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본질에 관한 영감의 가르침
1997년 4월 21일 자 U.S. News & World Report 잡지는 한 갓난아기의 사진으로 그 표지를 장식하며 「악하게 태어남?」이라는 특집 기사를 다룬 적이 있다. 극심한 범죄와 다른 파괴적인 행습들의 만연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가 허물어짐을 겪게 되면서, 본성(nature)과 양육(nurture), 다시 말해 <운명>과 <선택> 가운데서 어느 쪽이 인간의 품행을 결정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지에 관해 사려깊은 시민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사였다.
이와 유사하게 재림 교회 내에서도 혹자들이 원죄론이라고도 부르는 본의 아닌 죄(involuntary sin)의 교리가 계속해서 논쟁을 일으키고 있다. 이 이슈가 예수님의 인성과 이생에서의 죄 없는 순종의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직결되어 있기에, 그리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피조물들의 선택권에 대한 하나님의 존중함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 논제에 관해 또 한 번 더 명백히 밝히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용어들의 정의(定義)
이 “원죄” (original sin) 라는 용어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막대한 거부감을 수반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의 기본적인 공정감이 그 어떤 상태와 행위들을 스스로 택하지 않은 이들에게 그것에 대한 죄책을 부과하는 개념을 혐오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믿고있는 일부 재림교인 중 대부분은 이러한 그들의 견해를 표현할 때 비위에 덜 거슬리는 완곡한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완곡한 용어들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장에 내재하는 문제점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적 칼뱅주의 교리 (Augustinian, Calvinistic doctrine) 그 자체, 즉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후손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본의 아닌 범죄자 (involuntary transgressors)로 출생한다는 신조를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아무도 태어나면서 죄책(guilt)을 물려받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 그들이 죄라고 믿고있는 죄스러운 본성(sinful nature)을 전해 받았으므로 그 어떤 하나의 죄도 선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용서 하심이 필수 불가결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다른 이들은 인간이 자동적인 죄인으로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연약해진 의지력에 가해지는 육적 본성의 세력은 우리로 하여금 책임 적령기에 이르기 전에 반사적으로 죄를 범하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금방 태어난 아기들도 죄인이라는 근거로 그들에게도 사망이 있기 때문이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드는데, 이 아기들이 죄인이 아니라면 죽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다. (짐승들도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짐승들에게도 죄가 부과된다는 말인가?)
“이름이 달라도 장미”라는 옛 속담이 우리 앞에 있는 논제에 아주 잘 적용되는 말이라고 여겨지는데, 원죄설에 아무리 다른 이름표를 달아도 여전히 원죄설로 남아있을 뿐이다. 죄를 인간의 선택권 너머에 위치시키는 가르침은, 원죄설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 교리의 다른 어떤 면모들은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원죄설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를 근본적으로 인정하는 입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과 증언 말씀의 권위성
이 주제에 대해 논의를 시작하기 전, 성경 진리와 예언의 신에 포함된 그 진리의 영감적 확충이 차지하는 탁월하고 독자적인 권위성을 우리가 인정하고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명확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라고 밝히며, 더불어 “영적인 일들은 영적으로 비교” (고전 2:13) 함으로 성령께서 진리를 계시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언의 신 말씀을 주셨는데, 그 목적은 “성경의 진리가 지적하는 잘못을 범한 자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초기, p. 78) 그리고 “그럴듯해 보이는 오류를 교정하고 진리가 무엇인지를 상술하기 위하여” (3기별, p. 32) 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영감의 말씀을 해석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바로 다음의 증언 말씀이 잘 규정해 주고 있다:
“마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듯이 증언들 자체가 이미 주어진 기별들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1 기별, p. 42)
만약 이 원칙을 수긍치 않는다면, 이러한 신앙 논제에 관한 토론은 아무런 유익함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지 못한다. 인간의 추정들, 학자의 의견들 또는 변덕스러운 인간의 경험들이 우리의 교리적인 결론에 영향을 끼치도록 허용되어 진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그리스도가 기도하셨던 그 하나가 됨에 도저히 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리스도께서 “그들도 모두가 하나 되게 함이오니” (요한 17:21) 라고 기도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한 17:17) 라고 아버지께 간구하였음을 잊어버리곤 하는데, 하나님의 진리 말씀을 통한 거룩해짐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연합을 위한 하나님의 전제 조건임을 우리가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현시대의 재림교회가 논쟁으로 분열됨을 겪고 있는 이유는 영감의 말씀들이 너무 어려워 잘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러한 영감의 말씀들에 자신들의 인간적 개념과 의견을 가미하여 혼합시키려고 시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그 자체를 설명하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를 인정한다면, 이제 우리는 이 죄의 본질에 관한 이슈를 계속하여 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죄 중에 태어남 (Born in Sin)과 죄인으로 태어남 (Born a Sinner)
자유의지적 죄의 성격은 성경의 전체적인 기록을 통해 뚜렷이 나타나 있다:
“범죄하는 혼은 죽으리라. 아들이 아비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며 아비도 아들의 죄악을 지지 아니할 것이니, 의인의 의는 그에게 있고 악인의 악도 그에게 있으리라.” (에스겔 18:20)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느니라.” (야고보 4:17)
그리고 야고보서의 다른 기록은 또한 선택이 부재된 육적 본성의 충동들 그 자체는 죄가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 1:14-15)
부연 설명하자면 욕심이 잉태하게 될 때에만 죄가 성립됨을 밝히고 있는데, 이 잉태한다는 말은 선택과 직결되는 말이다. 욕심에 끌리거나 유혹을 받는 그 상태는 단지 시험을 당하는 상태이지 죄가 아니라고 야고보서의 이 구절은 기술하고 있다. 엘렌 화잇도 이 가르침에 동의하고 있음을 다음의 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특별히 위에 인용된 에스겔서 18:20절의 구절은 지금의 논제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원죄설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그들의 조상인 아담의 죄책을 떠맡게 된다고 하는데, 위에 인용된 성경절들은 분명히 모든 남녀는 그들 자신의 죄만을 담당하게 되며 의지의 선택을 통하여 그들 자신의 죄책을 취득함을 가르치고 있는 바이다.
성경 말씀과 엘렌 화잇의 글은 결코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기술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이 주입되며 자주 읽히는 두 가지 문절들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 (시편 51:5) 라는 성경절과 “셋이 죄 중에 태어났다” (Spiritual Gifts, vol. 3, p. 53)는 엘렌 화잇의 언급이다. 그러나 그 어떤 특정한 환경 안으로 태어나지만, 그 환경의 일부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느 한 나라에서 태어나더라도 자동으로 그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셋과 다윗이 이 죄스러운 세상 중에 태어났지만, 영감의 말씀은 결코 그들을 포함한 누구도 정죄된 죄인으로 태어났다고 언명하고 있지 않은 바이다.
이 시편 51:5절에 대해 주석을 달면서 원죄설을 신봉하는 어느 한 재림교인 학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자유의지와 그 선택을 존중하셨기에 인류에게서 물러가셨다. . .그리하여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이 세상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without God) 출생하게 되었다. .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태어나게 된다.” (에드워드 헤펀스탈, The Man Who Is God: A Study of the Person and Nature of Jesus, Son of God and Son of Man, 1977, p. 107)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편의 기자가 언급한 다음의 구절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그러나 주는 나를 태에서 꺼내신 분이시며, 내가 내 어머니의 가슴 위에 있을 때 내게 희망을 주셨나이다. 나는 태에서부터 주께 맡겨졌으니, 주는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시편 22:9-10)
“주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나의 의지시니이다.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붙드셨으며, 내 어머니의 배에서 나를 꺼내신 분도 주시니, 내가 계속해서 주를 찬양하리이다.” (시편 71:5-6)
“주께서 나의 내장을 소유하셨고 주께서 내 어머니의 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시편 139:13)
엘렌 화잇도 어린 자녀들에게 미치는 독실한 어머니들의 영향에 관하여 언급하면서 이 시편의 성경절들과 비슷한 관찰을 주고 있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영아일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산다면 우리도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꼴지워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소망, p. 512)
따라서 위에 인용한 원죄설을 신봉하는 학자가 한 것처럼, 아담 이후의 우리는 모두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without God) 태어난다고 논함은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위의 성경과 증언 말씀들에 공공연히 대적하는 주장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우리가 전체적인 영감의 증거들에 비추어 볼 때, 시편 51:5절이 아담의 죄 때문에 그의 모든 후예는 불가피하게 죄인으로 태어남을 가르치는 구절로 이해될 수 없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말하는 바는 단순히 그의 어머니가 자신을 배었을 때 죄인이었으며 자기 또한 죄인이라는 고백일 뿐이다. 이 구절을 포함한 성경 말씀의 그 어떠한 구절도 결코 죄인 됨의 과정을 자유의지의 범주로부터 제거하고 있지 않음을 우리는 명시해야 한다.
엘렌 화잇의 글이 담긴 CD-ROM을 누가 검색하여, “죄인으로 태어남 (born sinners),” “범죄자로 태어남 (born transgressors),” “태어나면서부터 죄인 (sinners at or from birth),” “태어나면서부터 범죄자 (transgressors at or from birth)” 혹은 그 외 여러 가지 유사한 문구들을 찾으려 한다면 분명히 실망하게 될 것이다. 본의 아닌 죄 (involuntary sin) 는 영감의 글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기에 그러하다.
로마서 5장의 기별
원죄설을 성경으로 입증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는 성경절은 아마 로마서 5:12-19절일 것이다. 따라서 이 성경절을 전체적으로 모두 인용한 후 분석해 보기로 하겠다:
[12]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13]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으니, 아담은 오실 분의 모형이라. [15]그 범죄와는 다르지만, 그 값없는 선물도 그러하도다. 만일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더욱더 하나님의 은혜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풍성하였느니라. [16]또 그것이 범죄한 한 사람에 의하여 비롯된 것과 같지 않은 것처럼 그 선물도 그러하도다. 이는 한 사람으로 인한 심판은 정죄에 이르지만 많은 범죄로 인한 값없는 선물은 의롭다 하심에 이르기 때문이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군림하였다면, 더욱더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 안에서 군림할 것이니라. [18]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정죄에 이른 것같이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값없는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여 생명의 의롭다 하심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롬 5:12-19)
로마서의 이 부분이 밝힌 여러 가지 중에서 특히 세 가지 주안점들이 우리 눈에 띈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생명과 사망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적인 삶과 죽음이 아닌 영생과 영멸을 지칭하고 있다. 이 점은 17절에서 명백해지는데, 그 절은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 사람들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 안에서 군림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명백히 이 구절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장래에 누리게 될 영원한 치세의 도래(계 5:10)를 가리키고 있다. 바울은 또한 로마서의 다른 장에서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과 죽음을 논하며 일시적이 아닌 영원의 현실을 언급하고 있는데 (롬 8:13), 여기서 그는 “네가 생명으로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계명들을 지키라”(마태 19:17, 누가 10:28)고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이 명하셨던 그 의미와 동일하게 생명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는 로마서 5:12절의 초점은 (물론 육신의 사망도 그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육신의 사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어린 아기들이 육신적인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그들도 죄인임에 틀림없다는 주장은 이러한 육신적인 죽음이 짐승들에게도 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 논리성이 여지없이 타파될 뿐이다.
18절에서 발견되는 “심판이 임하여”와 “값없는 선물이 임하여”라는 문구는 희랍어 성경 사본에는 없으며 역자들에 의해 보충된 문구들이다. 그래서 영어 흠정역 성경은 이 문구들을 이탤릭체로 명기하고 있다. 이 점은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그 이유는 아담의 정죄 됨과 그리스도의 죄 사함이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선택여부와 상관 없이 적용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자주 이 두 구절이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보충된 문구를 고려치 않고 18절을 읽게 되면, 이 구절은 죄와 구원의 방침에 있어서 선택의 결정적인 역할을 보여주는 위 로마서의 다른 구절들과 더 쉽게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사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역할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인간이 정죄된 죄인이나 사함을 입은 의인으로 되는데 있어 자유의지의 선택이 그 결정적인 요소임을 명백히 밝히는 세 구절이 위에 인용된 로마서 중에 있다. 정죄를 논하면서, 로마서 5장의 12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고 선포하는데, 한가지 주지할 점은 (영원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된 이유로 아담이 죄를 지었기 (Adam sinned)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all have sinned) 때문이라고 이 구절이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죄사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바울은 여기서 갈보리의 십자가 사건에 의해 모든 남녀가 그들의 의도에 상관없이 다 사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17절에서 말하기를, 죄사함을 받는 이들은 “은혜의 풍성함과 의의 선물을 넘치도록 받는(receive) 사람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또 19절에서도 같은 논지로,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shall be made righteous)”고 말했는데, 여기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은 12절에서 언급된 바대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all have sinned) 결과인 것 처럼,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됨은 십자가에서 단번에 모두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닌, 그 은혜의 선물을 받는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될 미래의 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로마서 5장의 주제는 사실 아주 간단하다. 아담이 이 세상을 죄로 인도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죄로부터 인도해 내는 방책을 마련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죄를 범하는 것이 우리의 선택에 의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의 선택에 따른 것임을 이 로마서 5장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강제로 범죄할 수 없음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로마서 3:23; 5:12), “아담의 후손들은 그의 죄책과 결과에 한 몫을 담당하게 된다” (영문 시조, 1890년 5월 19일). 단순히 출생함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후손들이 그의 죄책에 한 몫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본의 아닌 죄(involuntary sin)의 개념을 뒷받침 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증언 말씀이 또 있다:
“아담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을 위해서 하나님에게 완전한 순종을 바치도록 요구되었다. 만일 그가 당하게 될 큰 시련의 기간 동안 유혹의 시험을 견디어 내고 창조주에 대한 그의 충성됨을 보존하게 되면, 그의 순종은 그에게 하나님의 총애와 가납됨을 보증해 줄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 그렇게 되면 아담은 영원히 성결됨과 행복 속에 정착될 것이며, 이러한 축복이 모든 그의 후손들에게도 베풀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아담은 그 시험을 견디어 내는데 실패하였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계명에 반역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이 죄인이 되고 말았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29)
그런데 바로 이 글 다음의 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게 된다:
“하나님의 계명이 한 때 남녀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음에 품어 키워나간 죄들이 그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명을 희미하게 만들어 거의 지워버렸다, 죄로 인해 새겨진 자국들이 계명의 흔적들을 점차로 손상해 버리게 된 것이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29)
아담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마음에 품어 키운 죄, 즉 그들의 선택임을 이 문장은 부연(敷衍) 설명하고 있는 바이다.
혹자는 이 문장에 언급된 “모든” 아담의 후손에 사산아(死産兒)와 유아기에 사망한 아이들도 포함되는지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영감의 말씀은 이 점에 대해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고 있기에, 우리가 추측적인 공론을 삼감이 좋을 것이다. 단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누가 태어나자마자 즉시로 죄인이 됨을 묘사하는 영감의 말씀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성경 말씀의 한 구절이 “악인들은 모태로부터 벗어났으며,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거짓을 말하며 곁길로 나가는도다”(시편 48:3)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구절도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삼는 말이 아니고 특정하게 악인의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음을 우리가 주지할 필요가 있다. 악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가 그 부모의 무관심과 악행들로 인해, 출생 후 곧바로 타락하게 되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 연구서의 후반부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다.
또 다른 한 증언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담이 불순종한 결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 아래 팔려 계명을 범한 자가 되었다” (in Heavenly Places, p. 146)
[역자주] 이 문구가 있는 문장은 계속하여 서술하기를, "회개하여 거듭나지 않는 한 인간은 율법의 속박 아래에서 사단을 섬기게 되고 원수의 기만에 빠져 여호와의 계명에 누를 끼치는 증인으로 화하고 만다"라고 말하며, 성령의 개입이 없이는 모든 인간이 자연적으로 그들의 죄를 범하게 됨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첫 문장에 있는 "죄 아래 팔려 계명을 범한 자"가 되는 과정을 그다음 문장이 서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장의 뜻하는 바는 증언 말씀의 다른 글들과 함께 이해되어 져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욕심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불의가 양심을 압도할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의 동의가 구해져야 하며 그 심령이 범죄의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5 증언, p. 177)
“사단은 그 아무도 죄를 짓도록 강요할 능력이 없다. 죄는 죄를 짓는 자의 개인적이 행위이다.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기 전에는 죄가 마음에 존재할 수 없다. 그 의지의 동의함이 주어지자마자 죄는 승리하며 지옥은 기뻐한다. 그러나 크거나 작은 죄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있을 수 없다.” (영문 시조, 1893년 12월 18일)
죄가 마음에 존재하기 전에 의지의 선택이 선제 되어야 한다고 엘렌 화잇이 여기서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모든 마음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는가? 위에 언급된 문장들은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그렇게 죄인 됨이 그들의 개인적 선택과 상관없이 일어난다고 결코 말하고 있지 않은 바이다. 로마서 5:12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될 뿐이다: “이런 연유로 한 사람에 의하여 죄가 세상으로 들어오고 그 죄에 의하여 사망이 왔으니,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느니라.”
다시 말해, 아담의 죄가 그의 모든 후손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선례를 따르는 결과를 불러왔지만, 그렇게 아담의 선례를 따른 것도 결국은 그들 자신의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엘렌 화잇은 이 로마서 5:12절에 대해 해설하면서,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인간은 퇴화하였다.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기에 모두가 서로 뒤를 이으면서 저주 속으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길을 택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반면에 우리 자신들의 길을 택하여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것과 그 죄로 인해 죽음이 들어온 것을 알게 될 수도 있다.” (영문 시조, 1900년 6월 27일)
더불어 엘렌 화잇은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을 본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을 그 당시에 인류가 타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우리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도덕성에 있어서 지금보다 훨씬 더 고결한 상태로 머물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형언할수 없는 비극을 불러온 아담의 범죄를 사람들이 개탄하면서도, 그들은 아담이 했던 바와 똑같이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거역하였던 것이다. 여호와의 계명을 범하지 말기를 경고해 주는 아담의 경험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였다. 인간이 아담과 함께 몰락함을 중지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타락에 타락의 연속이 계속되어 오고 말았다.” (리뷰와 헤럴드, 1875년 3월 4일)
그리고 이렇게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게 전달됨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즉 영향력과 선택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음을 엘렌 화잇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사단은 그의 계획을 이행하는데 대체로 성공하였다. 마음과 마음을 통해 작용하는 영향력의 수단을 활용하여, 그는 아담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였다. 그리하여 인간 본성은 그 원천에서 부터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 이래로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을 통해 전해지면서 죄가 그의 사악한 일을 계속하여 왔다. 범해지는 모든 죄는 처음 범해진 죄의 반향을 계속 일깨우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901년 4월 16일)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어구는, 태어나면서 타고나는 피치 못할 그 무엇이 아닌 개인적 선택의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
엘렌 화잇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가 무엇인지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반복하여 규명하였다: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1 기별, p. 320)
“‘죄를 짓는 자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이것이 성경이 주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리뷰와 헤럴드, 1890년 7월 15일)
“만일 사랑으로 역사하여 죄의 모든 오점으로부터 심령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목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영문 시조, 1887년 11월 24일)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지음을 멈추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영문 시조, 1890년 3월 3일)
이미 필자가 언급하였지만, 모든 사람이 단순히 태어남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죄인이라고 명시한 문구를 엘렌 화잇의 글에서는 찾는려고 시도한다면 그건 헛된 일이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다른 정의, 즉 로마서 14:23절에 있는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라는 말씀을 엘렌 화잇이 혹시 간과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히브리서 11:6)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3:4절과 로마서 14:23절은 단지 같은 뜻을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성경 말씀과 엘렌 화잇의 글은 죄가 자발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과의 분리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쓰는 용어들을 정의함에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분리를 논할 때, 우리의 첫 부모들이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생명나무로부터 제외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류가 그러한 분리의 상태 속으로 태어났다. 여기서 이슈가 되는 하나님과의 분리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요일 3:4) 죄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그러한 분리를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다음의 두 증언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로 태어난다는 증거로 제시하여 왔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왔다. 우리의 영혼은 마비되어 있다.” (소망, p. 203)
“우리는 본질적으로 (by nature)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 성신은 우리의 형편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진술하였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엡 2:1),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여. . .성한 곳이 없'(사 1:5, 6)다.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단단히 붙들어 매인 바 되어 ‘그 뜻을 좇아 그에게 사로잡힌 자'(딤후 2:26)이다.” (정로, p. 43)
그러나 이 두 구절이 뜻하고자 하는 바를 완결하도록 우리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이렇게 분리된 상태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닌 선택에 의해 얻어진 결과임이 명백해진다. 위에 있는 첫 번째 구절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 쇠잔한 사람이 걸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없다. . .그대가 완쾌됐다고 느껴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그의 말씀을 믿으라. 그리하면 그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대의 의지를 그리스도의 편에 두라. 그를 섬기고자 뜻을 세우고 그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할 때에 그대는 힘을 얻을 것이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일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능히 거기에서 구출하실 수 있으며 또한 구출하시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는 ‘죄로 죽었던'(엡 2:1) 영혼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소망, p. 203)
여기서 화잇 여사가 “오랜 방종을 통하여 영육을 속박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을 주지하시기 바란다. 그녀는 이러한 악한 행습과 강력한 정욕에 속박됨이 출생을 통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랜 방종을 통하여”, 즉 선택에 의해 그렇게 속박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위의 두 번째 구절도 다음과 같이 계속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시고 놓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함에는 전적 변화 즉 우리 온 본질의 갱신(renewing of our whole nature)이 요구되는 고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정로, p. 43)
이 구절의 바로 전 부분에서 우리가 “본질적으로 (by nature)”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났다고 기술했는데, 지금 여기서는 우리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온 본질의 갱신 (renewing of our whole nature)”이 요구된다고 하였다. 이 필자의 연구서가 나중에 증명하겠지만, 영감의 말씀은 육적인 저등 본성과 의지의 선택과 관련된 고등 본성 사이를 명확하게 구별하고 있음을 아시기 바란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우리 온 본질의 갱신됨은 고등 본성의 갱신됨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영감의 글 다른 부분이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 육적인 저등 본성은 우리가 이생에 사는 동안 변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하였기 때문이다. (교사, p. 20; 사도행적, pp. 560-561; SDA Bible Commentary, vol. 2, p. 1032). 그러므로 이 증언 말씀에서 언급된 “본질적으로 멀리 떠나감”은 태어나면서 받은 죄의 경향이 아니라 의지의 행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고자 또 다른 하나의 증언 말씀을 자주 인용하곤 한다: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는 그러한 작은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바와 같은 그러한 무서운 결과가 생길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이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거룩한 율법을 범한 것이었으며 또 그것이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고 이 세상에 사망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재난의 방축문(防築門)을 연 것이다.” (정로, p. 33)
그러나 이 말씀의 주위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서 언급된 “사람(man)”이라는 단어가 선택함과 무관하게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 말씀의 주위 문맥을 살펴보면 “그대의 죄를 버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마음의 순결을 얻는 일을 지체하지 말라”(정로, p. 32)고 회개하는 일을 지체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를 주고 있으며,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버리는 것마다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의지를 약하게 만든다”(정로, p. 33)고 엘렌 화잇이 강조하고 있다. 한마디로 이 정로의 계단에 있는 증언 말씀의 요지는 죄를 짓거나 아니 짓는 우리 각자의 선택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의 주위 문맥에서 우리가 인간이 출생 때 물려받는 불가피한 상태로서의 죄라는 개념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는 바이다.
더욱이 성경 말씀은 이사야 서에서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사야 59:2)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아담의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분리되게 했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죄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언명하고 있다. 화잇 부인도 다음과 같이 이 성경 말씀과 동의하고 있음을 본다:
“그분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순간,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7년 7월 12일)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 (1 기별, p. 235)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으신다. 단지 그 백성이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자신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1888 Materials, p. 1011).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존하는 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한, 그들은 하늘 천사들의 보호아래 있게 되어 마귀가 그들을 파멸시킬 목적으로 그들 위에 사악한 계교를 행사토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자들은 그 큰 위험에 당면하게 된다.” (마라나타, p. 95).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법적인 행위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발람의 모든 사술이 행할 수 없었던 일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일을 행하였다.” (부조, p. 455)
우리는 위에 언급된 증언 말씀들에서 인간이 단지 이 세상에 태어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다는 주장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분리된 상태가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임을 위의 인용문들이 명백히 밝히고 있을 뿐이다.
불순종으로 인한 죄책과 죽음의 유산(遺産)
엘렌 화잇은 그녀의 글 여러 곳에서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를 묘사하면서 “유산”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다음이 그 몇 가지 예다: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이다 (that of sin).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 . .첫째 아담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그에게서 받은 것이란 죄책과 사형 선고밖엔 없다.” (새자녀, p. 475)
“죄책의 상속자로서 영원한 사망을 선고받은 타락한 인류의 선두에 서기 위해 그리스도는 자원하여 이 땅에 오셨다.” (Manuscript Releases, vol. 12, p. 61)
“이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죄책과 죽음의 유산, 즉 불순종의 유산을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았다.” (Manuscript Releases, vol. 13, p. 14)
이러한 증언 말씀들을 우리가 접할 때마다 한 가지 명심해야 할 점은, 이미 인용한 바대로 “마치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듯이 증언들 자체가 이미 주어진 기별들을 설명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1기별, 42) 라고 엘렌 화잇이 언급한 중요한 해석 지침을 상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연구할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렇게 서로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화잇 여사의 글들을 접하게 될 때 어느 한 쪽만을 취사선택 하기보다는, 좀 더 깊게 파고들어 그와 연관된 모든 영감의 말씀들을 참조하여 그 자체로 하여금 문제가 되는 단어와 개념들을 좀 더 충분히 정의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연구서에서 우리는 이미 죄가 인간 의지의 선택과 상관없이 불가피하게 선제된 상태가 아님을 성경 말씀들(에스겔 18:20, 아고보1:14, 15; 4:17)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 (5 증언, p. 177) 라고 명시한 여러 예언의 신 말씀들에서 보았다. 따라서 어린아이들에 대해 언급하며 “죄가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켰다”(새자녀, p. 475)라는 위에 인용된 화잇 부인의 글을 접할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의 행동에 의해 자신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1888 Materials, p. 1011)고 지적한 다른 예언의 신 말씀들과 나란히 대조하며 그 뜻을 조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라고 분명하게 계시한 성경 말씀을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됨을 언급한 위에 인용된 새자녀 지도법의 증언 말씀은 이 아이들이 그러한 상태를 그들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물려받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이 유산의 이슈에 대해 조금 후에 더 논의하겠는데, 이 글에서 유산과 분리됨을 언급한 두 문장이 나란히 적혀 있지만 그 문장들이 반드시 동일한 대상을 논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미 지적한 대로 증언의 다른 여러 말씀에서 이 하나님과의 분리됨이 우리의 선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명확하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죄와 그 결과들에 대한 다음과 같은 증언 말씀이 위에 인용된 글들을 우리가 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에 병에 걸리는 것은 죄다. 많은 이들이 그들 부모의 죄의 결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이 그들 부모의 죄로 인해 견책됨을 받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의무는 그들 부모가 삶의 법칙을 범하여 후손들에게 너무나 비참한 유산을 물려주게 되었음을 분명히 인식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부모들이 올바르지 못한 습관을 지녔더라도 그들은 자신들 삶의 방향을 수정해 올바른 습관을 터득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올바른 위치에 서는 것이다.” (Counsels on Health, p. 37)
위의 글을 자세히 보면, 화잇 여사가 “모든 질병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병에 걸리는 것을 죄로 칭하고 있으며, 또 부모가 건강법칙을 어긴 결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비참한 유산”을 물려준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자녀들이 부모들의 이러한 죄 때문에 견책될 수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부모들의 책임인 “비참한 유산” 때문에 그들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죄인이 된다고 그녀가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화잇 부인이 새 자녀 지도법 475페이지에서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of sin)”이라고 말했을 때 이 유산이 죄로 인한 결과로서의 유산임을 뜻한 것이지 자녀들이 죄 그 자체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역자주] "자녀들의 유산은 죄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sin)" 라는 말과 "자녀들의 유산은 죄의 유산 (The inheritance of children is that of sin)" 이라는 말 사이에는 그 의미에 큰 차이가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전자는 죄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고, 후자는 죄에서 기인한 유산 혹은 죄의 결과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화잇 여사는 물론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였다.
물론 위에 인용된 증언 말씀이 아담에게서 우리가 받은 것은 “죄책과 사형 선고밖엔 없다”라고 하며, 우리가 “죄책의 상속자”라는 사실과 “죄책과 죽음의 유산, 즉 불순종의 유산”을 우리가 물려받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상기할 바는, 이러한 죄와 죄책을 우리가 선택함으로 체험하게 됨을 증언의 다른 부분에서 엘렌 화잇이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이 그 몇 가지 예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책을 더럽혀지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That I May Know Him, p. 140)
“유혹은 죄가 아니다. 죄는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에 있다.” (Our High Calling, p. 87)
이처럼 태어남 그 자체에 죄가 있다고 엘렌 화잇이 결코 말하고 있지 않다. 위에 인용된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 및 질병과 죄로 말미암은 “비참한 유산”은 물론 선택의 결과인 죄책에 관한 글들을 모두 종합해 보게 되면, 엘렌 화잇이 묘사한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은 사실적으로 이러한 불순종과 죄책의 결과로서의 유산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죄 있다함과 죄책의 부과를 뜻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처럼 영감의 말씀 어디에도 본의 아닌 죄나 죄책(involuntary sin or guilty)을 가르치는 글이 존재하지 않는다. 엘렌 화잇은 “인간은 아무도 거룩함을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을 수 없다”(1 기별, p. 310)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그와 동시에 그녀는 우리가 죄를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는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엘렌 화잇에 의하면, 우리가 타고난 권리로 물려받는 것은 죄 그 자체가 아닌 죄로 기우는 경향이다 (가정, pp. 241,256; 부조, p. 306).
또 우리가 인식할 바는, 성경 말씀과 마찬가지로 엘렌 화잇도 이 유산을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물려받는 그 무엇으로 항상 언급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때로는 그녀가 이 유산을 본의 아니게 물려받는 것으로, 다른 경우엔 자의로 물려받게 됨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이 단어가 어떤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는 그 문맥의 전후 상황과 증언 말씀들의 일치성을 고려하게 되면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의 여러 구절이 하나님 백성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 경우 그 유산이 믿음에 근거한 순종의 조건하에 전수됨을 밝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시편 37:29; 이사야 60:21; 마태 5:5, 25:34; 누가 10:25; 고전 6:9; 갈라디아 3:29; 디도서 3:7; 히브리 9:15; 계시록 21:7). 엘렌 화잇도 이와 동일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구주께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당신께 나아와 그들의 죄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을 당신의 은총으로 가납하셔서 넉넉히 용서해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 충성하게 되면, 그분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보좌로 끌어올리시어 당신 자신의 피로 산 그 유산의 상속자로 삼으실 것이다.” (Spiritual Gifts, vol. 3, pp 176-177)
“그분은 [그리스도는] 그들을 죄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릴 수 있으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즉 그리스도와 함께 불멸의 유업을 받을 후사로 인정받을 수 있다.” (구호 봉사, p. 93)
“그분은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하늘의 베틀로 짠 당신의 의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신다. . . .우리는 하늘 가족으로 입양되어 순종한 자들을 위해 준비된 처소를 유산으로 받게 될 것이다.” (That I May Know Him, p. 108)
그리고 다음 증언 말씀은 이러한 두 종류의 유산들 사이에서 우리가 분명히 선택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그들은 [성도들은] 이 세상의 친척들과 절교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과 바꾸어 얻어진 보상 –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보라. 고상해지며 높임을 받아 구원에 참여하는 자, 즉 불멸의 유산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받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었다…..이렇게 오류를 진리로, 어둠을 빛으로, 병약함을 능력으로, 죄를 의로, 그리고 썩어 없어질 이름과 유산을 영원히 누릴 불멸의 보배로 바꾼 이 사실로 인해 감히 우리가 희생을 감수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리뷰와 헤럴드, 1859년 4월 28일)
그러므로 이러한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불순종과 죄책의 유산에 대해 언급한 증언 말씀들은 죄와 죄책의 결과들을 지칭하거나 아니면 영원한 유산 대신 멸해질 유산을 받고자 한 선택을 지칭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실질적인 죄와 죄책을 의지의 선택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 자동적으로 전수받는다는 결론은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이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무지(無知) 중에 범해진 죄들
우리는 이미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느니라”(야고보 4:17)라고 한 성경절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실로 이 무지의 때에는 하나님께서 눈감아 주셨으나”(행 17:30)라고 또 다른 성경절도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절대적으로 공명 정대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남녀에게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진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으시는데,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무지한 가운데 범해진 죄들에 그분의 저주가 결코 임하지 않는다.” (영문 시조, 1899년 11월 1일)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계신 중보사업의 여러 가지 역할들을 묘사하면서, 화잇 여사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기별을 깨닫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지성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는 예수께서 법궤 앞에 서서 아직도 자비를 베풀 모든 사람과 무지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마지막 중보를 하고 계시다. 이 속죄는 죽은 의인과 살아 있는 의인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수를 믿고 죽었으나 계명에 대한 빛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계명을 범한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다.” (초기, p. 254)
하지만 그 어떤 죄가 정말 무지의 죄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만일 빛과 진리가 그 사람에게 제시되었다면 그것이 분명히 받아들여졌을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확인하셔야 된다. 의도적인 무지와 나태는 여기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용서함을 받을 수 없다 (히브리서 2:3). 이 점에 대해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조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모든 무지의 죄에 대한 속죄를 이루셨다. 그러나 고의적인 맹목에 대한 대책은 전혀 없다.”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45)
어린아이들과 책임 적령기
유아(幼兒)들과 매우 어린 아이들이 죄의 행위들을 범할 수 있는가, 혹은 그 아이들이 그에 대한 책임을 지는가 하는 문제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영감의 말씀이 계시한 것 이상의 불필요한 추측을 일삼는 충동을 자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주제와 관련된 많은 부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정확히 어느 나이가 되면 책임 적령기에 이르게 되는지 알려주는 영감의 말씀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러한 명백한 계시가 없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책임 적령기의 도래가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거라는 결론밖에 우리가 내릴 수 없다. 한 어린아이의 생애 중 어느 시점에서 이 아이에게 책임성과 영적 이해가 계발되기 시작하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아이들이 아주 어릴 때부터 훈육이 필요하며, 그들이 이러한 교정(矯正)을 이해한다고 영감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제대로 훈련을 받기보다는 저절로 자라게 방치되고 있다. 이 불쌍한 어린 아이들이 열 달, 혹은 열 두달의 나이에는 잘못함을 바로잡는 교정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되어 방치됨으로써, 그들은 아주 어릴 적에 벌써 완고함을 표출하고 있다.” (리뷰와 헤럴드, 1893년 3월 28일)
“나는 어머니들이 그토록 맹목적이고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에 대해 소홀한 것을 볼 때 어머니들에 대하여 특별히 근심하는 바이다. 그들은 불과 수 개월밖에 되지 아니한 고집 센 아이에게 사단이 역사하는 것을 본다. 간악한 격정이 충만한 사단이 아이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새자녀, p. 289)
“어머니의 일은 어린 아기가 그녀의 팔에 안겨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자기의 뜻이 어떻게든 관철되지 않으면 몸을 내던지고 엉엉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을 자주 보았다…..이 어린 자녀들은 어떤 영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식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판단력과 분별력을 행사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자녀들의 습관은 세심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나쁜 성향은 억제되어야 하며 마음은 올바른 것을 좋아하도록 자극을 받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려는 어린 아이의 모든 노력을 격려하라.”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p. 150)
“이제 출간될 책 [교육] 에는 팔에 안긴 갓난아기로부터 자녀 훈련에 시행되어야 할 위대한 원리에 대하여 할 말이 많이 실려 있을 것이다. 자녀들을 훈련하지 않으면 원수가 바로 그 자녀들에게 역사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들을 훈련한다. 만약 부모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마귀가 할 것이다.” (3 기별, p. 217-218)
어린 아이들이 모두 다 하늘로 데려감을 받지는 못할 사실에 대해서는 에스겔 9장의 기록이 선명하게 우리의 생각을 환기시켜주고 있는데, 그 장에서 여호와는 살육의 무기를 가진 자들에게 “늙은이나 젊은이나 처녀나 어린 아이나 여자를 전부 죽이”(에스겔 9:6)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석을 하면서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대의 자녀들은 그대의 말을 유념하도록 훈육 되어야 한다. 그대의 말이 그들의 법이 되어야 한다. 부모들이여, 이 일에 확고히 임하라. 왜냐하면 멸하는 천사들이 곧 임하여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포함한 늙은 자와 젊은 자를 완전히 다 죽일 것이기 때문이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323)
“나는 그대가 지금 곧바로 회개하여 그대의 자녀들에게 신실하지 않는 한, 멸하는 천사에 의해 죽임을 당할 어린아이들을 그대가 기르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를 지닌 어린아이들을 그분이 덮어주고 숨겨서 보존하실 거라고 정말 그대가 생각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날뛰는 어린아이들이 표출하는 격렬한 감정과 악한 성질들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 환란의 시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하지 못하실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잃어버린 바가 될 것이다.” (Manuscript Releases, vol. 9, p. 352)
“어떤 부모들은 사단이 그들의 자녀들을 지배하도록 용납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제어를 받지 않으므로 악한 성질을 가지며, 성미가 급하며, 이기적이며, 순종하지 않는 자가 되도록 용납된다. 죽는다 해도 이런 어린아이들은 하늘에 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3 기별, p. 315)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지옥불에 멸하도록 처벌하는 것이 잔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일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질 만큼 충분한 이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만 아신다), 그러한 처벌은 공평하고 공의로운 것이 될 것이다. 몇 년전에 시카고에서 발생하였던 경악스러운 범죄를 독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두 아이가 자신들이 사탕과자를 훔치는데 거들지 않는다고 한 다른 어린아이를 목을 졸라 죽였던 사건 말이다. 오늘날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존재하는 도시의 갱단들은 소름끼치는 폭행을 일상적으로 일삼는 아주 어린 나이의 아이들을 포함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몇 해전 페루의 수도인 리마시에서 텔레비전 방송은 “피라나”라는 갱단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는데, 그 갱단은 대부분 12살 미만의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무차별 상해와 강도 및 살인 등을 상례적으로 일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무자비한 아이들을 멸하는 천사의 칼로 처벌한다고 하여 그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린아이들과 노예들
물론 옳고 그름의 차이를 전혀 깨닫지 못한 사람은 지옥불에 소멸되는 형벌로 부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지대한 사랑과 공의의 소유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무지의 죄를 범한 사람들은 처벌하지 않으실 것이다. “율법 없이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 없이 멸망할 것이요, 율법 안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은 모두 율법에 의하여 심판받게 되리니”(로마서 2:12)라고 바울이 언명하고 있다. 이미 인용했듯이, 엘렌 화잇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우리가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무지한 가운데 범해진 죄들에 그분의 저주가 결코 임하지 않는다.” (영문 시조, 1899년 11월 1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은혜를 통해 의(義)의 길을 계발하지 않은 사람을 하늘로 데려갈 수 없는데, 노예주들에 의해 영성이 억제된 노예들에 관하여 엘렌 화잇이 기술한 다음의 글은 이러한 점에 있어서 좀 더 밝은 이해를 제공해 주고 있다:
“나는 노예의 주인들은 자기들이 무지 가운데 가두어 둔 노예들의 영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예들의 죄가 주인에게 전가된다. 하나님께서는 무지와 타락 속에서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오직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할 줄을 모르는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데려가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시는 반면에 그들의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 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 때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게 될 것이며 마지막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초기, p. 276)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인식할 바는, 이러한 노예제도와 강제적인 노동착취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외국 출신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려 먹는 소위 “노동자 착취 업소”들이 미국의 대도시들에 아직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강제 노동 수용소들이 중국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타이랜드와 같은 나라에서는 어린 남녀 아이들이 강제로 매춘업에 팔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노예 주인들이 세상의 마지막에 올 일곱 재앙에 의해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위에 인용된 영감의 기술이 지나간 과거에만 적용되는 말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노예들이 다 위에 묘사된 그러한 정도의 영적 억압 상태에 처해 있지 않다는 사실인데, 영감의 말씀이 그 후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음을 우리가 읽게 된다:
“그때부터 땅이 쉼을 얻는 (예수님의 재림 때) 희년이 시작되었다. 나는 노예가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며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을 풀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악한 주인은 어리둥절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그것은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초기, p. 286).
이 거룩한 노예들은, 화잇 여사가 그녀의 글 여러 곳에서 언급한 바 있는, 비록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였지만 선교사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도와주었으며 옳고 그름에 대한 타고난 분별력으로 거룩한 성품을 고양했던 이교도들과 같은 범주의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소망, p. 638; 선지자, p. 376; 실물, p. 385 참조).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어떤 사람의 지식이 극히 미숙한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을 포함한 우리는 모두 각자가 깨달은 바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그 빛과 진리에 온전히 충실하였는지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엘렌 화잇은 이 점에 관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진주문을 통과할 모든 사람은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This Day with God, p. 94)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범죄함
어떤 이들은 주장하기를, 인간의 타락된 본성과 연약해진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에게 성화된 의지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들이 유혹의 맹공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 어린아이들이 책임 적령기에 도달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죄를 짓게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이들은 믿고 있다. 만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타락된 본성을 취하였다는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예수님께서 이미 성화된 의지를 지니고 태어나셨기 때문에 유아기와 어린 시절을 지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반사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곤 한다. 이들은 또 이렇게 반사적으로 범죄하는 어린아이들이 무지한 가운데 그렇게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러한 죄의 행위들은 무지 중에 범해진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 사함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초기, p. 254).
이러한 입장을 고려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상기할 바는, 유혹과의 싸움에 있어서 인간 예수가 타락한 인간보다 결코 더 유리한 처지에 있지 않았음을 엘렌 화잇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질 수 없는 어떤 특성을 나타내시거나 어떤 능력을 행사하지 않으셨다. 그의 완전한 인성은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소망, p. 664)
“만약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닌 특별한 능력을 가지셨다면 사단은 이것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일은 사단의 주장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그의 지배를 되찾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오직 그분이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시고 인간의 순종을 드림으로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SDA Bible Commentary, vol. 7, p. 930)
“세상의 구주 예수는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동일한 방법으로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으셨다.” (SDA Bible Commentary, vol. 7, p. 929)
누구에게나 선사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모든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그 이상의 어떤 유리함이 어린 예수에게 있었다고 암시하는 말이 성경이나 엘렌 화잇의 글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엘렌 화잇은 분명히 말하기를, “죄를 범하는 데에 핑계가 있을 수 없다”(소망, p. 311)라고 지적하였는데, 그러면서 “단, 그대가 책임 적령기에 이르기 전의 어린아이라면 핑계가 있을 수 있다”라고 결코 부연하지 않았다.
이 점은 다음에 인용한 엘렌 화잇의 글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 인간의 죄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 그리스도의 죄없는 삶이 보여주는 귀감은 그 분 생애의 어떤 부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어린 유아기에도 적용됨을 밝히고 있다:
“많은 남녀들이 죄짓기 일쑤인 그들의 경향에 대해 허다한 변명을 늘어놓곤 하는데, 이들에 의해 죄는 극복할 수 없는 그 어떤 불가피한 하나의 악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죄는 불가피하지 않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아로 부터 성년에 이를 때까지 이 세상에 사는 그 기간 동안 사람을 괴롭히는 모든 유혹을 싸워 물리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모든 어린 아이들과 젊은이들과 장년들에게 한 완벽한 귀감이 되고 있다.” (Manuscript Releases, vol. 18, p. 332; The Faith I Live By, p. 219)
물론 그리스도께서 성화된 의지를 지니고 태어나셨다는 주장은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과 어긋나는 주장은 아닌데, 엘렌 화잇이 그리스도에 관해 언급하면서 “그는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갖추어져 있었다”(소망, p. 123)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대로, 동시에 그녀는 예수님이 누렸던 그 이점을 우리의 어린아이들도 태어날 때부터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팔에 안긴 영아일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의 믿음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 거할 수 있다. 침례 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산다면 우리도 역시 아주 어릴 때부터라도 성령께서 우리의 어린 자녀들을 꼴지워 주시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소망, p. 512).
이와 유사한 또 다른 증언 말씀은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어떤 이들이 믿는 부모의 어린 자녀들이 구원을 받는지에 대해 질문한 것을 안다. 이는 그들이 품성의 시험도 받지 않았으며 모든 자들은 시험을 받아 그 품성이 시련에 의하여 결정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어린아이들이 이 시험과 시련의 경험을 가질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심판을 애굽인들의 장자에게 보내셨을 때처럼, 믿는 부모들의 믿음이 그 어린 자녀들을 덮는다고 대답하겠다…..그리스도께서는 신실한 어머니들이 그분께 데리고 오는 아이들을 축복하셨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행하며 그들을 가르치고 순종과 복종으로 그들을 교육시킨다면 그분은 지금도 축복하실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은 시험을 견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다. 이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들에게는 하나님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3 기별, pp. 313-314)
신실한 침례교인이 안식일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 가운데 그 안식일을 범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책임 적령기에 이르기 전에 어린아이들이 범하는 죄를 무지중에 범해진 죄로 평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화시키는 은혜 없이는 노소를 불문한 우리가 모두 죄의 유혹을 도저히 물리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떤 부류에 속하든지간에) 그 어떤 과실이 죄로 간주되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권능과 깨달음을 통해 우리가 그 죄를 피할 수 있는 것이라야만 된다. “어떤 사람도 강제로 죄를 범하게 할 수는 없다”(5 증언, p. 177)라고 엘렌 화잇이 말한 바대로, 죄는 의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내린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침례 요한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아와 어린아이들도 성령에 의해 올바로 꼴 지워질 수 있다. 타락된 인성을 쓰신 우리의 구주께서 사셨던 죄없는 생애는 영아에서 장년에 이르는 우리의 삶 전체를 통해 우리가 물려받은 육적인 본성이 성화된 영혼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강요할 수 없음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 시점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전혀 범하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구주가 필요하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반문은 세상의 마지막 환란을 통과하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하심을 계속적으로 필요치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지극히 어처구니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이 땅에서의 삶과 죽으심으로 가능해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그분의 권능만이 누구든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에 그러하다. 바로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하는”(마태 1:21)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다. “누가 죄를 범하면” (요일 2:1)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용서함이 제공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용서함이 필요치 않다는 말은 구주가 필요 없다는 말과 같은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구주의 역할은 죄를 사해 주시는 역할과 더불어 그 죄를 이기는 능력을 부여하시는 역할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생에서 타락된 육적인 본성을 지니고 사는 한, 우리를 실족하지 않게 도와주시는 이 구주의 능력은 우리에게 계속하여 절실히 필요한 바이다.
저등 본성과 고등 본성
영감의 일치된 가르침은 우리 인간의 본성 속에 저등 세력과 고등 세력이 동시에 존재함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다른 어떤 점들보다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러한 영감의 가르침은 인간에게 존재하는 죄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서는 물론,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상충하는 듯이 보이는 몇 글들에 대해 우리가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도움을 준다. 엘렌 화잇의 이러한 증언은 성경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도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한 두 세력의 존재에 대해 제자들에게 “참으로 영은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도다”(마태 26:41)라고 지적하셨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또한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며 동일한 개념을 전하고 있다.
엘렌 화잇도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의지는 취향이나 경향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역사하여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결정하는 능력이다”(5 증언, p. 513) 라고 기술하기도 했는데, 다른 여러 글에서 이 점에 대해 좀 더 명확한 구분을 내리고 있다:
“육체는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한다. 보다 높은 능력이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 감정은 의지에 지배되어야 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놓여야 한다.” (치료, p. 130)
“계발된 지력이 지배권을 잡아 동물적 습성을 통제하고 이를 도덕의 힘에 복종시킬 때에는 유혹을 가지고 정복하려 하는 자기의 힘이 심히 적어질 것을 사단은 잘 알고 있다.” (청년, p. 237)
“어떤 종류의 부절제든지 감각 기관을 마비시키고 뇌신경의 활력을 약화시켜 영원에 속한 사물을 분별하지 못하고 평범한 것과 같은 차원에 놓도록 한다. 향상된 목적을 위해 고안된 정신의 고등 능력은 비열한 정욕의 노예로 전락한다.” (영문 시조, 1887년 8월 11일)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두 세력을 구분하면서, 엘렌 화잇은 또한 다음과 같이 육적인 본성 그 자체는 죄를 지을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저속한 욕정은 체내에 자리를 차지하고 그것을 통하여 일한다. “육체” (flesh) 또는 “육체의” (fleshly) 또는 “육체의 정욕들” (carnal lusts) 이란 말은 그 저속하고 타락한 본성을 포함한다. 육체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가정, p. 127)
한마디로 우리의 고등 능력을 통하여 도덕적이고 영적인 선택이 내려지게 된다. 이러한 고등 본성의 개입이 없이는 죄나 의가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악한 욕정과 죄스러운 경향들은 위의 글이 분명히 밝혔듯이 그 자체로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저등 본성 속에 그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악한 욕정과 경향들은 의지와 성품을 포함하는 인간의 고등 본성으로부터 추방될 수 있는데, 다음의 증언 말씀이 그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참된 화평을 창조하시고 영속시키실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이 은혜가 마음에 심기워지면 그것은 분쟁과 불화를 일으키는 악한 정욕을 내쫓을 것이다.” (소망, p. 305)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타락을 피하고 하나님의 품성에 동참하는 자가 되는 것이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얻는 우리의 특권임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하면 우리는 모든 죄와 성품의 결함들로부터 정결케 된다. 단 하나의 죄스러운 성향(one sinful propensity)도 우리는 간직할 필요가 없다.” (SDA Bible Commentary, vol. 7, p. 943)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인식할 바는, 엘렌 화잇이 위에서 악한 정욕을 내쫓고 죄스러운 성향을 간직할 필요가 없음을 언급했을 때, 그녀가 1900년대 초에 있었던 거룩한 육체 운동 (Holy Flesh Movement)의 교리를 가르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녀는 다른 곳에서 “식욕과 욕정은 성령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 영생 이전인 이생에 있을 동안은 전쟁이 끊일 새 없이 있을 것이다”(교사, p. 20)라고 또한 말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편으로 예수께서 악한 성향들이나 우리와 비슷한 욕정들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엘렌 화잇의 글들과 (2 증언, pp. 201-202, 509;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28) 또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것들을 예수께서 지니고 있었다는 글들 (In Heavenly Places, p. l55; Christ Triumphant, p. 260; 영문 시조, 1896년 4월 9일; 영문 시조, 1900년 10월 17일) 사이에 있어 보이는 상충함을 해결하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의 글들은 의지와 성품의 선택이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고등 본성을 묘사하는 글이며, 다른 편의 글들은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가정, p. 127)라고 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저등한 육적 본성을 묘사하는 글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에 내재하는 저등 및 고등 세력들에 대한 이러한 구분이 어떻게 재림교회 안에 지금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논쟁점을 해결해 줄 수 있는지 더 연구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영문 대쟁투 사이트에 게재된 필자의 연구서, 「저등 본성과 고등 본성: 재림교회 안의 기독론 논쟁을 해결하는 열쇠」를 참조해 보도록 초청하는 바이다.
결 론
처음에 언급했던 U.S. News & World Report에 실린 한 기사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슈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유전 형질이 어떤 종류의 알코올 중독에 관여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당신으로 하여금 위스키 병을 사게 하며 그 술을 유리잔에 따라 단숨에 들이키게 강요할 수는 없다.” (Wray Herbert, “Politics of Biology,” U.S. News & World Report, April 21, 1997, p. 78)
이러한 결론을 내린 이 기사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엘렌 화잇의 글을 인용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진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사단에 의해 심겨지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격퇴하면, 그 영혼은 죄의 정죄됨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That I May Know Him, p. 140)
“아무리 시험이 크다 할지라도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영혼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크다 할지라도 범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는 행위이다. 이 세상의 권세나 지옥의 권세라 할지라도 억지로 악을 행하게 할 수 없다. 사단이 우리의 약점을 노리고 우리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넘어질 필요는 없다. 아무리 공격이 맹렬하고 불시에 닥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도우시는 손길을 준비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승리를 얻을 수 있다.” (부조, p. 421)
그리고 마지막으로 엘렌 화잇이 기술한 다음의 글을 독자들께서 개인적으로 신중히 고려하길 바라며 이 기사의 결론으로 삼고자 한다.
“마음속으로 하나님에게 불평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아담의 타락된 본성을 타고 났기에, 우리가 지닌 본성적인 결함들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잘못을 찾으려하며 자기들이 제공할 능력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고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와 동일한 불평을 하늘에서 사단이 하였는데,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을 욕되게 만드는 일이다.” (영문 시조, 1892년 8월 29일)
케빈 폴슨(KEVIN PAULSON) 목사는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로마린다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학위,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뉴욕합회에서 성경교사, 전도목사, 목사로 목회에 역임한 바 있다. 지금은 재림교회의 종교자유 전문지 리버티(Liberty) 등에 기고하는 작가로 활동하며 미시간의 베리언 스프링즈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