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 문서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 재림교회의 시작부터 1950년대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재림교회의 이해를 살펴본다.
  • 엘렌 화잇의 글을 해석하는 최선의 방법을 검토한다.
  •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검토한다.
  •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출판된 주요 진술들을 살펴본다.
  • 그녀의 “출판되지 않은” 주요 글인 베이커 편지 내용을 분석한다.

이 접근 방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를 더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그리스도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영감의 글들이 예수님과 그분의 신성과 인성의 결합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1950년대까지의 재림교회와 그리스도의 본성

엘렌 화잇이 1895년 윌리엄 L. H. 베이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가 1957년에 출판될 때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해 통일된 이해를 제시했다. (이 주제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를 제공하는 두 권의 책은 랄프 라슨(Ralph Larson)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Was Made Flesh)와 진 주커(Jean R. Zurcher)의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심(Touched With Our Feelings)」이다.)

베이커 편지가 출판되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재림교회의 접근 방법은 로마서와 빌립보서 그리고 히브리서의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그 주제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엘렌 화잇의 인용구를 그녀의 다른 인용구들과 대치하지 않았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안에서 널리 수용된 견해는 예수님이 아담이 타락한 후에 초래된 인성, 즉 당신과 나처럼 타락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1957년, 화잇부인이 윌리엄 베이커에게 보낸 1895년의 사적인 편지에서 발췌한 부분이 QOD의 부록 B,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의 본성”에 포함되었다. 이 부록은 엘렌 화잇의 인용문들을 사람들을 호도하는 방식으로 배열한 것이었다.

제목이 편집자들에 의해 제공되었는데, 이 제목들 중 일부는 화잇부인이 쓴 글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주요 진술들은 편집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제공된 진술들은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강조점으로 독자들을 이끌기 위해 이탤릭체로 표기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편집자들이 선호하는 생각과 모순되는 정보를 제거하기 위해 서너개의 점들로 엘렌 화잇의 진술 문장을 생략하는 행태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베이커 편지의 내용은 마치 선택된 단편들이 별도의 문서임을 나타내는 것처럼 재림교회 성경주석 제5권의 뒷 페이지로 부터 여러 번 반복되었다. 이런 서커스의 배경에서 제시된 인용문들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재림교회의 관점을 수정하는 근거로 제공되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하나님의 진리에 전념하는 사람들이다. 그 진리가 무엇이든, 우리가 그것을 어디서 발견하게되든, 하나님께 충실하기 위해 우리가 지닌 이해를 바꿔야 할지라도, 재림교인들은 진리를 따르기 위해 헌신한다. 만약 우리가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진심으로 수정된 관점으로 바꾸기를 원한다. 그러나 연구와 조사를 통해 우리의 관점이 재확인된다면, 우리는 그것을 견지하는 것에 매우 전념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진실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을 원한다.

해석학과 그리스도의 본성

영감을 받은 저자가 말하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해석학(Hermeneutics), 즉 해석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성경 해석 규칙을 검토해 보면 유익할 것이다:

(1) 질문에 대한 영감을 받은 모든 진술 자료를 수집한 다음 그 증거의 무게를 고려하여야 한다. 대부분의 구절들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어떤 부분들은 때때로 곤혹스럽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다른 진술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걸핏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몇 가지 진술들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는 그것들이 더 많은 진술들의 집합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문장과 짧은 인용문의 의미는 저자가 제시하는 단락과 긴 구절의 주위 맥락에서 신중하게 고려하여 결정하여야 한다.

(3) 덜 명확한 구절을 해석할 때 더 명확한 구절로 하여금 안내토록 하라.

(4) 저자의 의도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저자들의 원래 상황에서 그들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새로운 해석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5) “주재” 구절들이 설명을 인도해야 한다. “주재”라는 개념은 선생님이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이것들은 주어진 가르침에 대해 가장 집중적인 가르침을 제공하는 구절들을 지칭한다. 예를 든다면, 천연기에 대한 주재 구절은 요한계시록 20장이며, 세 째 천사의 기별을 위한 주재 구절은 요한계시록 14장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주재 구절은 출애굽기 20장이며, 창조에 관한 주재 구절은 창세기 1장이다.

(6) 장르를 고려하라. 다른 종류의 영감의 글은 다른 기능을 담당한다. 창세기처럼 “이야기의 서술”은 매우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세상은 문자 그대로 하루가 24시간인 여섯 날 동안에 창조되었고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다. 그러나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종말론적인” 장르의 글은 많은 것들이 비유적이다. 하루는 1년을, 별은 교회를, 짐승은 왕국을 나타기도 한다.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는 것은 영감을 받은 저자가 제공한 장르의 특성에 따라 해석하는 것을 포함한다.

내가 교회 제직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떠나면서 아내에게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다고 하자. 아내는 나에게 가게에 들러 바나나를 사오라고 문자를 보낸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가 식료품을 배달할 주소를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 둘 다 우리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고 내가 집에 가는 중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나누는 의사소통의 종류가 어떤 것은 말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세부사항은 메시지에 포함되는지를 결정한다.

성경의 기별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작동한다. 고린도 전서는 개인적인 편지라기보다는 널리 전해지는 편지에 더 가깝다. 그것은 여러 청중에게 읽혀지도록 조심스럽게 쓰여졌다. 개인적인 편지는 다른 장르이다. 그런 장르에서는 작성자와 수신자가 대화하는 특정 요점의 맥락을 이미 공유하고 있다. 요한삼서나 빌레몬과 같은 같은 개인 편지서의 저자는 종종 다른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자료를 빠뜨린다. 작성자와 수신자가 서로 정보를 이미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작성자로 하여금 정보를 생략할 수 있게 한다.

엘렌 화잇이 윌리엄 베이커에게 쓴 편지가 바로 이러한 개인 편지 장르에 속한다. 화잇부인이 “성향”과 초기교회 “교부들”의 글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들의 대화를 들여다 보는 외부인들 보다 베이커는 그녀가 무엇에 대해 말하는지 곧바로 이해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화잇부인과 베이커는 둘 다 “인성이 신성과 결합된 정확한 때를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21.1)는 화잇부인의 말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엘렌 화잇이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이들은 그녀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것에 대한 소문을 모으고 있었다. 이것이 야기한 혼란 때문에, 그녀는 “주님이 그녀[화잇자매]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셨는지 알고 싶다면, 그녀의 출판된 책들을 읽으라”(1888년 자료, 329쪽)고 조언했다. 그녀의 “출판된 책들”은 널리 이용 가능하고 검증 가능했다. 그녀가 발표한 글들은 의도한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준비되었다. 그녀의 글들은 그당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한 기독교에 대한 이해만을 가정했다. 이것은 출판되는 글의 기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기본 전제는 화잇부인의 사적인 서신에 있는 글의 내용이 그녀가 출판한 글에 있는 내용과 일치할 것이라는 점이다. 영감을 받은 글은 영감을 받은 글과 일치한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베이커 편지 자체를 고려하기 전에 성경말씀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에는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타락한 인류와의 밀접한 동질성에 대한 암시적이고 명시적인 정보가 풍부하다.

출애굽기 3장 2절에서 예수님은 타오르는 미천한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신다. 출애굽기 21장 8절에서 그분은 장대 위의 뱀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모세는 예수님을 인간 형제들 가운데서 일어날 자기와 같은 선지자로 예언한다. 시편 8편은 창조되었을 때 창조주께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운 존엄성을 지닌 인간을 묘사한다. 히브리서 2장은 고통받고 동정하는 인자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쓴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언급을 보여준다. 이사야 53장 2절에서는 예수님이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로 예언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장 4절과 11절에서, 그는 우리의 채찍으로 상처를 입었고, 우리의 비통함과 슬픔과 질고를 지고 갔으며, 그가 받는 징벌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게됨을 묘사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80번 이상 “인간의 아들”로 언급되고 있다. 그럼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모든 사람의 아들들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서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임을, 8장에서는 예수님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음을 알려준다.

빌립보서 2장 5~13절에서 바울은 믿는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를 간청하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비우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사람의 육신에 있는 동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였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2장 5~18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예수님이 다른 모든 타락한 사람들과 같은 종류의 인성을 취하셨고 모든 일에서 자기 형제들과 같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14~16절에서 영감을 입은 저자는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다고 묘사한다. 이렇게 성경의 증거는 실질적이고, 단호하며, 명확하다.

히브리서 2장의 연구

그러한 성경 구절 중 하나인 히브리서 2장을 택해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히브리서의 첫 7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로 제시한다. 속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천사, 모세, 그리고 레위기의 제사장에 비유된다. 예수님의 인성은 속죄와 죄의 극복과 연결되어 있다.

2장 5절부터 살펴보면, 예수님의 속죄룰 위한 사명이 묘사되어 있다. 바울은 다가오는 세상, 곧 미래의 이 땅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지구는 인간에게 종속되어졌다. 인간의 창조적 존엄성을 묘사한 시편 8편이 인용된다. 인간은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져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지고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 위에 세우심을 받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직 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바울은 죄의 문제, 루시퍼의 반란, 인간에 대한 마귀의 유혹, 그에 따른 인간의 몰락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죽음이 들어왔다. 예수님은 그분의 피조물을 회복하시기 위해 똑 같이 손상된 인성을 취하고 오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음을 맛보시고 속죄를 제공하였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인성과 그들을 구원해 주실 분의 인성은 이 장 전체에 걸쳐 명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2장 7절과 9절을 참조하라.

다음은 10-13절을 살펴보자. 아버지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인도함에 있어 인간의 고난을 경험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한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하나에서 무엇이 난 것인가? 하나의 공통된 인성이다. 예수님은 타락한 우리 인간을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신다.

그런 다음, 히브리서의 저자는 시편 22편을 인용한다. 이 성경절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예언한다. 하지만 이 시편에는 두 부분이 있다: 후자에서 저자는 그의 희생이 받아들여진 것을 기뻐한다! 희생을 위한 성경의 세부 사항들이 주의 깊게 명시되어 있다. 제물은 순결해야 하며,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적합해야 한다. 타락한 인간들을 위한 제물로서 예수님은 우리와 공통된 우리의 육체를 지녀야만 한다. 동시에, 그는 죄를 지으면 안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히브리서 2장에 인용된 다음 구절은 이사야가 자신과 자기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다고 말하며 자신의 사명을 적시한 이사야 8장의 설명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예언적인 뜻이 있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사야와 그의 자녀들이 지닌 이스라엘과의 연결을 예수님과 이스라엘과의 연결되는 유사점으로 사용한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을 친밀하게 연결시키는 것이다.

14절에서 우리는 대제사장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성을 공유할 필요성을 보게된다. 성경 기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셨다고 말한다. 사단의 힘을 무력화시키고, 죽음의 종노릇하는 우리 모두를 놓아 주기위해 예수님이 죽는 것이 필요했다. 여기서 우리는 에굽과 모세와 유월절과의 유사점을 보게된다. 예수님은 백성을 인도한 모세와 같다. 동시에 그분은 유월절 제물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사들을 도우려고 오시지 않았다. 그의 낮아지심은 그분을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게 하였다. 그는 아브라함의 씨앗을 돕고자 하였다! 영감을 받은 저자는 예수님이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함을 강조한다. 우리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필요하고 죄의 구속이 필요하다. 따라서 18절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4장 15절은 예수님이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또한 함께 느끼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히브리서 2장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히브리서 2장은 확실히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교리의 중심지”이다. 이 구절들은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을 속죄하는 것과 관련된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짧은 하나의 샘플에 불과하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 인성이 바로 구원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성, 정확히 바로 그 인성에게 죄를 극복하신 예수님의 모본이 가장 중요시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그 예수님을 궁극적인 모본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법을 알고 싶으신가? 예수님을 바라보라. 어떻게 죄를 극복할까? 예수님을 바라보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을까? 예수님이 믿음의 주요 또 완전케 하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엘렌 화잇의 견해는 초창기 재림교인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 주제에 대해 그녀에게 알려준 구절들은 동일했다 (로마서 8장, 빌립보서 2장, 히브리서 2장과 4장). 이 주제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해를 알고자 한다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된 같은 해석 원칙을 우리가 따라야 한다. 즉, 우리는 이 주제에 대해 그녀가 쓴 모든 글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녀는 어떤 자료들은 폭넓은 출판물과 일반 독자층을 위해서 준비하였다. 그리고 다른 경우에, 그녀는 개인에게 사적인 편지를 썻다. 그럴 때 그녀는 특별히 자신과 자기 편지를 받는 사람사이에 알려진 특정한 점들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들을 우리가 반드시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사적인 편지를 읽을 때 기억할 바는, 우리가 그들이 공유한 정보와 맥락 밖에서 그 글을 읽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녀의 모든 글이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녀의 출판된 글이라는 그룹과 출판되지 않은 그녀의 사적인 편지 형태의 그룹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엘렌 화잇의 출판된 진술들

우리는 출판된 엘렌 화잇의 책 「시대의 소망」에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다룬 그녀의 주요 진술들을 발견한다. 다음과 같은 진술들이 그것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죄를 짓지 않았을 때에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취하는 것은 거의 무한한 굴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인류가 4천 년간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때에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아담의 모든 자녀들과 같이 위대한 유전의 법칙이 끼쳐온 결과를 받아들이셨다. 이러한 결과가 어떠하였는지는 그분의 육신의 조상들의 역사 가운데 드러나 있다. 그분은 이러한 유전을 지니고 우리의 슬픔과 시험을 공유하시며 우리에게 죄 없는 생애의 모본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이, 사단이 통치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연약함을 가진 무력한 어린 아기로 오는 것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인간으로서 누구나 당하는 인생의 위험을 겪고 또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싸워야 할 싸움을 실패와 영원한 손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는 것을 허락하셨다.” (49쪽)

“사단은 하나님의 율법은 불공평하고 순종할 수 없다는 증거로써 아담의 범죄를 지적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실 것이었다. 그러나 유혹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 아담은 아무런 죄의 영향을 입지 않았다. 아담은 완전한 장년으로 몸과 마음에 충만한 활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에덴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었고 날마다 하늘의 천사들과 교통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사단과 상대하기 위하여 광야에 가셨을 때에는 그렇지 못했다. 4천 년간 인류는 체력과 정신력과 도덕적 가치에 있어서 퇴보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퇴보한 인류의 연약함을 취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만 그분은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할 수 있으셨다.

많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시험에 정복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처지에 서지 못하셨을 것이며, 아담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수 없으셨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어떤 점으로든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보다 더 혹심한 투쟁을 당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구주께서는 온갖 연약성을 지닌 인성을 취하셨다. 그분은 시험에 굴복할 가능성을 가진 인성을 취하셨다. 우리는 그분께서 당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도 짊어질 것이 없다. . . 멸망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곳에서 우리의 구속 사업이 시작되어야 한다. 아담이 식욕의 방종에 의해 타락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식욕을 극기하심으로 승리하셔야 한다. . . 아담의 시대부터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자아 방종은 식욕과 정욕의 세력을 점점 증가시켜, 마침내 그것들이 거의 무제한으로 사람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사람은 타락되고 병들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여 가장 혹심한 시험을 견딤으로 이기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굶주림이나 죽음보다 더 강한 자제를 행사하셨다.” (117쪽)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 폭풍을 대하셨을 때 그분은 극히 평온하셨다. 그분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말이나 표정에 두려워하시는 기색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당신이 가지신 전능하신 능력에 의뢰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조용히 쉬신 것은 ‘땅과 바다와 하늘의 주’의 입장에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을 그분은 버리셨던 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하늘 아버지의 능력에 의뢰하셨다. 예수께서 쉬신 것은 믿음 곧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였으며 폭풍을 잔잔하게 한 그 말씀의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336쪽)

이 단락들은 엘렌 화잇이 영감을 받고 모든 독자들을 위해 출판한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담은 정제된 진수이다. 명확한 구절은 덜 명확한 구절의 해석을 유도한다.

예수님이 인류가 몇 천 년간의 죄로 말미암아 연약하여진 후의 인성을 취하셨음을 주목하기 바란다. 그는 “인간으로서 누구나 싸워야 할” 싸움을 치루었다. 당신과 내가 그 “인간으로서 누구나”에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그 싸움에 어떻게 임해야 하는가? 손상된 육신으론가, 아니면 손상되지 않은 육신으론가? 어떠한 인성으로 예수님이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려 하셨는가? 엘렌 화잇은 “우리와 같은 인성으로”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인성을 취하시고 인류를 “쇠퇴의 깊은 구렁”에서 구출할 수 있으셨다.

“우리 구주께서는 온갖 연약성을 지닌 인성을 취하셨다.” “우리는 그분께서 당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도 짊어질 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혹심한 시험”을 견딤으로 이기셨다. 이 모든 진술들은 예수님이 어떤 인성을 취하셨는지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이것들은 그녀의 출판된 진술로서, 그녀의 가장 신중하고 광범위한 독자층을 위해 제시한 자료이다.

엘렌 화잇의 출판되지 않은 진술들 (베이커 편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 “타락전 인성론” 이나 “복합적/대안적 인성론”을 주장하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뒷바침하기 위해 자주 인용하는] 윌리엄 베이커 목사 부부에게 보낸 화잇부인의 사적 편지서를 살펴보고 분석해 보기로 하자. 우리는 이 편지서 전문과 색상으로 강조 표시된 특정 단락을 담은 두 페이지 유인물을 참고자료로 제공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목록 번호로 사용하는 숫자는 화잇유산관리위원회에서 공개한 문서 1002호의 페이지와 단락 번호를 지칭한다. 예를 들자면, “18.1”은 18페이지 1 단락을 의미한다.

[참고 자료]

(1) 13 MR No. 1002 “The Baker Letter” 원문
(2) “The Baker Letter”의 그리스도의 인성과 관련된 문단 도표

베이커는 누구였는가?

윌리엄 L. H. 베이커는 미국에서, 그리고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일하였던 교회의 사역자였다. 그의 경력은, 순서대로 열거하자면, 재림교회의 인쇄와 출판 사역자, 그 후 복음 전도자, 행정가, 대학 성경교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목으로 일했다. 1895년 엘렌 화잇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그가 설교자 보다는 (16.2, 3; 22.3; 23.0; 28.3) 책을 읽고 연구하는 유형의 사람이었고 (20.2, 3; 22.3; 23.0; 28.3), 우울과 낙담에 빠지는 개인적인 경향이 있었으며(14.1), 적어도 그의 초기 사역 시절에는 선도적이기 보다는 따르는 경향이 더 있었음(17.2; 23.3; 28.2)을 추론할 수 있다.

베이커 편지에는 뭐라고 쓰여 있는가?

이 편지에서 엘렌 화잇은 베이커 부부가 선교지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을 보고 격려를 하려고 노력하였다(14.1). 윌리엄 베이커는 복음전도의 현장 사역보다 출판사역에 더 익숙했고, 신학적인 교리를 강론하는 것보다 책을 연구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의 우울한 성격으로 인해 이 복음전도 사역의 기간이 그에게는 힘든 시간이 되었다.

화잇부인의 편지 대부분은 그에게 더 적극적으로 개인 사역과 설교에 임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그에게 (초기 교회의) 교부들의 글과 추측에 근거한 질문 또는 인간의 전통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녀는 그에게 더 많은 개인적인 복음사역에 주력하고, 일하는 방법에 대해 멀리있는 지도자들의 조언에 덜 의존하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제 5개의 핵심 단락에 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18.1,2; 19.1-3.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베이커의 가르침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문 외에, 이 단락들의 주요 내용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인성이 아니라 그분의 신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베이커 문서에 있는 주요 문단을 색상으로 강조 표시한 도표를 보면, 인성에 대한 내용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한 노란색을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녹색으로 표시된 몇 개의 단락은 신성과 인성의 조합을 가리키고 있다. 오렌지색 배경은 18.1단락에 있는 성향과 관련된 문구를 표시한다. 그리고 파란색 배경은 의지의 행동을 나타내고, 굵은 글씨는 시험당함에 대한 문구를 표시한다. 이러한 표시들은 여러분이 편지의 이 부분에서 구별되는 강조점을 빨리 찾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베이커의 편지를 전부 읽었다면, 22.3단락에서 화잇 부인이 베이커에게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의견에 연연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그 교부들의 의견이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초기 교회 교부들에 의해 쓰여진 글들의 집합체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여러분이 전통에 관심이 많다면, 여러분은 교부들의 1,600만 단어를 재현한 38권의 책 세트에 매우 흥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 교부들이 토론한 가르침 중 하나가 소위 “양자주의(Adoptionism)”다. 그 이론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는데, 기본적인 논조는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인간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때 피조물이었지만, 그의 모범적인 삶 때문에 그가 신격의 하나로 “입양”되었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견지한 이들은 예수님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필연적인 주요 쟁점은 “언제”라는 질문임을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여러분이 화잇의 편지를 읽으며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녀가 19.1단락에서 베이커에게 “인성이 신성과 결합된 정확한 때를 우리가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입양되고 인성이 신성과 결합된 시기가 있었음을 그녀가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곰곰히 생각해 볼만한 유익한 질문이 아니라고 베이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우스파의 가르침은 양자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예수님을 영원토록 아버지와 함께 존재하지 않은 최초의 피조물로 여기고 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을 신이라고 하지만, 그분은 영원히 하급의 신으로 취급된다.

베이커가 양자주의에 대한 가르침에 잠시나마 몰입하고 있었다면 편지에 담긴 화잇 부인의 우려는 쉽게 들어 맞는다. 양자주의의 일부 유형은 예수가 완전한 극복자가 되어 신격으로 “입양”되기 전에 그의 삶 초기에 죄를 지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베이커가 양자주의에 어느정도 몰입하고 있었고, 바로 이것이 그에게 보낸 화잇부인의 편지에서 경고하고 있는 한 가지 요점이라고 처음 제안한 분은 랄프 라슨(Ralph Larson) 목사였다.  만약 당신이 “양자주의자”의 글을 읽는다면, 그 가르침의 신학적 오류가 베이커에게 보낸 화잇부인의 편지에 표현된 우려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베이커의 그러한 사조에 대한 추측적인 관심은 엘렌 화잇의 실제적이고 영혼을 구하려는 걍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친절하지만 실용적인 방법으로 단호하게 글을 써서, 그에게 더 이상 교부들의 글과 상종치 말고 영혼을 구하는 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화잇부인이 베이커에게 예수의 인성에 대한 그의 주장에 대해 경고하지만, 이 편지에서 그녀의 주요 강조점은 예수의 신성에 있다. 예수님은 신이시다. 그녀는 베이커에게 예수의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었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말하면서, 예수가 결코 죄를 선택하지 않았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녀는 예수가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고, “반응하지” 않았으며, 사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셨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베이커가 예수는 단지 하나님이 된 사람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는가? 그렇다면 신성과 인성이 예수 안에서 결합됐음을 강조하는 화잇부인의 글과 인간에서 신으로 ‘존재의 전환’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조사하려 하지 말라는 경고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그녀의 강조는 논리적이다.

하지만 다른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엘렌 화잇이 18.1단락에서 사용한 “성향”이라는 단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녀는 베이커에게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죄의 성향(propensities of sin)”을 가진 사람으로 제시하지 말라고 편지에 썻다. 그녀는 아담의 죄로 인해 그 후손들이 “선천적인 불순종의 성향(inherent propensities of disobedience)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를 지을 수도 있었지만, 단 한 순간도 그분 안에 “악한 성향(evil propensity)”이 없으셨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향(propensities)”은 단순히 “경향(tendencies)”이다. 이것이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이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생긴 어떤 것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가 결코 죄를 지은 적이 없으으므로, 그 안에는 개인적인 죄에서 유래하거나 발전하거나 뿌리내린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악을 선택한 적이 없고, 따라서 자신 안에서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성향도 개발시킨 적이 없기 때문에 ‘악한 성향’이 있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그런 성향을 “소유”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어떤 “본성적인 성향”에 의해서 결코 정복되지 않았다.

엘렌 화잇이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를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비교하는 것을 알아차렸는가? 18.1단락에서 아담은 순수하고 에덴에서 시험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광야에서 시험을 당한다. 더불어 화잇 부인은 아담이 죄를 선택한 것과 예수님이 죄를 선택치 아니한 것을 비교한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심지어 19.3단락에서 다시 그들을 비교한다. 그녀는 아담은 타락했지만 예수님은 “가장 심각한 시련의 상황 하에서” 견뎌냈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이 글은 1895년에 쓰여졌다. 불과 몇 년 후, 그녀는 「시대의 소망」에서 예수님이 “우리가 견딜 수 있는 모든 것을 견디셨다”고 기술했다 (123쪽). 그녀는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손상된 본성에서 극복하셨고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것 처럼 극복하셨다고 단언하며 강조한다.

중요한 점은 죄는 결코 유전된 상태가 아니라 항상 개인적으로 선택된 행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18.1단락에서 화잇부인은 아담이 “타락할 수 있었고, 그는 범죄함으로 타락했다”고 썼다. 19.1 단락에서 화잇부인은 베이커에게 매우 명확하게, 예수님이 “어떤 식으로든 부패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조금이라도 남기지 말라고 요청했다. 19.3단락에서 그녀는 예수님이 사단의 시험에 반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하며, 그분이 시험에 반응하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한 순간도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셨다.” 죄를 짓는 것은 범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범법하기로 선택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화잇부인의 글로 하여금 그녀 자신의 글을 해석하도록 우리를 안내할 때 이 모든 것이 잘 이해된다. 그녀는 이 “성향”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인들이 보유할 필요가 없는 것을 뜻하기 위해 사용했다. 1900년 4월 24일자 리뷰와 헤럴드에서 그녀는 “우리는 하나의 죄악적인 성향도 유지할 필요가 없다”라고 기술하였다.

우리의 이해를 돕는 유사성을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베이커의 편지는 1895년에 쓰여졌다. 「시대의 소망」이라는 책은 1898년에 출판되었다. 이 엘렌 화잇의 책이 출판되었을 때 그 책 122쪽과 123쪽에서 그녀는 베이커에게 보낸 이 1895년의 사적인 편지에 있던 이전의 논점을 더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시대의 소망」에서 그녀는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광야에서 유혹과 싸우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895년 편지에서 그녀가 요한복음 14장 30절을 인용하고 논평한 것처럼, 1898년의 「시대의 소망」에서 화잇부인은 바로 그 성경절을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요 14:30)다고 말씀하셨다. 그분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사단의 궤변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분은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생각으로라도 시험에 굴복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었다. 그분은 성령의 내재하심으로 투쟁할 태세가 되어 있으셨다.” (소망, 123)

예수님 안에서 “아무것도”는 그분안에서 죄에 반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그분은 죄를 짓기로 동의하지 않으셨다”고 썼다. 엘렌 화잇은 일관성이 있다. 「시대의 소망」 독자들은 초기 교회 교부들의 의견에 관심을 두고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 책에서 양자주의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에 대해 “그 안에 생명이 있고, 독보적이며, 빌려오거나 파생된 것이 아니다”(520쪽)라는 반양자론적 견해를 밝혔다. 화잇부인은 베이커가 초기 교회 교부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후인 1898년에 이 글을 쓴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시대의 소망」은 의심할 여지 없이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그녀의 선언문이다. 우리는 이 책이 그 주제에 대한 그녀의 우선적이고 출판된 가르침을 구성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여기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 엘렌 화잇의 모든 출판된 글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글들과 대조해 이 한 가지 예외,  즉 “예수가 [죄로 부터] 면제되었”음을 지탱하기 위해 출판되지 않은 베이커 편지에 가해진 QOD에 포함된 특정한 해석이 있다. 그런 추측적인 근거에 그렇게 많이 의존하는 것은 건전한 해석이 아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베이커의 편지와는 달리,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출판된 글 중 최고작인 「시대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엘렌 화잇의 영감을 받은 견해를 알고 싶다면, 「시대의 소망」이 바로 그녀의 가장 명확하고 가장 의도적인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출판된 글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독자에게 세심하게 준비된 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에 저자와 독자 사이의 정보 격차는 훨씬 작다. 대조적으로, 베이커 편지는 빠르게 쓰여진 사적인 편지였다. 똑같이 영감을 받았지만, 그것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알고있는 배경하에 쓰여졌다. 여러분이 친구나 가족 구성원과 함축된 대화를 하는 것처럼 화잇부인과 베이커가 함축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서로 대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과 엘렌 화잇의 출판된 글들은 예수님이 타락한 후 아담의 본성을 취했다는 매우 명확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여기서 우리가 왜 그렇게 많은 귀중한 시간을 성경 구절과 「시대의 소망」에 있는 엘렌 화잇의 진술을 재차 언급하는데 쓰는지 물어볼 수 있다. 왜 필자가 성향이라는 단어를 미세 분석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근본적인 전제를 기억하시기 바란다: 영감을 받은 글은 영감을 받은 글과 일치한다. 그리고 엘렌 화잇의 글은 엘렌 화잇의 글과 일치한다. 좀 더 명확한 구절들은, 바로 그들의 명확성 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덜 명확한 종류의 글을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를 안내한다. 출판된 글들은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해에 필요한 문맥적 도움을 매우 의도적으로 제공할 수 있도록 신중하게 쓰여진다. 하지만 개인 편지는 다르다. 그것들은 한 특정한 장르로서, 독특한 유형의 글이다. 저자와 독자는 의사소통의 지름길을 택할 수 있다. 그들외의 독자들은 이러한 개인적 정보가 부족하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서 사실들을 더 넓게 볼 수 있고, 성경과 엘렌 화잇의 다른 글들 사이에 일치함을 볼 수 있으며, 전반적인 증거의 무게에 힘입어 엘렌 화잇의 그 어떤 진술들을 다른 진술들과 경쟁하게 만드는 부실한 해석들을 재평가하도록 촉구함을 깨달을 수 있다.

결 론

결론적으로 1957년, 교리에 대한 질문」에 제시된 신신학의 주창자들은 72년 동안 문서보관서 파일에 저장되어 있던 사적인 편지에서 특정한 발췌문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그들은 화잇부인이 윌리엄 베이커에게 보낸 편지에 특정한 해석을 가하여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결정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 이것은 부실한 해석학이었다. 이런 변경은 성경의 직접적인 증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취했다는 재림교회가 한 세기 동안 견지해왔던 가르침을 무시하고 엘렌 화잇의 어떤 진술들을 무시하고 다른 진술들은 극단적으로 재해석하는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하였다.

우리가 1950년대까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재림교회의 가르침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화잇부인이 이 주제에 대해 발표한 글들을 검토해 볼 때, 답은 분명해진다. 그녀의 출판된 글들과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서 사적인 베이커 편지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베이커 편지가 다른 자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란을 초래한 것은 화잇부인의 모호함이 아니라 「교리에 대한 질문」의 저자들에 의해 자행된 해석학적인 부정행위였다. QOD의 저자들은 본 연구의 시작에서 검토한 여섯 가지 해석학적 원칙을 각각 위반했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오늘날 베이커 편지에 대한 QOD의 편향된 해석을 제쳐두고 성경과 엘렌 화잇의 출판된 글에 있는 증거의 무게와 쉽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해석의 신중함은 하나님의 교회를 돕고 엘렌 화잇의 그리스도론에서 미스터리를 제거할 것이다.

[ 원문 출처: “Ellen White’s Christology Demystified” ]


래리 커크패트릭(LARRY KIRKPATRICK) 목사는 서던 재림 대학교(Southern Adventist University) 신학부를 졸업하고 유타-네바다 합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앤드류스 신학원에서 목회학 석사를 수여받고 캘리포니아주 등에서 사역을 거친 후 현재 미시간 합회에서 목회에 임하고 있다. 대쟁투 웹사이트(GreatControversy.org)를 1997년 부터 운영하고 있으며 마지막 세대 신학에 대한 강의와 저술 활동에 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