잇의 “완전함” 대 “완전주의”

따라서 저술가로서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부터 엘렌 화잇은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전에 죄악의 완전한 극복을 기대하는 사람들 편에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비록 그녀가 “거룩해진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초기 101; 자서전 83)고 가르친 “소위 완전주의”를 적대시하며 경고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것이 그녀가 완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오인하지 말아야 한다. 1855년에 주어진 “주 만나기를 예비하라”는 제목의 증언에서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과, 마지막 일곱 재앙을 피하는 법을 알려 준다”(1 증언 126)고 거리낌없이 말하였다.

환난의 시기 동안 겪을 괴로움

그녀는 저술 생애 내내 죄의 극복이 필요함에 대해 더욱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1858년판 대쟁투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중보 사업이 끝난 후 그 두려운 시간에 성도들은 중보자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었다”(초기 280)고 담대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영적선물 3권에서 그녀는 고난의 시기 동안 천사들은 “알려진 의무나 여호와의 자명한 명령을 무시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고 설명한다 (3SG 196).

환난의 시기를 안전하게 통과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죄의 극복 수준을 엘렌 화잇이 결정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그녀는 그 환난을 겪는 사람들이 평정심을 잃는 것에 대해서도 똑같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이 성도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들을 위하여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의지하는 가운데 태연자약하였”지만, 하나님께 버림받고 파멸의 위협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 그들이 “큰 정신적 고민으로 괴로워하는 것을”(초기 283) 그녀가 보았다. 이러한 정신적 고통의 측면은 이후의 글에서도 확대된다. 이 점에 대해,  마지막 세대의 성도들이 그리스도가 겪었던 경험과 비슷한 시련을 받는다는 것에 앤드리어슨과 화잇은 완전히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참조: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겟세마네를 통과해’ 지나간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그 세 시간 동안 겪은 그리스도의 경험을 조금 맛보게 된다.” [앤드리어슨, 성소봉사, 317-318])

마지막 세대는 그리스도를 닮게 됨

변화됨을 받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극복 수준에 대한 엘렌 화잇의 진술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아마도 가장 강력한 진술은 그녀가 선과 악사이의 대쟁투 시리즈 마지막 책의 저술을 끝내고 크게 수정했을 때인 1884-1888년 동안에 기록한 진술들일 것이다. 그녀의 1884년 저술인 「예언의 신」 제4권에서, 그녀는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시련의 크기”를 고려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지라”(4SP 440)고 권하며, 이 권면은 그녀의 1888년판 대쟁투에서 크게 확대되고 있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을 본보기로 높이 들며 “비록 생각으로라도 유혹의 힘에 굴복당하지 않으셨다. . . 그분에게는 사단이 이용할 수 있는 죄가 전혀 없었다. 그것은 환난의 때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반드시 나타나야 할 상태이다.” 라고 역설한다. 엘렌 화잇은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능하다고 믿는바에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새로운 단락을 시작하는 그 다음 문장에서, 그녀는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죄와 분리되어야 한다”라며 계속 말하고 있다 (대쟁투 623).

하나님의 정당성 옹호 문제

아마도 이것으로 마지막 세대가 죄를 완전히 극복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있어 엘렌 화잇이 분명히 앤드리어슨 진영에 속해있다는 점은 충분히 밝혀졌다고 본다. 이제 우리는 그 보다 좀 더 어려운 다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그분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 무리의 사람들에게 의존하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극복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곤경에 처해질까?

엘렌 화잇의 글에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없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양쪽 답변으로 추론되는 징후는 있다. 확실히 엘렌 화잇은 대쟁투의 시작부터 가해진 하나님에 대한 루시퍼의 고소가 완전히 답변되어져야 한다는 점에 있어 앤드리어슨과 같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 다 악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와 사단이 하나님의 율법을 공격한 이야기로 되돌아감을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는 지키기 불가능한 법에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인류의 비난에 의해 그 후 계속하여 메아리쳐온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사단의 두 번째 고소에 대한 엘렌 화잇의 관심

그러나 엘렌 화잇은 앤드리어슨이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은 사단의 또 다른 공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만일 인간이 죄를 범했을 경우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고도 그분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소망 110). 이 질문은 엘렌 화잇에게 있어서 끝까지 지속되었다. 인침의 시간을 묘사하는 그녀의 글에서, 마귀는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사자들을 그분 앞에서 추방하시면서 동일한 죄를 범해 온 이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리고 환난의 때에 사단은 “주님께서 그들의(성도들의) 죄는 용서해 주시면서 자기와 자기의 부하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한다” (5증언 474, 대쟁투 618).

엘렌 화잇에게는, 완전함을 이룬 마지막 세대가 마귀가 제기한 모든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 처럼 보인다.

그리스도의 삶 – 심판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

엘렌 화잇은 사단의 공격으로 부터 하나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데 있어 그리스도의 역할에 앤드리어슨보다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 법을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옹호하였다”고 말한 직후,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분의 삶은 계명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HP 38). 천년기 후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희생’이 분명하게 제시될 때 ‘하나님의 공의’가 ‘완전히 옹호’될 것임을 밝히고 있다 (4SP 486).

십자가에서 모든 의문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음

반면 엘렌 화잇은 십자가 이후에 무엇인가 더 드러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 앤드리어슨과 완전하게 일치하고 있다. 천사들조차 “그 때에도 대쟁투에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다 깨닫지는 못했다” (소망 761). 하지만 주어진 질문과 답변에 있어서 엘렌 화잇은 앤드리어슨과 조금의 차이가 있다. 엘렌 화잇이 환난의 때에 혹독한 시험을 받은 성도들에 대해 쓸 때, 그녀의 초점은 하나님에 대한 그 성도들의 믿음과 신뢰에 치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의지함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다면 사단은 그들을 이길 수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시험받는 성도들에게 고백되지 않은 죄가 그들의 의식속에 나타날 때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두려움과 괴로움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고백하지 않은 죄가 그들 앞에 나타나게 되면, 그들은 압도당할 것이다. 죄를 감추고 변명하기를 애쓰고 고백하지 않고 용서받지 못한 채 그 죄들을 하늘의 책에 남아 있게 두는 모든 사람들은 사단에 의해 압도당할 것이다.” (4SP 437-438). 비록 엘렌 화잇이 마지막 세대가 필요로 하는 죄의 극복 정도를 자세히 설명하는데 전혀 머뭇거리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마지막 때 그들을 전복시키려는 사단의 노력과 이 성도들의 극복을 연관지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단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하려고 함을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특정한 “죄악들”에 대한 이들의 승리는 이미 성취되어, 마귀가 그들에게 자기 중심적인 행위를 유발함으로 그들을 유혹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그가 그 성도들의 죄 많은 역사로 채워진 보물상자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고, 이 부분에서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마지막 세대의 모형으로 제시된 여호수아 대제사장과 야곱

마지막 세대를 설명하기 위해 엘렌 화잇이 사용한 표현 중 일부를 읽으면 다소 놀라게 된다. 앤드리어슨이 묘사한 동일한 무리에 대해 그녀가 말하고 있는건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두 저술가 모두 혹독한 시험을 받은 무리를 묘사하지만, 엘렌 화잇은 그들의 약점을 훨씬 더 자유롭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사단과의 대쟁투에서 사용하신 품성에 대한 증인의 예로 욥을 언급하지만 (교육 154-155), 마지막 세대를 묘사할 때 욥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물론 엘렌 화잇은 에녹을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어,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비난이 거짓임을 온 우주에 입증하고자”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으로 지목하고 있다 (CTR 51). 그녀는 심지어 마지막 세대를 지칭하며, 에녹의 “경건한 품성은 그리스도께서 재강림하실 때에 ‘땅에서 구속함을 얻을’(계 14:3) 자들이 달성해야 할 거룩한 상태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부조 88-89). 하지만 그녀는 이러한 진술들을 결합하여, 하나님이 순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녹처럼, 마지막 세대를 선택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녀가 마지막 세대를 묘사할 때 자주 언급하는 구약의 인물들은 양심에 의해 심히 송사당하며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과 더러운 누더기를 입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이다(슥 3:1-5; 5증언 470-471). 하나님이 144,000인을 “끝까지” 시험하도록 사단에게 허락함을 언급할 때에도 그들의 경험과 욥의 경험의 유사성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대쟁투 618).

마지막 시험에 대한 묘사

앤드리어슨과 엘렌 화잇은 모두 마지막 때의 성도들이 겪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앤드리어슨이 그 환난의 시기를 “하나님이 인간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결정적인 증거” (성소봉사, 303)라고 부르고 있는데 반해, 엘렌 화잇은 그러한 극적인 묘사를 성도들이 겪을 시험과 불신자들에게 떨어지는 재앙의 강도에 사용하고 있다 (대쟁투 613, 622). 물론 화잇 여사는 천사들과 사단까지도 놀랄 정도로 그리스도의 성품이 “완전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마지막 세대에 성취될 위대한 일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 (3SP 261; 소망 680). 그러나 그녀가 이 시험을 가장 약한 자들도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특정한다고 보기는 쉽지 않다 (참조: 앤드리어슨의 성소봉사, 302, 316-317). 오히려 그 시험을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반사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있는 세속적인 것들이 불타 버려야 하는데 필요한 과정으로 여기는 것 같다 (대쟁투 620). 엘렌 화잇의 글에 묘사된 마지막 때의 성도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완전히 깨닫고” 있으며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깊은 자각”을 지니고 있다 (대쟁투 618-619). 이런 괴로운 상태에서는 “의존하고 무력하며 죄를 뉘우치는 죄인들”(3SG 132)은 구약의 야곱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들의 확신과 믿음과 견인불발의 정신은 격렬하게 시험을 받을 것”(대쟁투 618-619)임을 화잇 여사의 글은 묘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엘렌 화잇과 앤드리어슨의 마지막 세대가 이룬 결과는 같을 수 있지만, 사용된 언어와 초점애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우 중요한 시험

엘렌 화잇이 앤드리어슨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다른 초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마지막 세대가 사단의 공격으로 부터 하나님의 무고함을 입증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증거가 있다. 앤드리어슨과 같은 대담한 필치로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시험에 대한 그녀의 설명은 그 결과가 하나님 명예의 회복으로 귀결됨을 알리고 있다. 사단은 성도들이 자신만큼이나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비난하는데, 이때 하나님은 “그가 그들을 최대한 시험하도록” 허락한다. 그러자 마귀는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마지막 세대 성도들의 손목을 느슨하게 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성도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만일 무가치함이 입증되고 그들 자신의 품성의 결함 때문에 그들의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면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치욕을 당하게 될 것”(대쟁투 619)을 두려워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성도들의 믿음과 충성 그리고 심지어 그들 품성의 완전함까지도 하나님 이름의 명예와 결부되어 있음을 엘렌 화잇은 알리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 측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엘렌 화잇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슥 3:1-5)의 모형으로 마지막 세대의 경험을 묘사할 때, 그녀는 사단이 그 성도들이 자기보다 낫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와 나의 사자들을 그분 앞에서 추방하시면서 동일한 죄를 범해 온 이 사람들에게는 상급을 주실 것입니까? 오, 주님, 당신은 공의에 의하여 이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보좌는 의와 공의로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공의는 그들을 대적하는 선고가 내리기를 요구합니다.”(5 증언 473-474)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 성도들의 완전함 보다는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진정으로 회개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악의 지배에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죄를 버리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 . . 그들의 통회와 겸손은, 슬피 탄식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겸손을 비웃고,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고 있으면서도 완전을 주장하는 자들의 자부심이 강하고 거만한 정신보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훨씬 더 가납될 만한 일이다. 마음의 온유와 겸손은 힘과 승리를 얻는 조건들이다.”(5 증언 474-475) 같은 맥락에서 그녀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전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남아있는 세속적인 것들을 태우는 고통의 불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지만, 최종 결과는 앤드리어슨의 시나리오와 같을 수 있지만, 화잇여사의 언어와 초점은 달리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결 론

우리의 두 가지 질문에 대해, 나는 겸허하게 다음과 같은 대답을 제안하고 싶다. 그렇다, 마지막 때의 환난을 견뎌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성품의 완전이 필요한 요소라는 점에서 엘렌 화잇은 분명히 앤드리어슨 진영에 속한다. 이 완전함이 하나님의 정당화을 옹호하는데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록 그녀가 앤드리어슨이 했던 것과 같은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엘렌 화잇은 마지막 세대의 경험과 하나님의 승리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쟁투에서의 하나님의 승리가 마지막 세대에 달려있다는 면에서, 그녀는 앤드리어슨이 한 것 처럼 하나님의 곤경을 끔찍하게 묘사하지는 않는다. 엘렌 화잇은 사단의 고소에 대한 최종적이고 최선의 답변으로 그리스도의 역할에 대해 훨씬 더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엘렌 화잇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정당성 옹호에 대한 마지막 세대의 기여는 중심적이 아닌 보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세대의 역할이 앤드리어슨의 관점에 비해 엘렌 화잇의 글에서는 축소되어 있는 편이다. 결론적으로, 엘렌 화잇은 악과의 대쟁투에서 하나님의 정당성 옹호에 큰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녀는 일반적으로 이 대쟁투의 어느 단계에서든 그분의 정당함을 옹호하는 주요 원천으로 그분의 성도들을 주목하지는 않고 있다.

이 모든 언급에도 불구하고, 나는 앤드리어슨의 아이디어가 유용하다고 믿으며 더 연구되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 예언의 신에서 반향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버릴 이유가 될 수 없다.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는 이유로 그 아이디어에 대해 정직한 탐구를 부정해서도 안된다. 엘렌 화잇이 그러한 경고를 누구보다도 먼저 했을 분일 것이다.

내가 연구를 통해 배운 것은 앤드리어슨과 엘렌 화잇 사이에는 몇 가지 점에서 다른 강조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비록 그들사이에 완벽하게 일치하는 많은 점들이 있지만, 그녀가 모든 면에서 앤드리어슨 진영에 깔끔하게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볼 때, 나는 앤드리어슨의 견해에 대해 좀 더 공감적이면서도 솔직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비록 그의 입장 모두가 엘렌 화잇의 글에 기반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세대에 대해 앤드리어슨이 밝힌 대부분 견해가 그녀의 글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 출처: “Ellen White’s Views Regarding the Final Generation: Is She in Andreasen’s Camp?” ]


폴 에반스 (PAUL M. EVANS) 박사는 「앤드리어슨의 마지막 세대 신학애 대한 역사적-맥락적 분석」 (A Historical-Contextual Analysis of the Final-Generation Theology of M. L. Andreasen) 이라는 논문으로 2010년 앤드류스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한국 삼육대학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