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인 2005년에 미주 교회지남에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이란 제목하에 데스몬드 포드의 가르침을 지지하는 케빈 페리스라는 평신도의 글이 번역되어 게재된 적이 있었다. 이미 그 몇 달전에 Adventist Review지에 실려 각처에 있는 신실한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의 항의와 의분을 초래했던 오류와 허위적 진술을 담은 이 글이 미주 재림교회들의 기관지에도 번역되어 실렸다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1979년 말 데스몬드 포드에 의해 자행되었던 우리 재림신앙의 성소론에 대한 공격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는 이 글은 재림신앙의 성소론과 심판론을 옹호하는 재림교회의 기본적인 취지와는 극도로 대립되는 입장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빈 폴슨 목사의 이 비평문은 그 당시 Adventist Review지에 실렸던 페리스씨의 기사에 대해 성서적 측면에서 답변한 글이다. 이 글을 여기에 다시 게재하는 목적은 페리스씨가 했던 주장들이 최근에 교회를 떠난 이상구 박사나 박영호 목사같은 이들에 의해 되새김질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비평문이 생각하는 재림교인들의 올바른 신앙정립에 도움이 되길 바라며, 하나님께서 마지막 무리에게 주신 귀중한 성소 교리에 대한 여러 독자들의 확신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며 바랄 뿐이다.


서 론

2000년도에 다음과 같은 공개서한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대총회장인 얀 폴슨 목사에게 보내졌다:

폴슨 목사님 귀하,

저는 지금 막 브리스배인 침례교회에서 열린 한 집회에서 제가 지금까지 들어본 중 가장 뛰어난 목사의 설교를 듣고 돌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데스몬드 포드 박사입니다.

이 브리스배인 시에 소재한 침례교회가 포드 박사를 채용했는데 오늘 저녁의 설교는 이번 주말 세미나의 막을 내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간에는 이 침례교회의 임직원들과 한명의 증권업자가 주동이 되어 앞으로 공적인 집회를 통해 이 포드 박사의 가르침을 지원하기 위해 백만불의 신탁 기금을 형성하려는 계획으로 회의를 가진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있었던 가장 귀중한 인재 중 하나였던 이 사람을 우리 교회가 어떻게 축출했는지를 상기할 때 저의 감정이 얼마나 끓어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솔직 담백성과 공정성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사조에 부합하여 우리가 이제 이런 부당한 상태를 해소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포드 박사의 설교를 들어본 정직한 교인들 중 “왜 이 분이 우리 대열에 있지 않는가?”라고 의문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현재 기본신조문이 갈보리에서 충족된 속죄에 대한 그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고, 또 글레시어 뷰 회의의 합의서가 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포드 박사 또한 그 합의서에 동의했음을 볼 때 (우리 교인들이 이 사실을 잘 알지 못하고 있음) 더욱 그러합니다. 따라서 포드 박사를 계속 고립화 시킨다면, 우리는 (이 교회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을 포함하여) 그가 가르치는 바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이설이라는 거짓을 영속화 시키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이제 지금 유통되고 있는 신학 사조에 비추어 포드 박사의 입장을 검토하기 위한 모종의 위원회를 구성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그를 축출시켰던, 지금 신빙성을 상실한, 세력들에 대한 재평가도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우리는 지금 부끄럽게도 계속 이 일말의 사건들이 남긴 어두운 유산에 찬동을 하고 있습니다. 충실한 한 교인으로서 저는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참 거북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부당한 일이 전도(轉倒)되기 전에는 항상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轉倒) 과정이 소규모적으로 이곳 호주에서 지금 막 시작되었지요. 포드 박사가 이곳에 있는 한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으며 곧 다시 할 것입니다. 그리고 초청에 의해 그가 안식일 학교의 과정 공부 시간을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더 많은 수의 정직한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진상을 알고 행동하면서 이러한 일들은 앞으로 더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포드 박사가 이 시대에 가장 유능하게 전달할 수 있는 기별로 부터 우리 전체 교인들이 혜택을 받도록 그에게 우리 교회들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전반적으로 허용해야 될 것입니다.

만일 안식일을 힘차게 수호하고 복음을 생생하게 전파하며 우리 대부분의 목사들처럼 재림 신앙의 교리들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성경에 대한 주제도 예리하게 전달하는 비재림교회 목사가 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사람을 우리 가운데로 불러들이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데스몬드 포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일 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우리 자신에 대한 그 어떤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고 보지 않으십니까?

포드 박사는 또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 신사중의 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포용성과 사랑의 손길이 그가 보여준 사랑과 포용의 정신만큼이나 넓다면 그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이러한 사랑과 포용의 손길을 내미는 몇 천명 정도의 지지 서명들을 모으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 일에 대한 귀하의 많은 기도가 담긴 용기 있고 조속한 고려를 간청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케빈 페리스 드림.

2000년 2월 20일자로 명시된 이 편지는 Adventist Today라는 재림교회의 기본신조들 및 표준들에 대해 그리고 교회의 정책들과 지도층들을 상례적으로 공격하는 잡지의 2000년 7/8월호에 실렸었다. (케빈 페리스, “데스몬드 포드에 대하여 대총회장에게 보내는 편지”, Adventist Today, 2000년 7/8월호, 6페이지)

간략한 역사

위 편지가 범하고 있는 역사의 왜곡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서 약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여기에 회고하여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79년 10월 27일, 호주의 아본대일 대학에서 온 초청 교수로서 그 당시 퍼시픽 유니언 대학(PUC)에서 강의를 담당하고 있던 데스몬드 포드 박사가 재림 평신도 공개 토론회 (The Association of Adventist Forums)의 한 지부 모임에서 “조사심판: 신학적 이정표 혹은 역사적 필요성?”이란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이 비평서의 저자는 그 당시 PUC 신학과에 재학중이던 2학년 학생으로 이 토론회 모임에 참가하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포드 박사는 예언 해석에서 우리가 적용해온 년-일 원칙이 근거가 빈약하다고 주장했고, 다니엘서 8장 14절과 레위기 16장에 나오는 성소 정결의 어학적 연관성에 이의를 제기했으며, 또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자마자 하늘의 지성소(Most Holy Place)로 들어가셨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그는 이러한 그의 논지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우리 교회가 엘렌 화잇의 글과 상충되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데, 그 이유는 엘렌 화잇의 글을 성경 말씀에 대한 영감적인 주석으로 여겨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라고 그 자리에 모인 청중들에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강연 결과, 포드 박사는 교편에서 즉각 휴직되었으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도록 조치를 받았다 (그레고리 쉬나이더, “잊혀진 글레시어 뷰의 25년 후”, Spectrum Magazine, 2005년 겨울호 6페이지). 그 후 곧 학자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 행정자들이 1980년 8월 콜로라도 주에 소재한 글레시어 뷰 집회 장소에 모여 포드가 자신의 입장을 입증하기 위해 작성 제시한 근거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 거기 참석한 인사들에 의해 의견을 모은 한 성명서가 기초 되었는데, 이 성명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회의에 참석했던 인사들 사이에 있었던 심각한 견해 차이는 물론 포드와 교회의 역사적인 입장 사이에 존재하였던 견해 차이를 불분명하게 만들어 버린 문서였다. 따라서 이 회의 참석자들의 합의된 의견을 받아들이겠다고 사전에 약속하지 않았던 현명한 교단의 지도자들은 이 합의서가 내포하고 있는 취약점들을 감지하고 별도로 포드의 입장에 대한 그들의 우려를 10개 항목으로 조리 있게 설명한 비평서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포드 문서에 대한 성명서, Adventist Review, 1980년 9월 4일, 8-11페이지)

이같은 우려 항목들에 근거하여 대총회 행정 자문 위원회(PREXAD)는 호주 아시아 지회(지금의 남태평양 지회)에다 포드 박사를 권고 사직하게 하여 목회직과 교직에서 자진 은퇴하도록 종용하고, 만일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의 목사 신임서를 취소하라고 권고하였다. 이러한 결정이 있은 후 얼마 안 되어 후자의 조치가 집행되었고 포드는 그의 신임서를 박탈당하게 된 것이다. (래이몬드 코트렐, “성소 교리 조사 위원회와 그 새로운 합의서”, Spectrum Magazine, 1980년 11월, 21페이지)

그 후 1983년 2월 1일, 포드와 대총회 지도자들 사이에 한 차례 더 있었던 대화가 실패로 돌아가자 호주 지회의 행정 위원회는 포드의 목사 안수를 취소하기로 결의하였다 (아드리안 지트코스키, “포드와 밴 루엔의 목사 안수 상실”, Spectrum Magazine, 13권 3호, 14페이지). 그 조치 후, 포드는 그 당시 대총회장인 닐 윌슨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여러 가지를 언급하면서 “내 교적이 어떻게 되던지 상관없이 나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으로 기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데스몬드 포드, 1983년 2월 9일 닐 윌슨에게 보낸 편지, 포드가 시작한 선교단체의 잡지인 Good News for Adventists에 실렸음, 1985년, 56페이지).

그로부터 18년 이후, 포드 박사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던 자신의 입장을 철회한 듯하다. 2001년 2월13일, 퍼시픽 유니언 대학 교회가 포드박사와 그의 아내 질리안으로 부터 제출된 그들의 교적을 제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기로 결의를 했기 때문이다 (데스몬드 포드와 질리안 포드의 교적에 대한 퍼시픽 유니언 대학 교회 총회의 결의, 2001년 2월 13일). 본 저자와의 전화통화에서 그 교회 서기는 이러한 결정이 포드부부의 자발적인 요청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포드가 그렇게 요청한 동기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지만, 페리스씨가 그의 편지에서 밝힌대로 포드가 호주의 한 지역에 있는 침례교회에 의해 채용된 사실과 모종의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침례교회가 재림교회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의 목회를 공개적으로 지원하거나 공식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된 페리스씨의 편지가 그 당시 호주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포드와 재림교회의 재결합을 위한 노력을 언급했는데, 그 같은 노력은 2001-2002년에 걸쳐 호주 교회의 몇몇 지역들에서 지속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과거의 수록과 미래의 초안”, 아본대일 대학 교회의 이슈 위원회에 의해 작성된 문서, 2002년 2월 2일). 하지만 이에 대하여 대총회장은2002년 6월 13일자 Adventist Review지의 부록에서 곧 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밝혔다:

“우리들의 유산과 정체성에 대한 신의(信義)" 라는 말에 대해 좀 더 분명히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제칠일안식일교회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교리들에 근래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믿게 하려는 일부 인사들이 있다.

한 예로, 심판과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이 담긴 예언적 기별들을 들어 이야기해 보자. 혹자는 1980년 (글레시어 뷰 회의) 이후, 그 회의에서 우리 교회가 확언했던 바로 그 교리를 포기했으며 그 당시 회의에서 배제했던 입장들을 이제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본다. 그 같은 주장은 현실의 왜곡이며 사실과는 거리가 먼 주장이다.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엘렌 화잇의 글에 의해 입증되는 역사적인 성소기별은 명백히 지금도 계속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다. 이와 그 외의 다른 교리들의 근거를 이루는 영감적인 권위들, 즉 엘렌 화잇의 글들이 옹호하는 성경 말씀은, 지금도 계속 우리 교회의 모든 믿음과 행동 규범의 바탕이 되는 성서 해석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우리의 입장에 그 어떤 모종의 변화가 있었다고 어느 누구라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얀 폴슨 대총회장, “신학적 전망”, Adventist Review 부록, 2002년 6월 13일, 8페이지)

이처럼 명확한 언급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세계 지도자에게서 부터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데스몬드 포드의 성소론을 옹호하는 글이 바로 5년 전에 폴슨 대총회장에게 편지를 써 포드를 다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우리 성소 교리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포드가 당했던 소위 “부당한 처벌”에 대해 공공연하게 불평했던 바로 그 사람에 의해 Adventist Review지에 실려진 것이다!

이 페리스씨의 글은 정말이지 방약무인한 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적이고 과도하게 자유주의적인 Adventist Today 잡지가 페리스씨의 “공개서한”을 발표하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리뷰지가 그 공개서한에서 제시되고 있는 동일한 종류의 신학을 옹호하는 기사를 싣는 것은 지극히 언어도단적인 일이다). 우리가 차차 증명할 터이지만, 페리스씨의 글은 성서의 가르침은 물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본교리까지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이 재림신앙을 부인하는 기사를 출판함으로 해서, 우리 교회의 기관지가 비성서적인 신학사조는 물론 재림기별의 통일성을 지켰던 우리 교회 지도자들의 용기를 암흑적인 유산이라고 공격한 사람에게 연단을 제공하고 말았다 (케빈 페리스, “데스몬드 포드에 대하여 대총회장에게 보내는 편지”, Adventist Today, 2000년 7/8월호, 6페이지).

포드 위기를 둘러싸고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나 우리 교회의 역사적인 성소 교리를 지탱하는 성서적인 증거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증거들을 그들이 직접 접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페리스씨의 기사를 출판한 것은 좋게 보아서는 하나의 심각한 판단 착오요, 나쁘게 보아서는 공공연한 배신행위이다. 탐구하는 마음과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을 위해 이 기사는 단호히 응수되어져야 한다.

믿음과 행함

믿음과 순종에 관한 극도로 중요한 성경적인 관계에 대해서 논하면서 페리스씨는 단 하나의 성경절도 인용하지 않고 있다. 그 대신 그는 아주 의심스러운 논리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인의 행함은 구원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함을 보게 된다.

페리스씨는 장황하게 유교도들이나 불교도들이나 심지어 무신론자들 까지도 선한 생애를 살고 있음에 대해 논하였다. 그의 전제는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도 선한 삶을 살 수 있음으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행실에 의존될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그가 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천성적으로 동정심이 풍부하고 마음씨 고운 나타샤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만일 그들의 선한 마음씨가 천국에 들어가는 여권이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주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8페이지)

나는 여기서 페리스씨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한 새로운 사실을 전해주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런 사람들을 천국으로 받아들이실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페리스씨는 비그리스도인에게서 발견되는 선함은 비록 그들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해도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예수님의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도 바울이 무어라고 말했는가?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롬 2:14-16).

그리고 다른 성경 절들에 따르면, 마음에 새겨진 율법의 행위는 새 언약의 기본이다 (렘 31:31-34; 히 8:8-10).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다른 성경 절들은 또한 진정한 순종을 가능케 하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신 30:14; 시 119:11; 고후 3:2-3). 따라서 마음에 율법을 새긴 자들을 가리키며 성경의 하나님은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히 8:10)고 선언하셨다.

그밖에도 성경은 하늘에 승천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이 구주에게 “당신의 손에 있는 이런 상처는 무엇입니까?”(슥 13:6)라고 질문할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명백하게도 거기에는 예수의 지상 생애나 그들의 죄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모르는 구원받은 사람도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화잇 부인도 양과 염소에 관한 그리스도의 비유(마 25:31-46)를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록 이방인 가운데서일지라도 친절한 정신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으며 생명의 말씀을 듣기 전에라도 그들은 선교인들을 도와주었으며 저희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섬긴 자들이 있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모르고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하여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일지라도 멸망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하였으나 자연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율법이 요구하는 일들을 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시킨 증거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 (소망, 638페이지)

이처럼,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지도 못하고 시인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그리스도교의 능력에 참여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영감의 기별에 의하면 그들은 영원히 구원받을 것이다.

페리스씨는 성경에서 우리가 행함에 의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때 그 말이 무엇을 정령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통상적인 오해에 빠진 사람인 것 같다 (롬 3:20,28; 갈 2:16; 엡2:8-9). 이런 오해는 이 성경절들에서 묘사된 “행함”에 믿는 자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인 행함까지도 다 포함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명확하게 말하기를, 죄사함을 받을 수 없는 “행함의 의”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변화시키는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보다는 개심하지 않은 마음에서 생성된 자만적이고 위선적인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롬 2:17-23).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17절), 그런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하며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23절)고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도 바울이 같은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선언해 놓고 그 몇 절후에서는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여기서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첫째 말씀에서 그는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낸”(롬 2:15), 즉 새 언약에 의한 변화의 정수를 말하고 있으며, 두 번째 말씀에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삶이 그러한 주장을 거짓으로 드러내는 자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롬 3:9-18).

이 점은 바울이 그가 비판하는 피상적인 의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의 율법을 자랑하는지를 두 번씩이나 말하는 것(롬 2:17,23)을 들을 때에 선명해 진다. 이것은 분명히 성령에 의해 성화된 의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바로 바울이 다른 곳에서 성령의 열매들을 열거하면서 자만심의 반대인 온유함을 거기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갈 5:23). 위선적인 의는 자만심을 드러내고 성령에 의한 성화시키는 능력은 겸손함을 창출하는 것이다.

물론 신약만이 피상적인 순종과 진심에서 우러난 순종을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구약에서도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왕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라고 고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유다 백성에게도 마찬가지로 아래와 같이 선언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1,16,17).

행함에 의해 의롭게 되고자 함에 대한 성경말씀의 정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는 한 중요한 요소인 믿음으로 이루는 성화에 대한 경고 말씀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페리스씨가 그의 글에서 유감스럽게도 부분적으로만 인용한 성경절에서 특별히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 3:5).

그런데 페리스씨는 유감스럽게도 오로지 위의 성경절 중에서 “. . .그의 긍휼하심 때문이며” 까지만 인용을 하고 있음을 우리가 보게 된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그러나 그가 이 성경절을 전부 인용했더라면 아무도 구원을 시키지 못하는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가 사실 구원의 수단으로 이 성경절에서 설명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대조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이 명백해지는 바이다. 여기서 표현된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말은 우리의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는 성경절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씻음과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의 행한 행위로 받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이 행함이 성령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오로지 우리의 힘으로만 이룬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다음의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의 수단으로 성령의 성화시키는 역할에 대해 더 강조한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살후 2:13).

그리고 페리스씨는 또 로마서 4장 6-8절을 언급하며 “하나님은 당신께서 의를 넣어준 자들의 죄는 죄로 치지 않으시며”라고 서술하였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그렇지만 우리가 이 성경절을 바울이 인용한 구약의 성경절과 같이 읽을 때, 바울이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행함이 없이 주어지는 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해 지는 것이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6-8)

그러면 바울이 이 말을 가져온 시편의 글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번 보기로 하자: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라고 했는가? 바로 마음에 간사가 없는 자들인 것이다 (시 32:2). 확실히 마음에 간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 성경절은 죄의 고백과 그것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는 구약의 다른 성경절을 생각나게 한다 (대하 7:14; 잠 28:13; 사 55:7). 그와 같은 행함은 바로 진정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인데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딛 3: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페리스씨는 바로 이런 그의 주장의 문맥에서 “하늘에 들어가는 자격과 적합성은 그리스도의 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소망 300페이지)라는 화잇 부인의 글을 인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구절의 바로 전에 나오는 문장을 페리스씨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이 화잇 부인의 신학을 명확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여기서 밝히고자 하는 바는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칭의와 성화 모두가 자랑하고 위선으로 가득 찬 율법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임을 대조시켜 보여주고자 함이다. 이 페리스씨가 국부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인용한 화잇 부인의 전체적인 글은 아래와 같다:

“교만한 마음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힘쓴다. 그러나 하늘에 들어가는 자격과 적합성은 그리스도의 의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소망, 300페이지)

그밖에도 그녀는 또 다른 곳에서 아래와 같이 기록하였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의는 입혀 주신 의요, 성화하게 하는 의는 그리스도께서 나눠 주시는 의이다. 전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증서이며 후자는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우리의 적합성이다.” (청년, 35페이지)

위의 글들에서 화잇 부인가 “교만한 마음은 성화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힘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가납되는 근거는 칭의로 주어지는 의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을 주목하라. 이 같은 칭의만을 주장하는 복음은 성경이나 화잇 부인의 글에서 결코 제시되고 있지 않는 내용이다. 심판의 과정으로 부터 인간의 행함을 전반적으로 제외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페리스씨는 지금 선포적이고 법적인 의(칭의)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가납되는 근거라고 가르치는 비성서적인 논리에 사로잡혀 그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갈보리와 속죄

“심판의 개념은 속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라고 페리스씨가 한 말은 맞는 말이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하지만 여기서 속죄 과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할 정도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이는 바로 페리스씨 자신이다.

원문을 오용하고 증거들을 무시하며 해명키 보다는 혼동을 야기하는 문구들을 사용하면서, 페리스씨는 그의 기사에서 성서적인 속죄의 과정이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어 졌다는 설을 증명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음을 보라:

“우리가 갈보리에서 완전히 속죄가 이루어진 것을 믿는다면 거기에 속죄의 일부가 아닌 전 과정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의 교리책이 말하는 “완전한 속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하지만 우리 교회의 기본신조문은 결코 속죄과정이 갈보리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문제의 제 9번 기본신조 항목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위한 유일한 속죄의 수단을 마련하셨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이 속죄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모든 피조물들은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완전한 속죄는 하나님의 율법의 의로움과 하나님의 성품의 자비스러움을 옹호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죄를 정죄하고 우리를 위한 용서를 마련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 보상적,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의 세력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요, 속죄를 받아들인 이들이 결국 죄와 죽음을 정복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분 앞에 하늘과 땅에 있는 자들이 다 그 무릎을 꿇게 될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권을 선언하는 것이다. (요 3:16; 사 53; 벧전 2:21-22; 고전 15:3,4,20-22; 고후 5:14-15,19-21; 롬 1:4, 3:25, 4:25, 8:34; 요일 2:2, 4:10; 골 2:15; 빌 2:6-11)”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기본신조, 교회 요람, 2000년판, 11,12페이지)

이 기본신조문에 열거된 “속죄의 수단들”이 갈보리에서 있었던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고 당신의 완전한 순종의 생애와 죽음으로 부터 부활하심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주의 깊게 인지할 필요가 있다. 이 열거된 수단들 중 후자의 것들은 다름 아닌 하늘성소에서 하시는 그리스도의 봉사의 기조를 제공하는 것들이다. 더욱이 이 신조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대리적이며 보상적이고 화해적 및 변형적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제칠일 안식일예수재림교회 기본신조, 교회 요람, 2000년판, 11,12페이지). 이 사실은 이 신조문에 나와 있는 “완전한 속죄”가 갈보리에서 제공된 능력에 의한 개인 생애의 변모를 포함하고 있음을 명백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속죄는 도움을 제공하는 수단적이 측면(instrumental)의 그 어떤 것이지 연대순적인 측면(chronological)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갈보리가 제공한 구원의 방편은 더 말할 것 없이 완전하다. 하지만 속죄의 과정 그 자체는 우리가 앞으로 성경에서 보겠지만 그 보다 더 많은 것을 수반하는 것이다.

이 점은 우리가 위에 언급된 기본신조 9항목을 떠받치고 있는 참조 성경절 종목들을 검토해 볼 때 더욱 더 명확해 진다. 이들 중 두 성경절이 바로 베드로전서 2장 21-22절과 로마서 8장 3-4절인데, 그 구절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고려해 보도록 하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 2:21-22)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기본신조 제9항목에 부착 포함되어 있는 이 두 성경절들은 이 점에 대한 재림교회의 공식적 입장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죄 없는 예수님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있는 육신에 재현됨이 이 기본신조가 설명하는 속죄과정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기본신조문을 보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대리적이고 보상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화해시키고 변형시키는” 측면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기본신조, 교회 요람, 2000년판, 11,12페이지). 개인적으로 일어나는 역사인 변화됨의 과정은 당연히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지 그 십자가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페리스씨가 선호하여 그것으로 부터 히브리서 1장 3절을 인용한 NIV 성경은 이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그리스도는]. .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NIV성경의 여기서 쓰여진 “하는 일을 하시고”라는 단어는 “이루시고”와 동일한 뜻의 단어가 아니다. 페리스씨 글이 풍기는 이상한 점은 그의 글 한 부분에서 “완전한 속죄가 갈보리에서 이루어 졌다”고 그리고 “이것은 속죄의 일부가 아닌 전 과정을 포함한다”라고 그가 주장하면서도, 그 전 문절에서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묘사한 위의 성경절 (히 1:3)을 그가 인용하면서 그 성경절이 “속죄의 과정에서 매우 요긴한 한 단계를 지적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중보가 “속죄의 과정에서 매우 요긴한 한 단계”라고 한다면, 어떻게 십자가가 속죄의 “전 과정”을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의 글은 참으로 혼돈스럽기 짝이 없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재림교인들이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믿거나 가르치지 않고 있는데, 그 간단한 이유는 그러한 개념이 구약과 신약에서 발견되는 속죄 교리와 극도로 충돌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속죄의 과정이 심도 있게 묘사되고 있는 곳은 레위기 전반부인데, 거기엔 여러 개인들을 위한 다수의 속죄제물과 속건제들이 설명되어 있음을 읽게된다. 그리고 이 레위기의 장들에서 보듯이, 이 희생 제물의 피가 주님 존전에서 뿌려지기 전까지는 속죄가 완결되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레 4:16-20, 25, 26, 30, 31, 34, 35; 5:9, 10; 7:1-7). 또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죄의 자복과 버림이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게되는 조건들로 열거되어 있는 바이다. (대하 7:14; 잠 28:13; 사 55:7; 요일 1:9)

그리고 흠정역(KJV) 성경의 로마서 5장 11절은 “이제 속죄를 얻게 된” 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난외주와 현대번역들은 이 속죄라는 말 대신에 화목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이 화목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쓰인 속죄라는 단어와 가장 가까운 동의어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지어 하나님에게로 부터 멀어졌기에(사 59:2) 그는 하나님과 화목될 필요가 있는 지경에 처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바로 이 화목을 이룰 수 있는 방도인 것이다.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수단으로서의 십자가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절들 하나하나를 자세히 읽어보면, 역시 그 주제가 도움을 주는 수단적이 측면에 관한 것이지 연대순적인 측면에 대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구절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0)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18-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골 1:20-23)

이 성경 구절들의 한 곳에서 바울이 “곧 우리가. .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롬 5:10)이라고 말하고, 또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고후 5:18)라며 말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는 바울이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며 그의 편지서를 읽는 이들을 초청하고 있다. 처음 두 문구들은 거듭난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세 번째 문구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고린도후서 5장 12절에서 바울은 “우리” 라고 말할 때 하나님의 중생시키시는 능력을 체험한 자신과 자신의 동료 전도자들을 지칭하고, ”너희” 라고 했을 때 중생의 체험하지 않은 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한 그의 독자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로마서에 있는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즉”(롬 5:10)이라는 성경절은 우리가 좀 전에 읽은 골로새서 1장에 있는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골 1:21) 라는 성경절과 나란히 읽혀져야 한다. 이 구절들은 분명히 악한 행실을 버리고 갈보리의 화목시키시는 능력에 자신들을 맡기는 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이것은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결되었을 경우 그러했을 전 세상을 지칭하고 있지 않으며, 그 대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죄를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만 포함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화목의 초점이 되고 있는 전 세상에 대해 말하고 있는 고린도후서 5장 19절이 “화목하게 하는”이라는 현재 진행형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지해야만 한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이 “화목되었다”라는 과거형을 결코 사용치 않았던 것이다. 이 구절이 또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서술하고 있음을 본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다른 성경절들에서 바울이 주님께서 죄를 저희들에게 돌리지 않는 이들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이를 위해 “마음에 간사가 없고”(시 32:2)라는 조건을 부여하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이 전 세상을 지칭한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죄의 사면을 받을 조건을 만족시킨 이들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외 다른 신약성경 구절들도 하늘에서의 대제사장 직분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봉사 사업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히 2:17)임을 명확히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때문에 사도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우리를 확신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여기서 “우리에게 갈보리에서 돌아가신 구세주가 있으니”라고 말하지 않았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속죄와 용서받음의 과정은 신약시대에도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동일하다. 죄의 자백과 버림이 그 명백한 조건인 것이다 (마 6:13-14; 롬 2:13; 요일 1:9). 이 과정의 묘사에 대해 존재하는 신구약간의 차이는, 구약에서는 지상성소를 통한 많은 희생제물과 제사장들이 있었지만, 신약에서는 오직 하늘성소를 통한 한 희생제물과 한 제사장만이 존재한다는 사실 뿐이다.

하지만 속죄의 과정은 믿는 자들의 삶에서 죄가 제거됨으로 해서도 그 종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 다른 마지막 과정이 남아 있다. 모형적인 성소제도에서는 이 마지막 속죄과정이 사단을 상징하는 아사셀 염소의 머리에 죄를 얹어서 그 염소를 광야로 끌고나가 유배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 대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레 16:9-10)

여기서 우리가 주지할 사항은 아사셀 염소와 주님의 양 모두가 속죄를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사단을 우리의 죄짐을 지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다름이 아니고 악과 그 악의 창시자인 사단이 하나님의 우주에서 완전히 제거되기 까지는 하나님과 그 피조물들 사이의 화목을 이루는 속죄의 과정이 마쳐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실체적인 아사셀 염소인 사단은 물론 천년기가 이르기 전에는 광야로 끌려감을 당하지 않을 것인데, 그 천년기 동안 그와 그를 추종하던 타락한 천사들이 황무지가 된 이 지구에 갇혀있게 된다 (대쟁투, 658페이지). 그리고 그 천년기가 끝나면 사단과 그의 추종자들이 마지막으로 멸망을 당할 것이고, 그 때가 되어서야만 이 화목을 이루는 속죄의 전 과정이 진정으로 마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서적인 속죄의 과정이 다음 네 가지 국면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죄의 자백과 버림
희생 제물의 살해
희생 제물의 피의 중보
아사셀 염소의 유배와 죽음

아주 분명한 것은, 실체적인 성소제도를 염두에 두고 볼 때 이 중 오직 한 국면, 즉 희생양의 살해만이 갈보리에서 완결된 것이었다. 더 이상의 희생제물이 바쳐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재림교인들은 이 사실을 항상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으로 당연히 거부했던 것은 십자가상에서 당한 예수님의 희생만을 포함하는 단축된 속죄과정의 개념인 것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이 이러한 개념을 분명히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속죄를 이렇게 단축시키는 것을 거절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스씨는 다시 NIV 성경본을 사용하여 이 속죄가 십자가에서 종결되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히브리서 9장 25-26절을 인용하고 있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5-26)

하지만 이 성경절에 있는 이슈는 속죄과정의 완성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오직 한번으로 희생제물을 바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에서 행해지고 있는 대제사장 직분으로서의 예수님의 봉사가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께 화목시키고 있는지(히 2:17), 그리고 대언자로서의 예수님의 봉사가 죄의 용서와 도말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요일 1:9; 2:1) 성경에서 보았다. 따라서 위에 인용된 성경절이 예수님께서 갈보리에서 돌아가셨을 때 모든 죄를 다 도말했음을 의미한다는 페리스씨의 주장을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성경절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당신의 희생으로 인해 죄를 제거하기 위해 한번 나타나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 명확한 주제를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죄를 제거하는 수단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 점은 히브리서 9장 전반부에서 바울이 죄를 정결케하는 예수님의 피의 중보에 대해 말할 때 더 확실히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된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히 9:12-14)

여기서 주지할 것은 예수님에 의한 이 정결케 함이 십자가에서 모두를 위해 이미 행해졌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구절의 문맥적인 상황은 분명히 이 정결해짐이 믿는 자들을 위해 자신의 피로 중보하시며 하늘 성소에서 행해지는 예수님의 봉사를 통해 일어남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페리스씨는 화잇 부인이 속죄가 십자가상에서 끝마쳐졌다고 하는 자신의 믿는 바를 지지하고 있다면서 다음의 글을 인용하고 있음을 본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충분하고도 완전한 것이었다. 속죄의 조건은 다 성취되었다. 그분이 이루고자 이 세상에 오신 사업은 완성되었다.” (행적, 29페이지)

하지만 이 글에서 그녀가 십자가에서 완료되었다고 한 것이 속죄의 조건인 희생 제물이지 속죄 그 자체가 아님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페리스씨가 그의 글에서 “1844년에 무슨 일이 일어 났는가?”라고 수사적인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해 “확실히 그것은 희생 제물에 의한 속죄는 아니었다”라며 스스로 답했을 때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그는 문제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재림교인도 예수님의 희생이 십자가에서 완료되지 않았다고 주장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대속죄일은 분명히 십자가에서 끝마쳐진 것이 아니었다. 속죄는 우리가 성경에서 명확하게 보았듯이 한 국면 이상을 요구하고 있는 바이다.

물론 십자가에서 완성된 속죄에 대해 언급한 화잇 부인의 몇 문구들이 존재함은 사실이다 (SDA 성경주석, 7권 663-664페이지, 이 문장 아래에 있는 저자주를 더 참조 바람). 하지만 이러한 개개의 문구들에서 쓰여진 속죄라는 단어는 그 문맥 정황이 분명히 보여주듯 속죄 희생제물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영감의 글을 이해하는데 대한 화잇 부인의 권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는데, 그녀는 “같은 말로써 뜻이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표현을 할 수 있다. 각기 뚜렷한 사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한마디 말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기별 1권, 20페이지)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오직 영감적인 권면의 전체적이고 서로 일치 부합되는 이해만이 우리의 그 어떤 교리나 행동 규범적 이슈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저자주] 화잇 부인이 가끔 십자가에서 완료된 속죄에 대해 언급하였지만, 그녀가 여기서 십자가에서 속죄의 전 과정이 다 끝났다는 개념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다음에서 예로든 인용문들이 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약 1800년 동안 성소의 첫째 칸에서 이 봉사사업이 계속되었다. 회개한 죄인들은 그들을 위하여 애소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를 얻고 아버지께 가납되었으나 그들의 죄는 여전히 기록책에 남아 있었다. 모형적 봉사에서 일 년의 마지막에 속죄 사업이 있었던 것처럼 인류의 구속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업이 마치기 전에 성소에서 죄를 도말하기 위한 속죄 사업이 있게 된다. 그것은 2300주야가 끝났을 때 시작된 사업이다.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바와 같이 그때에 우리의 대제사장께서는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가장 엄숙한 부분인 최후의 봉사, 곧 성소를 정결케 하는 일을 수행하고 계신다.” (대쟁투, 421페이지). “지금 그리스도는 아버지 존전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를 하시고 계신다” (원고 21, 1895). “예수께서는 하늘에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다. 그런데 그분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그분은 자기를 믿는 그분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속죄하고 계신다” (목사, 37페이지). “우리는 큰 대속죄일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현재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업은 우리의 끊임없는 연구가 되어야 한다.” (증언 5권, 520페이지). “모든 사람은 하늘 성소에서 진행되고 있는 속죄의 사업에 관하여 더욱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증언 5권, 575페이지). “지금은 대속죄일의 기간이어서 우리의 대언자께서 아버지 존전에 서서 우리를 위해 중보자로서 탄원하고 계신다” (SDA 성경주석, 7권 933페이지)

속죄가 있기 위해서는 대속물과 모본은 물론 죽임을 당하는 희생 제물로서의 완전한 순종의 삶이 선제되어야 했다. 이 조건이 바로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갈보리에 속죄의 일부가 아닌 (속죄의) 전 과정이 포함된 것” 이라는 페리스씨의 주장과는 달리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성경 말씀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속죄의 과정이 그 이상의 것을 포함함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바이다.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부인하는 페리스씨의 주장은 재림교회의 한 중요한 교리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배신행위인 것이다.

하늘 성소에 계신 그리스도

페리스씨는 그의 글의 한 부분에서 자신이 교회로 복귀되기를 바라고 있는 데스몬드 포드의 가르침을 반향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정말로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과 동시에 지성소로 들어가신 것으로 믿는가? 물론이다. 목회자들을 위한 본 교단의 기관지인 미니스트리지 1980년 10월호를 인용한다: ‘그리스도는 승천과 동시에 하나님의 존전에 들어 가셨다는 점에 우리는 기본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이는 속죄일에 지상의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간 사실이 그 상징적 근거가 된다. (p. 21)’”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이 페리스씨는 우리 재림교회가 공식적인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운영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교회의 어떠한 잡지에 발표되는 글이라도 그것이 세계 대표자들이 모인 대총회 회의석상에서 가결되지 않는 한, 그것은 제 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를 대변하는 공식적인 의견이 되지 못한다. 이 대총회 대회의만이 이 교회가 믿는 교리를 결정할 자격이 부여된 기구인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주님이 승천하신 후 1800년간에 걸쳐 하늘 성소(Holy Place)에서 봉사하시는 동안 하나님의 존전에 계셨다는 점이다. 이 지상의 성소 제도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지성소(Most Holy Place)에만 국한되었던 유일한 이유는 죄스러운 인간의 문제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하늘이나 하늘 성소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왜 인식하지 못하는가! 비록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태어나시면서 편재(遍在)하는 신성을 포기하셨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소망, 669페이지; 원고 14, 23페이지). 따라서 그 어떤 아무것도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당신의 성소 봉사(Holy Place Ministry)를 시작하신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으로 부터 배제되지 않았던 바이다. “역사적인 재림교리에 의하면, 하늘 아버지와 아들이 1800년간 휘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라고 말하며 우리 성소 교리를 비판하는 여러 비난자들의 우스꽝스러운 주장은 그래서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낭설인 것이다 (잭 세퀴에라, “이슈: 하늘 성소”, 왈라 왈라 대학에서 한 설교, 1990년 10월 13일, quoted by Kevin D. Paulson,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Eatonville, WA: Hope International, 1995, p. 95).

조사 심판: 계시적인가, 결정적인가 혹은 둘 다인가?

페리스씨는 영감의 글이나 공식적인 교회 문서이든 간을 막론하고 평이하게 기록된 문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재림교회의 기본교리 23항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봉사)를 읽은 후, 거기서 묘사된 심판이 “결정적 이라기보다는 계시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완전히 인위적인 구별을 추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그러고 나서 그는 그 기본교리 항목에서 다음을 인용하고 있다:

“[이 심판은] 죽은 자들 중에서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가를 하늘의 주민들에게 계시해 준다. 그것은 또한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 누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고 있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도록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분명히 알려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기본교리, 재림교회 요람 2000년 개정본 17페이지)

위에 인용된 문구의 내용을 고려해 볼 때, 페리스씨가 사용한 “계시적”이라는 말과 “결정적”이라는 말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위의 문구의 내용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사람들의 삶속에 나타난(계시된) 것들이 그들이 하늘나라에 갈지 아닐지를 결정해 줌이 분명하다. 이들 가운데 누가 그 판결을 통과할 것인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주만 홀로 아시기 때문에(왕상 8:39) 심판대 앞에 모여 있는 우주의 타락하지 않은 거민들(단 7:10)은 이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만 주님의 이름을 지닌 자들의 진실된 상태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문구는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할지 아니할지를 결정하는 요소들 중 하나라고 아주 명백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리스씨는 위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 심판의 과정에 있는 인간의 행실이 차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부인하려는 그의 노력에 비추어 볼 때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8페이지), 그가 지금 이 “그리스도 안에” 라는 용어를 일반적인 신신학 추종자들이 정의하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신신학 추종자들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에 부여하는 통상적인 정의는 그 어떤 가정적인 “불가피한” 죄가 믿는 자에게 존속하더라도 그를 마치 우산처럼 덮어주어 죄 없다 선포하는 그러한 칭의만을 뜻하기 때문이다 (케빈 해이덴, “남은 무리의 생활양식”, 리뷰와 헤랄드 출판, 2001, 24페이지). 하지만 성경 말씀은 그와 대조적으로 그 “그리스도 안에” 라는 용어가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요일 3:24)

다시 말해, 성경 말씀이 정의하는 “그리스도 안에” 라는 뜻은 가끔씩 범하는 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우산처럼 덮어주는 법적인 의미에서의 칭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의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새로운 피조물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페리스씨가 그의 글에서 (불행하게도 개역판 NIV성경의 번역을 사용하며) 인용한 로마서 8장 1절의 흠정역(KJV) 번역은 이 점에 대하여 전체적인 성경 말씀이 주고 있는 가르침과 최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함이니라” (롬 8:1, KJV)

[역자주] 지금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개역판 성경에는 이 성경절의 후반부인 “그는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함이니라”라는 절구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그 개역판 성경에서도 그 후에 나오는 로마서 8장 2-4절을 포함한 주위 문맥을 보면 이 생략된 구절이 있어야 됨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신신학 추종자들이 그들의 내부적 변화와는 상관없는 선포된 법적인 의미만의 칭의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 이 로마서 8장 1절을 인용할 때마다 흠정역 번역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 기이한 것은 개역판에서 생략되거나 변조된 거의 모든 성경절들이 바로 이러한 신신학 개념들을 지지하는데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예로 계시록 22장 14절을 흠정역과 개역판 성경에서 비교해 보시기 바람.

그리고 심판 때에 우리의 위치를 정하는 개인적 행실의 결정적인 역할은 성서 전반을 통해 아주 명확하게 들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리스씨는 그러한 성경절들을 그의 기사에서 언급조차 않고 있는 것이다. 다음의 성경절들이 그러한 예가 되겠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 12: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마 12:36,37)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이러한 성경절들을 읽고, 또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를 읽으면서도 어떻게 마지막 대심판 때에 우리의 무죄가 입증되는데 있어서 행실이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양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이 말의 대상이 된 무리들이 어찌하여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되었는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5,36절)

여기서 보듯이, 예수님은 이들이 취한 행실들을 열거하시어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늘나라를 상속하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영생을 받는 조건으로서의 순종에 대하여 다른 곳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 19:16,17; 눅 10:25-28).

이처럼 우리가 위에 인용된 여러 성경절들을 접히게 될 때, 마지막 심판에 관하여 페리스씨가 시도하는 “계시적” 과 “결정적” 측면들 사이의 인위적 구분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삶에 있는 내용들이 심판 때에 들어날 것이요, 종국적으로 이것에 의해 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잇 부인이 다음의 말씀을 하였을 때, 그녀는 성서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고 있는 바이다:

“심판의 날에 인간적인 연약성과 불완전함을 가진 자들의 노선은 옹호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를 위한 자리는 하늘에 없을 것이다. 그는 빛 가운데 성도들의 완전함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가 죄 짓는 것으로부터 보호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 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그러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다.” (기별 3권, 360페이지)

페리스씨는 또한 자신의 견해에 따라 하나님 심판에 의한 삶의 면밀한 심사보다는 갈보리 때문에 하늘나라로 승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 후 믿음으로 영적 현실을 고대할 때 그의 율법은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고 그분의 의로운 감화는 우리와 우리의 일상생활을 변화시키기 시작한다 (히 10:16)” (페리스씨의 기사 “심판에 관하여 우리가 정말 믿는 것”, 미주 교회지남 2005년 9월호 39페이지)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믿음은 그저 바라는 그 무엇이 현실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그것의 현실을 위해 분발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고후 7:1; 히 12:4 참조). 그리고 위에 인용된 화잇 부인의 글도 분명히 예수님의 일변시키시는 의는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심판을 통과토록 하기 위해 우리 삶의 한 첫걸음만이 아닌 그 이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인간적인 연약성과 불완전함은 정복되어야 한다. 우리를 죄 짓는 것으로 부터 지켜 주기위해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노력과 합하여 져야만 되는 것이다.

페리스씨는 또 다시 그의 기사에서 화잇 부인의 다음 글을 인용하였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해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속주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기별 2권, 32-33페이지).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영감의 말씀이 영감의 말씀을 설명토록 허용해야 한다. 화잇 부인이 예수님의 이 대속적인 역할에 대해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다음에 인용된 화잇 부인의 글들은 이 예수님의 대속적인 삶이 믿는 자들의 과거에 지은 죄들에게만 적용됨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이 과거에 지은 죄들의 형벌을 감당하셨다. 그리고 인간에게 당신의 의를 나누어 주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지킬수 있도록 해 주셨다.” (SDA 성경 주석, 6권 1092페이지)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서 지상에 오셔서 거룩한 생애를 사시고 완전한 품성을 계발시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받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값없이 선물로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사람들의 생명을 대신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관용하심을 통하여 과거의 죄를 용서받는다.” (소망, 762페이지)

“그대가 자신을 그에게 바치고 그를 그대의 구주로 받아들이면 그대의 생애가 아무리 악하였을지라도 그의 공로로 인하여 그대는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대의 품성을 대신하게 되고 그대는 죄를 도무지 범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의 앞에 받아들이는바 된다.” (정로, 62페이지)

또 산자들의 심판 때를 통과할 하나님 백성을 상징하는 여호수아와 사자의 이야기를(스가랴 3장) 논하면서 화잇 부인은 그 이야기에 나오는 여호수아에게서 벗겨진 더러운 옷이 현재나 앞으로 범할 죄가 아닌 과거의 죄들을 대표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사단은] 말한다. ‘이 사람들이 하늘에서 나의 위치와 나와 연합했던 천사들의 위치를 차지할 자들인가?. . .그들의 생애를 특징지워 온 죄들을 바라보라. 그들의 어리석음, 그들의 악의, 피차간의 증오를 쳐다보라.’ 하나님의 백성은 많은 점에서 매우 결함이 많았다. 사단은,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한 죄들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증언 5권, 473-474페이지)

“이제 그는[사단은] 그들의 생애의 기록을 지적하고, 그들의 품성의 결함과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한 점, 곧 그들이 구속주의 영광을 더럽힌 것과, 바로 그 자신이 그들로 범죄케 한점들을 지적한다.” (대쟁투, 484페이지)

이렇게 밝힌 후, 화잇 부인은 여호수아와 그의 백성들의 승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졌다. 곧 그리스도의 의가 그들에게 입혀졌다.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여진 관은 제사장이 쓴 그런 것이었고, 비록 그의 이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성소에서 그분 앞에 봉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뜻으로 ‘여호와께 성결’(출 39:30)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그런 관이었다.” (증언 5권, 469페이지)

이 모든 문구들이 믿는 자들의 죄에 대해 언급하면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화잇 부인은 여기서 사단의 고소가 믿는 자들의 과거에 관해서는 틀림없는 사실이었지만 이제 더 이상 정당한 고소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 그녀는 이렇게 언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들 스스로를 악의 지배에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죄를 버리고, 겸손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았다. 그리고 거룩한 중보자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탄원하신다.” (증언 5권, 474페이지)

한마디로 말해, 성경이나 예언의 신 말씀 가운데서, 대속하는 예수님의 의가 현재나 미래의 죄까지도 덮어주는 것처럼 묘사된 곳이 결코 없다. 다음의 글들이 그렇게 지속적인 덮음이 불가능함을 분명히 해준다:

“모든 불결한 생각과 음란한 열정은 영혼을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시킨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죄인의 결함을 숨길 목적으로 당신의 의의 옷을 그 죄인에게 입힐 수 없기 때문이다”. (Our High Calling, 214페이지)

“모든 범법은 영혼으로 정죄를 당하게 하며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받게 한다.” (증언 4권, 623페이지)

“사람이 범죄할 때 그는 율법의 정죄함 하에 처하게 되며, 그 율법은 그에게 있어 하나의 속박하는 멍에가 되고 만다. 이런 사람은 그가 공언하는 바에 상관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 것이다.” (My Life Today, 250페이지)

정말이지 그렇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에 대해서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대속주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실 것인가를 염려하여야 한다” (기별 2권, 32-33페이지). 하지만 이 말을 한 화잇 부인 자신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우리가 지은 과거의 죄들만을 덮어주기 위한 것이다. 위에서 우리가 인용한 문구들이 우리가 무시할 수 없는 그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믿는 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은 그들이 마지막 조사심판의 심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성화의 의로움에 의해 변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결 론

이 페리스씨의 글은 정말이지, 우리 교회 근대사에 있어서 아마 가장 파괴적이고 입심 좋은 한 중상자를 교회로 복직시키고자 공공연히 노력했던 이에 의해 쓰여진, 재림 신앙의 정수를 터무니없이 부인하는 기사이다. 그의 기사는, 십자가상에서 속죄가 끝마쳐졌다는 이설과 실제적이고 성화된 순종이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 심판 사조를 옹호하려는 노력으로, 영감적인 예언의 신 말씀뿐만 아니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기본교리들까지도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 돌아가심으로 해서 인간 역사의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온전한 희생 제물이 되신 것은 사실이나, 속죄의 과정은 단순한 희생 제물의 바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그 과정은 희생 보혈의 중보는 물론 성령이 주신 능력으로 인간들의 삶에서 죄를 추방하는 것과 궁극적으로는 죄와 그 죄의 창시자인 사단 및 죄인들을 지옥불에서 도말시키는 과정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갈보리에서 마쳐진 속죄를 주창하는 논조는 필연적으로 구원을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며 실제적인 경건함과는 무관한 그 어떤 개념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한 심판은 죄가 다시 일어나지 않음(나훔 1:9)을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하며, 그러한 심판 교리는 하나님 말씀이 담긴 성경의 페이지에서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실 그 아무도 심판이 근본적으로 갈보리에 관한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만을 통해서만 믿는 자들의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한 용서가 가능하다 (엡1:7). 오직 그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통해서만 우리의 삶이 죄로 부터 정결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히 13:20-21). 그리고 또 오직 이 피를 통해서만 성도들이 악과의 실제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으며 (계12:11), 그로 인해 이기는 자들에 속함을 입고 어린양의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소멸되지 않게 될 것이다 (계 3:5). 그러나 이와 동시에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 모두는 이 예수님의 피와 그 피가 부여하는 능력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 어떤 속죄도 불가능 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이다 (골 1:20-23; 요일 1:9).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 조사심판이라는 성서적인 심판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굳게 서야만 한다. 이 심판이 현재 하늘의 성소에서 진행 중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귀향길 여정을 알리는 전조인 것이다. 이 얼마나 소중한 날이 될 것인가!


케빈 폴슨(KEVIN PAULSON) 목사는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로마린다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학위,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뉴욕합회에서 성경교사, 전도목사, 목사로 목회에 역임한 바 있다. 지금은 재림교회의 종교자유 전문지 리버티(Liberty) 등에 기고하는 작가로 활동하며 미시간의 베리언 스프링즈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