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위험한 위조품은 진품과 가장 흡사한 위조품이다. 이것이 종교적 위조가 아주 치명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식별되어 노출되기보다는 종종 용인되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가장 훌륭한 진리와 매우 흡사한 오류를 공격하면 오해를 받을까 봐 두려워한다.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구분하는데 있어 종이 한 장 차이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은 위조품에 반기를 들 때 진품을 공격한 죄로 비난받을까 두려워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신성한 교리와 흡사한 왜곡된 가르침을 사단이 조작한 적이 있는가? 물론 실제로 그는 그렇게 했고, 그러한 왜곡된 가르침에 있는 미묘한 차이점들은 심지어 신학자와 학자들도 공개적으로 그것을 반대하기를 매우 꺼리게 만들었다.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평행한 견해들이 서로 너무 유사해서 그것들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차이가 대체로 경미한 의미에 있으며 단어의 사용에 있어서 조금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강력한 심리적 적대자가 실제로 이러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하고 거의 인식되지 않아 저항하기 어려운 진실의 절묘한 일탈을 교묘하게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실제로 나는 그가 6천년 동안 쌓아온 정신과학에 대한 그의 전문지식을 이용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없다. 이것이 오류의 길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의 길과 매우 가까이 놓여 있는 이유이다. 사단은 보통 기독교인들이 진리와 매우 가까운 어떤 것에 맞서기를 꺼릴 것이며, 특히 그 진실이 십자가의 사역이나 하나님 아들의 흠이 없는 삶을 포함한다면 더욱 그러할 것임을 알고 모험을 하였다. 누가 이런 거룩한 실체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길 원하겠는가? 완벽에 가까운 위조를 공격하는데 오해를 살 위험을 무릅쓰는 것보다 단순히 일탈적인 입장을 용인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해 보인다.

나는 사단이 교묘하게 위장한 오류를 만들어 대중화시켜서 연관된 오류의 네트워크로 이어지게 만들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헌신적인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소중히 자리잡은 가장 신성한 주제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성육신하신 예수님, 죄에 대한 승리와 같은 주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잘못된 견해들이 논리와 추론의 설득력 있는 연결고리에 의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 요점이 진리이면 다른 요점들도 모두 진리일 필요가 있고, 한 요점이 오류이면 다른 요점들도 신뢰성을 상실하게 된다.

원죄론

그러한 연결고리는 초대 교회 신학으로 주입된 원죄라는 교리에 의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죄를 짓기 쉬운 인간의 선천적인 타락된 본성에 관한 성서적 입장으로 시작하여, 아담의 죄 또한 후손에게 전수된다는 개념으로 점차 진화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의 유전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전파한 다른 누구보다도 책임이 있었고, 루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이 개념은 많은 개신교 교회로 침투하였다.

비록 그 교리가 초대 교회에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깊은 생각이나 의문 없이 다수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두 견해 사이에 근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담의 쇠약하고 타락한 본성은 유전의 법칙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져 그들이 개심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의 죄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인한 것이었기에, 그들은 아담의 죄책을 공유한다고 믿는 오류에 빠지기 쉬웠다.

그러나 죄로 기우는 성향과 죄에 대한 죄책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으며, 그 작은 차이가 일련의 다른 교리적 오류를 촉발시킨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에스겔 18:20)라고 말했다.

유아 세례

원죄를 믿는 논리적인 결과로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유아 세례에 대한 강력한 교리를 성립하였다. 물을 뿌리는 성례의식에 의해서만 아담에서 기인한 죄의 저주가 아기에게서 제거될 수 있었다. 아이의 구원은 적절한 세례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의식에 절대적인 우선 순위가 주어졌다. 어머니의 삶과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삶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어머니는 희생되었다. 가톨릭 의사들과 간호사들은 생아 출산이 어려운 경우를 대비해 자궁안에 있는 태아에게 세례를 주는 기술을 배웠다.

원죄 교리는 또한 마리아의 무염시태설 이라는 신조를 낳았다. 만약 모든 아기가 영혼에 죄책을 지니고 태어난다면, 예수님을 그 죄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어떤 조치가 취해져야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죄를 위한 완벽한 희생제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톨릭 교회는 마리아가 원죄의 영향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주는 기적적인 잉태를 통해 태어남으로 해서 그녀가 죄없는 육신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신조를 세웠다. 따라서 예수님이 자연히 아담에 대한 죄책에 참여하지 않고 인간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그들의 관점에서 비롯된 결과로, 가톨릭 교회는 인간 사제라는 비성서적인 제도를 또한 도입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거하지 않았다면, 구속의 사다리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과 타락한 인류 사이의 간극을 연결하는 사다리가 없었고, 따라서 그 연결을 완료할 수 있는 추가 수단이 제공되어야만 하였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죄된 육신을 지닌 지상의 사제들에게 그 연결고리의 역할이 할당되었다. 이어 죄된 육신으로 살았지만 교회에 의해 하늘의 성자로 지정된 이들에게 중재자의 역할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천사들과 예수님의 어머니에게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의 지위를 부여받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진리로 부터의 작은 일탈이 어떻게 연쇄 반응적 결과들을 불러오는지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인성 – 타락한 본성인가 타락하지 않은 본성인가?

이제 원죄론이 개신교 교회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들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 믿음의 딜레마를 피할 수 있었을까? 비록 그들은 무염시태라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거부했지만, 그들은 똑같이 비성서적인 교리를 지어내어 그리스도를 타락한 아담 가문에서 완전히 동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견해는 예수님이 아담 후손들의 본성에 참예하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육신하였다고 선언했다. 즉, 예수님은 아담이 죄짓기 전에 가졌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지니고 태어나, 죄 없는 인간성의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아갔다는 주장이다.

다시 한번 우리는 위조품의 놀라운 속임수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고 왔다고 말하지만, 원죄의 오염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본성이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리에서 벗어난 심각한 탈선인가? 예수님이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의 인성을 가졌다고 믿든 죄를 범한 후의 인성을 가졌다고 믿든 무슨 차이가 있을까?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이 차이가 실제 적용에서 고려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문제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사실은 이 작은 편차가 개신교의 가장 소중한 진리 중 일부를 공격하는 일련의 잘못된 결론에 이르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이런 교리는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다. 적어도 여섯 번에 걸쳐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졌음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히브리서 2장 11절은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들은 하나의 혈육과 가족이다.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거룩하게 함을 입는 자들인데, 우리가 모두 하나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그의 형제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문도 가질 수 없는 사실을 확립하고 있다.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히 2:16, KJV)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본성을 그가 취하셨다면, 아브라함의 씨를 그가 어떻게 취할 수 있었단 말인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가 천사나 거룩한 아담이 지녔던 어떤 이색적이고 죄가 없는 본성을 취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던 본성과 같은 본성을 취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죄로인해 연약해진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죄책을 수반하지 않는다. 죄를 짓도록 시험 당하는 것 그 자체는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시험을 당했지만, 결코 죄악에 굴복하거나 그 죄를 품은 적이 없었다. 그는 결코 죄악에 굴복함으로 죄로 향햔 성향을 계발하지 않았다. 그는 죄에 더럽혀지지 않았고 항상 순수하고 거룩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히2:17, KJV)

예수님은 왜 인성을 취하고 오셨는가?

왜 그는 우리가 가진 육신과 본성으로 태어나셨는가? 우리의 약점과 죄로 이끌리는 성향을 이해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기 위해서 였다.  “모든 일에서”라는 단어가 정말로 “모든 일에서”를 의미하는가? 물론이다.

바울은 예수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말을 그리스도께서 마리아로부터 거룩하고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물려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은 논리에 어긋나는 시도이다. 다윗의 혈통이 취한 육신이 어떤 것이었든지 간에 우리의 주님도 같은 것을 취하셨다.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기들의 유전적인 성향에 굴복하여 개인적으로 죄를 지었다. 예수님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윗의 본성을 육신과 더불어 물려받으셨지만, 그 본성의 선천적인 약함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처럼 모든 면에서 유혹을 받았지만, 그러한 유혹에 대해 단 한 가지도 방종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유혹자에 대항하는 변치않는 무적의 영적 능력으로 무장된 요새였다.

아버지의 변함없는 권능에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그는 육신을 물려받은 다윗의 모든 혈통에게 가능하고 경험할 수 있는 승리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다시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히 2:14)셨음을 읽게 된다. 영감을 받은 성경기자가 그리스도와 인간의 육체가  동일함을 강조했음을 주목하라.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 이 단어들은 반복적이고 중복되지만 연이어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럴까? 예수님이 정말로 인간이 소유한 같은 본성을 취하셨음을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이다. 자녀들이 (부모의) 혈육에 함께 속한 것처럼, 그도 또한 같은 혈육에 함께 속한 것이다! 어떻게 이 명백한 언어가 누군가를 혼란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유전적 연약함을 지니셨다

그런데 이 영감을 받은 말들은 그리스도가 “혈육에 함께 속한” 자녀들과 같은 본성에 참예했음을 확실히 말해준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리스도가 어떤 종류의 본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는가? 아담에게 그가 죄를 짓기 전에 낳은 아이들이 있었는가?  하나도 없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아담이 죄를 지은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히브리서는 예수가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 똑같은 무엇이란 말인가? 부모로부터 자녀들이 물려받는 그 동일한 혈육을 말한다.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어떤 종류의 육신을 물려받는가? 오직 죄된 육신(본성)이다. 아담의 자손 가운데서 죄된 육신외에 다른 종류의 육신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수님이 자녀들과 같은 혈육에 속하였다면, 그것은 죄된 혈육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자신은 죄가 없었다!

한 저자는 이 명확한 성경의 입장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매우 간결하게 묘사했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위대한 유전의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분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공유하시며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시대의 소망, 48페이지)

이 진술은 유전법칙의 작용을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혈육을 지녔다는 바울의 선언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진술은 또한 유전을 언급하고 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지니고 태어났다면 유전적 영향에 대한 바로 그 암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출생과 조상에서 기원되지 않은 타락하지 않은 거룩한  아담의 원래 본성에는 그 어떠한 유전적 영향도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그리스도에게 물려받은 연약함이 없었다면, 어찌하여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가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것과 같은 혈육을 지녔다고 말했겠는가? 확실히 창조주는 원래의 피조물에 그 어떠한 내재된 연약함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담은 유전적인 성향에 맞서 싸워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항상 죄를 짓지 않기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대로 이런 것을 말”(요 8:28)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한 모든 말과 행동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께 의존하고 있음을 반복해서 말했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격과 전능함을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그와 반대로, 그는 진실로 완전히 인간이었던 것처럼 완전히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그 두 본질이 분명히 신이나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어떤 잡종적인 성격으로 융합되지 않았다. 그는 완전한 신이었고 완전한 인간이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는 동안 이러한 구별된 본질 중 하나를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연약함과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신의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살기를 선택하였다. 죄와 육신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는 끊임없이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의 힘에 의존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마귀를 이겨내고 유혹의 모든 길을 닫고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살게 되었다. 육신의 본질적인 매력에 결코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의존을 통해 아담의 모든 자녀들에게 구현될 수 있는 승리의 본보기가 되었다.

사단은 광야에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의 고통스러운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그가 소유한 신적인 힘을 이용하도록 유혹하였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그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신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단의 바램은 그리스도를 자극하여 인간적인 고통의 해소를 위해 그의 신성을 사용하도록 자극하는 것이었다. 그게 왜 사탄에게 승리가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이것을 이용하여 육신으로는 어떤 사람도 바칠 수 없는 순종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다는 그의 비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본성으로 그리고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같은 수단으로 그 유혹을 극복하지 못했다면, 마귀는 순종이 실로 불가능한 요구라는 것을 증명했을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이 자신을 구원함과 동시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신적인 힘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시험을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혹독하고 괴로운 경험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실제로 물려받았다면, 어찌하여 그는 아담의 나머지 후손들 처럼 죄를 짓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그가 자궁에서 부터 성령으로 충만해 있었고 완전히 순복한 의지와 성화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죄를 짓지 않기 위해 같은 능력에 참예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 극복하신 그리스도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본성으로 사단에 승리를 거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승리로부터 어떤 용기를 얻을 수 있을까? 아담이 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가능함을 나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싶은 바는, 내가 소유한 타락한 본성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단은 피조물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는 혐의를 하나님에게 씌워 그분을 공격하였다. 타락한 인간이 순종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로마서 8장 3-4절에서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하여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KJV)

이 구절들의 의미는 우리가 몇 가지 질문을 하게되면 간단히 이해된다. 우리의 육신이 너무 연약하여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율법이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약함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을 보내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셨다. 그는 그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로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

육신안에서 이룬 그의 승리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순종이 가능하도록 했는가?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함으로써 우리가 복종할 수 있게 하였다.

육신안에서 이룬 그의 승리는 어떻게 우리가 복종할 수 있게 만들었을까?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도록 바꾸는 개심의 기적에 의해서다. 그러면 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죄에 대한 승리를 우리 삶에 부여하게 된다.

이러한 명백한 진리는 그리스도의 타락 전 인성론을 유지하는 데 있는 큰 문제점들 중 하나를 지적한다. 육신으로 이룬 사단에 대한 그의 승리가 내 안에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게 할려는 목적이었다면, 내 것과는 다른 육신에서 얻은 그의 승리가 어떻게 나를 도울 수 있단 말인가? 이 거짓 교리가 믿음으로 의라는 아름다운 교리를 공격하는 곳이 바로 이 점에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그리스도의 죄 없는 삶과 속죄하는 죽음의 결과를 입혀주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것은 칭의와 성화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는 그의 죄 없는 삶의 공로를 우리에게 전가하는데, 이것이 바로 칭의이다. 그리고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의롭게 여기실 뿐만 아니라, 죄를 이기는 힘을 또한 부어 주시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는 오직 세상의 구원자로서 자신의 성육신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칭의가 오직 그리스도의 죄 없는 기록을 우리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포함할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떤 종류의 몸으로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사실일까? 성육신의 목적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는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여야만 했다 (롬 8:3). 육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죄되어야 했고, 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죄 많은 육신을 정복하여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의 말대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오셨다. (그의 인성이 죄없는 인성이라면) 어떻게 그가 취한 육신에도 없는 죄를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더 정확히 말해, 어떻게 그가 죄 없는 육신 안에서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라 2:20)라고 말했다. 그리고 왜 그는 계속하여 우리가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았다”(롬 6:3)고 말하였을까? 모든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는 경험을 거쳐야 한다. 죽음에서 삶으로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둘째 아담으로 우리를 대변할 그분과 함께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가는 어린양이었기에, 그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또한 죽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은 총족되었고 소멸되었다.

우리의 죄된 본성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도록 예수님이 우리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가야 했음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렇지 못한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속죄를 가능케 하기 위해, 그 십자가 위에 저주받은 인간성을 충만한 죄의 삯으로 못 박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과 함께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었다. 분명히 구속이 요구하는 바는, 칭의라는 중요한 연결고리를 제공하기 위해 예수님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함께 살고 죽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제 성화의 요구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함

성화는 단순히 의롭다고 칭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나누어 주는 것이다. 우리를 죄책으로 부터 구원하기 위해 칭의를 입혀 주듯이, 그리스도는 이제 우리를 죄의 힘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성화를 나누어 주신다. 그가 나누어 주는 성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우리가 실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분이 육신으로 경험한 승리의 힘을 받아들이고 활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그는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이겨냈던 동일한 삶을 우리 안에서 기꺼이 살며 이루어 준다는 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죄 없는 경험을 우리안에서 재현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화이다.

예수님이 죄 없는 삶을 나타내기 위해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으로 세상에 오셨다면, 그 타락하지 않은 본성이 어떻게 내 안에 재현될 수 있을까?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경험에 동참함은 타락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죄를 이기기 위해 사용하신 것과 같은 능력을 통해 타락한 본성에서 죄를 이김으로써 거룩하게 된다.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경험에 우리가 참여할 방법은 없다. 그것이 예수님이 사단을 이겨낸 수단이라면, 그분이 나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방법이 없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이 지닌 타락한 본성으로 예수님이 사단을 이기고 승리하셨다면, 나는 그와 함께 그 승리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한 승리는 내가 가진 것과 같은 본성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내 자신의 삶에 겹쳐질 수 있다.

어떤 이질적이고 타락하지 않은 본성으로 살아온 죄 없는 경험은 내게는 입혀질 수 없고 결코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락한 본성은 이생의 삶에서 결코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상태로 회복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얻은 죄에 대한 승리는 우리가 받을 수 있다.

두 부류의 극단

이와 관련하여, 거룩한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인디애나 주의 기독교인 집단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1900년경 다소 많은 보수적인 교인들이 예수님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본성을 지니고 죄없는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육신안에서 경험한 예수님의 승리를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을 통해 전달받을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 죄 없는 아담과 똑같은 오염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광신적인 견해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절대적인 거룩함과 완전함을 (즉, 아담이 죄짓기 전에 가졌던 거룩한 육체를) 그들도 재현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이것은 이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에 대해 잘 기록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인간이 그리스도의 타락 전 인성의 오류를 받아들임으로써 빠지는 또 다른 극단은 바로 “거룩한 육체” 이론과 정반대 되는 견해다. 이 견해는 단순히 예수님이 아담의 죄 없는 본성을 지니고 죄를 이겨냈기 때문에, 여전히 죄된 육신의 몸을 지닌 상태에 있는 우리는 그분의 승리를 나누기를 바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는 오직 그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베풀어 줄 수 있는데, 그분에게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이룬 죄에 대한 승리가 없기 때문에, 그분이 (타락하지 않은 본성으로) 이룬 승리를 우리와 공유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극복한 것처럼 극복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견해에서 성화의 아름답고 기본적인 진리가 어떻게 격하되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경험으로부터 제거되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원죄론” 오류가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왜곡을 발생시켰는지 보았는데, 예수님이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인성을 지니고 성육신하셨다는 가르침과 예수님이 인간에게 성화를 베풀어 줄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사실 원죄론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생에서 모든 죄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신성한 본성에 참예할 수 있다는 성경의 반복되는 주장을 부인한다. 어찌된 일인지 그들은 성경에서 종종 확인되는,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위에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지만 결코 죄가 없었다는 하늘의 신비를 깨닫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아담의 유전된 죄책이 인간의 본성에 너무나 만연해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시 있을 변화됨을 입을 때에만 그 본성이 극복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죄 없이 산다는 것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33년 반 동안 살면서,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죄가 없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기 어려운가? 인간의 육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 아래에 있다 하더라도, 죄에 대한 그러한 승리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가? 성경의 대답은 명확하다: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10:3–5)

이 약속은 복음의 구하는 능력에 호소하는 육체에 속한 죄인들에 관하여 주신 약속이다. 죄에 대한 후천적인(습득한) 성향이 없는 우리의 축복받은 주님이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얼마나 더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주시는 힘을 주장하였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한 본성에 참예하여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질 수 있음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육신안에서 이룬 그의 죄 없는 경험은 우리가 예수님이 하신 것 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의지한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같은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이 된다.

이것은 그가 죄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우리보다 유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가 지닌 같은 본성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같은 영적 무기로 적과 싸웠다. 그에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이라도 유리한 면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의 타고난 인성이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죄에 대한 개인적인 탐닉에 의해 더 이상 쇠약해지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죄 없는 삶의 완벽한 모본과 동등하게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 모두는 육체의 이끌림에 순응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더욱 타락시켰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김으로써 죽음의 저주를 자초했을 뿐만 아니라, 사단과 협력함으로써 사단에 스스로를 더욱 취약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단 하나의 죄스러운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사단은 그에게서 아무런 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완전히 성화된 의지와 순복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속죄가 요구되는 어떠한 죄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그의 모본과 동등하게 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삶을 가능한 한 충분히 반영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함으로 해서 우리는 모든 알고있는 죄악을 버리고 소중히 아끼는 잘못이 없는 가운데 우리의 영역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 없이 사는 것을 알 수 있고 자랑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이다. 오히려 우리가 그리스도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무가치함을 더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자랑은 커녕, 그것을 깨닫는 마지막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 때에 자신의 성품을 옹호해 줄 순종하는 백성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에게 중요한가? 성경은 하나님과 악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우주적 갈등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우주를 지배하려던 사단의 원초적 욕망으로 거슬러 올라감을 밝히고 있다. 하늘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천사의 3분의 1을 추락시킨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무고에서 시작되었다. 사단은 피조물에게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창조주로 하나님을 고발하면서 그분의 성품을 왜곡하였다.

어떻게 마귀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은 영원히 적을 침묵시킬 수 있는 입증을 제시해야 했다. 그것은 막강한 창조주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의 몸 속으로 내려와서, 그 본성의 한계 안에서 사단이 그에게 던질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하는 길고 고통스러운 입증이였다. 만일 그가 육신을 지닌 다른 인간들이 이용할 수 없는 어떤 신성의 능력을 사용하여 죄를 극복했다면, 사단은 아무도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그것을 증거로 사용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사단이 틀렸다는 것을 온 우주앞에 입증하셨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존함을 통해 육신안에서 순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옹호의 마지막 단계는 아마겟돈과 그 너머의 환란을 통해 충실하게 남아 있는 박해받은 적은 무리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품성이 재현될 때 일어날 것이다. 사단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들 죄의 영원한 결과를 맛본 오랜 후에도, 144,000명의 남은 무리는 여전히 하나님 정부의 명예와 진실성을 증언할 증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새로운 승리와 구원의 노래가 경청하는 천사들,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사람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성도들에게 들려질 때, 모든 사람들은 찬양의 웅변으로 뭉쳐질 것이다.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찌로다 아멘 하더라” (계시록 7:12)

모세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그 적은 무리가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상징적으로 영광을 누리게 되는 이유를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험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성품이 옹호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아담의 죄책이 후손에게 전수된다는 고대의 오류가 어떻게 연관된 기만들의 연결 고리로 이어졌는지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구원의 진리가 교묘하게 위조되었다. 예수의 인성은 부정되어졌고 그리스도의 나누어 주시는 의(성화)는 도전을 받게 되었으며 죄에 대한 승리의 가능성은 조롱받아 왔다. 우리가 기본적인 거짓을 인식할 때만이 뒤따라오는 왜곡을 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그분에게 뿌리를 내리지 않는 모든 오류적인 교리들을 거부하는 지혜를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 원문 출처: “A FABRICATED LOOK-ALIKE?” ]


조 크루즈 (JOE CREWS, 1924-1994) 목사는 재림 교회의 대표적인 자영 선교 기관인 어메이징 팩츠 (AMAZING FACTS) 를 창립한 분이다. 성공적인 목회와 전도 목사로 활동한 후 1965년에 어메이징 팩츠 선교기관을 설립한 후 주님의 품으로 잠든 1994년까지 TV와 출판물을 통해 고유의 재림 신앙을 비재림교인들에게 전하여 많은 구도자들을 지역 교회로 보내어 침례를 받도록 인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