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적인 가정에서 우리는 제법 많은 종류의 측정 도구들을 볼 수 있다. 부엌에는 식품의 양을 재는 수저들과 크기가 다른 측량 컵들 및 그외 여러 가지 양을 재는 용기들이 있다 . 또 냉동실의 온도를 재는 온도계 , 요구르트를 만들 때 쓰는 온도계 및 화덕에 붙어있는 온도계들을 발견한다.
침실 벽에 붙어 있는 실내 온도계가 있고 의료품 보관장 안에는 체온계가 있다. 재봉틀 서랍 안에는 3피트짜리 줄자가 있고 책상 서랍 안에는 그와는 다른 종류의 나무로 된 자가 있다. 옷장 선반에서 우리는 카메라에 붙어있는 광도 측정기를 볼 수 있으며 식료품 저장실 선반에 있는 식료품을 다는 접시저울을 발견하고 화장실 바닥에 있는 몸무게를 다는 저울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차고에는 12피트와 50피트의 양철로 된 줄자가 있고 전압을 재는 전압계, 자동차 배터리의 상태를 측정하는 액체 비중계, 자동차 바퀴의 공기 압력을 재는 압력 게이지 및 스파크 플러그 꼭지의 간격을 재는 측정기 등등이 있다 . 자동차 자체에서 우리는 각종 계기 바늘과 신호등으로 차의 상태를 알려주는 신호판들을 본다. 그리고 물탱크에는 물의 압력을 재는 압력계가 붙어 있음을 본다. 이러한 것들이 일반적인 가정에 늘려 있는 여러 종류의 측정기들의 몇가지 예들이 되겠다.
한번 간단한 실험을 해보자. 집에 늘려 있는 모든 측정기들을 모아서 상위에 놓고 잠시 관찰해 보면 크게 두가지로 그 측정기들을 분류할 수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기구들은 물체의 크기 및 양을 재는 것이고 또 다른 기구들은 에너지의 세고 약함을 재는 것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물체의 크기와 양을 측정하는 기구들
컵
줄자
나무자
직각자
필러 게이지
에너지의 세고 약함을 측정하는 기구들
온냉을 재는 온도계
광도를 재는 광도 미터기
전압을 재는 전압계
압력을 재는 압력 게이지
물체에 가해지는 중력의 크기를 재는 저울
저울은 좀 분류하기가 모호한데, 우리는 주로 저울을 물체의 무게를 재는 기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게는 물체가 가진 고유한 특성인가 아니면 물체에 가해진 중력의 영향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중력 없이는 물체에 무게가 없으며 공중으로 뜨게 됨을 보면서 해답을 구할 수 있겠고, 이렇게 볼 때 저울은 분명히 에너지를 측정하는 기구의 그룹에 속한다.
이렇게 측정기들을 크게 두가지 부류로 구분한 후 그 측정기들이 어떻게 쓰여 지고 그들의 작동원리가 무엇인지 한번 고려 해 보면, 우리는 다시 이런 면에서 두 부류의 기구들에 차이점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체의 크기를 재는 기구들은 물체의 규모 (즉 길이 , 넓이 및 깊이로 성립되는 질량) 를 확정함으로 측정기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 반면에 에너지의 강도를 재는 기구들은 이와는 다른 방법을 이용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에너지의 강도를 길이, 넓이, 깊이 및 질량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평상적으로 “이 빛이 얼마나 무거운가?” 혹은 “이 열이 얼마나 넓은가?” 등의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질문들은 한마디로 무의미한 질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열, 빛 혹은 전기등의 에너지의 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어느 누군가가 아주 훌륭한 고안을 했는데, 에너지로 하여금 작동을 좀 하게 한 후 그 작동의 정도를 관찰하여 에너지의 강도를 측정하자는 생각을 해 낸 것이다. 에너지로 하여금 세밀하게 눈금과 조절된 측정기의 바늘을 움직이게 하고, 온도계의 수은을 올리고, 혹은 튜브관속에 있는 축을 밖으로 나오게 하며 아니면 각종 크기가 다른 신호등에 불이 들어오게 함으로 그 작동의 정도를 통해 에너지의 강도를 우리는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고안은 에너지의 강도를 측정하는데 아주 만족스러운 방법으로 증명되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5만 파운드의 트럭을 정지시키는데 그 차체의 아래 부분에 부착되어 있는 작은 기조 속에 있는 아주 적은 양 (적게는 60파운드 정도의 기력) 의 압축된 공기를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트럭을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이렇게 적은 공기 압력으로 어떻게 큰 트럭을 정지시킬 수 있을지 염려하지 않는 이유는 운전석 앞에 있는 계기판의 바늘이 브레이크의 기압에 의해 움직여 가리키는 눈금을 보면서 트럭의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정도를 알기 때문이다. 그 운전기사는 더 적용될 수 있는 브레이크의 힘을 계기판을 통해 감지하기에 그는 자기의 계기를 믿고 운전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행기 조종사도 그들의 계기들이 어둠속에서도 비행기를 안전하게 조종할 수 있도록 도와줌을 믿으며, 배를 항해하는 선장도 폭풍우 속에서 그들의 배를 항해하는데 각종 계기들의 도움에 의지한다. 한마디로 말해 에너지는 그 에너지에 의해 작동되는 일의 정도에 의해 정확하게 측정된다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는 아주 신뢰할 만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과 관찰의 결과로 우리는 두가지의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로, 에너지의 강도는 그 자체를 직접 측정할 수 없으며 그 에너지가 한 일의 정도를 측정함으로 잴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원리에 반하는 예외를 인간이 발견하지 못했다. 둘째로, 이렇게 에너지가 한 일의 정도를 기준해 에너지의 강도를 측정하는 방법은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수단인데 그것은 이러한 측정 방법이 산출하는 결과가 한결같이 일관성 있으며 신뢰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해본 여러 측정 계기들에 대한 관찰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한 중요한 질문을 가져다주는데,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믿음은 물체인가 에너지인가? 믿음이라는 것은 길이, 넓이 그리고 깊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물체로 보아야 할까?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다. 믿음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나의 힘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의 유무와 정도도 다른 모든 에너지를 재는 것처럼 그 믿음이 작용하여 나타나는 행함으로 측정할 수밖에 결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갈라디아 5:6) 을 강조하고 있으며, 야고보 사도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 (야고보 2:17) 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믿음을 재는 기구인 행함의 증언은 신뢰할 만하고 정확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행함이 부재한 상태는 구원하는 믿음의 부재를 의미한다고 보겠다.
이렇게 주장함은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을 뜻하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측정하는 계기가 그 측정되는 에너지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벽에 붙어 있는 온도계는 화로가 재대로 작동하는지 알려 줄 수는 있으나 그것이 집안을 따뜻하게 난방하게 해주지는 못하며, 트럭의 브레이크 압력을 재는 압력계는 브레이크에 가해지는 공기의 압력을 알려 주지만 그 압력계가 트럭을 정지시키지 못한다. 또한 전선에 흐르는 전력을 재는 전압계가 가정 전기 용구들을 가동시키지는 못하기에, 빵 굽는 기계를 전압계에 연결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측정기는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에너지의 기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행함은 믿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측정기의 역할을 하지만 그 행함이 믿음의 기능의 원천이 아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영감의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행실로 말미암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와 반면에 어떤 영혼도 선한 행실이 전혀 없이 구원 받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문 가려 뽑은 기별 1권 377 페이지)
예수님의 삶속에 있었던 능력의 역사는 그 분이 가지셨던 완전한 믿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믿음은 그 분으로 하여금 순결하고 거룩한 삶을 사시도록 역사하였고, 놀라운 기적을 행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연법칙을 압도하는 역사와 더불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또한 예수님의 믿음은 그분으로 하여금 죄인들의 모순을 감당하게 하였고 사악한 인간들의 권력이 주장한 십자가의 죽음까지 마다않고 감수하도록 이끌었으며, 그 완전한 믿음으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는 승리의 외침과 함께 그의 영혼을 하늘 아버지께 바치셨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믿음은 사랑으로서 역사한, 명백히 식별되고 단연히 그 강도를 평가할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평가의 대상이 되어질 수밖에 없는 한 개체인 것이다.
믿음에 대한 이런 이해를 가지면서 우리는 “그러면 누구를 위해 이 믿음의 증거와 평가됨이 필요한 것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사실 모두를 위해 믿음의 증거와 평가가 필요 된다.
인간의 중심을 읽으시는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이러한 믿음의 평가를 필요로 하시지는 않는다. 하지만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다른 세계의 거민들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왜 우리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안전한지 납득시키기 위해 우리들 믿음의 객관적인 평가됨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또한 신앙의 척도가 필요한데 그 이유는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구별을 위해서이고, 진짜 믿음과 가장된 믿음의 식별을 위해서도 그 믿음의 정도를 재는 척도는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교회 사업에 필요한 사역자들에게 걸맞은 책임을 현명하게 부과하는 기준으로 그들의 믿음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약한 사람을 외국의 선교지나 아니면 힘든 국내의 개척지로 모르고 보냄으로 해서 손실이 큰 과실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우리 자신이 가진 믿음을 평가하기 위해 우리의 막연한 느낌이 아닌 객관적인 그 어떤 기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러한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의 수준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과 말다툼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즈음 네 믿음이 점점 약해져 오고 있다” 고 성령의 음성으로 알려 주실 때 , 우리가 “천만에요 하나님, 저는 제 믿음 상태에 대해 아주 만족하고 있는데요!” 라며 대드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래? 네 믿음의 증거를 보자. 네 믿음이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라고 여쭈어 보신다면, 우리의 믿음 상태에 대한 한 뚜렷한 자각이 우리 마음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이 믿음의 척도는 필요한 것이고, 이 척도의 방법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행함” 인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 결코 아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행함을 율법주의적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서로 상반된 개념인데, 율법주의는 사랑이 부재한 가운데 행해지는, 믿음으로 역사치 않은 행함을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예로 , 당신이 한 아침에 차를 몰고 출근하는 중이라고 가정해 보자. 당신의 집근처에 있는 사거리에 그 전에 없던 완전 정지 신호판이 새로 세워져 있음을 보고 그 신호판에 따라 차를 완전히 정지한 후 사거리를 지나간다. 하지만 당신은 그 새로운 신호판에 대해 별로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아, 속으로, “우리 시청에 참 바보 같은 직원들이 있어! 그 사거리에는 완전 정지 신호판이 있을 필요가 전혀 없는데 그런걸 세우다니 말이야! 참 바보 같은 짓이야. 하지만 만일 내가 그 신호판을 어기다 경찰에게 잡히면 벌금을 내야하니까 지킬 수밖에 없지.” 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이 경우 당신은 법의 규정에 준한 일을 행했지만, 이 행함은 믿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당신이 보여준 행함은 순전히 법에 저촉하여 생기는 결과에 대한 두려움의 동기에서 우러난 행함, 즉 율법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 행함에는 사랑의 동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 신호판을 세운 시청 직원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의 바램을 존중하려는 욕구가 당신에게 부재한 가운데 이행된 행함이다. 인간의 법은 이러한 종류의 준법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법에 준하는 겉으로 들어나는 행함만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이와는 다르다. 다시 한번 당신이 침례를 받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당신은 이 침례식에 대하여 별로 탐탁하게 생각지 않고 있다. 침례를 받기위해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속으로 “이 참 얼마나 고리타분하고 바보 같은 예식인가! 교회가 이런 식의 예식을 벌써 오래 전에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참 바보 같은 짓이야. 그렇다고 내가 만일 이 침례를 받지 않으면 멸망당할지도 모르니까 할 수 밖에 없지.” 라고 혼자 생각하며 침례를 받는다.
이렇게 침례를 받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행하였다 하더라도 사랑이 부재한 그 행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마지못해 순종하는 율법주의에 기반을 둔 행함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런 식의 순종이 문제되지 않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이런 순종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그 분은 우리의 행함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것이 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순전히 율법을 지키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무의미한 순종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신다. 오직 사랑으로만 역사하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열매들만이 영적인 에너지인 믿음을 재는 척도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그 분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여 침례식에 참여할 때 그것이 바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강조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의 한 실체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동일한 원리가 안식일 준수와 십일금 및 그 어떤 다른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따라서 주님을 믿는다 하는 이들 속에 내재하는 믿음이 객관적으로 관찰되는 행함에 의해서만 측정될 수 있는 한 에너지라는 원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평상시에 다른 에너지들에 항상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다. 열, 빛 혹은 전기의 에너지를 그들의 물체적인 치수나 부피로 재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에너지의 측정에 별 관심 없이 살아 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에너지의 측정기 자체를 측정되는 에너지와 결코 동일시하지 않으며 그 축정기가 에너지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우리는 다시 한번 이 진리에 대해 확실히 우리의 생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 믿음은 물체가 아닌 에너지이며, 따라서 그 믿음은 그것이 창출해 내는 행함으로 알 수 있고, 믿음을 나타내는 측정기로서의 행함 그 자체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 구원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고, 그 믿음의 진실성은 또한 진실된 믿음이 필연이 창출해 내는 열매들 즉 올바른 행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순수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한다. 그대들이 갈바리를 바라볼 때에 그대들의 영혼이 아무런 일도 행함이 없이 잠잠히 있거나 그대들 자신을 잠들도록 할 것이 아니며 예수님에 대한 믿음 곧 역사하시는 힘이 있고 이기심의 타락에서 영혼을 순결케 하는 그러한 믿음을 창조해 줄 것이다.” (영문 가려 뽑은 기별 2권 20 페이지 )
랄프 라슨(RALPH LARSON, 1920-2007) 목사는 60년간에 걸쳐 목사, 전도부흥 강사, 신학대학원 교수등으로 사역하였다. 아틀란틱 대학에 재직 중 앤도버-뉴톤 신학원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필리핀의 재림교회 신학원에서 교수로 일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100년간의 재림교회 기독론을 다룬 「말씀이 육신이 되어 (The Word Was Made Flesh)」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