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문서는 앤드류스 대학교 캠퍼스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복음 연구회 (Gospel Study Group)의 2008년 11월 7-9일 모임에 제출되어 발표된 제리 피너먼 (JERRY FINNEMAN) 목사의 논문이다. 그 당시 화잇 부인과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이설로 규정된 “거룩한 육체 운동”의 실체와 주요 문제점들이 무엇인지 정리한 연구서로서 이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재림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서 론
이 논문의 목적은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인디애나 주의 재림교인들 가운데 벌어졌던 “거룩한 육체 운동 (Holy Flesh Movement)”의 두 가지 주요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교리와 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교리적 문제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것이었고, 체험적 문제는 그 교리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우리는 이 “운동”을 주도했던 알비온 밸린저(Albion Ballenger)와 S. S. 데이비스(S. S. Davis)의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위에 명시된 시기의 동시대 자료를 언급할 터인데, 한 가지 예외로 재림운동 역사에 관해 대학 교과서를 저술한 (현재 생존 중인) R. W. 슈바르츠라는 분의 책에 있는 자료를 또한 인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육체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진술을 한 화잇 부인의 글로 결론은 내리고자 한다.
1888년에 재림교회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중요성이 새롭게 강조되기 시작했다. 1889년 3월, 화잇 부인은 존스, 와고너와 그녀 자신에 의해 거행된 매사추세츠주 사우스 랭커스터에서 열린 집회에 대해 보고하였다. 이 집회는 1월 11일부터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구속주가 아닌 우리와 가까이 있는 구속주로서의 그리스도를 제시할 필요성을 느꼈다”라고 그녀는 기록하였다 (RH March 5, 1889). 이 기별은 그리스도의 의를 죄를 극복케 하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제시하였다.
점차 이 기별은 교회 내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하지만 일부 교인들은 이 기별과 그 당시 일반 개신교에서 대중적으로 전해지던 성결에 대한 가르침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A. T. 존스에 대한 비난 중 한 가지로, 그가 한나 위탈 스미스의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이란 책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가져왔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존스는 1893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읽고 상당히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책은 그들에게 큰 빛과 격려와 선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성경으로 가지 않더군요. 형제들이여, 그리스도인들의 행복한 삶의 비밀은 그러한 책 수만 권보다 성경 안에 훨씬 많이 담겨있음을 여러분들이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회중: “아멘!”] 저는 오래 전에 그 책을 읽어 보았습니다. 제가 처음 그 책을 접한 건 아마 5~6년 쯤 전 같아요. 어떤 분께서 가지고 계시면서 읽으시더니 저한테 그 책을 본 적이 있는지 묻더군요. “아니오”라고 대답하니 한번 읽어 보겠느냐고 해서 읽어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책에서 보다 이미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을 더 많이 얻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책에 담긴 것보다 성경에서 저는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을 더 많이 발견했거든요. 사람들이 성경 안에 있는 내용을 직접 꺼내서 배우기를 저는 바랍니다. [회중: “아멘!”] 만약 그 책이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담겨진 비밀을 얻게 도움을 주고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책의 내용이 모든 사람들이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의 정도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한 번은 제가 그 책에서 빛을 얻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어요. 바로 이 책이 (성경을 들어 올리며) 제가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을 얻은 곳입니다. 다른 곳은 없습니다. 저는 그 책이 존재함을 알거나 보기도 전에 이미 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그 책을 읽게 되었을 때 그 책 안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의 행복한 삶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성경을 읽고 믿는다면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A.T. Jones, General Conference Daily Bulletin, 1893, pp 358, 359)
1899-1900년 사이에 발생했던 교회 내의 거룩한 육체 운동은 본질적으로 그 당시 대중적으로 전해지던 일반 개신교의 성결 운동들과 다름이 없었다. 인디애나 합회에서 벌어졌던 성결 운동에는 두 가지 문제가 연관되어 있었다. 하나는 체험적인 면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적인 면이었다. 그 체험적인 면은 바로 이것이었다. “거룩한 육체”를 믿는 사람들은, 신자가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거듭나는 순간에 그의 죗된 인간 본성에 변화가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유전된 죄로 기우는 성향이 소멸되어 신자로 하여금 더 이상 죄를 범치 않도록 막아주고 또한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유전된 죄로 기우는 성향 때문에 아무도 죄를 이길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거룩한 육체” 옹호자들은 신자들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죄 없는 인간 본성을 받아 체험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 체험에 대한 주장은 그들의 교리에 기반을 두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범죄하기 이전에 지녔던) 죄 없는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는 믿음이었다. 1899년에 Review and Herald 편집자인 A. T. 존스는 “죗된 육신”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 두 가지 이슈, 즉 교리와 체험의 문제들에 대해 다루었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범해지는 심각하고 골치 아픈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거듭날 때 자신의 죗된 옛 육신이 제거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 육신이 완전히 소멸되어 그로부터 벗어나게 되리라 잘못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중에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고, 동일한 옛 사람의 육신과 함께 그 육신의 성향과 괴롭힘 그리고 시험도 여전히 남아있음을 발견하면서, 그들은 좌절하게 되고 그들 자신이 애초에 거듭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의심하기 시작한다. . .
거듭난 사람이 그의 육신이 여전히 죗된 육신일 뿐임을 계속하여 확실히 인식하게 될 때에만, 그는 자신의 육신에 선함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절대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육신에 대한 신뢰를 허용하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육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만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의 능력과 희망의 근원은 육신과는 완전히 별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게 된다. 항상 경계심을 가지고 육신을 의심하면서 신뢰하지 않기에, 그는 그 육신으로부터 어떤 선한 것을 결코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준비되어 그 육신으로 부터 기인한 모든 충동과 암시를 가차 없이 무시하고 짓밟아 물리치기 때문에, 그는 실패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승리에서 승리로, 능력에서 능력으로 계속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옛 사람의 영에 새로운 육신을 입혀주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의 육신 안에 새로운 영을 부어주는 것이다. 즉, 옛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육신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옛 사람의 육신 속에 새로운 마음을 주는 것이다. 구속과 승리는 인간의 본성을 제거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을 받아들여 인간 본성 위에 지배권을 행사하여 그것을 제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죗된 육신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영을 보내어 육신 안에서 죄를 정복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 . .
주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한 육신과 피, 동일한 인성, 즉 우리의 죗된 육신과 같은 육신을 지녔으며, 그 분 안에 계시던 신성한 마음을 통한 성령의 능력에 의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A. T. Jones, Review and Herald, April 18, 1899)
알비온 밸린저의 영향
알비온 벨린저의 영향으로 1890년대 후반에 성결운동의 씨앗이 재림교회 내에서 싹을 틔우게 되었는데, 밸린저는 1898년에 인디애나 장막 집회에서 강론하였다.
인디애나의 사역자인 S. S. 데이비스는 특히 “생각과 말, 행동에서 죄를 짓기엔 이미 너무 늦었으며, 지금은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입니다”라는 밸린저의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에반스빌에서 “도움의 손길(Helping Hand)”이라는 사회복지 선교로 활동하며 여러 오순절 기독교인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그들의 열정에 강력한 감명을 받았고 다른 재림교인 사역자들에게 “그들은 ‘영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만약 우리도 진리에 그들처럼 ‘영성’을 가지게 된다면 더 많은 일들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R.W. Schwarz, Light Bearers to the Remnant, p. 447)
감성적인 이슈
그 후 데이비스는 인디애나 합회의 부흥전도 강사가 되었으며, 그는 자신이 “정화의 기별”이라고 부르는 메시지를 전파하였다. 그의 집회는 매우 감정을 자극하는 분위기였으며, 그 목적을 위해 그의 부흥 집회에서는 오르간, 바이올린, 탬버린, 플루트, 나팔, 큰 북 등이 포함된 많은 악기들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그의 호소의 감성적 효과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청중들은 성령의 안수를 구하기 위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고 소리 지르고 박수를 치도록 부추겨졌다.” (R.W. Schwarz, Light Bearers to the Remnant, p. 447)
이러한 감성적인 경험 중에 사람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식을 잃고 기절하여 넘어졌고 그러면 그들이 연단으로 옮겨지고 거기에서 노래 부르고 기도하며 소리지르는 신자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렇게 한 번 혼절한 참가자가 께어나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으신 고뇌의 “동산 체험”을 통과했다고 선언되었다. 이 경험은 그 개인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 이제 죄와 죄의 성향에서 완전히 정화되었고 죽음의 권능에서 해방된 것을 보여준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승천할 준비가 되었다고 선언되었다. 그 겟세마네 “동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입양된 아들”로서 “지하 철도를 거쳐 천국으로 가야 한다” – 즉, 먼저 죽어야 되는 과정을 거쳐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R.W. Schwarz, Light Bearers to the Remnant, p. 447)
그리고 인디애나 합회장인 R. S. 도넬 (R. S. Donnell)이 데이비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 그 합회의 거의 모든 사역자들이 그를 따라 데이비스의 가르침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들의 예배 방식은 구세군 교회, 오순절 교회와 재림교회의 조합이었는데, 그것은 여러가지 형태가 뒤섞여 있는 혼돈스러운 예배 형식이었다.
교리적인 이슈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때 지녔던 인간 본성의 성격에 대해, 이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연관된 개념을 주장하였다:
-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가졌던 인간 본성을 취하였다.
- 그리스도의 육신은 타락한 영적 본성을 지니지 않았으며, 오직 타락하거나 퇴화된 육신적 본성을 지니고 있었다.
- 그리스도께는 잉태 당시 성령의 능력으로 인간의 유전법칙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
1900년 9월 13일부터 23일까지 인디애나주의 먼씨에서 열린 장막 집회에서 거룩한 육체 운동 지지자들의 모임이 있을 때에, S. N. 해스켈 목사와 A, J. 브리드 목사가 그 문제를 대처하기 위하여 대총회 대표로 참석하였으며, 거기서 해스켈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인디애나 합회 지도자들과 논의하였다. 해스켈이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간 본성을 스스로 취하였다는 자신의 믿는바를 말하자, 인디애나 합회 목회자들은 헤스켈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심지어 그의 발언을 왜곡하였다. 해스켈은 그 모임 직후에 엘렌 화잇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에서 그는 특히 거룩한 육체 운동의 교리적 문제와 그에 따른 경험적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저들의 운동은 제가 본 진리에 대한 광신주의의 가장 큰 혼합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가장 잘 처리했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우리가 실수를 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우리를 비난하고 우리의 입장을 왜곡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과 혼란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으로 탄생하신 사실을 믿고 있는 우리의 입장을, 아무도 오해할 수 없을 만큼, 분명히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우리를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저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요점은 이와 같이 보였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에 가진 인성을 취하셨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분은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의 죄 없는 인성을 취하셨으므로 그분이 가진 인성은 거룩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은 이와 같이 죄 없는 인성을 취하여 거룩하게 되어야 할 특별한 시대가 이르렀으며, 저들이 이제 승천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S. N. Haskell Letter to Ellen White, Battle Creek, MI, September 25, 1900 – DF 190, White Estate)
해스켈 목사는 위의 서신을 화잇 부인에게 보내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하여 “거룩한 육체”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교리의 구체적인 요점들에 대해 알렸다. 이 편지는 1900년 9월 25일에 작성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0월 2일에 해스켈은 리뷰와 헤럴드지에 “거룩한 육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죗된 육신 안에 있는 거룩한 그리스도인가 (Christ in Holy Flesh, or A Holy Christ in Sinful Flesh.)” 라는 제목의 사설을 올렸다. 그가 사용한 대안적인 명제는 서로 대칭된 해석들이 고려된 구체적인 시점을 알려주는데, 이 기사 전체는 두 번째 명제, “죗된 육신 안에서의 거룩한 그리스도”에 촛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는 이 사설에서 성경 말씀과 시대의 소망을 인용하였는데, 다음은 그의 사설을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시대의 소망」에서 인용한 후에 해스켈은 다음과 같이 계속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시대의 소망」 361,362쪽 [현재 판에서는 311, 312쪽]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야곱이 보았던, 밑바닥은 지상에, 꼭대기는 하늘 문, 곧 영광의 문어귀에 닿은 그 사다리이시다. 만일 그 사다리가 단 한 발판 때문에 지상에 도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잃어버린 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있는 곳에 찾아오신다. 그분께서 우리의 본성을 취하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취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 없는 생애를 사셨다(롬 8:3). 이제 예수께서는 당신의 신성으로는 하늘의 보좌를 붙드는 한편 당신의 인성으로는 우리를 붙드신다.”
(S. N. Haskell Review and Herald, October 2, 1900)
그런 다음 해스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인성은 모든 유전적 성향을 갖고 있는 타락한 인성을 가리킨다. 하늘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상에서도 흠이 없으셨던 그분이 우리의 본성을 취하셨는데, 그렇게 함은 인간을 당신의 의로 당신의 높은 위치까지 끌어 올리기 위해서였다.
같은 책 119, 120쪽 [현재 판에서는 112쪽]에서 다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범죄한 세상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지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친히 취하시는 그러한 굴욕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그분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다.”
(S. N. Haskell Review and Herald, October 2, 1900)
이는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지녔던 인성을 취하셨다는 “거룩한 육체” 옹호자들의 믿음과 대조되는 것이었다. 해스켈은 다시 「시대의 소망」에서 인용하였다.
다시 말해서, 아담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저자는49, 50쪽 [현재 판에서는 49쪽]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위대한 유전의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분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공유하시며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S. N. Haskell Review and Herald, October 2, 1900)
그리고 계속하여 해스켈은 예수의 인간적 유전성을 다루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선조들에 관한 유일한 신뢰할 만한 족보를 담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조상으로 네 명의 여성 이름들이 언급되어 있다. 창녀로 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음행을 저지른 다말 (마1:3, 창세기 38장), 기생 라합 (마 1:5; 여호수아 2장), 자기 아버지와 동침한 롯의 딸의 자손인 모압 사람 룻 (창19:30-38), 그리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바로 그들이다. 밧세바와 다윗의 사건은 수천 년 동안 조롱하는 자들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선조들에 관한 역사를 기록하지 않을 방식이다. 그들은 선한 여성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 즉 출생과 생활이 모범적인 사람들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식이며, 타락한 자들에게 희망을 제시한다. 우리가 최악의 성향과 욕망을 물려받았다 하더라도 희망이 있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라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였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었을 때 그가 지닌 인성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같은 선지자는 또한 시편 22장 9-10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9-10). 이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모든 믿는 자들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S. N. Haskell Review and Herald, October 2, 1900)
히브리서 2장 16-18절과 4장 15-16절을 인용한 후, 해스켈은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그 사설의 결론을 맺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속주는 죄스러운 인간 본성 안에 있는 거룩한 그리스도로서, 죗된 본성안에 거하는 그분의 임재가 타락한 인류를 성화시키며, 죄없는 구속주의 거룩함과 임재로 인해 인류가 끝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S. N. Haskell Review and Herald, October 2, 1900)
해스켈과 더불어 존스도 인디애나 합회의 데이비스 목사와 도넬 합회장이 제기한 기독론적 문제를 다루었다. 존스는 “예수의 믿음”이라는 제목하에 일련의 기사를 리뷰지에 기고하였다. 이 시리즈는 1900년 12월 11일부터 1901년 1월 29일까지 이어졌는데, 이러한 기사들과 그의 다른 사설들은 나중에 집필된 히브리서에 담긴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책 “「성별(聖別)된 길 (The Consecrated Way)」의 기초가 되었다. 존스는 그 기사들에서 “거룩한 육체” 옹호자들의 근본적인 교리적 문제를 반복해서 다루면서, 그리스도를 인간의 유전된 된 본성을 취한 존재로 제시하였다.
반면 인디애나 합회의 도넬 합회장은 존스에 맞서서 “인디애나 보고서(Indiana Reporter)” 지에 “예수의 믿음”이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자신의 기사를 썼다. 이 견해는 존스의 시리즈를 반박하는 것으로, 도넬은 그리스도께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죄 없는 본성을 가진 존재로 제시했다.
그분(예수님)은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을 소유해야 한다. . .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처음 상태로 회복하려고 한다면, 그분은 자신도 그러한 상태로 인간에게 다가 와야 한다. 그분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 소유했던 상태로서 와야만 한다. (R. S. Donnell, “The Faith of Jesus” Indiana Reporter, Article One, p. 4)
하나님이 사람 속에 거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죄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시 사람 속에 거하기 위해서는 죄가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몸으로서, 하나님과 사단은 함께 거할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의 육신은 결코 죄를 짓고자 하는 그 어떤 성향도 완전히 박멸된 육신이었어야만 했을 것이다. (R. S. Donnell, “The Faith of Jesus” Indiana Reporter, Article Two, p. 6)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어떤 상태였는가? . . . . 그는 거룩했다. 이제, 아담이 지나간 동일한 길을 통과하려면, 그리스도께는 분명히 아담이 시작한 곳에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 . . . 이제 우리는 그의 신성이 거룩했음을 안다. 그리고 그의 인성도 거룩하였다면, 그러면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로 나타난 그것은 모든 면에서 거룩한 것으로서 죄의 성향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R.S. Donnell, “Article Two,” pp. 6,7. – Written while president of the Indiana Conference. In 1907 these were published in a tract entitled “What I Taught in Indiana.”, DF 190, White Estate)
그리고 1901년의 대총회 후 인디애나 합회장의 직무에서 해임당한 다음, 도넬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분은 죄의 영향을 보여주는 약화된 상태의 몸을 가졌으나, 그분의 삶은 그 안에 죄가 없음을 증명하였다. 그분의 몸은 그를 위해 아버지께서 예비한 몸이었다 (히 10:5). 그리스도의 육체는 타락한 영적 본성에서 구원된 몸이었지만 타락하거나 또는 약화된 육체적 본성에서는 구원되지 않았다. 그것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육체였고, 그 육체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성을 입혔다. (R.S. Donnell, “The Nature of Christ and Man.” an essay written from Memphis, TN, and sent to his colleague S.S. Davis)
도넬 목사의 후임으로 인디애나 합회장이 된 I. J. 핸킨스 (I. J. Hankins) 목사는 데이비스 목사에게 그의 믿음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편지를 썼다. 총 여덟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으며, 그 중 절반은 성육신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은 그 중 두 가지 질문이다:
질문 #4: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간략히 서술해 주시오; 데이비스의 답변 – “누가복음 1:35 거룩한 이.”
질문 #7: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이 선과 악을 구별할 만큼 나이가 들기 전에도 자연스럽게 악을 범하게 기울어져 있는가?; 데이비스 답변 – “네,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유전의 법칙으로부터 보존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S. S. Davis, Letter to I. J. Hankins, Elnora, Indiana, March 15, 1903)
교리적 문제를 이해한 다른 이들의 증언
죄없는 육체의 교리와 연관된 다른 하나의 주장을 지금 우리가 검토해 볼 터인데, 그것은 바로, 거듭남과 함께 육신의 욕망, 경향 및 성향과 유전적 기질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육신과의 싸움이 그치고 그때부터 유혹은 모두 외부로부터 오며 내부에서 기인한 유혹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S. G. Huntington, “The Son of Man,” p. 13. (A tract published by Mission Press, LaFayette, Indiana about 1900)
인디애나 합회의 장막 집회 이후에 화잇 부인은 유진 판스워스 (Eugene Farnsworth) 목사 및 다른 이들과 함께 인디애나폴리스 교회를 방문하였으며, 그곳에서 그녀는 이 오류를 지적하는 분명한 증언을 내놓았다. 그녀는 이 오류에 가담했던 사역자들이 함께 모여서는 아니되며 그들은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에 “내가 이 곳을 떠난 후에는 그 누구도 이 교리의 어떤 부분을 가지고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되는데, 이러한 교리의 어느 부분에도 털끝만큼의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고 단언하였다.
(G. A. Roberts, “The Holy Flesh Fanaticism,” June 11, 1923, DF 190, White Estate)
[역자주] 거듭남과 함께 육신의 욕망, 경향 및 성향과 유전적 기질들이 모두 사라지고 육신과의 싸움이 그치고 그때부터 유혹은 모두 외부로부터 오며 내부에서 기인한 유혹은 없다고 주장하는 “거룩한 육체 운동”의 가르침을 다음에 인용된 김명호 목사의 주장과 한번 비교해 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중생한 생명, 곧 새로운 창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항상 의롭고 항상 거룩합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07쪽)
“거듭난 사람은 신성의 본질을 예수 안에서 받은 사람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그 본질이 하나님의 의가 된 것입니다(고후 5:21). . .이것이 구원이요,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이며, 이것이 거룩이요 이것이 생명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30쪽)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에게 있어서) 죄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203쪽)
“하나님께로 난 사람, 곧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공격을 받아 영생의 생명으로 생활하는 일에 상처를 입는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들이 범하는 죄라고 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스스로 죄를 선택하지 않는다. 즉, 자기 안에서 죄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죄가 공격할 때 그것을 미처 방어하지 못하여 죄가 들어오는 것이다.” (죄, 예수 그리고 구원, 212쪽)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신 것은, 말하자면 모태에 잉태되시고 탄생하시는 그 자체가 바로 거듭나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 .예수님이 탄생하시는 것이, 우리의 처지에서 말한다면, 바로 중생으로 탄생하신 것이고, 우리는 태어나는 것이 죽은 자로 태어났으나 예수님이 성령으로 탄생하신 것과 같이 성령으로 거듭남으로 탄생하신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올리워진다는 말입니다. . .(예수님은) 중생의 생명으로 탄생하셔서 중생한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시고, 우리를 성령으로 중생하게 하셔서 예수님의 거룩한 상태로 끌어올려 놓으심으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으로 중생했다면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능히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숨 쉬는 것은 썩지 않는다, 104쪽)
이 목회자가 그의 서적에서 주장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 죗된 본성(본질) 자체가 바뀌어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죄는 없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이 목회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달리 죄성이 없는 육신으로 성육신하셨다고 주장하는 분인데,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과 같은 승리를 거두려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본성이 예수님처럼 속에서부터 죄가 올라오지 않는 본성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이 목회자는 그리스도인이 거듭날 때에 그의 본성이 예수님과 같은 죄 없는 본성으로 변화되어 “에수님의 거룩한 상태로 끌어 올려져서”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자리로 올리워지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신 것과 같이 능히 살 수 있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목회자의 주장은 화잇 부인과 그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해 이설로 규정하여 배격했던 “거룩한 육체 운동”의 바로 그 교리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거듭날 때 변화되는 것은 마음과 성품이지, 본성이 아니다. 물론 엘렌 화잇이 그녀의 저서에서 본성의 변화에 대하여 몇 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품성의 변화를 의미한다. 화잇 부인 생존 당시에 품성이라는 단어를 본성으로 대신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우리의 자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을 수없이 강조했다. 거듭남을 통하여 생명으로 태어나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자아가 존재한다. 살아 있지만 힘을 잃은 육이 영에 의해서 지배당하는 상태로 변화되는 것이 중생의 경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 . .로 여길지어다.”라고 한 것이다(롬 6:11).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죽은 것으로 간주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본성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 몸이 홀연히 변화되어 영화로운 새 몸을 받을 때까지 변화되지 않는다. 우리 생애 속에서 된 충동과 투쟁이 완전히 없어질 때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거룩한 육체 운동 옹호자들이 주장했던 핵심적 신조의 오류를 화잇 부인은 가려뽑은 기별 2권 32-33쪽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소위 "거룩한 육체"라고 일컫는 가르침은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영혼들이 이생에서 거룩한 마음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나 거룩한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말하였다. 믿음에 의해서 소위 그 거룩한 육체라고 하는 것을 얻으려고 무진히 애쓰는 자들에게 나는 "그대들이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대들 중의 단 한 영혼도 거룩한 육체를 가진 자가 없다. 이 지상에 사는 인간은 아무도 거룩한 육체를 가진 자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만약 육체로서 완전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제멋대로 말하는 자들이 참된 빛 가운데서 사물을 밝히 파악할 수 있다면 저들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참람된 생각을 버리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거룩한 육체에 관해 가장한 저들의 허위성을 나타내 보여 주심으로써 남녀들이 당신의 말씀을 인용하여 육체와 영혼과 정신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저지시키려고 애쓰신다. 교리의 이러한 양상을 조금만 더 허용한다면 마침내는 이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할 것이다. 저들은 거룩한 육체를 가졌으므로 저들의 행동은 모두 거룩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에 유혹의 문이 얼마나 크게 열릴 것인가?
성경은 몸과 영혼과 정신의 성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성화의 작업에 있어서 우리들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람 안에 하나님의 도덕적인 형상을 회복하고 육체적, 정신적 및 도덕적인 능력을 개선하는 일에 있어서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고 몸을 더럽히는 것들을 일체 거부함으로써 신체적인 조직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비록 우리가 육체의 완전성은 주장할 수 없으나 신앙적인 영혼의 완전성은 가질 수 있다. 우리 인류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을 통하여 죄들은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다. 우리들이 의존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그것을 의존한다. 우리들이 우리들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복종시키고 완전히 믿을 때에 그리스도의 피는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신다. 양심은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주님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영혼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될 수 있다. 우리들이 불가능한 일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우리들은 성화를 주장할 수 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향유할 수 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해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치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그대들은 사랑하시는 주님 안에서 받으신 바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복종을 받아들이시고 당신 자신의 형상을 따라 꼴을 지워주시고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 . .
나는 이상한 교리들을 주장하는 인디애나 주의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고귀하고 중대한 하나님의 사업에 그릇된 인상을 주고 있다. 성경의 한계선을 지키라. 그리스도의 교훈들을 선택하여 그것을 거듭거듭 반복해서 가르치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약 3:17, 18)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인간이 거룩한 육체를 받을 때에는 저들은 이 지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며 하늘로 데려감을 입을 것이다. 이생에서 죄가 용서함을 받기는 하나 죄의 결과는 이생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빌 3:21)실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다. . . .
1901년 4월 2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된 대총회 회의
1901년 대총회는 재림교회 안에서 발생했던 이 “거룩한 육체 운동”을 다루었으며 이 운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운동의 이론, 음악, 방법 및 경험등이 1900년 10월 화잇 부인이 해스켈 목사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해스켈 목사 가족에게 보낸 화잇 부인의 편지:
인디애나 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하여 그대들이 묘사한 것과 같은 일들이 은혜의 시기가 끝나기 직전에 있을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셨다.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치며 드럼과 요란한 음악소리가 들리며 춤추는 광경을 재연할 것이다. 이지적인 인간의 감각들은 혼란을 일으켜 올바른 결정들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성령의 역사라고 부른다. . . .지난 정월에 나에게 보여진 바 우리 장막 집회에 있을 사업을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악기들을 사용함으로 난잡한 음악으로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좋다. . . .그러나 지난 1월에 주님께서는 우리 장막 집회에 오류에 속한 이론들과 방법들이 침투할 것과 과거의 역사가 반복될 것을 나에게 보여 주셨다. 나는 크게 슬픔에 잠겼다. (엘렌 화이트의 편지 132, 1900, 5-8쪽 - S. N. 해스켈 형제와 자매에게, 1900년 10월 10일, Manuscript Releases, Vol 21, 128-130쪽; Selected Messages, Vol 2, 36-37쪽).
1901년 대총회 회기 중 이 “거룩한 육체 운동”에 대해 가장 두드러지게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두 인물이 있었는데, 그들은 E. J. 와고너와 엘렌 화잇이었다. 와고너는 여러 차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교리적 문제를 다루는 설교를 하였고, 화잇 부인은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경고하는 동시에 그들의 잘못된 체험에 대해서 다루었다.
4월 16일 저녁 시간에, E. J. 와고너는 명료하고 결단적으로 설교를 하였는데, 그는 히브리서 10장 4-10절을 본문으로 인용하였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4-10)
이 성경절은 물론 거룩한 육체 교리의 옹호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요 구절 중 하나였다. 이 성경절을 봉독한 후에 와고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번 여기서 설교한 후에 나는 두 가지의 질문을 받았는데, 이제 그 질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 중 한 질문은 이렇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태어난 거룩한 이는 죄스러운 육신을 지니고 태어났으며, 그 육신은 우리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악한 성향과 씨름해야 했습니까?” . . . .
이 성경절을 논하기 전에 이 질문에 담긴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거룩한 이, 즉 그리스도께서 죄스러운 육신을 가지고 태어난 것인지 여러분이 질문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로마 가톨릭의 무염 시태설 (immaculate conception) 교리에 대해 들어 보셨나요? 그 가르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 . . 무염 시태설 교리는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죄 없이 태어났다는 가르침입니다. 왜냐구요? –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지만, 사실은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구원을 받을 인류 사이에 큰 간격을 두어 아무도 그 사이를 넘어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작품인 것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우리 모두가 로마 가톨릭교에서 벗어났는지 여부를 꼭 결정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 흔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 .
(우리 육신이 죄스럽기 떄문에) 예수님의 육신은 우리의 것과 같지 않았다는 아이디어는 필연적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 시태설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음을 여러분이 감지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으셨음은 우리 모두가 압니다. 하지만 육신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가 나타난 것은 . . . 죄스러운 육신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이 한 점의 흠도 없는 순결함으로 완전하게 나타난 것입니다. . . .
잘못된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마음 속에서 그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론적인 오류뿐만 아니라 죄로부터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 이 점을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죄없는 육신이라는 개념은 마귀의 산격화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음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는 마귀의 것입니다. . . . 죄 없음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따라서 죄 없는 육체라는 개념은 불순종의 자녀들, 즉 육신의 소욕 안에서 작용하는 영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E.J. Waggoner, General Conference Bulletin, April 16, 1901, pp. 403-405)
그 다음 날에는 화잇 부인은 거룩한 육체 운동이 주장하는 체험적인 측면과 그 가르침에 대해서 증언을 제시했다:
인디애나 주에 있는 형제들이 최근에 겪은 경험과 저들이 교회들에게 준 가름침에 관하여 나에게 지시의 말씀이 있었다. 이러한 경험과 가르침을 통하여 원수 마귀는 영혼들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나도록 활동하여 왔다.
소위 “거룩한 육체”라고 일컫는 가르침은 오류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영혼들이 이생에서 거룩한 마음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나 거룩한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주장은 옳지 못하다. 사도 바울은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말하였다. 믿음에 의해서 소위 그 거룩한 육체라고 하는 것을 얻으려고 무진히 애쓰는 자들에게 나는 “그대들이 그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대들 중의 단 한 영혼도 거룩한 육체를 가진 자가 없다. 이 지상에 사는 인간은 아무도 거룩한 육체를 가진 자가 없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 .
비록 우리가 육체의 완전성은 주장할 수 없으나 신앙적인 영혼의 완전성은 가질 수 있다. 우리 인류를 위하여 치르신 희생을 통하여 죄들은 완전히 용서받을 수 있다. 우리들이 의존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그것을 의존한다. . . . 우리들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해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치물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 . .
인간이 거룩한 육체를 받을 때에는 저들은 이 지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며 하늘로 데려감을 입을 것이다. 이생에서 죄가 용서함을 받기는 하나 죄의 결과는 이생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빌 3:21)실 때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다. 그리스도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오실 때, 주님안에서 죽은자들을 무덤의 감옥에서 불러내실 터인데 그 때가 되어서야 성도들이 거룩한 육체를 받을 것이다.
(Ellen White, General Conference Bulletin April, April 17, 1901, pp. 419-420)
교황권의 기반
와고너와 마찬가지로 S. G. 헌팅턴 목사도 거룩한 육체 교리 이론을 교황권과 연결시켰다:
죄 없는 육신 이론을 채택함으로써, 그 옹호자들이 인정하기를 꺼려해 왔지만, 그들은 부지중에 무염 시태설과 그외 다른 가톨릭 교회의 이설들을 포함한 교황권의 오류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죄없는 육신 이론은 전적으로 교황권의 이론인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기초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 교리를 제거하게되면 교황권의 전체적인 종교적 구도는 무너지게 됩니다.
“죄 없는 육신”이라는 표현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표현을 구태어 채택해야 합니까? . . . . 성경 말씀의 기록은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졌고 (롬 8:3),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롬 1:3),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2:16) 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명한 말씀들을 비틀어서 도착적인 공상을 지지하기 위해 주관적으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일관성 없는 엉망진창의 올가미에 얽매이게 됩니다.
(S. G. Huntington, “The Son Man,” p. 3, – A tract published by the Mission Press, LaFayette, Indiana, 1900)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화잇 부인의 가장 강력한 글들은 거룩한 육체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기록되었음
특별히 유의할만한 점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떤 종류의 인성을 취했는지에 대한 화잇 부인의 가장 강력한 글들을 거룩한 육체 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기록되어 졌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그리스도께 “죄를 범한 인간의 본성 (the offending nature of man)”, “죄로 말미암아 퇴락하고 더럽혀진 본성 (a nature degraded and defiled by sin)”, “범법자 아담의 본성 (the nature of Adam, transgressor)”을 취하셨다고 기록하였다.
죄를 범한 본성을 그분 자신의 죄 없는 본성과 연합하심
그리스도를 통해 명백히 드러난 사랑을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이 헤아리기엔 너무나 깊은 신비로움이다. 그리스도께는 실제로 죄를 범한 인간의 본성을 자신의 죄 없는 본성과 연합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자신을 낮추심으로 해서, 그분이 추락한 인류를 위해 당신의 축복을 부어주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Ellen White, Ms 166, 1898 (Manuscript Releases Volume Seventeen, p. 26); Review and Herald, July 17, 1900)
퇴락하고 더럽혀진 본성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굴욕을 생각해 보라. 그는 몸소 죄로 말미암아 퇴락하고 오염된 고통 당하는 인성을 취하셨다.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으며 우리의 수욕을 겪으셨다. 그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유혹을 참고 견디셨다. 그는 인성과 신성을 연합시키셔서 거룩한 영이 육체의 전에 거하게 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요 1:14)에 거하셨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죄많고 슬픔이 많은 아담의 아들들과 딸들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Ellen White, Youth Instructor, December 20, 1900, quoted in 4BC 1147)
범법자 아담의 본성
그리스도 안에서는 신성과 인성이, 창조주와 피조물이 하나로 연합되었다. 자신의 법이 어김을 당한 하나님의 본성과 범법자 아담의 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인 예수 안에서 만났다.
(Ellen White, MS 141, 1901, 7BC 926)
요약과 결론
1898년부터 1901년까지 발생했던 “거룩한 육체 운동”의 두 가지 주요 측면, 즉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교리적 문제와 그 교리에서 파생된 “거룩한 육체”의 체험적 문제에 관해 우리가 살펴 보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 당시 시대의 자료들을 검토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거룩한 육체 운동”이 벌어졌던 기간 중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가장 강력한 진술을 한 화잇 부인의 글로 결론은 맺었다.
[ 원문 출처: “The Holy Flesh Movement by Jerry Finneman” ]
제리 피너먼 (JERRY FINNEMAN) 목사는 은퇴 후 병원 원목으로 봉사하고 있으며 그가 속한 교회에서 안식일학교 교과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