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주요 교회 간행물에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토론 주제로 죄의 정의에 대한 한 신학자의 기사를 개재하였다.[1] 따라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베레아인의 안경을 꺼내어 성경을 연구하여 진리와 오류를 구분해야 할 때인 것 같다 (행 17:11).
해당 기사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그분에게 온전히 의지하며, 그들 앞에 펼쳐진 영원한 삶가운데 그분의 임재를 더 깊게 발전시키도록 창조되었음을 올바르게 언급하고 있다.[2] 또한 이 기사는 죄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이 설계하신 모델을 왜곡하고 파괴했다는 것도 올바르게 언급하고 있다.[3] 문제가 발생하는 부분은 이 기사가 죄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제시하면서, 성경에서 죄를 묘사하는 여러 방법이 실제로 동의어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점, 그리고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천적이고 본의와 상관없는 불수의적(不隨意的) 상태를 죄에 포함시키는 가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정의?
해당 기사는 성경에서 죄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의 정의를 제시하고 있다[4]:
-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
- 신성한 법을 어김
-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게 된 본의 아닌 상태
- 의무의 소홀
- 예수님의 주장을 거절함
기사의 저자는 원래 성경 언어에서 과녁을 빗나감, 왜곡, 범죄, 반역 등의 의미를 추출한다.[5] 저자가 “죄의 복잡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 기사는 악(evil), 죄책(guilt), 악행(wickedness), 불의(unrighteousness)와 같은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불결함(impurity), 기만(deceit), 오만(arrogance), 부당함(injustice)과 같은 더 구체적인 것까지 여러가지 용어로 구체화하고 있다.[6]
그러나 저자가 인식하지 못하는 바는 이러한 용어 중 어느 것도 옳고 그름에 대한 객관적인 척도가 식별되지 않는 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것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과녁을 빗나감”은 표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왜곡, 범죄, 반역은 왜곡된 이상, 범죄된 규범, 반역의 대상인 조직이 정의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또한 불의, 불결함, 부당함과 같은 단어는 의로움, 순결, 정당함이 정의되지 않는 한 기준을 제공하지 못한다.
더불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 관계의 매개변수와 구조가 명시되어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관계의 깨어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의무의 소홀은 의무가 어떤 객관적인 형태로 명시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으며, 예수님이 인류의 구세주라는 주장은 우리가 무엇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죄의 유일한 정의”
이 기사 내용을 비추어 볼 때, 죄에 대한 위에 나열된 이해 중 어느 것이든 명확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죄의 유일한 정의로 언급한 엘렌 화잇의 다음과 같은 진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이것이 성경이 주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7]
“우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定義)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씀이다.” [8]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에 대한 유일의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요일 3:4)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의 정부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사랑의 율법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정신의 표현이다.” [9]
“이제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이다.” [10]
“죄인을 그의 죄에 대한 인식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가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죄의 유일한 정의는 요한일서 3:4에서 주어진다.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11]
“죄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당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사도는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 4:15)고 말한다 [12]
“’죄를 짓는 자마다 율법을 범하는 것이니,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 이것이 성경이 주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이다.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늘의 하나님과 대적하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13]
“하나님의 말씀에 주어진 죄의 유일한 정의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으며, 변호나 변명도 있을 수 없다.” [14]
“모든 죄인은 자신의 선생에게 죄가 정말 무엇인지 물어볼 권리가 있다. 나에게 죄의 정의를 알려달라. 요한일서 3장에 그 정의가 있다.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체에서 주어진 죄의 유일한 정의이다.” [15]
“만일 사랑으로 역사하여 죄의 모든 오점으로부터 심령을 정결케 하는 믿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다. 그리스도는 죄의 목자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인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주어진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16]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지음을 멈추어야만 한다.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17]
어떤 이들은 성경에 있는 죄에 대한 다른 정의, 즉 로마서 14장 23절에 있는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는 말씀을 엘렌 화잇이 혹시 간과하지 않았는지 궁금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면 또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히11:6)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게 됨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유혹을 물리치는 유일한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일서 3장 4절과 로마서 14장 23절은 단지 같은 뜻을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나는가?
해당 기사는, 죄는 아담의 타락 후 태어난 모든 인간이 처한 상태라는, 원죄의 교리로 불리는 개념을 여러 성경 구절들을 인용하며 주장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이 구절들을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이 중 첫 번째는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지은 후에 한 잘 알려진 말로, 그것은 “내가 죄악 중에서 태어났고, 죄 중에서 내 어머니가 나를 배었나이다” (시편 51:5) 라는 성경절이다. [18]
그러나 이 구절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다윗이 죄로 둘러싸인 죄악적인 환경속으로 태어났음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구절은 “내 어머니가 나를 죄인으로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이나 주변 어느 구절도 죄가 본의와 상관없는 불수의적(不隨意的)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다.
이 기사에서 선천적 죄의 개념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한 또 다른 구절은 시편 58장 3절이다: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19] 그러나 이 성경절은 모든 인류가 태어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하지 않고 악인(wicked)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이다. 엘렌 화잇은 자녀 양육에 있어 부모들의 태만에 대한 그녀의 권면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이들이 제대로 훈련을 받기보다는 저절로 자라게 방치되고 있다. 이 불쌍한 어린 아이들이 열 달, 혹은 열 두달의 나이에는 잘못함을 바로잡는 교정을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고 생각되어 방치됨으로써, 그들은 아주 어릴 적에 벌써 완고함을 표출하고 있다.” [20]
“나는 어머니들이 그토록 맹목적이고 그들에게 맡겨진 책임에 대해 소홀한 것을 볼 때 어머니들에 대하여 특별히 근심하는 바이다. 그들은 불과 수 개월밖에 되지 아니한 고집 센 아이에게 사단이 역사하는 것을 본다. 간악한 격정이 충만한 사단이 아이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것처럼 보인다.” [21]
“어머니의 일은 어린 아기가 그녀의 팔에 안겨 있을 때부터 시작된다. 나는 자기의 뜻이 어떻게든 관철되지 않으면 몸을 내던지고 엉엉 울어대는 어린 아이들을 자주 보았다. . .이 어린 자녀들은 어떤 영이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식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판단력과 분별력을 행사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이다. 자녀들의 습관은 세심하게 지켜보아야 한다. 나쁜 성향은 억제되어야 하며 마음은 올바른 것을 좋아하도록 자극을 받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다스리려는 어린 아이의 모든 노력을 격려하라.” [22]
우리는 이사야 48장 8절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됨을 발견한다. 이 구절은 어떤 사람들을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로 묘사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 구절의 맥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그분의 말씀을 거부하고 그들 삶의 시작부터 불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에 대한 묘사가 아니며, 의지의 행동과 별개로 선천적인 육체적 충동에 대한 저주도 아니다.
해당 기사는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남을 증명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또 다른 성경 구절들(전 7:20; 사 64:6; 렘13:23, 17:9; 롬 3:23, 8:7; 엡 2:1,12,19; 요일 1:8)을 나열하고 있다.[23] 그러나 사실 이 구절들 중 어느 것도 인간이 죄인이 되는 시점으로서 출생을 말하는 것은 없다. 그 본질과 맥락에서 이 구절들은 모두 인간의 죄를 행위의 문제로 묘사하고 있다.
해당 기사는 또한 로마서 7장 15-25절의 잘 알려진 구절을 죄가 선천적 인간 본성의 일부라는 증거로 언급한다.[24]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구절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출생 본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단순히 그리스도와 동떨어져 있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다음 장의 첫 열세 구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롬 8:1-13). 사람들이 죄인이 되는 시점으로 출생을 결코 언급하지 않으며, 실제로 이 구절들에서 출생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로마서 7장 14-25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에서 그는 자신이 이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2절)되었음을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기”(4절) 때문이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자기]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한다(23절). 하지만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절)며 구원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그는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키고 있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하건데, 바울은 여기서 성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은 육신에 포로됨을 분명히 하지만, 이 구절 중 어느 것도 누구든지 태어날 때 육신에 포로가 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인류의 보편적인 죄악성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에서 기인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롬3:23; 5:12). 바울의 글이나 성경의 다른 곳에서 인간이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가르치는 곳은 없다. 우리의 선천적인 타락한 본성을 죄 그 자체로 동일시하는 공식은 성경이나 예언의 신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해당 기사는 또 타락 이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태어날 때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과의 분리가 죄의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죄가 하나님과의 분리를 초래하는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사 59:2)
아담의 죄가 이 분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의 죄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이 구절에서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이 성경말씀에 동의하고 있다:
“그분의 계명을 범하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키는 순간,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25]
“죄를 짓기로 선택함으로 인간은 저들 스스로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며 축복의 통로에서 저들 자신을 차단시키며, 그 분명한 결과는 패망과 사망이다.” [2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분리하지 않으신다. 단지 그 백성이 그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자신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킨다.” [27]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보존하는 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매달리는 한, 그들은 하늘 천사들의 보호아래 있게 되어 마귀가 그들을 파멸시킬 목적으로 그들 위에 사악한 계교를 행사토록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리스도로부터 자신들을 분리시키는 자들은 그 큰 위험에 당면하게 된다.” [28]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법적인 행위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발람의 모든 사술이 행할 수 없었던 일 곧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일을 행하였다.” [29]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많은 열매를 맺힐 수 있는 사람들이 재물을 모으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그 결과로 그들의 모든 정력을 그들의 사업에 바치게 되어 자연히 영적 사물을 등한히 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희 자신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지게 한다.” [30]
“그 거룩한 자”
해당 기사는 “그 거룩한 자”(눅 1:35)로 태어난 예수님과 나머지 인류를 대조하여 인간의 선천적 죄의 본성을 증명하려고 시도한다.[31] 그러나 이 주장은 그 다음 장에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는데, 누가복음 2장은 모세의 법을 인용하여 “태를 여는 모든 남자는 주께 거룩한 자라 불리리라”(눅 2:23)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여기서 모세의 법은 타락된 본성을 지닌 타락한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고대 선지자들을 거룩하다고 부른 것처럼(벧후 1:21), 그들이 타락한 인간 본성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약 5:17) 이 성경절은 그들을 거룩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유전된 육신적 본성을 정복하고(고전 9:27), “나 주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레 19:2; 레 20:7; 벧전 1:15-16)는 명령을 받고 있다.
엘렌 화잇은 이 구절(눅 1:35)이 단순히 예수님이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그분이 타락 후 태어난 나머지 인류와는 다른 육신적 본성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 거룩한 자’로 불렸다. 영감된 기록은 그리스도에 대해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벧전 2:22), ‘죄를 알지 못하셨고'(고후 5:21),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고 말한다. 그분은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신'(히 7:26) 분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스도에 관한 이 증언은 그분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음을 보여준다(롬 8:3).” [32]
예수님이 “죄를 짓지 않으셨고,” “그분이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다”는 사실이 여기에서 그분이 “그 거룩한 자”로 불리는 이유로 인용된 것을 주목하시라. 성경과 엘렌 화잇이 예수님 안에 “죄가 없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단순히 그분이 죄를 짓거나 죄악적인 욕망을 간직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지, 죄를 짓게 하는 내적인 충동을 그분이 느낀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33] 또한 예수님을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히 7:26)셨다고 선언한 성경절을 엘렌 화잇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기대되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대의 품성안에서 그리스도의 품성과 조화를 이루는 그 무엇이든지 배양하라. 진실되고, 정직하고, 공의로우며, 순수하고, 사랑스럽고, 선한 평판을 받는 것들을 소중히 간직하라. 그러나 우리 구속주와 닯지 않은 것은 모두 버리라. . .영생을 얻는 모든 영혼은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히 7:26)신 그리스도와 같아야 한다.” [34]
그녀는 더불어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구원받은 자들이 내부에 형성된 그리스도를 가짐으로 품성에 있어서 순결하고 거룩하고 더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 죄악 세상에 드러내시기 위하여 하늘로부터 죄 없는 존재를 보내셨을 때 하나님은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을 행하셨다.” [35]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처럼, 순결하고, 거룩하고 정결하게 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 [36]
성결된 신자는 여전히 타락한 인간 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 삶이 지속되는 한 그 본성의 욕망과 여전히 싸워야 한다는 같은 저자의 확언을 명심하시기 바란다.[37] 이것은 분명히 “거룩하시고, 해가 없으시고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들로부터 분리되”(히 7:26)”는 것이 그러한 타락된 본성을 소유하고 정복하는 것과 전혀 모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누가복음 1장 35절의 “그 거룩한 자”라는 구절은 영감의 글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다르게 유전된 인성으로 태어나셨다는 개념이나, 그분 인성의 순수함이 (성결된 그리스도인의 손에 닿을 수 없는) 태생이 다른 본성때문이라는 추정적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완전한 타락?
해당 기사는 “인간의 일부만이 아니라 완전히 전체적으로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죄에 의해 영향을 받고 부패하였다”라고 말한다.[38] 그러나 엘렌 화잇은 다음의 진술에서 이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그 이유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인류의 상태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인간이 본질상 정말 완전히 타락했는가? (Is man by nature totally and wholly depraved?)’ 라는 의문을 마음속에 품게 된다. 정말 인간은 절망적으로 몰락되고 말았는가 (Is he hopelessly ruined)?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 궁전을 떠나 우리 인성을 쓰고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분의 모본을 따라 우리 모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사셨다. 우리는 의의 모본이 되는 삶을 이 세상에서 완성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삶으로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도 죄를 이길 수 있다. 위대한 모본 되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신 것과 똑 같이 인류도 그 죄를 이길 수 있음을 그 분은 드러내 보이셨다.” [39]
본 비평문은 그리스도론의 질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위의 진술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는데, 인류가 “본질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인간 본성”을 취하시고 오셨기 때문이다. 죄가 아담의 타락 후 태어난 인간의 모든 부분을 본의와 상관없이 불수의적(不隨意的)으로 부패시킨다면, 위의 진술은 우리 자신과 인간 그리스도 모두에 대해 틀린 기술이 될 것이다.
결론: 얼마나 더 많은 정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결론적으로 요약하자면, 죄의 정의를 미묘하고 복잡하게 제시하려는 일부 사람들의 시도는 영감의 글들이 보여주는 의견 일치와 단순한 논리를 모두 거역하고 있다. “과녁을 벗어남”에서 “왜곡”, “반역”, “관계의 깨뜨림”, “불순함”, “부당함”, “악행”, “불의” 등 모든 것을 포함하는 “죄의 복잡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신성한 율법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객관적인 표준을 도입하기 전에는, 그 의미가 전혀 없다.[40] “죄는 곧 율법을 범하는 것이라”는 요한일서 3장 4절을 성경에서 발견되는 죄의 유일한 정의로 제시한 엘렌 화잇의 반복적인 주장은 성경 전반의 메시지와 일치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논리적이다. 선택과 행동을 측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표준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게 되고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는 올바로 정의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 없게 될 뿐이다.
[ 원문 출처: “How Many Definitions?” ]
참조 문헌 (REFERENCES)
1.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2. Ibid.
3. Ibid.
4. Ibid.
5. Ibid.
6. Ibid.
7. Ellen G. White, SDA Bible Commentary, vol. 7, p. 951.
8. Selected Messages, vol. 1, p. 320.
9. The Great Controversy, p. 493.
10. Faith and Works, p. 56.
11. Our High Calling, p. 141.
12. Review and Herald, June 10, 1890.
13. Ibid, June 15, 1890.
14. General Conference Bulletin, March 2, 1897.
15. Sermons and Talks, vol. 1, p. 228.
16. Signs of the Times, Nov. 24, 1887.
17. Ibid, March 3, 1890; see also Confrontation, p. 75; The Upward Look, p. 371.
18.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19. Ibid.
20. Review and Herald, March 28, 1893 (italics original).
21. Child Guidance, p. 289.
22.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p. 150.
23.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24. Ibid.
25. Review and Herald, July 12, 1887 (italics supplied).
26. Selected Messages, vol. 1, p. 235.
27. 1888 Materials, p. 1011 (italics supplied).
28. Maranatha, p. 95.
29. Patriarchs and Prophets, p. 455.
30. Christ’s Object Lessons, p. 51.
31.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32. Signs of the Times, Jan. 16, 1896.
33. The Desire of Ages, p. 123; The Great Controversy, p. 623.
34. In Heavenly Places, p. 160.
35. Manuscript Releases, vol. 9, p. 125.
36. Sons and Daughters of God, p. 102.
37. Acts of the Apostles, pp. 560-561; Prophets and Kings, p. 84; Counsels to Teachers, p. 20; Selected Messages, vol. 2, p. 33; SDA Bible Commentary, vol. 2, p. 1032; From the Heart, p. 297.
38.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39. Manuscript Releases, vol. 9, p. 238.
40. https://adventistreview.org/magazine-article/of-the-nature-and-definitions-of-sin/
케빈 폴슨(KEVIN PAULSON) 목사는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졸업 후 로마린다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으로 석사학위,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뉴욕합회에서 성경교사, 전도목사, 목사로 목회에 역임한 바 있다. 지금은 재림교회의 종교자유 전문지 리버티(Liberty) 등에 기고하는 작가로 활동하며 미시간의 베리언 스프링즈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