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 중 가롯 유다를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대제사장들과 유대의 장로들에게 그 분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주님의 배도한 제자였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예수님은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지탱하고 유대 백성들을 예속화시켜며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던 전통들에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였는데, 유대 지도자들은 이 나사렛 출신의 보잘것 없는 기적꾼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자기들의 기득권을 탈취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롯 유다와 밀약하여, 그로 하여금 밤중에 자기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고 입맞춤으로 그를 자기들에게 지적해 주어 잡아들일 수 있도록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다른 열 한명의 제자들은 그날 밤 자기들의 동료 유다가 무리들을 이끌고 올 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유다의 속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다.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 (누가복음 22:48)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훌륭한 남녀들의 이름을 따라 자녀들의 이름을 지어 왔다. 하지만 나는 “유다”로 이름 지음을 받은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다. 그 어느 부모가 자신의 아들에게 그리스도를 배신한 자의 이름을 주겠는가? 이는 자기 아들의 이름을 “루시퍼”나 “사단”으로 짓는거와 다름 없는 것이니까.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마태 26:14-16)

이 마태의 기록에서 볼수 있듯이 유다는 예수님을 공식적으로 대적하거나 아니면 그 분을 대적하기 전에 자신의 제자 직분으로 부터 사임하지도 않았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그는 사악한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직분을 기만적인 은폐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예수님의 친구요 동지인 체하면서 그 분을 배신했던 것이다.

가롯 유다에 관한 성경의 기록을 읽으면서,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십자가에서의 구주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우리는 일종의 이상한 우월감과 함께 우리 자신을 이 유다보다 훨씬 나은 사람으로 착각하 고 그 배도자를 경멸적으로 보기가 아주 쉽다. 그러나 실상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자인하는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매일 키스와 더불어 그 분을 반복하며 배신하고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와 재물과 영광을 구할 때 마다, 우리는 배도의 키스를 범하는 것이다. 그 분의 이름을 이용하여 우리의 이름을 한번 내세워 보려고 할 때 마다, 우리는 키스로 그리스도를 팔아 넘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신 성과로 인해 (특히 예배중에)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갈채를 구하고 충동하고 받을때 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배도의 입맞춤을 시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적당한 봉사”로 인해 서로 칭찬하고 상을 주고 받을 때 마다, 우리는 유다가 했던 배도의 키스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아니면 직장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타인을 감성적으로, 심리적으로, 영적으로, 성적으로, 재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속이려 든다면, 그 때 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입맞춤과 함께 배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재능과 재주들, 우리의 간증들, 우리의 경력, 우리의 사역과 신임서들은 물론 우리의 명성과 인기, 그리고 재물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관심과 찬사를 하나님 대신 우리에게 집중되도록 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에게 배도의 입맞춤을 위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신학자나 목사나 장로가 비성경적인 오류로 다른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데 화평과 연합의 명분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면전에 배도의 키스로 추파를 던지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구도자들의 기분을 상케하지 않으려고 강단에서 그들의 구원에 필요되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 말씀을 거두면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들만 늘어 놓는다면,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술에 배도의 입맞춤으로 맞짱을 뜨는 무뢰함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가 순종과 자기희생이 따르지 않는 공수표 찬양을 하나님에게 남발할 때마다, 우리는 그 분을 배도의 키스로 배신하고 있음을 절실히 깨달을 필요가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결국 그 옛날의 유다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우리가 유다와 이렇게 닮은 점들이 많음을 느낀다면, 다시 한번 개인의 삶에서 교회라는 공동체의 삶에서 우리의 행위와 동기들을 조용히 되 살펴보며 회개하고 보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그 분의 승인으로 착각하지 말고 말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무례한 배도의 입맞춤은 태워버리는 하나님의 진노하신 입술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키스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