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구원과 연관된 인간의 본성을 묘사한 엘렌 화잇의 수많은 글들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인간의 본성을 크게 두가지로 세분하고 구분하여 이해하며 그 본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엘렌 화잇이 본성이라는 동일한 단어를 여러군데서 사용하지만, 그 단어를 문맥과 더불어 증언 말씀 전체를 통해 제시된 그녀의 기조적 사상 (큰 흐름)을 이해하며 우리가 읽는다면 그 본성이라는 단어가 어떠한 본성의 부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지 올바로 파악할 수 있게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본성에 획일적인 개념을 부여한다면, 엘렌 화잇이 그녀의 글에 부여하지 않았던 의미를 우리의 부족한 이해나 선입견으로 주입하여 오해할 소지가 많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이해는 다른 일반 신학자나 성경주석가들이 감지하지 못한 영감적인 이해라고 본인은 생각합니다. 또한 성경적인 가르침에 그 근거를 두며 성경의 전반적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엘렌 화잇의 이러한 이해를 우리가 염두에 둘 때, 성령의 역사로 본성이 변화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실제적으로 파악하게 되고,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에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엘렌 화잇이 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어떠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의 몇 글들에서 우리는 그녀가 가진 본성에 대한 세부적인 이해를 엿볼수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품성은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슨 특별한 은혜나 천분(天分)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품성은 극기와, 저등 본성을 고등 본성에 종속시킨 (the subjection of the lower to the higher nature) 결과,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기 위해 자아를 내어 맡기는 자기 수련의 결과이다.” (교육, 57)

“고상한 품성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며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은총이나 거저 주심에 의한 것도 아니다. 이것은 자기 수양과 고귀한 본성에 비천한 본성을 종속시키는 것(subjection of the lower to the higher nature)과 하나님과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일의 결과이다…….몸은 품성의 건설을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계발시키는 가장 중대한 매개물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원수는 체력을 약하게 하고 퇴화시키는 데 그의 유혹을 주력한다. 이 점에서 그가 성공했다는 의미는 때때로 전 존재가 악에 굴복 당했다는 뜻이다. 육체적 성향이 보다 높은 능력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The tendencies of the physical nature, unless under the dominion of a higher power) 분명히 파멸과 죽음을 초래할 것이다. 육체는 보다 높은 능력에게 복종하여야 한다(The body is to be brought into subjection to the higher powers of the being). 정욕은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의지 그 자체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된 이성이 생애를 지배해야 한다.” (선지, 488-489)

“이 사람은, 오랜 기간 형성되어 온 극복해야 할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생애의 중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의 도덕적 원칙은 너무 연약하여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방탕과 투쟁할 때에는 정복을 당하였다. 저열한 정욕이 보다 고상한 본성을 지배하였다 (The baser passions had gained the ascendancy over the higher nature).” (2 증언, 350)

여기서 보다시피 엘렌 화잇은 인간의 본성은 크게 나누어 “저등 본성 (the lower nature or the baser passions)”과 “고등 본성 (the higher nature or a higher power of being)” 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이 중 “저등 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죄의 시발점인 부패한 생각이 침투하려고 공격하는 대상이 본성의 어느 부분을 말하는 것인지 기술하고 있습니다.

“저열한 욕정 (the lower passions)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flesh) 또는 ‘육체의’ (fleshly) 또는 ‘육체의 정욕들’ (carnal lusts) 이란 말은 그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 (the lower, corrupt nature)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우리는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신체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 할까! 아니다.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해야 한다. 부패한 생각은 추방되어야 한다. 모든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야 한다. 모든 동물적인 경향 (all animal propensities)은 심령의 더욱 높은 능력 (the higher powers of the soul) 아래 복종되어야 한다.” (재림신도의 가정, 127-128)

이 글에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은 본성과 죄의 관계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 우리 인간에게는 “저열한 욕정” 혹은 “동물적 경향”으로 표현된 저등본성 (lower nature)과 “심령의 높은 능력” 으로 표현된 고등본성 (high nature) 이 동시에 존재한다.
  • “육체”, “육” (flesh) 혹은 “육적인 정욕들” (carnal lusts) 이 바로 우리의 타락한 저등본성 (lower, corrupt nature)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 하지만 이 타락한 저등본성을 포함한 “육체” 혹은 “육” 그 자체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이 타락된 저등본성의 상태나 그 존재 그 자체는 죄가 될수 없다.
  • 죄를 극복하는 방법: 죄에 대한 유혹을 죽게 하는것, 즉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게 허용함으로 부패한 생각 (corrupt thought) 을 추방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부패한 생각을 추방하여 그로 오염되지 말아야 될 본성의 영역은 바로 고등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동물적 경향 (저등본성)을 심령의 높은 능력 (고등본성)에 복종시킴으로 가능한데 그렇게 함으로써 죄를 이길 수 있다.
  • 이것을 반대로 말하자면, 죄를 짓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죄에 대한 유혹을 죽이지 않고, 다시 말해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도록 허용치 않고 부패한 생각을 품음으로 해서, 결국 동물적 경향 (저등본성)이 우리의 고등본성을 좌지우지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육체” 또는 “육체의” 또는 “육체의 정욕들” 로 표현된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 (저등본성)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즉 죄라고 할 수 없다고 단정지은 증언의 말씀은 상당히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위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고등 능력 (higher powers)을 통해서만 도덕적/영적인 선택 (즉 죄를 이기던지 죄를 범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이 고등본성의 영역이 오염되지 않도록 악한 욕정과 죄스러운 경향을 그리스도의 능력에 의지해 추방해야 하는데, 우리의 의지를 그리스도께 사로잡히도록 함으로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증언 말씀에 따르면, 한마디로 죄와 그에 따르는 정죄됨의 성립은 우리 인간의 고등본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우리의 저등본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음과 같은 그녀의 글들이 어떻게 죄가 우리의 본성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립되는지 또 죄를 이기고 극복하는 것이 우리 본성안에서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 더 보충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는 성경절은 사도 베드로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절을 단지 방탕한 사람만을 경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보다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성경절은 모든 해로운 식욕과 정욕의 만족을 금할 것을 말하고 있다. 경건하다고 공언하는 자들은 육체의 건강에 무관심하고 또한 부절제는 죄가 아니라고 믿으며 부절제가 그들의 영성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도록 하자. 육체적 본성 (the physical nature)과 도덕적 본성(the moral nature)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공감이 존재한다. 건강을 증진시키지 않는 습관은 어느 것이나 보다 높고 고상한 기능을 퇴화시킨다. 먹고 마시는 데 대한 그릇된 습관은 사상과 행동을 그릇되게 인도한다. 식욕의 방종은 동물적인 성질(the animal propensities)을 강화하여 그 성질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능력(the mental and spiritual powers)을 지배하게 된다. (성화, 25)

마음과 뜻과 영혼(the mind and heart and soul – 고등 본성)이 저등본성(the lower nature)을 이길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살아 계신 구주와 개인적으로 접촉해야 한다.” (실물, 388)

그러면 이 저등본성과 고등본성에 속하는 인간 본성의 요소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엘렌 화잇은 그것도 다음과 같은 글들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순결한 신앙은 의지와 상관이 있다. 의지는 사람의 본성 가운데 있는 지배력(governing power)이며, 다른 모든 기능을 통제한다. 의지는 취향(taste)이나 경향(inclination)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결정하는 능력(deciding power)이다.” (5 증언, 513)

“육체는 정신과 심령이 품성형성을 위하여 성장하게 해 주는 유일한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원수는 육체적 힘을 약화시키고 퇴화시키기 위하여 유혹을 하고 있다. 그가 여기에서 성공하게 되면 영과 육을 다같이 악에 굴복시킬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육체적 본성의 경향(the tendencies of our physical nature)이 보다 높은 세력 (a higher power)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분명히 파멸과 죽음을 당할 것이다. 육체는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보다 높은 능력(the higher powers of the being)이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 감정(passion)은 의지(will)에 지배되어야 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성화된 고상한 이성의 힘(the kingly power of reason, sanctified by divine grace)이 우리의 생애를 지배해야 한다.” (치료봉사, 130)

“식욕과 정욕의 방종은 마음을 흐리게 하고 육체적 힘을 감소시키고 도덕적 힘을 약화시킨다…….우리의 첫 부모가 식욕의 방종으로 말미암아 에덴을 잃었으므로 에덴을 다시 찾는 유일한 희망은 식욕과 정욕의 확고한 부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식생활에 있어서의 절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의 제어는 지력을 보존시켜 주고, 정신적·도덕적 활력을 주고, 보다 고상한 능력(the higher powers)의 지배 아래 모든 기질을 복종시킬 수 있게 해주고, 옳고 그른 것, 거룩하고 속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3 증언, 491)

“사단의 계교를 간파하는 명철한 정신을 가지려는 자들은 누구나 육체적 정욕을 이성과 양심의 지배하에 두지 아니하면 안 된다. 고상한 정신력을 도덕적으로 힘 있게 활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품격을 완성하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우리의 대적 사단은, 식욕과 정욕이 지배권을 갖게 되면 육체의 건강과 지력은 자기만족의 제단 위에 희생되고, 사람은 급속히 멸망당할 것을 알고 있다. 계발된 지력이 지배권을 잡아 동물적 습성을 통제하고 이를 도덕의 힘에 복종시킬 때에는 유혹을 가지고 정복하려 하는 자기의 힘이 심히 적어질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다.”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237)

“정신적 기능이 보다 높은 능력으로서 육체의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 선천적 식욕과 정욕은 양심과 영적 애정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치료봉사, 399)

“하나님께서는 그대에게 의견의 교만과 의복의 자랑과 자아 존대를 버리고 훌륭하고 고상한 정신의 기능들을 사용함으로써 강화시키도록 요구하신다.” (5증언, 128)

“품성의 완성은 정신적인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이룰 수 있고 극도의 시련을 겪을 때에 하나님의 율법의 모든 요구에 순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원고 85, 1906년)

위의 여러 인용구들에서 보시듯이, 우리의 본성을 이루는 저등/고등 본성에 속하는 요소들이 다음과 같이 구분됨을 보게됩니다:

  • 저등본성 – 식욕, 정욕, 증오/희열/슬픔과 같은 원초적 감정과 같은 동물적 습성, 즉 동물들도 가지고 있는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습성과 경향; 인간이 원하고 원치 않음에 관계없이 주어진 성향들. 아담의 범죄로 인해 타락되어 전수된 본성은 이 저등본성을 말합니다.
  • 고등본성 – 이성, 양심, 계발된 지력, 의지, 절제, 도덕적 힘, 심령등과 같이 인간의 도덕적 선택/책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성품의 요소들. 이 고등본성은 각 개인이 저등본성을 통해 침투하는 사단의 유혹에 동의하여 굴할 때 오염이 되고 그러한 습관이 계속될 때 고등본성으로 지칭되는 성품이 죄의 성품으로 꼴이 잡히고 변모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화잇 부인은 이중 어느 성향이 우리에게 지배권을 행사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품격 혹은 품성 (character)이 타락되기도 하고 완성되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본성에 대한 이러한 구분적 이해는 화잇 부인의 여러 말씀 중에 사용한 본성, 성향 등등의 어구들이 그것이 사용되어진 문맥에 따라 저등본성을 지칭하는지 고등본성을 지칭하는지를 파악하게 해주는 일관성 있는 열쇠이며, 죄와 그리스도의 인성 등에 대하여 언급하신 화잇 부인의 말씀들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몸과 영을 나누는 초대 교회시대에 나돌던 이원론의 이설이 아니며, 육신과 영을 함께 소유한 인간 안에 서로 다른 세력이 존재하며 투쟁하는 대쟁투 사관에 기초한 재림 신앙의 일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화잇 부인의 이러한 이해는 다음 성경말씀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파악한 이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고전 9:27)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후 10:5)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갈 5:16‐17)

더불어 이와같은 인간 본성의 이해는 야고보서 1:14-15의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며 그 구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생각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

우리의 저등본성인 육적인 욕구에 의해 시험(유혹) 받는 것 그 자체가 죄가 아니며, 오직 우리의 고등본성의 의지가 동의하여 욕심이 우리 마음에 잉태한 후에만 죄가 존재하게 되며 그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지으면 우리의 품성이 죄에 오염되어 결국 둘째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된다고 이 성경절은 명확히 밝혀주고 있는 바입니다. 다음의 증언 말씀들을 또한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험담의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데서 시작된다. 궤휼은 온갖 형태의 불순을 포함한다. 불순한 생각이 용납되면 부정한 욕망을 품게 되고, 심령이 더럽혀지면 그 정직성도 손상된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죄를 짓지 않으려면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죄를 피해야 한다. 모든 감정과 욕망은 이성과 양심에 굴복되어야 한다. 모든 부정한 사상은 즉시 배척되어야 한다. 그대의 밀실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되라. 믿음으로 기도하고 온 마음을 다하여 기도하라…….어떤 사람도 강제로 범죄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자신의 동의를 먼저 얻어야 한다. 심령이 죄의 행동을 범하기로 작정하기 전에는 정욕이 이성을 지배하고 불의가 양심을 이길수 없다. 유혹이 아무리 강할지라도 죄에 대한 핑계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벧전 3:12). 시험받는 영혼이여, 주님께 부르짖으라. 속절 없고 무가치한 그대로 그대 자신을 예수님께 던져 버리라. 그리고 바로 그분의 약속을 주장하라. 주님께서는 들어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육신적 마음의 성향이 얼마나 강한지를 아신다.” (5 증언,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 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의 정죄됨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랄드, 1888년 3월 27일)

위에 인용한 증언 말씀에 의하면 죄가 마음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는 개인적인 “행위”가 선제해야만 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우리를 유혹할 때 저등본성을 통해서 일한다는 처음의 증언 말씀을 상기한다면,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이 바로 그 저등본성을 부추기어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 1:14-15에서 언급한 욕심에 이끌린 유혹이고 시험임),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고등본성을 활용함으로써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즉 그 욕심을 잉태하지 않으면), 우리 영혼이 죄의 정죄됨으로 물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본성의 구조와 그 크게 두가지로 나눈 본성의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엘렌 화잇의 구체적이고 섬세한 이해를 우리가 파악하게 될 때, 우리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후손들에게 전수된 소위 타락된 본성때문에 사람들이 태어나면서 부터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한 죄인일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또 그렇게 죄인이지만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않는다 하지만 개인적인 범죄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는다는 식의 도저히 논리성이 부재하여 설득력이 없고 하나님을 이상한 존재로 그려보이는 주장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엘렌 화잇의 글이나 성경말씀이 본성적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by nature”) 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문맥과 전체적인 흐름을 생각하여 올바른 이해를 유출할 수 있게되어, 성경이나 증언 말씀의 여러 구절들이 서로 상충되게 유도하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