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문서는 앤드류스 대학교 캠퍼스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복음 연구회 (Gospel Study Group)의 2008년 11월 9일 모임에 제출되어 발표된 R. J. 그래블 (R. J. GRAVELL) 장로의 발표문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특히 마음과 육신의 관계에 대해, 평신도로서 깊게 분석한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연구서로서 이 주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구하는 재림성도들과 목회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평신도의 관점을 공유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 내가 이 발표를 통해 성취하고자하는 바는 엘렌 화잇이 밝힌 다음의 간단한 진술로 표현된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참된 인성에 대하여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하기를 원한다.” (Letter 69, 1897, Manuscript Releases, vol. 8, p. 447.3)

이 논문은 심도있는 신학적 연구서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나는 히브리어나 희랍어를 읽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이런 재능이 도움이 되겠지만, 그리스도가 왜 인간의 육신속에 들어오셨는지 이해하고 헤아려보기 위해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때때로 복음의 단순함으로부터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멀리 떠나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 주제가 내 마음에 매우 가깝고 소중한지에 대해 여러분과 공유하면서 시작하고 싶다. 나는 1986년에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연구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진행될 과업이다. 나는 엘렌 화잇과 그녀의 동역자들의 글에 있는 가장 명확하고 단순하며 이해하기 쉬운 진술들을 공유할 것인데,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말할 때 성경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만난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 사이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만나야 하는 하나님의 신성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관계 또한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이 왜 인간의 몸과 본성으로 아들을 보내셨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때, 그리스도의 인성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는”(That I Might Know Him p. 166)지를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재림교회에서 우리는1950년대부터 이 주제에 대해 논의하고 논쟁하고 교회를 분열시켜왔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신실한 목사들까지도 엘렌 화잇이 이 주제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우리에게 말해왔다.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가 타락하기 전 아담의 본을 취했다는 견해를 지지하는 진술을 하고, 또 타락한 후 아담의 본성을 취했다는 진술을 하기도 한다는 한 재림교회 목사의 말을 내가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히 큰 충격을 받았었다. (이 논문에 있는 강조체는 필자의 것임)

재림교인인 우리가 엘렌 화잇이 선지자였음을 믿으면서, 동시에 그녀가 이 주제에 대해 다소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고 믿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어찌하여 이 주제에 관해 혼동된 사람이 우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보다 그녀가 혼동했던 것이라고 더 쉽게 믿는 것인가? 나는 이 주제를 다룬 화잇부인의 글에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나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선택만 놓여있을 뿐이었다: 엘렌 화잇이 모순되지 않았으며 참된 선지자였거나, 그녀가 모순되었다면 나는 그녀가 거짓 선지자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하였다. 만약 그녀가 거짓 선지자임이 사실로 밝혀진다면, 36년 동안 나는 잘못된 교회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위험부담이 컸다. 나의 이 연구가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믿음을 포기하도록 이끌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내 젊은 시절 믿음을 “진리위에 정착”하도록 계속 굳히는 과정의 일부가 될것인가?

여러 주 동안 수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한 끝에, 나는 엘렌 화잇이 진실로 참된 선지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주님을 찬양한다!). 그녀는 사실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아주 분명한 가르침을 제시하였다. 그녀의 글에 대해 난무하는 혼동 때문에, 내가 공유할 많은 것들은 화잇부인의 글에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변명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그녀의 글을 성경과 비교하여, 작은 빛의 아름다움이 선포된 말씀의 영광스러운 더 큰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게 하고 싶을 뿐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역대하 20:20)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재림교인 저자들의 진술을 공유함으로, 나는 여러분이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그림을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자 한다. 내가 원하는 바는 우리가 기초를 다질 수 있는 간단하고 이해하기 쉬운 진술을 먼저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인데, 다음은 내가 수년 전에 예언의 신에서 발견한 한 간단한 진술이다:

“주 예수님은 사람이 처한 곳에서 그를 만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셨다. 그분은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천사들을 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돕고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성을 취함으로써 인류를 도우신다.” (Letter 97, 1898)

두 번째 문장은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에 대한 놀라울 만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문장이 무엇을 말하는지 다시 주목해 보자.

“그분은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천사들을 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심오하다. 예수님이 왜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는가? 왜냐하면 “그는 천사들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본성을 취하셨느냐, 아니면 타락한 후의 본성을 취하셨느냐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위의 인용구가 그 답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이 점을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천사에 대한 위의 문장을 다시 읽으면서 “천사”라는 단어 대신 “타락하지 않은 아담(unfallen Adam)”이라는 단어를 삽입해 보자.

“그분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타락하지 않은 아담을 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락하지 않은 아담은 결코 구세주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여전히 올바른 진술일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가 “천사”라는 단어를 “타락한 아담(fallen Adam)”이라는 단어로 바꾸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시기 바란다.

“그분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타락한 아담을 구하기 위해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분명히 올바른 진술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는지 그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구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타락하지 않은 아담을 구하러 오신 것도 아니고, 타락한 인간인 우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리스도가 어떤 본성을 왜 택하셨는지에 대한 논의를 종식시킬 수 있다. 나중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 어떤 것을 물려받으셨는지 자세히 논의해 볼 것이다.

내가 연구에 몰두하던 첫 두 해 동안,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내의 두 명의 유명한 지도자들과 이 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모리스 벤든(Morris Venden) 목사였는데, 그는 80년대 후반 플로리다 합회에서 열린 한 캠프미팅의 주요 강사였다. 그와의 개인적인 대화 중에, 나는 그리스도가 취했던 타락하거나 타락하지 않은 본성에 대해 논할 때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진술 중 다음 진술문을 그와 공유했다:

“그리스도가 자신 위에 타락한 인간의 형체와 본성을 취해야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Spiritual Gifts, vol. 4a, p. 115)

이 진술은 매우 분명하다.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형체”를 취한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피부와 뼈, 즉 사람의 신체 구조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고 한 바로 그 몸이다(히 10:5).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엘렌 화잇은 또한 그분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고 말했다.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의미했는가? 우리는 이러한 진술과 이와 유사한 다른 진술들이 존재하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가장할 수 없다.

벤든 목사에게 위의 인용문을 읽어 준 후, 나는 “내가 보기에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타락한 후의  본성을 취하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개념을 뒷받침하는 압도적인 증거가 예언의 신에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그는 다음과 같이 반응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그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만약 그가 우리의 본성을 가졌다면, 그는 죄를 지을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내가 다시 질문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태어나셔서 늘 순복하는 의지를 지니고 오셨더라도 말인가요?’ 이에 벤든 목사는 “그랬더라도 마찬가집니다. 그가 우리의 본성을 가졌다면, 그는 죄를 지을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며 그와의 만남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복음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기별 중 하나가 될 수 없다. 만일 벤든 목사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거듭날 때(성령으로 태어날 때)에도, 우리는 계속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로부터 한 해 후인 1988년에, 나는 워싱턴 D.C.에서 내 절친인 사무엘 모니어(Samuel Monnier) 목사를 방문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대총회 본부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들러 함께 점심을 나누자고 했다. 나는 그렇게 했고 그의 오랜 친구인 라울 데데론(Raoul Dederon) 목사도 우리와 점심을 함께 했다. 그때 나는 이 목사가 누군지 전혀 몰랐었는데, 점심을 나누는 동안 모니어 목사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관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시작했다. 데데론 목사는 우리 목회자와 교사들의 70~80%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본성을 취했다고 그들이 믿는다고 말했다. 이 말에 나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공식적인’ 입장을 취할 것이라고 목사님은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 중요한 주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벤든 목사나 데데론 목사의 진실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두 사람 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신사로 보였다. 문제는 “그들이 진실성이 있었는가?”가 아니고, “그들이 옳았는가?”이다.

우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엘렌 화잇의 두 가지 진술을 살펴 보았다. 첫 번째 진술은 왜 그리스도가 천사의 본성을 취하지 않았는지 말해주었고,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형체와 본성을 모두 취했다고 설명했다. 여기 세 번째 진술이 있는데, 나는 이것이 똑같이 중요한 진술이라고 믿는다:

“율법의 범해짐을 당한 하나님의 본성과 범법자인 아담의 본성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 안에서 만났다.” (Manuscript 141, 1901)

범법자 아담의 본성, 죄인 아담의 본성이 예수님 안에서 만났다. 우리는 선지자가 그렇게 분명하게 말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어떻게 죄된 육신에서 죄 없이 있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에 대한 형벌을 갚기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셨다는 것에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기로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있는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직후, 사단은 하나님을 향해 비난했다. 엘렌 화잇은 사단의 이 비난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들에 대응하기로 택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사단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함으로, 지혜와 사랑의 부족함을 하나님께 돌렸다. 만약 그들이 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 법을 제정하신 분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이었다.” (영문 시조, 1896년 1월 16일)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모든 비난에서, 그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그의 첫 번째 비난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비난은 “만약 그들이 법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사단의 비난에 어떻게 대응하셨는지 주목하시기 바란다:

“사단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사단의 시험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높은 지위를 버리고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셔서 타락한 종족의 선두에 서셨다.” (Manuscript 77, 1902)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사단의 시험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시험당하고 있는 그와 같은 타락한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다면, 아담의 타락한 아들과 딸들이 “시험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주실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무엇을 증명했겠는가? 오직 [타락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시험을 견뎌낼 수 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타락에 대한 변명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뿐이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마시기 바란다. 나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들어오셨을 때 우리와 똑 같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성을 지닌 그분처럼 되어야 한다고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함께 살펴볼 때, 이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스도께서는 타락하지 않은 아담이 죄를 범한 적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증거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또한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이 무엇인지 보여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인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러 오신 것이다!

엘렌 화잇의 글에는 그리스도가 왜 율법을 인간의 육신에서 준수했는지를 말해주는 다른 진술들이 많이 있다. 다음은 내가 여러분과 꼭 공유하고 싶은 진술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지켰으며, 인간도 율법을 지킬 수 있음을 논쟁의 여지 없이 증명하였다.” (리뷰와 헤럴드, 1901년 5월 7일)

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데, 지금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어떤 인성을 취하셨는지, 오늘날의 타락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해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어떤 본성을 취하셨고 어떻게 죄를 극복하셨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타락한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정말로 이해하고 진실로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이 타락한 직후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전에 나와서 구원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창세전부터 준비되었던 그 계획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 줄것을 간청하였다.

“아버지는 죄를 범한 인간을 죽게 할 것인지, 잃어버린바 된 종족을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게 할 것인지, 투쟁 없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그의 법을 바꾸시거나 그 법의 가장 작은 부분이라도 포기하시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분은 당신의 아들이 인간의 범법을 위해 죽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영문 시조, 1879년 1월 30일)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너무 사랑하셨고, 또한 하나님은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그의 마음이 두 동강이 나 있었다. 그러나 타락한 상태에 빠진 인간을 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이 그대로 기록된 당신의 법을 바꿀 수 없었다. “따라서 그분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아들이 죽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공의는 죽음을 요구했지만 자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었다!

에덴 동산에 들어서자마자 그리스도는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의 계획에 대해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아담과 하와뿐이 아니었다. 사단도 처음으로 그 구원의 계획을 들었다. 그가 처음으로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해 죽을 것임을 알았을 때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상상해보라. 그는 꿈에서 조차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단은 이런 종류의 사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말씀 중에 사단의 관심을 끈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죄를 짓게 했을 때 처럼 다시 그를 크게 기뻐하게 만들었다.

“구원의 계획이 밝혀지자 사단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인간의 타락을 초래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그의 높은 지위에서 끌어내릴 수 있다고 기뻐했다. 예수님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할 때, 그를 제압할 수 있고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지 못하게 방해할 수 있다고 그는 그의 천사들에게 말했다.” (영문 시조, 1879년 1월 30일)

놀랍게도 사단은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가 어떤 인성을 지니게 될지 알고 있었다. 나는 사단이 4천 년 동안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를 큰 기대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믿는다. 사단이 그것이 그에게 쉬운 승리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맞붙고 싶어했다고 나는 확신한다. 사단은 모든 것이 인간에게 유리한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쉽게 넘어뜨렸다. 새로운 규칙 하에서 그리스도를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훨씬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아담을 상대로 한 싸움은 훨씬 더 힘들었다. 사단은 에덴 동산 가운데 있는 나무 옆에서만 그를 유혹할 수 있었다. 더욱이 아담은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단은 오직 아담을 그의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만 유혹할 수 있었다. 사단은 이제 예수가 자신의 영역인 이 사악하고 간악한 세상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할 것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사단의 비난을 기억하라. 타락한 인간은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단은 또한 자신이 그리스도를 언제 어디서나, 밖에서와 안에서 유혹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사단은 모든 상황이 그에게 이롭다고 확신했다.

앞의 인용문은 두 가지 이유로 흥미롭다. 첫째로, 우리가 방금 알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는데, 사단이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인용문에 대한 또 다른 흥미로운 점은 1879년 1월 30일이란 날짜이다. 많은 재림교인들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다는 가르침은 1888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 직후 A. T. 존스와 E. J. 와고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1] 하지만 실제로 그로부터 거의 10년 전 엘렌 화잇은 이미 사단이 “예수님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했음”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존스와 와고너, 그리고 나중에 W. W. 프레스콧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녀는 단 한순간도 새로운 신학을 듣고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품에 대한 새로운 강조는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였다. 미니애폴리스 대총회 불과 몇 달 후인 1889년 6월, 그녀는 그 집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또 다른 이[E. J. 와고너]가 그것을 제시했을 때, 내 마음의 모든 조직이 아멘으로 반응했다. . .그리스도의 비길 데 없는 매력. 이것이 내가 그대들의 마음 앞에 전하려고 했던 기별이다.” (Sermon, Rome, New York, June 19, 1889. Manuscript Releases, vol. 5, p. 219.1)

[1] 역자주: 이런 주장은 재림교회의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가르침을 격하하기 위해서 그것을 엘렌 화잇과 분리시키고 존스와 와고너에 의해 시작된 것 처럼 조작하는 시도로 조지 나이트에 의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0년 2월 18일자 리뷰와 헤럴드지에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에게 수많은 편지들이 왔는데, 그리스도께서 만일 인간과 꼭 같은 본성을 가지셨다면 비슷한 유혹들을 받을 때에 타락하셨을 것이므로 인간과 꼭 같은 본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편지들이었다.” (리뷰와 헤럴드, 1890년 2월 18일)

일찌기 언급했던 내 질문에 대한 벤든 목사의 반응을 기억하는가? “만약 그[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성을 가져갔다면, 죄를 지을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벤든 목사는 거의 120년 전 사람들이 엘렌 화잇에게 표현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표현하고 있었다! 왜 사람들은 그 때 그녀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쓰고 있었을까?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대총회 이후 15개월 동안, 존스 목사와 와고너 목사, 그리고 화잇부인이 때때로 함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제로 설교하며 각 지역으로 순회하였다. 그들의 설교와 글에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새로운 빛이었고 그들은 엘렌 화잇으로 부터 이것에 대해 명확히 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는데, 이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새로운 주제이거나 다른 이해가 아니었다. 그녀는 10년 전에 이미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 그녀와 존스 목사와 와고너 목사는 그 주제에 대해 완벽한 의견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 엘렌 화잇이 받고 있던 편지로 돌아가서 “그리스도가 인간과 꼭 같은 본성을 가졌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반응을 읽어보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약 그분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었다면, 그분은 인간이 당하는 것처럼 시험을 받으실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약 시험에 굴복하는 것이 그분에게 불가능 하였다면 그분은 우리를 돕는 자가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인간을 위하여 싸움을 싸우려 오셨다는 것은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분의 시험과 승리는 인간이 모본되시는 분을 모방하여야 할 것과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리뷰와 헤럴드, 1890년 2월 18일)

화잇 부인이 “[그리스도]의 시험과 승리는 인간이 모본되시는 분을 모방하여야 할 것과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함을 우리에게 알려준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순히 사도 바울의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거듭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는 말씀과 조화를 이룰 뿐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영감의 펜은 그리스도께 어떤 특별한 능력이 없었음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으며, 또 그 후에도, 그분이 거듭난 사람들에 비해 이점을 가지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가지셨다면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Manuscript 1, 1892)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사람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그분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Bible Commentary, vol. 7, p. 929)

“그리스도께서 싸움 중 가지고 계셨던 모든 이점을 인간이 가질 수 있도록 만드셨다. . . 만약 사람들이 그들에게 허용된 이점들을 이용한다면, 그들 또한 어둠의 힘에 대한 승리자가 될 것이다.” (Letter 19, 1899)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이용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면, 그 능력은 “그분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는 그의 인성에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분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고 이점이었다. 그분을 개인의 구세주로 맞이할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주어지는 능력이다. 이것은 죄와 싸워온 우리 모두에게 그저 복음이 아니라, 너무나 엄청난 복음인 것이다. 이 특별한 능력은 무엇일까?  엘렌 화잇은 청년 지도자(The Youth Instructor)에 글을 쓰면서 젊은이들에게 매우 명확한 언어로 답을 주었다:

“시험에 빠진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분으로 하여금 극복하도록 도왔고, 인간은   스스로를 도울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잘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오셨다.” (Youth Instructor, December 28, 1899)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가져다 주신 “특별한 능력”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 그로 하여금 극복하도록 도와준 것이 그분 자신의 신성이었을까?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요 12:49)

엘렌 화잇은 이 성경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그러나 그분[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분은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소망, 336)

“그분[그리스도]께서는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아버지를 오직 믿음으로 신뢰해야 하였다” (Amazing Grace, p. 170)

“그[그리스도]는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은 그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인간으로서 그는 시험을 당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승리하셨다. .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동일한 신성의 능력의 도움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하셨다.” (Manuscript 141, 1901)

“그[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의 신성한 능력에 의지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었다.” (Youth Instructor, August 23, 1894)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가 그의 능력을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그의 “전능한 힘”을 “내려놓기로” 선택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신성의 능력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승리하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쉬신 것은 “오직 믿음으로 그분이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고”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리하였다. 그것은 거듭난 우리들 중 누구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으로 쉴 때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동일한 신성의 능력’을 받게 될 것다. 성경 말씀과 화잇부인은 이 놀라운 진리를 모든 신자들에게 확신시켜 주고있다:

“세상의 구속주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하늘 아버지의 권하심과 뜻을 이행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사신 일상적인 삶의 역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된 정확한 기록이다. 그의 삶과 성품은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 일상적인 갈등속에서 세상을 극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성품의 완전을 펼쳐 보이거나 나타낸 것이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과 협력하여, 타락한 인간을 범죄로 인해 만들어진 넓은 수렁을 넘어오게 하기 위해 인성을 취하셨다.” (Youth Instructor, March 30, 1893)

“그분은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으셨다. 그분은 우리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하여 오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손을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굳게 붙잡게 함으로 우리로 완전한 성품을 얻게 하려고 하신다.” (소망, 123)

만약 우리도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면” 그리스도가 성취한 “성품의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하는 한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으로라도” 죄에 굴복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크신 자비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주시며 세상에 전하라고 명하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기별의 일부였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 안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를 세상에 단계별로 보여주셨다.

  1. 그리스도께서 순복한 의지를 가지고 오셨다. 우리도 우리의 의지를 순복해야 한다.
  2.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태어나서 오셨다. 우리도 성령으로 태어나야 한다.
  3. 그리스도는 아버지로부터 신성의 능력을 받으셨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통해 신성의 능력을 받게된다.
  4.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돌보심과 사랑안에서 쉬셨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돌보심과 사랑 안에서 쉴 수 있다.
  5. 그리스도는 아버지에 대한 믿음만으로 승리하셨다. 우리도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승리해야 한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인간의 본성을 취함으로써 성취한 것에 대해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녀는 또 다시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분이 우리 안에서 이루고자 하는 성품을 결부시키고 있다.

“그가 완전히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물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특권인 성품의 완전을 인류에게 이루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영문 시조, 1897년 6월 17일)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히 인간”이라고 믿었는가? 다음 구절들이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성을 취한 이유로 다음을 경험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 였다고 말했다:

우리의 모든 시험들 (ALL our temptations) – 리뷰와 헤럴드, 1905년 3월 9일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 (ALL our difficulties) – 리뷰와 헤럴드, 1889년 10월 1일
우리의 모든 고통들 (ALL our afflictions) – Manuscript Release, Number 1405
우리의 모든 경험들 (ALL our experiences) – 영문 시조, 1897년 11월 24일
그의 형제처럼 모든 것들 (ALL things like His brethren) – 리뷰와 헤럴드, 1892년 5월 1일
시험당한 모든 점들 (ALL points tempted) – 영문 시조, 1894년 4월 17일
모든 동반된 불행들 (ALL its attended ills) – 영문 시조, 1877년 1월 4일
모든 골칫거리들 (ALL its liabilities) – The Faith I Live By, p. 48
우리의 모든 시련들 (ALL our trials) – 영문 시조, 1892년 4월 18일
우리의 모든 연약함들 (ALL our weaknesses – Upward Look, p. 139
우리의 모든 필요함들 (ALL our necessities) – Manuscript Release, Number 878
우리의 모든 슬픔들 (ALL our sorrows) – That I May Know Him, p. 53
우리의 모든 싸움들 (ALL our battles) – Bible Echo, December 1, 1892
우리의 모든 비애들 (ALL our griefs) – That I May Know Him, p. 53
모든 연약함들 (ALL the infirmities) – Bible Echo, May 21, 1900
그의 형제처럼 모든 점들 (ALL points like His brethren) – 영문 시조, 1895년 5월 16일
죄를 제외한 모든 면들 (ALL points except sin) – 리뷰와 헤럴드, 1904년 1월 7일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완전히 인간이시지만 결코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음을 진심으로 믿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  그러면 그리스도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본성을 취했음을 그녀가 말했다는 예언의 신에 있는 진술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는 매우 훌륭하고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예언의 신에는 엘렌 화잇이 다음과 같이 묘사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300개 이상의 진술들이 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 (nature of fallen man) – Spiritual Gifts, vol. 4A, p. 115
타락한 인간이 가진 본성 (fallen man’s nature) – 영문 시조, January 30, 1879
범법자 아담의 본성 (nature of Adam the transgressor) – Manuscript 141, 1901
우리의 타락한 인성 (our fallen human nature) – Letter 81, 1896
우리의 타락한 본성 (our fallen nature) – Letter 81, 1896
우리의 본성 (our nature) – 리뷰와 헤럴드, 1890년 2월 18일
죄된 육신의 모양 (likeness of sinful flesh) – 영문 시조, 1900년 10월 17일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을 묘사하면서, 엘렌 화잇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몇 번이나 사용했을까?

타락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 (Nature of unfallen man)
타락하지 않은 인간이 가진 본성 (Unfallen man’s nature)
인간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 (Man’s unfallen nature)
타락하기 전 아담의 본성 (Nature of Adam before the fall)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 (Adam’s unfallen nature)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인성 (Adam’s unfallen human nature)
아담의 죄 없는 육신 (Sinless flesh of Adam)
죄된 육신과 다른 모양 (Unlikeness of sinful flesh)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본성을 그리스도가 취했다는 개념을 엘렌 화잇이 지지한다는 횟수를 찾기 위해 나는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단어 조합을 검색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진술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화잇 부인은 그녀의 모든 글에서 위에 언급된 문구 중 그 어느것을 사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걸까? 우리는 지난 50년이 넘게 그리스도가 타락하지 않은 아담의 인성을 취하셨다고 [신학자와 목사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하지만 영감의 펜은 그러한 것을 결코 제시하거나 암시하지 않았다.

이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혼란은 1957년에 발행된 「교리에 대한 질문」이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대총회의 일부 지도자(주로 리로이 프룸 목사)들과 몇명의 복음주의파 지도자들 간에 일련의 회의가 있었고 그 직후 이 책이 출간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파 인사들 중 두 사람은 이터니티 잡지의 편집자인 도널드 반하우스(Donald Barnhouse) 박사와 비기독교적인 이단들에 대해 글을 쓰면서 명성을 얻은 젊은 연구자 월터 마틴(Walter Martin)이었다. 이 회의는 1955년에 월터 마틴이 재림교회가 믿는바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다는 목적으로 프룸 목사에게 재림교회 지도자들을 인터뷰하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새로운 주석이 달린 「교리에 대한 질문」 주석판이 2003년에 발행되었다. [이 주석판의 편집자인] 조지 나이트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다룬 이 책의 부분에서 몇 가지 흥미로운 논평을 했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았다.

“우리는 교단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주제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518)

월터 마틴에 대해 언급하면서 나이트 박사는 “마틴이 재림교회의 신학을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한 질문은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을 때, 인간의 죄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음’을 견지하는지였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우리 재림교회의 출판물들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된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는 여러 분명한 진술들을 월터 마틴이  읽었기 때문이었다. 프룸과 그의 동료들은 교회가 더 이상 이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고 월터 마틴을 납득시켰다. 그러면서 프룸은 이전의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광적인 소수 분파”라고 언급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조지 나이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프룸 자신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음’을 발견했다.” (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xv)

월터 마틴은 결국 자신의 이단 목록에서 재림교회를 제거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계속해서 믿고 있는 바를 알았다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리에 대한 질문」은 그 대부분의 목적을 달성했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재림교인들을, 비록 그들이 몇가지 성경 진리에 대해 잘못 이해한다고 계속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인 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대다수의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아담의 타락하기 전 본성을 취했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주석판에서 조지 나이트는 「교리에 대한 질문」을 둘러싼 역사를 다루면서 여러 귀중한 기여를 했다. 하지만 그가 기술한 것들 중 일부는 상당히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그러한 것들 중 하나가 엘렌 화잇이 존스와 와고너와 프레스콧의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가르침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조지 나이트는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아담의 다른 모든 후손들 처럼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죄된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은 20세기 전반에 대다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의 신조가 되었다. 그 가르침은 너무 널리 받아들여져서 더 이상 재림교회 출판물에서 논의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 .사실은 1890년대 이래로 재림교회안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두 개의 서로 다른 이해가 있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해석이었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는 해석이었다. 가시적인 해석은 1890년대 중반에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에 의해 제시되었다. . .이 주제에 대한 재림교회의 다른 한 가닥의 사조는 그것이 출판되지 않은 편지와 절판된 정기 간행물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 해석은 엘렌 화잇의 해석이었다.” (Questions on Doctrine, annotated edition, p. 516-529)

이것은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의도로 제시된 지극히 믿기 힘든 신박한 주장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2] 화잇 부인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었다. 만약 그녀가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는 사적인 편지를 쓰고 있었다면, 그녀의 신빙성은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엘렌 화잇은 자신의 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화잇 자매가 행동했다던지 말하고 기록했다던지 하는 것에 대한 불분명한 소문을 믿지 말라. 만일 그대들이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계시한 것을 알고자 하면, 그의 출판물들을 읽어라.” (증언 5권, 696)

[2] 역자주: 조지 나이트의 여러 서적들을 읽으면 이렇게 증거도 없는 주장을 사실인 것 처럼 발설하는 예를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행습은 교회사의 주제에 대해 스스로에게 그 어떤 “권위적인 위치”를 부여하고 그 권위로 말하니 무조건 사실로 받아들이라는 식의 태도이다. 이런 식의 주장을 논증법에서는 “권위 논증”(Argument from Authority)이라고 부르며, 비윤리적인 논증법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다. 조지 나이트의 책에는 이런 종류의 주장들이 적지않게 포함되어 있기에, 역자는 교인들이 그의 책들을 읽을 때 상당히 비판적인 안목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나이트의 “보이지 않는 해석” 이론을 입증할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에 대해 염려했다면,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와 펜으로 그녀의 신념과 이해를 알렸을 것이다. 1895년에 그녀는 호주의 태즈메이니아에 있는 윌리엄 베이커 목사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그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진리의 일부를 잘못 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떤 사람들은 출판되지 않은 이 편지를 쓰면서, 그녀가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 질책하였다고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그녀가 사람들과 성경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아니었다. 사실은, 이 시기[1895-1896] 동안, 그녀는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의 가르침에 아주 강력한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크신 자비를 베푸셔서 와그너와 존스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지극히 소중한 기별을 보내셨다.” (Testimonies to Ministers, p. 91, 1896)

“우리는 주님이 그(프레스콧)에게 성령을 주셨음을 확신하며, 진리의 풍성한 흐름이 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리뷰와 헤럴드, 1896년 1월 7일)

해결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을 때, 엘렌 화잇은 그 문제들을 단도직입적으로 직면했다. 교정이 필요한 오류를 지적하면서 그녀는 시간을 내어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녀가 이 세 사람들에게 위축되어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단 말인가? 아니면 혹시 그녀가 60대 후반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녀를 이런 종류의 문제에 덜 사용하고 있었단 말인가? 다음과 같은 그녀의 글을 읽은 후 당신이 스스로 결정하기 바란다:

“나는 스미스 목사와 버틀러 목사, 그리고 모리슨과 니콜라 목사들이 심판날에 대면하고 싶지 않을 맹목적인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Letter, Dec. 6, 1890)

“우리는 병사로서 이 세상에 있다. 지금은 우리가 소홀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부주의할 때나 장소가 아니다. . .” (Letter to Elder G.I. Butler, Dec. 14, 1903, File B-43)

“최근에 나는 배틀 크릭에서 만연되고 있는 기만적인 영향력에 현혹될 위험에 처한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 .하지만 주님은 살아계시고 다스리고 계신다. 나는 그분이 나에게 주는 주의사항을 보내고 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영혼의 짐을 덜어야 한다. 아마도 내가 배틀 크릭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 (Letter to Elder G. I. Butler, October 30, 1906)

엘렌 화잇은 이 글을 썻을 때 78세였다. 그녀는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필요하다면 “배틀 크릭을 방문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착수하기에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 당시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리뷰와 헤럴드의 편집장이나 대총회장 혹은 태즈메이니아의 무명한 목사에게 편지를 쓰든, 주님의 지시대로 그녀는 편지를 썼다. 하나님의 기별자는 조용히 사적인 편지를 쓰며 “대다수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이 믿고있던 것과 다른 복음을 공유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녀는 베이커 목사에게 했던 것처럼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 목사들에게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경고하는 편지를 쓰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명백하다고 나는 믿는다. 주님이 편지를 쓰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녀가 베이커에게 경고했던 오류가 존스, 와고너, 프레스콧의 가르침과 어떤식으로든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여전히 엘렌 화잇이 베이커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들먹이며 그녀가 이 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암시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제시하면서, 그들은 사실상 그녀가 이 주제에 대해 “대다수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과 동의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퍼뜨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가 베이커 목사에게 편지를 쓴 같은 해인 1895년에, 엘렌 화잇은 11월 캠프 미팅의 주요 강사로 W. W. 프레스콧을 호주로 초대했다. 캠프 미팅 두 달 뒤인 1월 7일자 리뷰와 헤럴드에 엘렌 화잇의 다음과 같은 보고서가 실렸다. 이 보고서에서 그녀가 프레스콧의 메시지를 설명할 때 “진리”라는 단어를 사용한 빈도를 주목하기 바란다. 그녀가 사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고 조지 나이트가 말한 그 메시지에 대해서 말이다.

“저녁 시간에 프레스콧 교수는 금처럼 귀중한 아주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 장막은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밖에까지 서 있었다. 그가 우리 신앙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주 새로운 선으로 진리를 제시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말씀에 매료된 것 같았다. 진리는 오류와 분리되었고, 성령에 의해 귀중한 보석처럼 빛나게 되었다. . .주님은 진리를 선포하는 그의 종들을 통해 권능을 행사하고 있으며, 프레스콧 형제에게 백성을 위한 특별한 메시지를 주셨다. . .주님은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프레스콧 형제에게 임했다. 우리는 주님이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음을 확신한다. 그리고 진리는 그에게서 풍성한 흐름으로 흘러 나오고 있다.” (리뷰와 헤럴드, 1896년 1월 7일)

무엇이 화잇 부인으로 하여금 프레스콧이 “백성을 위한 특별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며 “주님이 그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다”고 외치게 했는가? 왜 그녀는 계속해서 그것이 “진리”라고 말했는가? 그녀는 “진리는 오류와 분리되었다”라고 말했다. 프레스콧이 성령에 의해 이끌려 어떤 오류를 폭로했는가? 그의 설교 제목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것이었다. 다음은 그가 전한 설교의 일부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14)

구원의 주제 가운데 우리가 지금 살펴볼 주제처럼 그 진가를 음미하기 위해 우리의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이 되고, 하나님이 육신에 나타나시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고 교훈적인 진리 중 하나이며, 모든 진리 위의 진리이며,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리입니다. . .우리의 마음을 최대한 집중합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살으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든 정신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18절:
14 그런즉 자녀들은 살과 피에 참여한 자들이므로 그분도 마찬가지로 같은 것의 일부를 취하셨으니 
16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17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그분께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될 필요가 있었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서 긍휼 많고 신실하신 대제사장이 되사 백성의 죄들로 인해 화해를 이루려 하심이라.
18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지닌 것과 똑같은 육신, 죄의 육신, 우리가 죄를 짓는 그 육신을 가지셨고, 그럼에도 그 육신 가운데서 그분이 죄를 짓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그 죄의 육신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그것을 어떻게 보았든지 간에, 지금 말씀에 있는 그대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에 있는 그대로 볼수록,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 .

. .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육신안에 여자에게서 나게 되시고 율법 아래 나게 되셨습니다. 성령으로 태어나셨지만, 육신으로 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의 육신외에 어떤 육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가 취하려고 계획했던 바로 그 육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알다시피 문제는 인간이 빠져든 곤경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것이었고, 인간은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로서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과업은, 그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며, 새로운 종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재창조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 .

하나님은 천사들보다 인간을 조금 낮게 만드셨는데, 인간은 그의 죄로 인해 훨씬 더 낮게 추락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게 되어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하시려고 오셨는데, 그분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있던 곳이 아니라, 인간이 타락한 후에 있는 곳으로 오셨습니다. . .아담은 처음부터 식욕 문제로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 .그가 시험을 받은 것은 죄된 육신에서 였지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의 육신이 아니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프레스콧이 이 주제에 대해 혼동된 것처럼 보이는가? 그가 이보다 더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지닌 것과 똑같은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그가 시험을 받은 것은 죄된 육신에서 였지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의 육신이 아니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모든 진리 위의 진리이며,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리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취한 본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것이 너무 논란이 많은 주제이기에 내버려 둬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프레스콧은 그런 주장에 강하게 반대했고 엘렌 화잇도 마찬가지였다.

프레스콧 목사가 이 설교를 할 때 화잇 부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는가? 회중과 함께 그 장막에 앉아서 그의 모든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메시지가 “금처럼 귀중”하였으며 성령이 프레스콧 장로를 통해 역사하여 “귀중한 보석처럼 빛나게 되었다”고 말했다. 주님의 선지자가 프레스콧의 메시지를 그렇게 크게 지지한 것이 옳았는가? 그녀는 “진리는 오류와 분리되었다”는 자신의 말을 진심으로 믿었는가? 조지 나이트는 그녀가 프레스콧의 메시지에 대해 매우 강력한 지지를 전하는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출판되지 않은 편지”를 쓰느라 바빴다고 우리로 하여금 믿게하려고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조지 나이트의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재림신앙은 영적인 파탄에 직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가 지닌 것과 똑같은 육신”울 취했다고 믿는 사람은 프레스콧 목사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에 같은 생각을 표현하는 세 가지 진술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모두 1909년과 1913년의 안식일 학교 교과에 있는 글들이다:

“육신의 장막에 거하는 신성. 죄 없는 사람의 육신이 아니라, 이 땅의 자녀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육신이다. 이것이 실로 영광스러운 점이었다.” (Sabbath School Quarterly, second quarter, 1909)

“죄된 육신을 취함으로. . .그[예수]가 죄된 육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Sabbath School Quarterly, first quarter, 1913)

“로마교는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설 교리에 따라 예수님의 어머니가 원죄의 오점으로부터 보존되었고, 그녀는 죄 없는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가르친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다른 인류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렇게 예수가 죄된 육신으로부터 분리된 결과, 그리스도와 죄인 사이에 중재할 사람으로 로마 사제직이 제정되었다.” (Sabbath School Quarterly, second quarter, 1913)

안식일 학교 교과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묘사하기 위해 이렇게 강한 언어가 사용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들은 적이 언제였던가? 마리아의 무염시태설 교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 혼란을 가져온 가르침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로마교는 마리아가 죄 없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또한 유전의 대법칙을 건너뛰어 어머니와 같은 죄 없는 육신을 물려받았다고 가르친다. 재림교회의 많은 이들도 또한 그리스도가 유전의 큰 법칙을 건너뛰었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로마교가 주는 답보다 더 좋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나는 무염시태설에 관한 다음의 진술을 여러분과 공유하는데, 불쾌감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죄된 육신안에서 얼마나 “완전히 인간”이 되셨는지를 약화시킬 때 발생하는 심각한 딜레마를 제시하기 위해서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W.W. Prescott, 리뷰와 헤럴드, 1910년 1월 13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된 거룩한 존재인 그리스도는 죄된 육신으로 태어났는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죄 없이 태어났다는 것이 무염시태설의 교리이다. 왜일까? —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을 돋보이기 위해서다. 하지만 진실은 인간의 구속주이신 예수님과 그가 구속하러 온 인간들 사이에 큰 수렁을 두는 마귀의 작품이다. . .우리가 로마 교회에서 진짜로 나왔는지 아닌지, 우리 모두는 결정해야 한다.” (A.T. Jones, April 22, 1901, General Conference Bulletin, Q01 VOL. IV. Battle Creek, Mi., Extra No. 17. P. 404.)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히 육신의 모양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육신인 죄된 육신으로 온 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요일 4:3 KJV) 가톨릭 교회는 이것을 고백하지 않고, 반대로 그렇게 함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다.” (A.T. Jones, August 1894)

사단은 우리가 무염시태설 기만의 최종 결과를 믿기만 한다면, 재림교회가 얼마나 강력하게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마리아를 그 방정식에서 제거한다고 해서 속임수가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 재림교회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염시태설 교리의 다양한 형태를 접하고 있는데, 그리스도가 취한 육신과 그가 구원하러 온 인간들의 육신 사이에 충분한 차이를 두고있는 기만때문에, 세상은 결국 나머지 인류와 멀리 동떨어져 있는 구세주를 떠안게 되고만다.

성경과 예언의 신은 예수님이 모든 인류가 물려받은 것과 같은 본성을 그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 (히 2:16 KJV)

“. .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롬 1:3 KJV)

“그분은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위대한 유전의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분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공유하시며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Ellen White, Australian Record, Jan. 15, 1903)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죄된 육신을 물려받으셨지만 결코 육신의 것을 개발하지 아니 하셨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는 우리의 본성을 취했지만 우리의 성과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우리가 죄된 육신 가운데 이미 처한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러 오신 것이다.

나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 대해 합의할 수 있기를 바란다:

  1. 타락의 때부터 사단은 그리스도가 ”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할 것을 알았다.
  2. 사단은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3. 그리스도는 타락한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논쟁의 여지없이” 입증하기위해 오셨다.
  4. 그리스도는 그의 “전능한 힘”을 “내려놓고”, 그의 의지를 순복함으로, 성령으로 태어나셨다.
  5.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앗”이었으며, “유전의 위대한 법칙”아래 놓여 있었다.
  6.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가 “범법자 아담”의 인성을 취했다고 믿었다.
  7. 프레스콧은 그리스도가 죄된 육신을 취했다고 말했을 때 “진리를 오류와 분리켰다.”
  8. 존스와 와고너, 그리고 엘렌 화잇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취했다고 가르쳤다.
  9. 1950년대 후반까지 대부분의 재림교회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가 “죄된 육신”을 취했다고 믿었다.
  10. 믿음으로 신성한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도 죄된 육신 속에서 승리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범법자 아담”, “타락한 본성”,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 같은 매우 묘사적인 문구들이 사용됨을 보았다. 이 모든 용어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단순한 언어로 말한 것을 다른 방법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그리스도는 죄된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그분이 우리의 육신을 가졌음을 말하면서 우리가 그분의 마음을 가져야 됨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마음과 죄된 육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이것이 재림교회안에서 수십 년간 지속된 논쟁을 해결하는 열쇠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타락한 인간의 마음을 취함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아버지로부터 신성한 힘을 받은 인간의 마음을 가졌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가 물려받은 죄된 육신에 결코 동조하지 않았다. 성경 기자들과 재림교회의 선구자들은 이점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 안에서 고난을 당하셨은즉 그와 같이 너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 (벧전 4:1)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무장하면, 우리는 정복자 이상이 될 것이다.” (영문 시조, 1903년, 6월 10일)

“그분은 죄된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지만 죄된 마음의 모양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의 마음을 그곳으로 끌어내리지 말라. 그분의 육신은 우리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었다. . .만일 그분이 우리의 마음을 취하셨다면 어찌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촉구하였겠는가? 우리는 이미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A.T. Jones, 1895 General Conference Bulletin p. 327)

유혹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은 육신의 통로를 거쳐 마음에 다가온다. 우리는 마음과 육신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여러 다른 용어들을 살펴볼 것이다. 유전의 법칙을 통해 온 마음과 육신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은혜의 법칙을 통해 온 마음속에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정신/마음과 죄된 육신

우리가 지금 살펴 볼 진술들은 정신과 육신을 다루고 있다. 그 용어들이 단지 정신이나 죄된 육신을 묘사하기 위한 여러 다른 단어들인지, 아니면 그것이 정신이나 육신에 있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우리 자신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정신이나 육신에 있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개심 전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개심 후를 말하는 것인가?

“하늘이 위탁한 정신의 능력들은 보다 높은 능력으로 취급되고, 육체의 왕국을 지배해야 한다. 타고난 식욕과 정욕양심영적 능력의 지배 아래 놓여져야 한다.” (증언 8권, 63)

“육체의 왕국”은 죄된 육신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며, 정신을 묘사할 때는 “보다 높은 능력”이 사용되고 있다. “육체의 왕국”에는 우리의 “타고난 식욕과 정욕”이 있다. 화잇 부인은 “양심”과 “영적 능력”이 타고난 식욕과 타고난 정욕을 지배하는 “보다 높은 능력”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정신/마음 (Mind) 죄된 육신 (Sinful Flesh)
보다 높은 능력 (Higher Powers)육체의 왕국 (Kingdom of the Body)
양심 (Conscience)
영적 능력 (Spiritual Powers)
타고난 식욕 (Natural Appetites)
타고난 정욕 (Natural Passions)

저열한 욕정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또는 ‘육체의’ 또는 ‘육체의 정욕들’ 이란 말은 그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을 포함한다.” (가정, 127)

여기서 엘렌 화잇은 “육체의 왕국”을 단순히 “육체”로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몸 안에 우리의 “저열한 욕정”이 있다고 말한다. “육체”와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은 죄된 육신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이다.

정신/마음 (Mind) 죄된 육신 (Sinful Flesh)
보다 높은 능력 (Higher Powers) 육체의 왕국 (Kingdom of the Body)
몸 (The Body)
육체 (Flesh)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 (Lower Corrupt Nature)
양심 (Conscience)
영적 능력 (Spiritual Powers)

타고난 식욕 (Natural Appetites)
타고난 정욕 (Natural Passions)
저열한 욕정 (Lower Passions)

“승리하는 사람들은 육신의 식욕과 욕정을 깨우침을 받은 양심이성의 지배하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를 것이다.” (Confrontation p. 74-75)

우리는 우리의 욕정이 우리의 죄된 육신에서 발견됨을 안다. 이제, 우리는 목록에 “식욕”을 추가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깨우침을 받은 양심”과 “이성”이라는 용어를 정신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추가할 것이다. “깨우침을 받은 양심”은 분명히 개심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신/마음 (Mind) 죄된 육신 (Sinful Flesh)
보다 높은 능력 (Higher Powers) 육체의 왕국 (Kingdom of the Body)
몸 (The Body)
육체 (Flesh)
저열하고 타락한 본성 (Lower Corrupt Nature)
양심 (Conscience)
영적 능력 (Spiritual Powers)
깨우침을 받은 양심 (Enlightened Conscience)
이성 (Reason)
타고난 식욕 (Natural Appetites)
타고난 정욕 (Natural Passions)
저열한 욕정 (Lower Passions)
식욕 (Appetites)

사도 바울은 마음과 죄된 육신 사이의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육신을 따르는 자들은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거니와 성령을 따르는 자들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하나니” (롬 8:5)

바울은 우리가 죄된 육신으로 하여금 우리를 이끌게 할 때 식욕과 정욕이 그들의 뜻대로 할 것임을 이해했다. 하지만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하나님의 본성]이 이끌도록 허락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것들을 따를 것이다.

“시험은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신의 능력을 굳게 붙들므로 믿음으로 저항할 때 대항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통과한 시련이었다.” (The Youth’s Instructor, July 20, 1899)

사단이 우리의 육신을 통해 우리를 강하게 시험할 때,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육신에서 성취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신의 능력을 믿음으로 궅게 붙든다면 우리의 마음은 그 시험을 저항할 수 있다. A. T. 존스도 사도 바울과 화잇부인의 말에 동의하면서 우리의 유혹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단이 어디서 그의 시험을 시작하는가? 육신에서이다. 사단은 육신을 통해 정신에 도달하고, 하나님은 정신을 통해 육신에 이른다. 전쟁터는 육신과 정신의 경계에 있다.” (1895 General Conference Bulletin, p. 328)

하나님과 사단은 우리의 영혼을 위한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의 정신/마음을 통제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혹에 굴복하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고, 하나님에 대한 그대의 신뢰가 초지일관하지 못하도록 허락하는 데서 시작된다. 악한 자는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고 마음을 금지된 것들로 이끌 기회를 엿보며 항상 주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품성과 인격, 31)

다시, A T. 존스는 화잇 부인의 말에 동의하면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마음은 죄에 동의했다. 우리는 육신의 유혹을 느꼈고, 우리의 마음이 굴복했으며, 우리 마음의 동의하에, 육신과 정신의 의지와 욕구를 이행했다. 육체가 이끌고, 마음이 그 뒤를 따라간다. 마음이 이끌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법이 준행되게 된다.” (1895 General Conference Bulletin, p. 328)

존스는 죄악의 행위로 이어지는 간단한 단계들을 보여주었다. 먼저, 우리는 감각의 통로를 거쳐 사단에 의해 유혹받는 육신[저열한 본성]에 의해 시험을 받는다. 그런 후 우리 마음이 굴복하여 죄의 행위를 초래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달음을 얻은 양심이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죄의 모든 힘은 저항되고 유혹은 그 힘을 잃게 되어 하나님의 법이 준행된다는 것이다.

예언의 신에는 그리스도의 본성과 관련하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에서 많은 혼란을 야기시킨 몇 가지 진술들이 있다. 문제의 난점은 이 진술들이 보통 그의 마음이나 성품보다는 그의 본성에 적용함으로 인해 기인한다. 그리스도는 죄된 육신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의로운 성품을 개발했음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 모순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엘렌 화잇의 몇 가지 진술이 있다.

1. “그에게는 부패의 오점이 하나도 없었다.” (영문 시조, 1897년 12월 9일)

“부패의 오점이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을 그리스도가 취하신 타락한 본성에 절대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굴복한 채로 유지되어 그의 성품에 죄의 오점이 하나도 없게된 그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부패’라는 단어는 ‘죄’라는 단어와 동의어이다. 우리가 마음을 굴복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부패로 더럽혀지고, 바로 그 순간에 죄의 행위가 일어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분의 영적 본성은 모든 죄악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왔다.” (Adventist Bible Commentary, vol. 7, p. 449)

“그분은 그의 성품에 죄악의 얼룩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분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 본성과 그의 신성을 연결시키기 위해 자신을 낮추셨다.” (Letter 81, 1896)

그리스도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성품에 죄악의 얼룩이 없었던 것이다. “그분의 영적 본성”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의 마음이 “모든 죄악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그의 마음이 결코 생각으로라도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은 “우리도 그 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그분은 우리와 같이 연약하신 형제이시다. 그러나 같은 정욕(passions)을 갖지는 않으셨다. 죄 없는 분으로서 그분의 본성은 악에서 물러났다. (영문 시조, 1879년 8월 7일)

“죄 없는 분”은 그가 물려받은 육신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성과를 가리키는 것이다. 육신은 마음의 협조 없이는 죄를 짓지 못한다.

“그의 본성은 악에서 물러났다.” 그리스도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의 타락한 본성처럼 죄로부터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타락한 본성은 우리가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느끼고, 만지는 우리의 감각이 작동하는 통로이다. 사단은 우리의 감각을 통해 유혹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우리의 마음으로 가는 유일한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되듯이, 악으로 부터 물러났던 것이다. 바라봄으로 우리도 변화하게 된다.

“죄 없는 분”, “본성은 악에서 물러났다”라는 말이 그리스도 마음의 반응을 가리키는 것처럼 “같은 정욕을 갖지는 않으셨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죄된 육신과 관련된 ‘정욕’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인성이 지닌 정욕의 모든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 .” (Heavenly Places, p. 155)

그리스도가 “정욕의 모든 힘”을 가지면서 동시에 “같은 정욕을 갖지않는” 길은 단 하나다. 그리스도가 결코 “같은 정욕을 갖지않은” 이유는 그가 물려받은 육신에 있는 “정욕의 힘”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같은 욕정”은 죄를 지은 결과를 뜻한다. 그리고 욕정의 힘은 “죄된 육신으로 태어난” 결과를 말한다.

3. “그러나 단 한 순간도 그분 안에는 악한 성향이 없으셨다.” 아담이 에덴에서 시험당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다. (Manuscript Releases, vol. 3, p. 18)

이 진술의 맥락은 시험과 죄의 영역이다. 악한 성향은 항상 죄를 선택한 결과이다. 우리가 타고난 성향은 성화된 마음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육신의 타고난 성향에 굴복함으로써 악과 사랑에 빠지기로 선택하게 된다.

“[사단]은 악한 성향들을 부추기며, 불결한 정욕과 야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이 모든 권세와 이 명예와 부와 죄된 쾌락을 내가 네게 주리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조건은 성실함을 포기하고, 양심을 무디게 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는 인간의 기능들을 저하시키고 그들을 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Our High Calling, p. 153.3)

그리스도는 육신을 물려받으셨지만 육신의 것들을 개발하지 않으셨다. 그는 장비를 취하셨지만 타락한 인간의 성과는 취하지 않으셨다. 그는 시험을 받으셨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으셨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는 타락한 죄악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 이것은 ‘죄된 육신’, ‘저열한 본성’, ‘육체의 왕국’ 등으로도 지칭된다. 다음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들의 육신에 표준 장비로 포함된다:

타고난 식욕 (Natural Appetite)
타고난 정욕 (Natural Passions)
타고난 성향 (Natural Propensities)

이 모든 것들이 선천적으로 우리에게 존재하지만, 그것들은 “깨우침을 받은 양심”, 즉 성화된 마음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중생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다음은 마음이 육신을 통해 오는 유혹에 협조하여 죄의 행위가 일어날 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의 일부가 된다.

동물적인 식욕 (Animal Appetite)
탐욕스러운 식욕 (Gluttonous Appetite)
호색적인 식욕 (Lustful Appetite)

죄악적인 정욕 (Sinful Passions)
동물적인 정욕 (Animal Passions)
사악한 정욕 (Evil Passions)

돈을 좋아하는 성향 (Money-loving Propensities)
이기적인 성향 (Selfish Propensities)
호색적 성향 (Lustful Propensities)
죄악적인 성향 (Sinful Propensities)

마음의 동의를 통해 죄가 생기고 타고난 식욕이 동물적인 식욕이 되거나 타고난 성향이 죄악적인 성향이 된다. 이것이 바로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의 마음이 육신의 유혹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한 성향”이 없다고 진실하게 쓸 수 있었던 이유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타고난 식욕을 가졌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가 결코 식욕의 죄에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동물적인 식욕이나 탐욕스러운 식욕을 경험한 적이 없다.

우리는 모두 죄에 굴복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졌던 모든 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의 죄된 성향도 유지할 필요가 없게 된다.” 화잇 부인은 우리에게 “우리의 타고난 성향은 통제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극복한 것처럼 결코 극복할 수 없다”고 상기시킨다. 우리의 모든 식욕, 우리의 모든 욕정, 그리고 우리의 모든 성향은 그것들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았든 경험에 의해 개발되었든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때 극복될 수 있다.

“성경말씀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의 은혜를 통해 그분이 성취한 동일한 성품의 완전을 우리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 (영문 시조, 1903년 6월 19일)

“그는 당신의 완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로 하여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칠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마음과 연합되고 우리의 뜻은 그분의 뜻에 합병되고, 우리의 정신은 그분의 정신과 하나가 되고, 우리 생각은 그분에게 사로잡히게 되어 마침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의미이다.” (실물, 312)

“그대가 될 수 있는 바로 그것을, 그분이 인간 본성에서 이루셨다.” (Letter 106, 1896)

그리스도가 선택한 본성은 우리의 본성이었다 그리고 선택에 의해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 재림성도들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이해하고 감사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부록: 가려뽑은 기별 3권 (130-141페이지)

그의 속성은 우리의 것일 수 있음 ― 그의 본성의 보다 고귀한 속성은, 만약 우리가 그가 준비하여 놓은 것을 통하여 이 축복들을 우리 것으로 하고 악 대신에 선을 계발한다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속성인 이성, 양심, 기억력, 의지,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을 사단의 속박으로부터 구해 내기로 언약하셨을 때에 하신 준비를 통하여 인성이 그분의 신성과 결합하도록 모든 방편이 제공되었다. 이러한 속성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시험을 받으셨다. 그분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사단이 속이는 제안에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우리는 그분이 일점 일획도 굴복하지 않았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두 속성이 융합함 ― 신성을 나누어 받음으로써 우리는 순결하고 거룩하고 더러움 없이 설 수 있다. 그 두 속성이 융합함으로 신이 인간이 되거나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죄되고 부패하고 타락한 불충실을 소유하지 않으셨는데 이는 만약 그렇다면 그는 완전한 제물이 되실 수가 없으셨기 때문이다.­원고 94, 1893.

그리스도의 시험의 실체 ―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시련과 당혹스러운 일을 만날 때, 그는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모든 기대를 실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신뢰를 버리지 말 것이다. 원수에 의하여 타격을 입었을 때 그는 시련과 낙담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억해야 한다. 하늘의 존재들이 그분의 필요시에 그리스도께 수종하였으나 이것이 주님의 생애를 투쟁과 시험에서 자유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모든 면에서 우리처럼 시험을 당하셨으나 죄는 없으셨다. 만약 그의 백성들이 이 본을 따른다면 그분의 영으로 채워질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이 그들에게 수종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시험은 가공할 실체였다.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그분은 하나님과는 엇갈린 의도를 가진 사단의 시험과 공작에 굴복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시험대에 올라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만약 그가 굴복될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분은 인류가 시험 당한 것처럼 모든 면에서 시험을 당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시험과 그 시험 아래서의 그분의 고통은 그의 고상하고 무죄한 성품에 비례하였다. 그러나 매 괴로움의 순간에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께로 향하셨다. 그분은 도덕적 실패의 공포가 죽음의 공포와 같은 그 시간에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셨다. 겟세마네에서 영혼의 고뇌중에 엎드렸을 때 그의 땀구멍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지면의 잔디를 적셨다. 그분은 심한 울부짖음과 눈물로 기도하였으며 그의 두려워하는 바에 대해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그들 자신을 낮추고 그들 자신, 혼, 몸, 영을,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에 내맡기는 모든 자들에게 힘을 주실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사단의 시험의 엄청난 힘을 아셨으며 그의 마음은 사단의 올무에 빠진 죽어 가는 강도에 대한 동정과 용서로 쏟아져 내렸다.­청년 지도자, 1899년 10월 26일자.

그리스도의 마음은 그분의 손과 발에 박힌 못에 의해 일어난 고통보다 훨씬 날카로운 고통에 의해 관통되었다. 그분은 우리가 받을 처벌, 즉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시면서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계셨다. 그분의 시련은 하나님께로부터 그가 버림을 받았다는 생각의 격렬한 시험을 포함하였다. 가공할 시련을 당하는 동안 그의 곧바름을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하였으므로 그의 영혼은 엄청난 흑암의 압력에 의해 고문을 당하였다.

굴복의 가능성이 없다면 시험은 시험이 아니다. 시험은 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도록 강력한 영향을 받으며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신의 능력을 굳게 붙들므로 믿음으로 저항할 때 대항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통과한 시련이었다.­청년 지도자, 1899년 7월 20일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음 ―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리고 그분의 계명의 불변성은 주님의 죽음 못지 않게 그분의 생애에 의해 드러났다. 그는 인성을, 그것의 연약성들과 그것의 경향들과 그것의 시험 거리들을 지닌 채 취하시고….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히 4:15)으셨다. 그는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힘은 그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셨다. 인간으로서 그는 시험을 당하셨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승리하셨다. 그는 완전한 순종의 본을 우리에게 끼치셨다. 그는 우리가 신성을 나누어 받는 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셨으며 그가 승리한 것처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신다.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그 동일한 신성의 능력의 도움에 의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함을 입증하셨다.­원고 141, 1901.

구원받은 자들이 내부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가짐으로 품성에 있어서 순결하고 거룩하고 더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 죄악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죄 없는 존재를 보내셨을 때 하나님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행하셨다. 그분은 그분의 이상을 그분의 아들 안에 보내셨으며 사람들에게 이 이상과 조화되는 품성을 형성하라고 명하신다.­서신 58, 1906.

하늘 총회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창 1:26, 27)셨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도덕적 기능들과 신체적 힘을 창조하셨다. 모든 것이 그분 자신의 죄 없는 사본이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거룩한 속성을 부여하시고 특별히 그를 위하여 마련된 동산에 두셨다. 전능자의 손에 의해 창조된 이 존재는 죄만이 파괴할 수 있었다.­청년 지도자, 1899년 7월 20일자.

그리스도만이 모든 인류의 고난을 지고 가실 수 있었다. “그들의 모든 고난 중에 그가 함께 고난을 받으셨다.” 그는 육체적으로 질병에 걸리신 일이 결코 없으셨으나 다른 이들의 질병을 지셨다. 고난 당하는 인간들이 그분의 주변에 밀려들 때 완전한 장년의 건강중에 있었던 그는 그들과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지상 생애에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품성을 계발하셨으며 그의 아버지의 계명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인간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시고, 율법에 매인 바 되시고, 사람들에게 그분이 그들의 질병, 그들의 슬픔, 그들의 죄를 지신다는 것을 드러내셨으나 그분은 죄인이 되시지 않았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그분은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다. 죄의 한 점도 그분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 그분은 세상 앞에 점 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서셨다.­청년 지도자, 1898년 12월 29일자.

세상의 대속자 그리스도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감화가 흠 없는 도덕성과 순결의 생애를 보존하기에 가장 적합하게 고안된 그런 분위기에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염되지 않았다. 그는 시험에서 면제되지 않았다. 사단은 그의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속이고 정복하기 위한 그의 노력에 있어서 열렬하고 끈질겼다.

그리스도는 죄의 흠 없이 지상을 걸어간 유일한 분이시다. 그분은 순결하고 점이 없고 부정함이 없었다. 지상에 죄로 더럽혀지지 않은 한 분이 계시다는 사실은 죄의 창시자를 크게 불안하게 하였으므로 그는 그의 교활하고 기만적인 능력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정복하기 위하여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이 유혹자를 대항하고 정복하기 위하여 그분의 하늘 아버지께 지혜와 능력을 주시도록 의지하셨다. 그분의 하늘 아버지의 영이 그분의 생애를 고무시키고 통제하였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다. 미덕과 순결이 그분의 생애의 특성을 이루었다.­청년 지도자, 1873년 2월.

그분의 품성에 죄의 얼룩을 가지고 계시지 않았으나 그분은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그분의 신성과 연결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 이렇게 인성을 취하심으로 그분은 인성을 영화롭게 하셨다. 우리의 타락한 속성을 취하심으로 그분은, 그것을 위하여 그분이 이루어 놓으신 넉넉한 준비를 받아들일 때, 그리고 신성을 나누어 받는 자가 될 때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셨다.­서신 81, 189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으로 오늘날의 어린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시험거리를 갖지 않으셨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성경 말씀은 그분이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하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한다.­청년 지도자, 1873년 4월.

주님께서는 사람이 대속함을 받도록 만들지 않으시고 그분의 형상을 간직하도록 창조하셨다. 그러나 범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실 때에 의도하셨던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 대속을 통해서 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2-16).

그를 위하여 지불된 속전 때문에 사람은 그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순종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그에게 처음 주어졌으나 후에 타락으로 상실된 그 형상을 입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의 것과 전혀 다른 것은 아님 ― 위대한 교사가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교훈과 모본에 있어서 교사가 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사람에게 인성 안에서 계명을 지키는 방법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시므로 인간이 그 자신의 결함 있는 판단을 따라 가는 것을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본다. 그의 생애에는 죄가 없다. 그의 평생의 순종은 불순종하는 인간들에게 책망이 된다. 그리스도의 순종은 그분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요구하시는 순종과 전혀 다른 것으로 제쳐놓아져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가능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의 일은 마음이 나누인 봉사가 아니었다. 그리스도는 그분 자신의 뜻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모든 순종에서 나의 아들 됨의 발자국을 따르라. 나는 매우 확고하게 동역자의 정신으로 순종하였다.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의 동역자로서 순종해야 한다. 길을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가 많을지 모른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그분은 그대에게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 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참된 인성에 대하여 가능한 한 깊이 이해하기를 원한다.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결합되었으며 그 둘은 완전하였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진정한 관계를 취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다. 신중하게 행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야 한다. 30년 동안 그분은 완전의 가장 높은 표준을 충족시키면서 완전한 인간의 삶을 사셨다. 그리하여 인간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하나님 안에 희망을 가지며, “내가 다른 성질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섬길텐데”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시고 진실된 봉사에 있어서 자신을 그분께 드리도록 하셨다…. 그 속성은 나에 의하여 대속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대는 퇴락되지 않고 오히려 나에 의하여 향상되고 고상하게 되고 다듬어진다. 그대는 내 안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다. 그대는 승리를 얻을 수 있으며 나의 이름 안에서 승리자 그 이상이 될 수 있다.­서신 69, 1897.

세상의 구주께서는 여호와의 명백한 계명에 대한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아담이 넘어진 곳을 통과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을 세상에 보여 주시기 위하여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타락한 천사인 사단은 아담의 불순종 이후에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온 인류가 자신의 지배 하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은 자신을 죄인의 자리에 두시고 아담이 넘어진 곳을 건너셨으며 인류에게 임한, 혹은 임할 그 어떤 시험보다 백 배나 강한 광야의 시험을 견디셨다. 예수는 모든 유혹 받는 영혼이 저항할 수 있는 동일한 방법, 즉 자신을 영감의 기록에 위탁하고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므로 사단의 유혹을 저항하셨다.

인성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음 ―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셨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승리할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 그분은 모든 면에 있어서 우리처럼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은 아담의 불명예스러운 실패와 타락을 대속하셨으며 승리자가 되시므로 모든 타락하지 않은 세계와 타락한 인류에게 인간이 하늘로부터 그에게 허락된 거룩한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음을 입증하셨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으며 시험을 견디셨고 우리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하여 극복하셨다. 이렇게 하심으로 그는 그의 관심을 가장 밀접한 끈으로 인간에게 붙들어 매셨으며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은 받지 않으며 그러한 시험의 경우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적인 확신을 주셨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음 ― 성령은, 강력한 능력을 나타내는 중에, 인간에게 초자연적인 힘을 부여하며, 무지한 자에게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로 교훈하면서, 승리를 위하여 씨름하는 자에게 주어지겠다고 약속되었다. 성령이 당당한 조력자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약속이다. 성령이 세상의 구주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우리의 경우에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 지속적, 역동적, 재 창조적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교활한 원수의 시험을 견디고 지상의 전생애 동안 그와 씨름하시고 인간이 멸망하지 않도록 불의한 자를 대신하여 의로운 자의 죽음을 당하신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주어진 성령은 그분의 제자들, 즉 사도들로 하여금 온갖 종류의 우상숭배를 반대하여 굳건히 서게 하고 주님, 오직 그분만을 높일 수 있게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그분의 영과 거룩한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동의 고귀한 기록을 세상에 제시하도록 거룩한 역사가들의 펜을 인도하였겠는가?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후에 그분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약속된 성령은, 갈바리 십자가 상의 위대한 제사 제도의 희생에 관심을 이끌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며, 죄를 깨달은 영혼에게 성경의 고귀한 것들을 열어 주며, 어두워진 마음에 의의 태양의 밝은 빛, 즉 그들의 속마음을 영원한 진리에 대한 깨우쳐진 지식으로 불타오르게 할 진리를 열어 주면서 늘 일하고 있다.

성령 외에 누가 마음에 의의 도덕적 표준을 제시하며 죄를 확신하게 하고 후회할 것이 없는 회개를 이루는 거룩한 근심을 일으키며 모든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믿는 믿음을 행사하도록 고취하겠는가?

성령 외에 누가 인간의 마음에 역사하여 일시적이고 멸절될 사물에 대한 애정을 거두게 함으로 품성을 변화시키며, 영혼에게 영원한 유업, 즉 멸절되지 않는 영원한 사물을 제시함으로 간절한 소망을 넣어 주며, 인간을 재창조하며 정련하며 성화시켜 그들로 하여금 왕족의 일원, 하늘 임금의 자녀들이 될 수 있도록 하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죄를 승리함 ― 우리의 첫 조상의 타락은 인간 의지의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절대 복종의 금사슬을 끊었다. 순종은 더 이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인간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을 따랐는데 주님께서는 옛 세계의 거민들에 대하여 그들이 항상 악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는 나는 나의 아버지의 계명을 지켰다고 선언하신다. 어떻게 지키셨는가? 인간으로서 지키셨다.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유대인의 고소에 그분은 그분의 순결하고 덕스럽고 거룩한 품성을 가지고 나아와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도전하셨다.

우리의 모본이시며 죄를 위한 희생물 ― 구주께서는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되시기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람에게 한 거룩한 인간적 품성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분은 세상이 일찍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교육자요 교사이셨다. 그분은 권세를 가진 분으로서 말씀하셨으나 모든 사람들의 신임을 얻으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무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그분의 말과 실제적인 모본을 통해 우리가 모방해야 할 분명한 틀을 남기셨다. 그분의 말씀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교육하셨으며 그분 자신의 행동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법칙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생애와 품성을 통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하며 올바른 것들을 행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보시기에 즐거운 일들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도록 하셨다.

그분은 사단의 주장이 그릇됨을 입증하심 ― 우리는 예수께서,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거짓을 반박하시면서 실제적인 사실을 통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입증해 주신데 대하여 항상 감사해야 할 것이다. 이 위대한 교사는 인류의 선두에 서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에 대한 그분의 거룩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이 가능함을 보여 주시면서 인간을 향상시키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은 평생의 순종이 가능함을 증명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성부께서 그 아들을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들의 생애에 예증하도록 선택된 대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

그분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시험을 견디심 ― 우리는 그리스도의 순종 그 자체를 그분의 특별한 신성에 의하여 그분이 특별히 적응된 그 어떤 것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 앞에 인간을 대표하여 서셨으며 인간 대신 인간의 대속물과 담보물로 시험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가지셨다면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단의 주장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그의 지배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직 그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고 인간의 순종을 드림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승리와 순종은 진정한 인간의 것이었음을 마음에 명심하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의 인성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많은 잘못을 범한다. 만약 우리가 그분의 인성에, 사람이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질 수 없는 그러한 능력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인성의 완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분은 믿음으로 그분을 받아 모든 자에게 그분의 입혀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주신다. 그분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인간에게 요구되는 동일한 순종이다.

인간은 거룩한 능력이 그분의 도우심과 결합되지 않으면 사단의 유혹을 승리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분은 거룩한 능력을 붙들 수 있었다. 그분은 보다 열등한 하나님의 순종을 보다 위대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순종하기 위하여 오셨으며 이러한 면에서 그분은 우리의 모본이시다.

예수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심 ―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바를 드러내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비상시마다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를 드러내기 위하여 오셨다. 사람은 믿음을 통하여 신성을 나누어 받는 자가 되며 그를 에워싸는 모든 유혹을 이기도록 되어 있다. 주님은 이제 모든 아담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성 안에서 그분을 섬기기를 요구하신다.

주님 예수는 죄가 만들어 놓은 구렁에 다리를 놓으셨다. 그분은 땅을 하늘과, 유한한 인간을 무한하신 하나님과 연결시키셨다. 세상의 구주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동일한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셨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우리는 그분의 아들되심과 인성을 마음에 담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행사해야만 한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분은 하나님이 아니었으며 죄인들의 그분에 대한 반박을 견딘 분도 하나님이 아니었다. 우리 인성에로 자신을 낮추시고 인간이 되신 분, 자신을 낮추시사 인성을 취하신 분은 하늘의 임금이셨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 우리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하여 하나님을 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하여 대속된, 우리가 가진 속성 안에서 그분을 섬겨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자로, 그리하여 전혀 죄를 범한 적이 없는 것처럼 서는 것이다. 우리가 천사라면 행했을 것들을 생각한다면 결코 힘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서야 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을 보여야 한다. 예수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따라 오너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원고 1, 1892.

그리스도는 스스로 인성을 쓰시고 생애를 희생물로 드리심으로 인간이 신성을 나누어 받는 자가 되어 영생을 얻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그 희생물을 드리는 제사장이었다.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그는 모든 범죄에 대하여 무죄하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함으로 사단에게 스스로를 판 사람들과 교환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었으며 인류의 생명 대신 그분의 생명을 주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그분의 매입한 소유가 되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 18).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타락하기 전에 주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만약 네가 내 계명을 범한다면 죽음이 정녕 네 처벌이 되리라.”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므로 그는 그의 생명을 저 버렸다.

타락하기 전에 아담은 저주의 결과와 무관하였다. 유혹자에 의하여 공격을 받을 당시 그에게는 죄의 영향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는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죄에 굴복했으며 높고 거룩한 지위로부터 떨어졌다.

죄된 육체와 같은 모양으로 ― 둘째 아담인 그리스도는 죄된 육체의 모양으로 오셨다.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그는 슬픔, 피곤, 허기, 갈증을 당하게 되었다. 그는 유혹을 당하였으나 죄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어떠한 죄의 흔적도 없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상 생애에서) 지”(요 15:10)켰다. 그가 무한한 능력을 가졌던 것은 오로지 그가 완전히 아버지의 뜻을 순종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아담은 모든 인류의 소유자가 되기 위하여 시험과 유혹을 견디었다. ­원고 99.1903.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는 안개처럼 몰려와 세상의 기독교인들을 짙은 구름처럼 뒤덮었고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를 모두 휩쓸어 버렸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인간의 모습에 가려서 보내셨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보내기로 택하셨을까? 세상이 하나님 사랑의 충만함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십자가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단의 깊은 증오심을 타락하지 않은 온 우주에 드러내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은 보고 믿고 구원받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의 아들을 육신에 가리기로 택하셨는가?  가장 분명한 첫째 이유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보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두번째로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박힌 아들의 죽음을 통해 전 세계를 하나님의 품으로 모을 수 있었다. 십자가 위에서 신성한 아들이 죽임을 당함으로 인해, 그리스도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사단을 무너뜨리고 모든 믿는 영혼의 죄를 없애게 되었다. 그리고 세번째로, 그리스도는 육신안에서 죄를 승리함으로 해서 우리 안의 죄를 그분이 정복할 수 있게 되었다.

[ 원문 출처: “Mind vs. Sinful Flesh by R. J. Gravell” ]


R. J. 그래블 (R. J. GRAVELL) 장로는 플로리다주의 오랜지 시티에 소재한 DeBary-Orange City SDA Church 의 장로로 봉사하는 평신도 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