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리 교회 성도님들, 지난 주간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면서 평안하셨나요?

저는 포트리 교회가 진리위에 굳건히 서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견고한 교회가 되길 늘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안식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함께 심령의 회복과 신령한 지식으로 무장하는 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의 설교는 “죄로 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죄에 대한 이해에 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좀 어려운 주제이고 해서 보통 설교보다 시간이 좀 길어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주 중요한 내용이기에 성도님들의 주의와 양해를 구합니다.

오늘의 주제 성경절은 디도서 2:11-14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디도서 2:11-14)    아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죄로 기우는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의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을 위해서는 구주가 필요하다”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할 때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은혜”의 전반적인 목적과 기능을 간과하고 무의식적으로 오직 한가지에만 우리 생각을 집착하는 과오를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광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에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능과 더불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능이 또한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주제 성경절이 “은혜”에 이러한 칭의와 성화의 양면적 기능이 있음을 잘 나타내 줍니다.

이 점은 죄를 범하지 않은 천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지에 대해 언급한 엘렌 화잇의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글을 주위 문맥과 함께 고려해 보면 뚜렷해 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없는 천사들을 사랑하시는데, 그들은 그분의 사업을 하며 당신의 모든 명령에 순종한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신다. 이 하늘 천사들은 은혜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그들은 이것을 결코 필요로 해본 적이 없는데, 이는 그들이 결코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Amazing Grace, 34페이지)

여기서 증언 말씀이 기록한 바는 죄를 범한 적이 없는 하늘 천사들에게는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 은혜의 기능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엘렌 화잇은 더불어 다른 기능의 은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데, 그 이유는 그들도 하나님 아들의 십자가 고난을 바라봄 없이는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효능을 통해서만 하늘의 천사들이 배교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십자가 없이는 그 천사들도 사단이 타락하기 전의 천사들 보다 더 안전하지 않다. . .이 땅이나 하늘에서 범죄로부터 안전을 바라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 보아야만 한다. 구원의 계획은. . .죄를 범치 않은 세상들에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없도록 영원한 보호막을 제공한다.” (영문 시조, 1889년 12월 30일)

즉, 죄를 범치 않고 승리하도록 권능을 주는 십자가 은혜의 기능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천사들에게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요약하자면, 하늘 천사들은 죄를 범한 적이 없기에 “용서해 주는 십자가의 은혜”는 필요치 않지만, 그들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이기는 능력을 주는 십자가의 은혜”는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는 점이죠.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구원의 계획에는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능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치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권능이 또한 있음이 성경절과 증언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용서함이 제공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 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절실히 필요되기에, 과거에 죄를 지어 죄인이었는지 몰라도 회개하여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더라도, 구주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능력이 우리는 물론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천사들에게도 계속 필요됨은 당연한 것입니다.

제가 장로교에서 개종하여 재림교인이 된 후에 엘렌 화잇의 글들에서 감명을 받고 그녀를 하나님의 기별자로 확신하게 된 이유 증 하나는 바로 십자가 은혜에 대한 이러한 포괄적인 이해를 그녀의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죄론의 신학체계에 기반을 둔 장로교 신앙은, 우리를 죄 가운데 두지 않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담긴, 이러한 십자가 은혜의 진리를 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성도님들, 죄로 부터 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죄로 부터 우리들을 구원하실까요?  우리가 이 죄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진실로 중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죄에 대해 올바른 이해는 마귀의 기만이 범람하는 마지막 때에 오류로 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성경의 모든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인데  어떻게 사람들이 구원받는지에 대한 모든 토론의 근본이 되는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무엇이며 그것이 복음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함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점은 그 때마다 이 주제들의 바탕에 있는 듯이 보이는 한 주제를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정의입니다.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가 그렇게 안 좋아 보이는 주제에 관심을 두어야 할까요? 그 이유는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우리의 결론이 죄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정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이 죄인인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을 정죄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죄인이 지옥 불 속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가?

아마도 여러분은 죄가 뭔지 알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강 짐작하고 있던 그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우리가 죄란 말을 사용할 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따져보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지었나요?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 그는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 전에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해야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깨달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문제입니다. 치료가 실행되기 전에 그 질병의 본질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되돌아가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왔던 모든 고통들의 시작이 되었던 죄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아담이 죄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떠한가요?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도 죄인이 되는가요? 그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유전 받았으므로 우리가 죄인입니까?  아니면 아담의 죄를 우리도 짓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지옥불의 불꽃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책이 부과된다는 그 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무슨 죄 때문에, 그리고 누구의 죄 때문에 우리는 정죄되고 잃어버린바 되는가요?

기독교 안에는 크게 죄에 대한 두가지 다른 정의가 존재합니다. 본성으로서의 죄와 선택으로서의 죄가 바로 그것입니다.

본성으로서의 (원죄론)

이 정의는 우리의 죄책이 소위 원죄라고 하는 것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원죄란 아담이 선택하여 지은 처음의 죄를 의미하지 않고,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타고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혹은 그 연유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이죠. 이 원죄라는 용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원죄론 안에서도 조금씩 변형된 몇가지 다양한 정의가 존재합니다.

  •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므로 죄인이 된다
  • 아담의 자녀로 태어나 타락한 종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간주된다
  •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다
  • 아담의 자녀로 태어나서 죄인 + 우리 자신의 반역행위를 선택했기 때문에 죄인 (두가지 다른 측면의 죄를 다 포함)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의 밑바닥에 있는 한 공통분모는 우리가 인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죄인 되거나 혹은 정죄를 받는다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들로 원죄를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이 모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죄책(guilt)과 정죄됨(condemnation)이 본질적으로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주장인데, 우리의 개인적인 선택과 전혀 상관없이 아담의 죄에 대해 책임을 지고 정죄되었다는 뜻입니다.

장로교단을 창시한 탁월한 조직 신학자인 칼벵은 죄(sin)와 죄책(guilt)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 .죄에 감염되어 얼룩진 채 세상에 들어온다. .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더럽혀지고 오염되었다. . .부모들의 불순함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 되어졌다. . .모든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타락되었다. . .죄책은 본성에서 기인한다.”

“인간 전체가 침수 되어서. . .어떤 부분도 죄로부터 면제되어 남아있지 못한다. 그런 연고로 그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것이 죄로 간주된다. . .사람들은 사악하게 태어난다. .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죄인들이다.” (캘빈, 「기독교 강요(綱要)」,  2권, 1장, #5,6,7,8,9,10,27)

그리고 원죄론의 사조를 받아들인 재림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이런 원죄론적인 주장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죄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선언되었다. . .악한 욕구는 그것을 의지로 물리칠 때에도 죄가 된다. . . .죄는 우리가 유전 받은 악한 본성이며 그것의 모든 열매들이다.(데스몬드 포드, 「성육신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한 팜대일 학술회에 제출한 논문 28페이지).

아담에게서 나는 아담의 후손들은 다 썩은 씨들이다. 아담은 사망의 나무가 되었다. 즉 죄의 나무가 된 것이다. 거기서 열리는 열매는 죄들이다. 아담에게서 태어난 그의 모든 후손들도 죄의 나무 사망의 나무로 태어났다. 거기서 열리는 것은 다 썩어져가는 구습인 사망의 열매들만 열린다.” (김명호, 「죄, 예수 그리고 구원」, p.73-74)

“그러나 성경은 다른 의미에서 죄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 . .성경은 아담이 죄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칩니다.” (저자 미상, 「만져본 구원」)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우리가 이해하고 옳고 그름에 대해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혹은 깨닫기도 전에 우리 속에 죄가 이미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담의 후손으로 태생한 때문에 우리는 이미 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주장은 재림교회의 제 7 기본 교리문에 반하는 주장인데, 대총회의 대표자들이 인준한 공식 교리에 어긋나는 이런 주장을 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현상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여튼 이 본성적인 죄론의 전제를 지탱하기 위해 여러가지 비성서적인 이설들이 그 후에 기독교안에서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죄에 대한 원죄론적인 이해가 왜 로마 천주교회는 물론 루터와 칼뱅 등 모두로 하여금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지에 대해 알려줍니다. 만약 사람 이 본성에 의하여 정말 죄인이 된다면, 그가 탄생하자마자 즉시 세례를 받아서 이 죄를 씻어버리고 출생으로 인한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일은 사실상 극히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원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와 칼뱅은 그것의 필요성을 누누이 역설했는데, 이들의 생각엔 아기들이 태어난 후 즉시 침례 받아서 그들 안에 내재된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하였죠.  칼뱅과 루터 모두 이렇게 원죄론에 동의하였으며 원죄론에 대한 사상을 로마 천주교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받아들였습니다.

루터와 칼뱅은 또한 예정론의 교리를 견지하였는데, 이 예정론이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 받거나 버림 받도록 미리 예정하셨다는 주장입니다. 루터와 칼뱅은 이와 같은 교리를 따랐으며 그들이 견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이 예정론이란 전제 위에 구축했습니다. 왜냐하면, 원죄론에 의하면, 죄가 우리의 본성 그 자체로 항상 우리에게 존재합니다. 하지만 성경말씀은 분명히 죄가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 분의 주권으로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미리 정해 놓았다는 예정론을 주창하기 시작한 거죠. 예정론은 원죄론의 교리와 매우 논리적으로 잘 들어 맞습니다.

또 이 원죄론에 의거하여, 우리가 본성적으로 죄인이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죄를 극복할 수 없기에, 성화라는 것은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계명은 철폐되었다고 주장하는 도덕률 철폐론(antinomianism)이 나왔고, 다른 한 편으로는 모순을 해결하려고 깊게 생각해 보니까 너무 골치아파서, 하나님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그냥 다 구원하실 것이라는 만인 구원론(universalism)이 그 부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이렇게 한 오류적 전제를 지탱하기 위해  여러 다른 오류들을 만들어 내게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신학자들 참 대단한 사람들이죠?

“We are what we think/believe”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데로 꼴지어 진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관과 세계관이 우리의 삶을 꼴짓습니다. 이제 여러 성도님들은 이 세상 대부분의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차이없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나약하고 추한 모습으로 변했는지 이해가 좀  가시나요?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영에 인도되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거짓된 전제를 가지고 출발함으로써 오류에 빠진다. 그런 다음에는 오류가 진실로 입증되게 하고자 모든 일을 유도한다. 어떤 경우에 근본 원리는 오류가 혼합된 어느 정도의 진리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행동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것이 사람들이 오도되는 이유이다. 그들은 지배하는 하나의 세력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들의 원칙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에 그들은 사단의 방법을 택한다.” (엘렌 화잇, 증언 7권, 181 페이지)

결론적으로, 이 본성적인 죄의 “원죄론” 교리는 많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정의들 속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개념은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죠. 우리가 죄인으로 그리고 정죄 받은 자로 태어난다는 개념, 우리가 아담 가족의 일부로서 죄인이 되고 정죄 받는다는 개념이 이 원죄론 즉 본성으로 인한 죄의 가르침입니다.

선택으로서의

이제 죄의 두 번째 정의인 선택으로서의 죄에 대해 주목해 봅시다.

아담의 본성 속에 원래 아무것도 그를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이끄는 것이 없었습니다. 아담에게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웠지요.

  • 그러나 아담의 타락은 아담에게 악으로 이끌리는 성향을 초래하여 죄 짓는 일이 자연스러워 지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짐
  •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죄로 기우는 고장난 본성, 연약함, 타락함을 유전받고, 아담이 그의 죗된 상태에서 가졌던 동일한 욕망들을 가지게 됨
  • 하지만 이러한 죄의 정의가 원죄론의 정의와 다른 점은 우리가 죄책 혹은 정죄/형벌은 유전 받지 않는다는 것
  • 죄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빛과 알고 있는 의무에 대하여 반역하기를 선택할 때 비로서 죄인이 됨; 우리가 아담이 내렸던 결정, 즉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기로 한 그 결정을 내리기로 선택해야지만 비로서 우리가 죄인이 됨

우리는 죄스러운 본성이, 죄짓는 것 즉 죗된 선택을 더욱 쉽게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강조하려는 요점은 우리가 그러한 선택들을 하는 그 시점에 죄인이 되는 것이지 그 선택 이전에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이 지은 처음의 죄로  인해 초래된 악과 죄책(Evil and Guilt) 그리고 결과와 형벌 (Result and Penalty) 이라는 개념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조심스럽게 구분 지어야 하겠습니다.

악과 죄책 (Evil and Guilt), 과와 형벌 (Result and Penalty)

다음 도표는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잘 나타내 줍니다.

(A) 악과 죄책 (Evil and Guilt)

만약 우리가 죄를 선택으로 정의한다면, 악(evil)과 죄책(guilt)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구분 지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많은 악이 존재하는데 짐승의 세계에서 조차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역력히 들어나는 모든 악한 것들에 항상 죄책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한 예화를 들면서 설명하면 이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오래전에 저희 가족이 기르던 방울이라는 힌색 진도개가 있었습니다. 이 녀석은 틈만 있으면 도망나가서 자주 잡으러 나갔는데, 하루는 비어있는 옆집뒤에 가서 뭘 하는걸 보고 쫓아 가서 보니, 들고양이가 새끼를 나아 기르는데 가서 새끼 고양이를 앞발로 이리 치고 저리 치면서 무자비하게 노리개 감으로 고문하며 놀고 있었어요. 물론 어미 고양이는 혼비백산해서 아기 고양이를 두고 도망간 상태였습니다. 저는 즉시로 그 사이에 끼어들어 방울이를 잡아 더이상 새끼 고양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고 끌고 왔습니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 새끼 고양이가 포기할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죽였을 겁니다. 집에 끌고와서 말로 혼내고 나무랬지만, 우리는 그 개를 재판에 넘겨 감옥에 가두지 않습니다. 이것은 진도개와 같은 동물에게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적 본능으로 여기고 넘어 갑니다.

그런데 같은 방법으로 그 어떤 동물이나 혹은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우리는 그를 가장 흉악한 범죄를 지은 범죄자로 생각하고, 아마도 법으로 처벌해 감옥에 가두어 지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동물, 다시 말해 이 진도개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이 자연세계의 일부로 여기고 말 것입니다. 그 새끼 고양이가 고통을 겪어야 한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개에게 죄책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악한 행동들은 악하더라도 죄의 자연적인 결과로 보며, 어떤 다른 악한 행동들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에게 죄책이 부과되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이렇게 악과 죄책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악이라는 말은 단지 나쁜 것, 부정적인 것 혹은 틀린 것, 즉 저주받은 세상에 존재하는 죄의 결과들을 뜻합니다.  죄책은 악한 생각들과 행위들에 대한 도덕적 존재에 부과되는 책임에 적용되는 말입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자연과 동물들은 죄의 결과들을 가득히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거나 구속 받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적 가치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람만이 이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지식 때문에 그는 어떠한 악한 행위들에 대해서 유죄판결을 받게 되는 겁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선택에 의한 것이라 믿는다면 우리는 악과 죄책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죄책이 성립되려면 사전 지식과 의도적 반역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죄선고는 항상 인간의 사전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야고보서 4:17에 에 있는 다음 말씀이 그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B) 결과와 형벌 (Result and Penalty)

이제 우리는 악과 죄책의 개념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이 개념을 성서적으로 입증할 필요가 있는데, 창세기 2장 17절에는 하나님을 거역함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한 형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아리송하게 느끼곤 하는데,  왜냐하면 아담이 이브가 준 그 열매를 먹었을 때 그날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 아주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은 그날 죽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엘렌 화잇의 다음 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사형선고가 즉시로 그에게 집행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대속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스스로 떠맡고 실족한 인류를 위해 대속하기로 자원하셨던 것이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2페이지).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이 금하신 그것을 범하였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의 형벌이 내게 떨어지도록 하소서. 제가 인간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그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산 자와 죽음 사이에 들어 서셨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5페이지).

“죄가 있자마자 거기에는 구속주가 있었다. .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인류를 위한 보증으로 제공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갈보리의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자위에 선고된 멸망을 피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4페이지).

왜 아담은 그날 죽지 않았나요? 그날 대속물이 죄의 형벌과 아담 사이에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날 아담의 자리에 대신 들어 서셨던 겁니다. 아마도 이것은 계시록 13장 8절의 어린양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킹제임스 성경역에 있는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날 아담과 그의 사형 선고 사이에 들어서심으로 해서, 사실상 예수께서는 인간의 보증물로 그날 그 형벌을 감당하셨던 겁니다.

그 후 곧바로 아담은 그를 대신해 돌아가실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한 짐승의 희생제사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아담의 죄에 대한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즉시 지불되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아담의 자리를 대치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담도 결국은 그 형벌을 감당해야 할까요? 아담은 결국 그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어야 합니까? 왜 아담은 930년 이후에 죽었습니까? 그가 결국 그 죄 값을 지불했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그의 죽음은 단지 죄의 내재된 결과들 중 하나였을 뿐인가요?  

사실 그의 죽음은 아담에게 있어서 일종의 축복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900여년간 목격했던 모든 죄와 아픔과 고통이 자기 자신의 죄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고통을 견디어야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실 이러한 것들로부터 구조됨을 받는 것이었다고 봐야할 것 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 즉 아담에게 도래했던 이 자연사는 죄의 형벌(penalty)이라기 보다는 죄의 결과(result)였습니다. 죄의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이지요. 아담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려서 그 죽음의 형벌이 이미 지불되었음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 즉 죄의 내재된 결과는 남아 있어서 아담은 900여년 후에 육체적인 죽음 (첫째 사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두 구별된 기둥으로 나누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 도표에 나타나 있듯이 왼쪽의 기둥은 악(EVIL)이라고 명시되는데, 죄의 내재된 결과로 기인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비롯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이 모든 악은 육체적 죽음인 첫째 사망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사망을 잠이라 부르셨는데, 그것은 인간의 최종적인 종말은 아닙니다. 이처럼 악과 그것의 결과는 육신의 사망과 고통과 우리 주위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 이어졌습니다.

오른쪽의 기둥은 죄책(GUILT)이라 이름 붙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둥은 영멸 혹은 둘째 사망, 즉 죄에 대한 형벌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죄로 인한 두 결말들을 가지고 있지요.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죄의 고유한 결과들인 저주, 즉 인간들과 동물들 그리고 모든 자연이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죽음인 첫째 사망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인간이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또한 죄의 형벌인 둘째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책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지불되어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영접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코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와 같은 죄의 두 가지 결말들 모두를 다 해결합니다. 그러나 이 속죄가 죄책은 용서함으로써 해결하고 악한 결과들은 죄의 저주가 초래한 것들을 재창조하고 회복함으로써 해결합니다. 속죄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래 계획한 대로 회복하기 위해 일하지만, 왼쪽 기둥에 있는 영역을 용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오른 쪽에 있는 죄책의 영역들, 즉 죄의 형벌만을 용서할 뿐입니다. 여러 성도님들, 제가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이것을 잘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칭의, 용서, 구원, 복음, 그리고 의와 성화와 같은 용어들은 특별히 오른쪽 기둥에 있는 문제들, 즉 죄책과 형벌 및 지옥과 관련된 문제들에 적용됩니다. 죄의 결과와 죄의 형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정죄와 구원의 문제들은 특별히 죄책과 그로 인한 형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말할 때는 바로 이 오른쪽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으로 가서 이러한 차이점에 대한 증거들이 있는지 살펴볼까요?

요한복음 9:1-3에서 제자들이 소경 된 자를 보고 그리스도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1-3).

여기서 예수께서는 그의 소경됨 즉, 그가 당하고 있는 불행이 어떤 개인적인 죄에 대한 책임때문이 아니고 유전된 연약함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개인적인 죄와 타고난 죄의 영향 혹은 결과들 사이를 구분 짓고 계십니다.

또 다른 중요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5:24-25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미 언급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성경 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반박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수께서는 바로 지금 오늘, 만약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계속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십니다. 24절에서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이제 영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25절에서는 다가올 재림의 때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라 했지요.  우리가 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이의 차이를 구분 짓지 않는 한, 우리는 여기서 어쩔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오늘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고,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 지고, 구원받았으며 죄의 형벌인 둘째 사망을 결코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채로 승천할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사로의 경우처럼) 우리는 잠이라 불리는 죽음을 경험할 것이며, 나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첫째 사망의 잠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용서받고 영생이 주어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담이 지은 죄가 불러온 저주의 결과로서 여전히 죽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죽는 세상에 존재하기에 죽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첫째 사망은 죄에 대한 형벌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도 첫째 사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죠.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영생은 죄의 삯인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파생되는 두 가지 결말이 존재한다는 훌륭한 성서적 증거들이 우리에게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1) 첫째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결과가그 하나요, (2)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형벌이 다른 하나입니다.

죄가 우리의 선택과 연관됨을 보여주는 성경 말씀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 3:4, 킹제임스역)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약 4:17)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욕심이 잉태하게 될 때에만 죄가 성립됨을 밝히고 있는데, 이 잉태한다는 말은 선택과 직결되는 말. 욕심에 끌리거나 유혹을 받는 그 상태는 단지 시험을 당하는 상태이지 죄가 아님.]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

우리의 본성 자체는 죄가 아니라는 예언의 신 말씀

“저속한 욕정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flesh) 또는 “육체의” (fleshly) 또는 “육체의 정욕들” (carnal lusts) 이란 말은 그 저속하고 타락한 본성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가정, p. 127)

육체는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보다 높은 능력이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 감정은 의지에 지배되어야 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 (치료, p. 130)

계발된 지력이 지배권을 잡아 동물적 습성을 통제하고 이를 도덕의 힘에 복종시킬 때에는 유혹을 가지고 정복하려 하는 자기의 힘이 심히 적어질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다.” (청년, p. 237)

죄는 개인의 의도와 동의가 선제된 행위라는 예언의 신 말씀

“악한 말을 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것으로 시작된다. . .하나의 불결한 생각이 방관되고, 하나의 거룩치 못한 욕망을 맘속에 품으면, 그 영혼은 오염되고, 그것의 순결함은 타협된다. . . .모든 거룩치 못한 생각들은 즉시 물리쳐 져야 한다. . .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가장 훌륭한 사람들 조차도 사단에 의해 암시되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물리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특별히 대쟁투에 있는 다음 글은 자발적인 “선택”이 죄와 하나님의 속성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의지나 판단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노예적인 굴복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이, 당신께서 사랑을 받으실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의 지혜와 공의와 자비를 충분히 깨달은 후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특성들에 대하여 올바르게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분께 이끌려가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대쟁투, 541)

자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정복당할 수 없다. 유혹자는 사람의 의지를 지배하거나 죄를 범하도록 강제할 능력이 조금도 없다. 그는 사람을 괴롭힐 수는 있어도 더럽힐 수는 없다. 그는 번민케 할 수는 있으나 죄에 물들게 할 수는 없다.” (대쟁투, 510)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택과 판단을 강요하지 않으시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충분히 깨닫고 순종하는 자발적인 선택을 귀중히 여기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분이 죄를 인간의 선택을 무시하고 아담이라는 조상의 죄를 떠않고 책임지라는 “본성적인 죄”로 정의하시지 않는 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만 기억한다면,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가르침인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기본신조문 제7항에 나타난 재림교회의 죄론

더불어 재림교회의 기본 신조 제 7항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남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으며, 개성과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부여 받았다. 비록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각 사람은 육체, 정신, 혼의 불가분적인 통일체로서 생명과 호흡,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있어서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그들은 그분께 대한 자신의 의존성을 부인했으며, 하나님 아래에 있는 그들의 고귀한 지위에서 타락했다. 그들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되었고 그들은 사망에 예속되었다. 그들의 후손은 이런 타락한 본성과 그 결과를 물려받았다. 그들은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경향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 통회할 때 그들 안에 조물주의 형상을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간에 사랑하며 자신의 환경을 돌보도록 소명되었다.” -기본 신조, 7.

이 신조문은 타락의 실제성과 그 파괴적인 결과를 강조하며 아담의 죄로 인한 인간의 “연약성과 악에 기울어지기 쉬운” 타락한 본성을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담의 죄로 인해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소위 원죄론적인 “타고난 본성적 죄인”의 개념을 배제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기본신조문을 자세히 설명하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죄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기술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 죄의 성질. 특별히 최초의 타락에 관한 설명을 포함해서, 수많은 성경절들은 죄란 도덕적 악이라는 것, 곧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범한 결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창 3:1-6, 롬 1:18-22). 1) 죄의 정의.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여러 성도님들, 그 어떤 이름있는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이와 반대되는 의미로 죄를 정의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의 글이나 강론이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 뿐만 아니라 우리 재림교회의 공식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것임을 알고 경계하셔야 할 것입니다. 죄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칭의, 성화, 심판과 같은 복음 전반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이 마지막 시대에 사는 우리는 그러한 현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근래에 이상구 박사, 박영호 목사 같은 사람들이 우리 교회의 성소론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을 비난하며 교회를 떠나갔는데, 그들이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바로 본성적인 죄라는 원죄론적인 죄의 개념울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40년전 성소론을 부정하며 크게 물의를 일으키고 교회를 떠난 데스몬드 포드 신학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박영호 목사는 자신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데스몬드 포드의 이해와 동일하다고 주장함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포트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에게 성경말씀과 그 성경말씀들을 이해하기 쉽게 조명하는 화잇 부인의 글들을 기도하며 열심히 읽고 연구하셔서 영적인 분별력을 성장시키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저는 화잇 부인의 글들이 참으로 저의 신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게 해주는데 아주 큰 도움을 준 자료였음을 여러 성도님들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쉽지 않은 주제애 대해 더 자세히 연구하고 살펴보시고자 하는 성도님들은 REMNANTFAITH.ORG라는 블로그에 방문해 보시길 권합니다. 신앙과 재림교회의 근래 역사등에 대해 유익한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7:11에서 바울은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라고 베뢰아인들을 칭찬했습니다. 사도인 그의 말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고 확인하는 베뢰아 사람들을 “신사적”이라고 칭찬했는데, 영어성경은 “고귀하다”라는 뜻의 noble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저나 목사님이나 다른 사람들이 강단에서 하는 설교를 그냥 모두 진리이겠거니 가정하지 말고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읽고 확인히시는고귀한 베뢰아 사람들이 되시길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하심이 여러분들과 늘 함께하시길 기원하며, 이제 우리 함께 개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마치는 기도

자비로운 하나님,

죄악이 넘치고 마귀의 기만적인 이론들이 남은 무리의 교회안까지 침투하는 이 때에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진리의 띠와 의의 흉배와 믿음의 방패로 전신갑주를 취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으로 무장케 하사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에 힘쓰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항상 그리스도의 편에 서고자 마음먹지만
나태함과 연약함과 이기심때문에 자주 실족하는 저희들
이렇게 주님께 나와 다시 한번 십자가 앞에 자복합니다.
지극히 부족한 저희 죄인들 긍휼히 여겨 주시고 용서해 주소서.

더불어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분을 닮아 변할 수 있도록 용기주시고 겸손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기도가 될수 있도록 성령으로 도와 주소서.
당신의 뜻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 자신의 죄 된 의지를 당신의 뜻으로 가장시키기 위해 기도하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항상 살펴볼 수 있게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우리 가운데 상처를 받은 성도님들 있다면 치유해 주시고 서로 사랑하게 도와 주시고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전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소서.
더불어 하나님의 사업에 온 성도님들 합심하여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건강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 주소서.

오늘 교회에 함께하지 못하는 교우님들에게도
당신의 안식와 축복을 허락하시고 속히 우리와 함께 주님께 예배드릴수 있게 인도해 주소서.

이제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시고 승리하도록 이끄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하심이
지금부터 세상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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