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지남 2011년 7월호에 실린 지상훈 님의 「그리스도의 인성론 – 도전과 대응」 이라는 기사를 읽으면서 본인은 그동안 이 기독론의 주제가 논해질 때마다 한인 재림교회 내에서 역사적 사실의 왜곡과 더불어 너무나 편파적인 의견들만이 정통적인 의견인 양 발표되어 왔던 사실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사실 그렇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은 처지가 아니여서 자세하게 신학적 혹은 논리적 분석이나 역사적 배경을 여기서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 주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오랫동안 양면의 입장들을 살펴본 경험이 있기에, 지상훈님의 의견으로 제시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눈에 띄는 몇 가지 이슈들에 대해 좀 더 폭 넓은 재조명이 필요될 것 같아 몇 자 적어 보려고 한다.

먼저 이 기사를 집필하신 지상훈님께 감사드림은,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 그동안 여러 한인 재림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너무나 자주 보여온 상투적인 편파성과 그 어떤 부류의 재림 신앙인들에 대한 불필요한 공격성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이 기사 전체를 통해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본인이 재림교인인 된지 벌써 26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의 인성론에 대해 이렇게 조심스러운 자세로 글을 쓰고 발표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을 한인 교회안에서 그동안 접한 적이 없었다. 오랫동안 개인적으로 이 문제의 밑바닥을 파해치고자 정말 속앓음을 하던 중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였던 때가 바로 학자적 공평성과 정직성이 부재된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글을 읽을 때였음을 여기서 밝히고 싶다. 하여튼 누구인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지만, 다시한번 지상훈님께 심심히 감사드리는 바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세가지 부류의 견해가 재림교회내에 존재함을 대체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한 것도 호평을 받을만한 점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인성이라는 주제가 다른 재림신앙의 중요한 가르침들과 밀접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솔직하게 지적한 점에서도 좀 새삼스러운 느낌이 드는 학자의 정직성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동안 여러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인성론은 다른 중요한 교리들과 별 상관없는 것처럼 말하곤 하는걸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은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되는 저자의 설명과 해석에 대해 나름대로 이 저자의 이해와는 좀 다른 측면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미주지남의 글을 읽고 또 이 글을 읽으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나름대로 기도하며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을 연구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 비평을 발표하고자 한다.

앤드리어슨이 타락 후 인성론 견해의 시조?

지상훈님은 전통적인 인성론, 즉 타락 후 인성론을 설명하면서, “재림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가장 오래된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타락 이후의 인성과 같다는 견해이다” 라고 언급하였다. 정확한 기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면서 필자는, “이 견해의 강력한 옹호는 앤드리어슨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1950년대에 재림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죄된 인성론을 극대화시켰고 그의 견해는 오늘날 그의 후예들에게 사상적, 신학적 근간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또한 주장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 주장에 좀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이 타락 후 인성이라는 견해는 앤드리어슨 이전에 재림교회의 초기 때 부터 엘렌 화잇은 물론 교회의 선구자들이 현저하게 의견일치를 보이며 견지해 오던 입장이었다. 물론 그동안 다른 최근의 입장을 받아들인 분들에 의해서 엘렌 화잇의 견해가 꼭 그런 것 만은 아니였다고 곡해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이 점은 요사이 다른 입장을 견지해온 죠지 나이트 등 다른 신학자들도 솔직히 인정하고 있는 바이다 (참조: “교리에 대한 질문” 책에 담긴 역사적 왜곡들에 관한 죠지 나이트의 지적 – Questions on Doctrine: Symbol of Adventist Theological Tension, pp. 9-10). 이 주제가 교회내에서 1950년대 전에는 지금처럼 쟁점이 되지 않은 이유는 교회 전체가 이 입장의 당위성에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대 전 단 한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에 도전하였던 한 무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1900년대 초 인디애나 주에서 일어났던 “거룩한 육체 운동 (Holy Flesh Movement)”이였다. 이 이설적 운동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1) 그리스도는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죄없는 인성을 취하였다; (2) 그리스도는 타락하고 열약해진 육체를 취하였지만 영적인 본성은 타락하지 않은 본성을 취했다; (3) 이러한 타락되지 않은 영적 본성을 취할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의 힘으로 잉태되었을 때 인간의 유전적 법칙으로부터 보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스켈 목사가 이들의 야영집회를 참석해 보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화잇여사에게 보내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인성을 지니고 태어나셨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가 죄인이라고 주장한다고 왜곡하였습니다. . .이 주제에 대한 그들의 신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인성을 취하였기에, 그 분의 인성이 거룩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이제 우리의 육체가 그처럼 거룩해져서 결코 죽지않는 몸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거룩한 육체 운동에 대해 엘렌 화잇에게 보고한 하스켈 목사의 편지, 1900년 9월 25일)

우리는 그 때, 화잇 여사와 존즈, 와고너 및 여러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운동의 이설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교회를 그들의 이설로부터 보호한 기록을 화잇 부인의 글과 선구자들의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성이 타락 후 인성이라는 입장은 재림교회의 초기 때 부터 우리의 선구자들이 일관성있게 견지하던 교리적 입장이었다. 단 앤드리언슨은 이러한 중요한 교리적 입장을 1950년대 후반 복음주의파 대표인 도날드 반하우스와 월터 마틴등과의 회담 후 정당한 토론없이 뒤엎으려던 프룸, 리드 및 앤더슨을 대표로 한 교회 지도자들의 시도에 신랄하게 항의을 제기한 것뿐이다. 따라서 지상훈님이 제기한 “이 견해의 강력한 옹호는 앤드리어슨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1950년대에 재림교회 내에서 그리스도의 죄된 인성론을 극대화시켰다”라는 주장에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는 문제점이 내재한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대안적 인성론 (복합적 인성론)에 대한 오해

소위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대안적 견해”라고 명명된 설명에서, 지상훈 님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대안적 견해는 타락전 인성론과 타락후 인성론을 통합하고 수정, 보완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가장 뒤늦게 발견된 이 견해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죄의 영향을 받은 타고난 육체적 연약함들 혹은 신체적 연약성들을 포함하지만, 아담의 후손들이 공통적으로 물려받은 선천적인 죄로 향하는 성향, 죄의 경향 혹은 성벽, 정욕, 부패 또는 기질 등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위에 언급된 “거룩한 육체운동”의 주창자들이 견지한 그리스도의 인성론에서 보았듯이, 이러한 “대안적인” 입장은 이미 재림교회내에서 주창된 적이 있었고, 그러한 입장을 우리의 선구자들이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 대안적인 인성론이 타락전 인성론과 타락후 인성론을 통합하고 수정, 보완한 견해라는 지상훈님의 주장에도 다분히 문제점이 있다고 본인은 생각한다.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이러한 대안적 인성론도 우리가 곰곰히 분석해 보면, 그것이 실상은 "타락전 아담의 인성론" 입장과 하등 차이가 없음을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월터 마틴과 같은 칼뱅주의적 복음주의파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리로이 프룸 등이 "타락전 인성론" 입장을 주장했을 때, 그들이 예수님께서 타락하기 전 아담의 완전하고 흠없는 마음뿐만 아니라 그의 완전하여 흠없고 연약성이 부재된 창조 당시의 육체도 지니고 오셨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예수님의 "타락전 인성"을 언급했을 때는, 그 용어를 언제나 예수님의 "마음" 혹은 “영적 본성”에만 적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프룸등이 주장했던 "타락전 인성론”은 한마디로 “대안적 인성론”과 동일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대안적 입장인 "복합적 인성" 입장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바이다. "타락전 인성론"이 교회내에서 심한 반대에 부딪치면서 그 개념을 포장과 이름만 바꾸어 다시 제시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 말이다.

사실 이 대안적 견해라는 입장은 일반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복음주의파의 입장임에 틀림 없다. 재림교회안에서 계발된 “타락전 인성론과 타락후 인성론을 통합하고 수정, 보완한 견해”가 아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기독론은 이미 4세기경에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 (Apollinaris of Laodicea)라는 주교에 의해 주창되었던 설인데, 희랍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예수님이 인간의 타락된 몸을 지니셨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던 바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담이지만,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화잇 여사의 안목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일것 같아 언급해 본다. 지상훈님이 예수님이 우리가 물려받은 죄로 기우는 성향등은 지니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정욕”도 거기에 포함했는데, 사실 화잇 여사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호소” 31 페이지에서 젊은이들이 성적인 충동을 못이겨 잘못된 습관에 빠지는 행습에 대해 기술한 후,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권면하였다:

“만일 그들이 생각과 행동의 정결함과 순결성이 부족하다면 그들은 무력한 자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에게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인성의 모든 약함들을 접해보아 아시므로 (“Jesus is acquainted with all the weaknesses of human nature”) 탄원을 받으실 때 그분은 아무리 강력한 유혹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어머니들에게 보내는 호소, 31페이지)

그만큼 예수님이 인간이 느끼는 성적인 충동의 유혹을 접해보았을 정도로 우리의 인성과 가까이 계셨다는 말이다. 여기서 화잇 여사가 “면식이 있다”는 뜻을 가진 “acquainted with” 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예수님이 그러한 죄로 기우는 인간 본성의 유혹을 느꼈으나 차단하여 그러한 유혹에 굴하지 않았음을 전하고자 함이다. 화잇 여사의 이러한 안목은 요즈음 “대안적 인성론”을 견지하고 주장하는 분들의 안목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원죄론적 전제에 기반을 둔 주장

또한 지상훈 님은 미주지남 7월호 30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셨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죄된 본성을 가지셨으나 죄에서 승리하셨고 따라서 죄인은 아니라고 한다면 (타락 후 인성론자들의 설명처럼), 죄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인간도 구세주 혹은 대속주 없이 자신의 선택과 노력에 의하여 죄 없는 삶을 살수 있고, 결과적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다. . . 오히려 예수께서 죄된 본성을 가지셨다면 그분이야말로 구속주가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사실 이 저자가 견지한 “본성 = 죄”라는 부분적으로나마 원죄론적 전제에 기반을 둔 논리전개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재림교회의 입장은 타락한 본성 그 자체를 죄로 보지 않았다. 죄를 기본적으로 인간의 상태에 있지 않고 인간의 선택에 있다고 보았다. 죄는 인간의 마음이 탐스러운 그 무엇에 동의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때 성립되게 된다고 본다. 죄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의도적 선택으로 정의하며 신약의 복음에서 말하는 죄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타락되고 죄스러운 본성을 발휘하는 우리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묘사한다고 보는 편이다. 기본교리 28신조의 인간론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 죄의 성질. 특별히 최초의 타락에 관한 설명을 포함해서, 수많은 성경절들은 죄란 도덕적 악이라는 것, 곧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범한 결과라는 점을 명백히 하고 있다(창 3:1-6, 롬 1:18-22). 1) 죄의 정의. 죄에 관한 성경적 정의는 ‘불법'(요일 3:4),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것(약 4:17),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롬 14:23)하는 모든 것 등을 포함한다. 죄에 대한 포괄적인 정의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명령하신 것을 행하는 데 등한히 한 것이나 혹은 그분께서 특별히 금지하신 것을 행하는 것 등,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만일 죄가 본성이 아니고 선택에 의해 이루어 진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타락된 죄로 기우는 본성을 물려받으면서도 죄인이 아니 될 수 있음이 분명해 진다. 그 분은 결코 자신의 선택들이 유전된 본성에 의해 지배되도록 허용치 않음으로 해서 그의 모든 의식적 선택이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였기에, 그리스도는 언제나 죄없는 상태로 계셨을 뿐이다. 그렇게 하신 방법은 그 분의 삶이 항상 성령과 밀접히 접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똑 같이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방법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죄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엘렌 화잇의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술하였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힘입어 시험을 이겨내셨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굳게 붙잡았으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것과 같은 동일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은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될 수 있으며 시험과 시련 가운데서 천국의 도움을 얻지 못할 영혼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능력의 근원을 나타내시므로 인간이 결코 인간 자신의 무력한 재능을 의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 (1기별, 409)

저자의 의도가 불분명한 주장들

마지막으로 지상훈님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셨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연구에서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인 자세도 지양해야 한다. . .어떤이들은 무분별하게 특정 견해를 지지하는데, 그 근거로 그들은 ‘과거 재림교회 안의 많은 선구자가 그렇게 믿었다.’ 혹은 ‘재림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는 이렇게 믿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교리의 기초를 사람에게 둘 수 없는데, 심지어 그들이 재림교인들이며 혹은 재림교회 지도자들이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과거 어느 때에도 재림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특정한 견해를 교회 차원의 이해나 가르침으로 교리화하거나 혹은 명문화한 적이 없다.”

이 말은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함축된 주장 같다. 물론 우리의 신앙에 관계된 진리는 그 어떤 인간들의 견해에 기초를 두면 않된다. 그리고 무조건 과거지향적인 자세를 가져서도 않된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본인 자신이 바로 이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견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한국 재림교회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 거의 대부분이 심하게 이단시해온 “타락 후 인성론” 이 재림신앙에 꼭 필요하고 합당한 입장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 바로 그런 자세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이러한 저자의 주장을 접하면서 몇가지 질문들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1) 그리스도의 인성론에 있어서 지나치게 과거지향적인 자세를 지양하여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타락후 인성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인가?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그렇게 할 성서적이거나 합당한 이유를 많은 교인들이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그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을 지나치게 이설시 치부해온 압력밖에는. . . 아니 오히려 본인의 생각으로는 “대안적 인성론”을 버릴 이유가 더 많은 것 같다. 근래에 들어와 미국과 한국 교회내의 젊은 목회자들과 청년들이 “타락전 혹은 대안적 인성론”을 버리고 “타락후 인성론”으로 돌아서는 경향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이들이 이러한 복음주의파적인 입장들이 교회내로 들어오게된 의혹적인 역사적 배경에 접하고 나서 재림교회 고유의 입장이던 “타락후 인성론”을 다시 재조명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고 본인에게 전해주었다.

(2) 타락후 인성론 견해를 견지하는 한 이유로 “과거 재림교회 안의 많은 선구자가 그렇게 믿었다” 라는 이유를 제시하면 올바르지 않다는 주장인 것 같은데, 그러면 이 선구자 중 엘렌 화잇도 포함되는데 그 분의 글도 이러한 결정을 하는데 권위성이 없다는 말인가? 엘렌 화잇이나 선구자들의 의견들보다 최근 신학자들의 의견들을 더 믿고 기본적으로 재림교회 밖에서 들어온 인성론을 채택하라는 암시적 권고같은 느낌이 드는데 저자의 진중을 알고 싶다.

(3) 그리고 “재림교회의 유능한 지도자는 이렇게 믿었다”고 해서도 아니된다고 충언하였는데, 참으로 흥미로운 점은, 사실 오랫동안 “타락전 인성론” 혹은 “대안적 인성론”을 주창하며 “타락후 인성론”을 견지하는 사람들을 비난해온 많은 이들이 바로 이러한 언급으로 자기들의 입장을 내세웠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저자가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 주제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 중, 항상 많은 목회자들이 “어느 유명한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믿고 있다”는 등의 말로 반응을 해 왔음을 자주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4) 마지막으로 저자가 또 “과거 어느 때에도 재림교회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 특정한 견해를 교회 차원의 이해나 가르침으로 교리화하거나 혹은 명문화한 적이 없다” 라고 말했는데, 맞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난 몇 십년간 한인 재림교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렇게 교리화 된 적인 없는 그리스도의 인성론을 놓고 소위 그들의 “타락전/대안적 인성론” 에 반대적 입장을 견지하고 주장해온 사람들을 이단시 공격하였단 말인가? 그것도 복음주의파 신학자들의 호감을 사기위해 변칙적으로 출판되었던 (거기에 담긴 “타락전 인성론”을 이제는 주장하는 사람이 없다고 저자도 인정한) “교리에 대한 질문”을 마치 교회 교리의 공식문서인 것처럼 인용하면서 그렇게 해오지 않았는가?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사실 이렇게 한 사람들은 미국인들 중에서도 몇 있었다. 로이 아담즈와 우드로우 위든 같은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결 론

참으로 이 주제는 그동안 한인 교회내의 이상한 풍정 때문에 너무 일방적으로 강요되며 올바르고 공정한 논의가 부재하였다. 비그리스도적이며 비신사적인 행태들을 소위 교회의 원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너무 노출해 버렸음을 많은 교인들이 감지하고 있다. 몇 해전 김중훈 목사가 번역하여 시조사를 통해 출판되었던 “영원한 본체를 붙잡다”라는 책에 대해 무슨 이설책인 것처럼 가혹한 비판을 가하던 한국 목회자들의 자세가 그 한 두드러진 예이다. 이제 이러한 주제에 대한 서적들과 강연들이 한국 교회내에서 자유롭고 비난없이 출판되고 열리게 될 때, 한국 재림교회는 그동안의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씻을수 있을 것이라는게 본인의 생각이다.

솔직히 일종의 회의감이 들면서도 언젠가 그럴 때가 오겠지 하는 바램을 버리지는 못하겠다.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