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데니스 프리비 목사 저서 「참된 복음과의 대면」 2장에서 발췌하였다. 죄에 대한 두가지 정의를 비교하고 성경과 예언의 신 말씀이 가르치는 죄의 개념을 자세히 설명한 이 글은 이 주제에 관해 성경과 예언의 신의 가르침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신실한 재림성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리라 생각된다.

역자: 김정대 (Justin Kim)


아마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성경의 모든 주제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주제일 것이며  어떻게 남녀들이 구원받는지에 대한 모든 토론의 근본이 되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무엇이며 그것이 복음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질문에 관해 많은 논쟁들이 있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함에 있어서 아주 특이한 점은 그 때마다 다른 모든 주제들의 바탕에 있는 듯이 보이는 한 주제를 피할 수 없는데,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정의이다.

죄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그렇게 안 좋아 보이는 주제에 관심을 두는가? 그 이유는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관한 우리의 결론이 죄에 대하여 우리가 어떠한 정의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왜 사람이 죄인인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은 사람을 정죄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사람이 지옥 불 속에서 죽어야 한다고 말씀 하시는가?  우리가 죄에 대해 내리는 결론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 내리는 모든 다른 결정에 영향을 줄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죄가 뭔지 알고 있다고들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대강 짐작하고 있던 그것을 다시 한번 들여다 보고 우리가 죄란 말을 사용할 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접 따져보는 것은 유용한 일일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는 모두 죄를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죄를 지었던가?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가 의사에게 가면 그는 적절한 처방을 내리기 전에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진단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구하실 수 있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삶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를 깨달아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에 대한 문제이다. 치료가 실행되기 전에 그 질병의 본질을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되돌아가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왔던 모든 고통들의 시초가 되었던 죄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담이 죄를 자발적으로 선택한 사실을 알고 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죄인이 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떠한가?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해 그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도 죄인이 되는가? 그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유전 받았으므로 우리가 죄인이란 말인가?  아니면 아담의 죄를 우리도 짓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죄인이란 말인가?

이렇게 우리는 죄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한번 되돌아 왔다. 복음이 무엇을 용서하고 치유해야 하는가? 해결되어야 할 기본적 질문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시지 않으면, 사람에게 지옥불의 불꽃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책(guilty)이 부과된다는 그 죄의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슨 죄 때문에, 그리고 누구의 죄 때문에 우리는 정죄되고 잃어버린바 되는가?

본성으로서의 죄

여기서 우리는 엄밀한 정의들과 함께 시작할 필요가 있다. 여러 세기를 통해 죄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정의들이 제안되어 왔기에 그러하다. 

한 그룹은 우리의 죄책이 소위 원죄라고 하는 것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런 사고 체계에 의하면 원죄란 아담이 선택하여 지은 처음의 죄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타고난 상태를 의미한다. 아담의 죄의 결과로 혹은 그 연유로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비록 원죄라는 용어가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사용되어 왔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와 같은 용어로부터 물러서서 그 용어 뒤에 담겨있는 이슈들에 대하여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때때로 신학적 용어들이 이해를 분명하게 해주기 보다는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원죄라는 용어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원죄는 여러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죄를 물려받았으므로 죄인이 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우리가 죄인이 된 바는 죄책을 우리가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아담의 자녀들로 태어남으로 해서 타락한 종족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죄인으로 간주된다고 말한다. 즉 아담의 죄책이 우리의 죄책으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또 다른 형태의 견해는 우리가 죄를 물려받거나 죄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고 우리가 분리된 상태로 태어나기 때문에 죄인이라 한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진 관계로 태어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채로 출생되는데, 그 분리됨이 바로 우리의 죄책이라는 것이다. 그 소원해짐에 대한 죄책이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는 죄가 없지만, 타락한 종족의 일부로서 정죄 받아 태어난다고 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견해들의 밑바닥에 있는 한 공통분모는 우리가 인류의 가족으로 태어났으므로 죄인 되거나 혹은 정죄를 받는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여러 가지 견해들로 원죄를 어떻게 설명하든지 간에, 이 모두가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죄책(guilt)과 정죄됨(condemnation)이 본질적으로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한층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에는 두 종류의 죄가 있다고 하는데, (1) 우리는 이 종족의 일부로 태생하였기 때문에 죄인이며 (2) 우리는 또한 우리자신의 죄들, 우리 자신의 선택들, 우리 자신의 반역행위들 때문에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죄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타락한 종족으로의 태생과 반역적 선택이라는 죄에 대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의 태생 때문에 정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원죄라는 용어의 핵심인데, 바로 그것은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유죄가 되거나 혹은 정죄 받는다는 점이다.[1]

[1] 역자주: 죄의 정의가 상태와 선택에 의한 두 종류의 죄를 다 포함한다는 신학적 변론을 재림교회 안에서 원죄론적 사조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인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편이다. 이것은 원죄론에 기반을 둔 칼뱅주의 복음관과 자유의지의 선택에 기반을 둔 아르미니우스주의 복음관을 융합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신학체계는 논리적으로 융합과 공존이 불가능함을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다.

이러한 믿음에 내포된 의미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에 잘 나타나 있다.  “죄는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선언되었다. . .악한 욕구는 그것을 의지로 물리칠 때에도 죄가 된다. . . .죄는 우리가 유전 받은 악한 본성이며 그것의 모든 열매들이다.” (데스몬드 포드, 「성육신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관계」,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논한 팜대일 학술회에 제출한 논문 28페이지).

그러므로 이러한 정의에 의하면, 선택하기 이전에 혹은 깨닫기도 전에 우리 속에 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죄는 우리가 이해하고 옳고 그름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우리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죄는 우리가 타락한 종족 안으로 태생한 때문에 우리 속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탁월한 조직 신학자중 한 사람인 칼뱅은 죄(sin)와 죄책(guilt)에 대해 이런 주장을 하였다. “우리 모두는. . .죄에 감염되어 얼룩진 채 세상에 들어온다. .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더럽혀지고 오염되었다. . .부모들의 불순함이 그들의 자녀들에게 전달 되어졌다. . .모든 사람들은 근원적으로 타락되었다. . .죄책은 본성에서 기인한다.” (굵은 글씨 강조는 필자가 제공). 칼뱅은 우리 본성의 유전적인 타락과 부패가 바울에 의하여 죄로 지적되었다고 말한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정죄된 상태로 나오는 유아들 조차도. . . 그들 자신들의 결함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물론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죗된 것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인간 전체가 침수 되어서. . .어떤 부분도 죄로부터 면제되어 남아있지 못한다. 그런 연고로 그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것이 죄로 간주된다. . .사람들은 사악하게 태어난다. .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죄인들이다.” (칼뱅, 「기독교 강요(綱要)」,  2권, 1장, #5,6,7,8,9,10,27; 굵은 글씨 강조는 필자가 제공).

이러한 죄에 대한 이해가 왜 로마 천주교회는 물론 루터와 칼뱅 등 모두로 하여금 유아세례의 필요성을 역설했는지에 대해 명확히 밝혀 준다. 만약에 사람이 본성에 의하여 정말 죄인이 된다면, 그가 탄생하자마자 즉시 세례를 받아서 이 죄를 씻어버리고 출생으로 인한 죄로부터 정결케 되는 일은 사실상 극히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유아세례는 원죄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에게는 극히 중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루터와 칼뱅은 그것의 필요성을 누누이 역설하였던 바이다. 어린이들은 태어난 후 즉시 침례 받아서 그들 안에 내재된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야 하였다.  칼뱅과 루터 모두 이렇게 원죄론에 동의하였으며 원죄론에 대한 사상을 로마 천주교의 교부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받아들였다. 

루터와 칼뱅은 또한 예정론의 교리를 견지하였는데, 이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혹은 구원 받거나 혹은 버림 받도록 미리 예정하셨다고 믿었다. 루터와 칼뱅은 이와 같은 교리를 따랐으며 그들이 견지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교리를 이 예정론이란 전제 위에 구축했다.  원죄론은 예정론의 교리와 매우 논리적으로 잘 들어 맞는다. 

죄가 본성 속에 내재한다는 믿음에는 아직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에 그는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잃어버렸으므로, 아담에게 남겨진 모든 것은 죄를 지을 능력뿐이었다. 아담이 어떤 결정을 내리던 그것들은 죗된 결정뿐이었다. 따라서 아담은 죄지은 이후에 오직 죄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으며, 우리 또한 타락한 인류의 구성원들로서 오직 죄만 지을 수 있을 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죄짓는 일뿐이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필자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이 교리가 많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정의들 속에 공통적으로 흐르고 있는 개념은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으로 그리고 정죄 받은 자로 태어난다는 개념, 우리가 아담 가족의 일부로서 죄인이 되고 정죄 받는다는 개념이 이 원죄론 즉 본성으로 인한 죄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교리에 대한 신학자 에밀 부르너의 반응을 잠시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전적으로 아담의 타락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두어 그의 죄가 계속 이어지는 세대들에 양도된다고 하는 교회의 교리는 어떤 의미로든 전혀 성서적이지 않은 한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신학의 표준구(標準句)처럼 여겨져 온, 예외적으로 보이는 로마서 5장12절의 내용 조차도,  후세대들에 의해 추종되었던 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지지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상 로마서 5장에는 죄의 본질에 대해 묘사하는 아무런 내용도 없다. . . .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로부터 기독교 인간론의 정석이었던 원죄론은 성서의 가르침과는 전적으로 동떨어진 사상이다. . .죄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행위, 즉 ‘타락’으로서, 신성한 시작에 대한 자발적인 결별로서, 그리고 신의 명령에 대한 적극적인 거역으로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 .죄란 행위이다 ― 그것이 죄에 대해 언급할 첫 번째 사실이다. 그리고 난 후에만 두 번째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행위는 동시에 항상 행위 속의 존재인 한 상태, 즉 그 안에서 달리 어찌할 수 없는 노예의 상태라고 말이다.” (에밀 부르너, 「창조와 구속에 대한 기독교 교리」, 98,99,103,109 페이지).

선택으로서의 죄

이제 죄의 두 번째 정의인 선택으로서의 죄에 대해 주목해 보자. 이 정의 속에서 우리는 원죄의 여러 정의들 속에서 기술되었던 동일한 점들을 언급하게 된다. 

우리는 아담의 본성 속에 원래 아무것도 그를 하나님께 반역하도록 이끄는 것이 없었음을 믿는다. 어떤 욕구도 그를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게 인도하지 않았다.  아담에게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그릇된 일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웠다. 그러나 타락으로 말미암아 아담의 바로 그 본성, 즉 그 존재의 가장 중심 부분에 있는 무언가가 바뀌었다. 타락은 아담에게 악에 이끌리는 성향을 가져왔다. 그의 본성은 이제 왜곡되고 뒤틀어졌으며, 이제 아담은 그가 전에 하기를 싫어했던 일, 즉, 하나님께 반역하는 일을 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제 아담에게는 죄 짓는 일이 자연스러웠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유전 받는다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의 중요성을 온전히 이해 해야만 한다. 우리는 분명히 아담으로부터 나쁨(badness), 연약함(weakness), 타락함(corruption)을 유전 받는다. 우리는 아담이 그의 죗된 상태에서 가졌던 동일한 욕망들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그릇된 일을 하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반역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어렵고, 잘못을 저지르는 게 더 자연스럽다. 만약 우리가 자신들에 대해 정직해 진다면, 우리 자신이 너무 자주 자신의 유혹자가 됨을 솔직히 인정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사단이 우리를 쫓아 다니며 모든 종류의 생각들로 우리를 유혹할 필요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스스로를 잘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의 본성들이 우리를 탈선하도록 이끈다. 이기심이 우리 삶의 뿌리에 자리잡고 있어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알고 있는 것들을 하도록 충동하는 듯 보인다. 이와 같이 우리는 확실히 아담으로부터 부정적인 성향들을 물려받는데, 그것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잘못을 저지르게 이끎이 틀림없다.

이러한 죄의 정의가 이전의 정의와 다른 한가지는 우리가 죄책(guilt) 혹은 형벌(condemnation)은 유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담이 넘겨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우리는 그의 모든 성향들과 기질들과 욕망들을 물려받으며, 하나님께서 정녕 의도하시지 않았던 방식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이 정의는 개인의 죄가 선택을 통해 생기며, 죄 그 자체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죄책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빛과 알고 있는 의무에 대하여 반역하기를 선택할 때 비로서 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내렸던 결정, 즉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하기로 한 그 결정을 내리기로 선택해야지만 비로서 우리가 죄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스러운 본성이 죄짓는 것, 즉 죗된 선택을 더욱 쉽게 하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강조하려는 요점은 우리가 그러한 선택들을 하는 그 시점에 죄인이 되는 것이지 그 선택 이전에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악(evil)과 죄책(guilt)이라는 개념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조심스럽게 구분 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위에서 죄에 대한 두 기본적인 정의들의 요지를 살펴보았다. 어떤 정의를 믿기로 선택하느냐에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쟁점들이 다른 색깔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칭의와 성화에 대해 내리는 결정들은 우리가 죄의 본질에 대해 내리는 결정여하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악과 죄책 (Evil and Guilt)

만약 우리가 죄를 선택으로 정의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악(evil)과 죄책(guilt)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구분 지어야만 한다. 오늘날 이 세상에는 많은 악이 존재하는데 짐승의 세계에서 조차도 그렇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역력히 드나는 모든 악한 것들에 항상 죄책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예화중의 하나는 일반적인 애완동물인 고양이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고양이가 쓰다듬을 받기 위해 우리의 무릎이나 발등 위에 바싹 다가붙거나 따뜻한 우유를 먹기 위해 오는 것을 보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우리의 애완동물들이 지닌 다른 이면을 잊고 산다. 고양이들이 다음 식사거리로 잡은 쥐에 대해서 무자비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놈들이 쥐를 잡았을 때 즉시로 죽이지 않고 그냥 노리개 감으로 가지고 논다. 그 놈들은 쥐가 도망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마침내 포기할 때까지 사실상 그 쥐를 고문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방법으로 그 어떤 동물이나 혹은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대하겠는가? 우리는 그를 가장 흉악한 범죄를 지은 범죄자로 생각하고, 아마도 그의 남은 여생을 감옥에 가두어 지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 동물, 다시 말해 우리의 고양이에 대하여는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그것이 삶이란 현실의 일부로 여기고 말 것이다. 그 쥐가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고양이에게 죄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악한 행동들은 악하더라도 죄의 자연적인 결과로 보며, 어떤 다른 악한 행동들은 그것을 저지른 사람에게 죄책이 부과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자 이제 이 문제를 인간의 수준으로 가져와 보자. 만약 우리가 말뚝을 땅에 박을 때 더 잘 조준할 수 있도록 친구더러 붙잡고 있으라고 부탁한 후 우리가 그만 실수로 말뚝을 치지 않고 친구의 엄지를 내려 칠 수도 있다. 그 엄지는 상처를 입고 멍들어 회복되는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지만, 그 친구는 우리가 고의적으로 그렇게 상해를 입혔다고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하나의 불행한 사고로 여길 것이다.

요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하여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 만약에 한 어린 아이가 총을 가지고 놀다가 그의 형이나 누나를 쏜다면, 우리는 그 총을 그 어린이로부터 빼앗아서 앞으로는 아이의 손에 닺지 않게 우리의 화기를 금고에 더 잘 잠그도록 확실하게 조처만 할 것이다. 우리는 그 어린이를 죄인으로 정죄하거나 심판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한 스무 살 먹은 사람이 같은 총을 가지고 누구를 쏜다면 우리는 즉시 “왜?”라고 시작하는 몇 가지 질문들을 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그 사람에게 살의의 죄과가 있는지 알기를 원할 것이다.

이렇게 악과 죄책이라는 개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악이라는 말은 단지 나쁜 것, 부정적인 것 혹은 틀린 것, 즉 저주받은 세상에 존재하는 죄의 결과들을 뜻한다.  죄책은 악한 생각들과 행위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 적용되는 말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요지는 나무들과 동물들은 죄의 결과들을 가득히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에 의해 유죄선고를 받거나 구속 받지도 않는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도덕적 가치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람만이 이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데, 이 지식 때문에 그는 어떠한 악한 행위들에 대해서 유죄판결을 받게 되는 바이다. 만약 우리가 죄를 선택에 의한 것이라 믿는다면 우리는 악과 죄책 사이에 엄격한 구분을 지어야 할 것이다. 죄책이 성립되려면 사전 지식과 의도적 반역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유죄선고는 항상 인간의 사전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고 이 필자는 주장하는 바이다.  야고보는 명백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결과와 형벌 (Result and Penalty)

이제 우리는 악과 죄책의 개념들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는 가설을 입증해야만 할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는 하나님을 거역함에 대한 명확하고 분명한 한 형벌이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아리송하게 느끼곤 하는데,  왜냐하면 아담이 이브가 준 그 열매를 먹었을 때 그날 그는 죽지 않았던 것이 아주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도 그가 죽기 시작했다는 뜻이라고 가끔 말하곤 해 왔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은 “그러므로 네가 먹는 날, 너는 죽음을 죽으리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번역은 훌륭한 번역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아담은 그날 죽지 않았는가? “그러면 어찌하여 사형선고가 즉시로 그에게 집행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대속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스스로 떠맡고 실족한 인류를 위해 대속하기로 자원하셨던 것이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2페이지).

“인간이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이 금하신 그것을 범하였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의 형벌이 내게 떨어지도록 하소서. 제가 인간의 자리에 서겠습니다. 그에게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질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산 자와 죽음 사이에 들어 서셨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5페이지). “죄가 있자마자 거기에는 구속주가 있었다. .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하나님의 아들은 자기 자신을 인류를 위한 보증으로 제공하셨는데, 이것은 그가 갈보리의 십자가위에서 죽으셨을 때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은 자위에 선고된 멸망을 피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1권 1084페이지).

왜 아담은 그날 죽지 않았는가? 그날 대속물이 죄의 형벌과 아담 사이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날 아담의 자리에 대신 들어 서셨다. 아마도 이것은 계시록 13장 8절의 어린양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했다는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날 아담과 그의 사형 선고 사이에 들어서심으로 해서, 사실상 예수께서는 인간의 보증물로 그날 그 형벌을 감당하셨던 것이다.

그 후 곧바로 아담은 그를 대신해 돌아가실 하나님의 아들을 상징한 짐승의 희생제사를 드렸다. 이렇게 아담의 죄에 대한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즉시 지불되어졌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즉시 아담의 자리를 대치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아담도 결국은 그 형벌을 감당해야 할 것인가? 아담은 결국 그의 죄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어야 할 것인가? 왜 아담은 930년 이후에 죽었는가? 그가 결국 그 죄 값을 지불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의 죽음은 단지 죄의 내재된 결과들 중 하나였을 뿐인가? 

사실 그의 죽음은 아담에게 있어서 일종의 축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900여년간 목격했던 모든 죄와 아픔과 고통이 자기 자신의 죄로 초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엄청난 고통을 견디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담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실 이러한 것들로부터 구조됨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죽음, 즉 아담에게 도래했던 이 자연사는 죄의 형벌(penalty)이라기 보다는 죄의 결과(result)였다. 죄의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지불되었었다. 아담은 양을 잡아 제물로 드려서 그 죽음의 형벌이 이미 지불되었음을 이해한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저주, 즉 죄의 내재된 결과는 남아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죄에 대한 기본적 개념을 두 구별된 기둥으로 나누어야 함을 의미한다.  위의 도표에 나타나 있듯이 왼쪽의 기둥은 악(EVIL)이라고 명시되는데, 죄의 내재된 결과로 기인한 모든 것들을 포함하며 이 모든 악은 육체적 죽음인 첫째 사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사망을 잠이라 부르셨는데, 그것은 인간의 최종적인 종말은 아니다. 이처럼 악과 그것의 결과는 사망과 고통과 우리 주위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로 이어진다.

오른쪽의 기둥은 죄책(GUILT)이라 이름 붙여 있다. 그리고 이 기둥은 둘째 사망 혹은 지옥, 즉 죄에 대한 형벌로 이어진다.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죄로 인한 두 결말들을 가지고 있다.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죄의 고유한 결과들인 저주, 즉 인간들과 동물들 그리고 모든 자연이 일반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죽음인 첫째 사망이 있다. 다른 한 편으로 우리에게는 또한 죄의 형벌인 둘째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책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미 지불되어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영접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코 둘째 사망을 경험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의 속죄가 이와 같은 죄의 두 가지 결말들 모두를 다 처리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속죄가 죄책은 용서함으로써 처리하고 악한 결과들은 죄의 저주가 초래한 것들을 재창조하고 회복함으로써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죄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원래 계획한 대로 회복하기 위해 일하지만, 왼쪽 기둥에 있는 영역을 용서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오른 쪽에 있는 죄책의 영역들, 즉 죄의 형벌만을 용서할 뿐이다.

그러므로 칭의, 용서, 구원, 복음, 그리고 의와 성화와 같은 용어들은 특별히 오른쪽 기둥에 있는 문제들, 즉 죄책과 형벌 및 지옥과 관련된 문제들에 적용된다.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바는, 죄의 결과와 죄의 형벌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정죄와 구원의 문제들은 특별히 죄책과 그로 인한 형벌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하여 말할 때는 바로 이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이제 신약성경으로 가서 이러한 차이점에 대한 증거들이 더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누가복음 13:1-5에서 예수께서는 어떤 교훈을 깨우쳐 주시기 위하여 한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 와서 갈릴리 사람들의 피가 저희의 제물과 섞인 것에 대해 예수께 아뢴 것을 기술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빌라도에 의해 살해 당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에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로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 13:1-5)

여기서 우리는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이 그들의 죄가 불러온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었음을 보게 된다. 예수께서는 이 갈릴리 사람들과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 그들이 당한 첫째 사망이 그들의 죄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었음이 명백하다. 

요한복음 9:1-3에서 제자들이 소경 된 자를 보고 그리스도께 물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1-3). 다시 한번 예수께서는 그의 소경됨 즉, 그가 당하고 있는 불행이 어떤 개인적인 죄의 결과가 아니라 유전된 연약함에 의해 야기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개인적인 죄와 타고난 죄의 영향 혹은 결과들 사이를 구분 짓고 계시는 바이다.

또 다른 중요한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5:24-25이다. 만약 우리가 위에서 설명한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성경 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이 한 말을 스스로 반박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예수께서는 바로 지금 오늘, 만약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지금 우리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계속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고 하신다. 24절에서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이제 영생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는데, 25절에서는 다가올 재림의 때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라 했다. 우리가 이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이의 차이를 구분 짓지 않는 한, 우리는 여기서 어쩔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이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오늘 그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 지고, 구원받았으며 죄의 형벌인 둘째 사망을 결코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채로 승천할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나사로의 경우처럼) 우리는 잠이라 불리는 죽음을 경험할 것이다. 나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고 첫째 사망의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용서받고 영생이 주어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아담이 지은 죄가 불러온 저주의 결과로서 여전히 죽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는 세상에 존재하기에 죽어야만 한다. 따라서 첫째 사망은 죄에 대한 형벌이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생을 소유한 사람들도 첫째 사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생각하시기 바란다 – 영생은 죄의 삯인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각을 매우 명확하게 나타내는 또 다른 성경구절은 요한일서5:12-13인데, 여기서는 우리가 현재인 오늘, 그리스도안에서 생명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육체적으로 죽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해 파생되는 두 가지 결말이 존재한다는 훌륭한 성서적 증거들이 우리에게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1) 첫째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저주가 그 하나요, (2) 둘째 사망으로 이끄는 죄의 형벌이 다른 하나이다.

빛과 선택 (Light and Choice)

죄가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개인적 선택의 결과라는 말은 정말로 사실인가? 죄와 죄책이 내재된 죄의 결과로 시달리는 인간 가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선택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가 성서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성서적인 증거를 살펴 보기로 하자.

로마서 7:7-9에서, 바울은 율법과 또 우리가 가진 율법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7-9) 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죄가 뭔지 아는 것은 율법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만약에 우리가 율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죄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이해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때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해하면서도 하나님께 거역하는 선택을 할 때에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22-24에서는,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요 15:2-24) 라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과 그분의 하신 일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분께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분의 오심과 그분에 대한 그들의 지식으로 인해, 그들이 그분을 거절하게 되면 유죄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9:41에서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 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어떤 비판들에 대해 대답하시면서, “너희가 소경이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 9:41)고 꾸짖으셨다. 즉, 만약 당신이 진실로 눈이 멀었다면, 만약 당신이 진실로 알지 못했다면, 당신은 유죄선고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본다”고 말하면, 유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와 죄책이 지식과 이해와 빛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이 명백해 보이지 않는가? 우리가 일찍이 언급했던 (악과 죄책을 분간하는데 도움을 준) 두 기둥 사이를 나누는 분기점은 아마 빛이라는 성서적 용어일 것이다. 악을 죄책으로 바꾸는 것은 빛, 지식 혹은 이해이며, 그러한 새로운 빛 혹은 이해에 기초하여 내린 선택들이다.

이 문제는 야고보서에서 밝히 설명해주고 있다. 야고보서 4:17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고 야보고가 말했는데, 이 말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죄가 된다는 가르침이다. 다시 한번 지식과 죄책이 밀접하게 연결됨을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야고보서 1:15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고 말한다.  여기서 욕심 혹은 욕망이 실질적 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본다. 죄는 꼭 욕심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죄는 욕심에 의해 산출되어지는 것으로, 그 욕심에 굴복하는 것의 결과이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18:2-4에서는 이스라엘 민족들의 한 속담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겔 18:2-4). 그리고 20절에서 에스겔은 죄에 대하여 이 성서적 원칙을 다시 강조한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겔 18:20). 개인의 선택에 대한 개인의 책임 – 그것은 선택에 대한 개인적 자유가 부여된 바 때문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부지중에 잘못을 범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실까? 그분께서는 그와 같은 상황들을 어떻게 처리하실까? 바울은 사도행전17:30에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라고 말한다. 무지할 때에 사람들은 악한 일들을 행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일들을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뜻을 어긴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가?  그에 대해 무어라 하실까? 이 성경절에 의하면, 그분께서는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시거나 혹은 너그럽게 간과해 주신다고 알려준다. 용서하신다고 않고 간과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빛과 지식이 이를 때, 악은 비로서 죄책화 된다. 그리고 깨닫고 난 후에 지은 죄에 대하여서 그 죄인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로 말미암아 마태복음11:21-24에 있는 우리 주님의 말씀은 좀 더 명백해진다: “너희(벳새다)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 .네게(가버나움)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 11:21-24).

악한 일의 양으로 따지자면 확실하게 소돔이 가버나움을 훨씬 앞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에 내려진 정죄는 더욱 컸다. 왜 그런가? 가버나움이 더 많은 빛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 자신을 영접할 특혜를 가지고 있었다. 소돔이 물론 악한 일들을 했지만 많은 그 악한 일들이 훨씬 적은 빛 속에서 행하여졌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롯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길을 전해주는 그리 좋은 대변자는 못 되었다. 무지 때문에 그들은 더욱 큰 빛을 거절한 가버나움의 사람들만큼 죄가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은 소돔보다 더욱 죄가 많았는데 이는 그들이 더 많은 빛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택들은 더욱 완전하게 빛이 주어진 상황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시편 87:4-6은 주님께서 사람이 어디서 태어나며, 어디서 자라나는지를 감안하실 것이라고 언급한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있는 환경과 그의 과거의 배경과 하나님의 뜻에 대해 얼마나 많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기초하여 심판하실 것이다.

엘렌 화잇 또한 죄와 죄책에 대한 주제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언급을 하였다.  “자녀들이 부모의 비행의 결과로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나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대체로 자녀들은 부모의 발자취를 따른다. 유전과 부모들의 모본으로 말미암아 아들들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짓는다.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저열한 품행은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을 지니고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전승물로 내려간다.” (부조와 선지자, 306페이지).

여기서 아담의 죄의 결과로 전수되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란다. 육체적 질병과 퇴화 현상뿐만 아니라, 나쁜 버릇과 그릇된 식욕과 그리고 저열한 품행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가 우리 부모들과 조상들로부터 물려받는 것의 일부이다. 그러나 또한 여기서 한 중요한 문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자녀들은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지 않는 한, 부모의 죄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죄와 죄책은 옳고 그름에 대한 충분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는 선택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교리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빛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아니할 것이나, 우리가 저항하고 거절한 빛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제시된 적이 결코 없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으므로, 결코 받아보지 못한 빛에 대해 정죄받을 수 없다.” (엘렌  지 화잇의 주석, 「SDA 성경 주석」, 5권 1145페이지). 개인적인 유죄평결은 오직 빛과 지식에 근거해서 내려진다. 만약 우리가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어느 정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가 악하거나 잘못된 일을 하는 이유로 정죄 받지 않는다. “누구도 결코 받아본 일이없는 지식과 빛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정죄받게 되지 않을 것이다.” (상게서).  그녀가 형벌을 이해와 의도된 결정들에 기초하고 있음이 명백한 것 같다. “빛은 흑암 속에 감취어 있는 오류를 지적하여 고쳐 준다. 빛이 이를 때에는, 사람의 생애와 성품이 그 빛과 일치하기 위하여 변화되어야 한다. 전에 마음이 캄캄할 때에는 죄됨을 알지 못하고 범한 것이라도, 이제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복음 교역자, 162페이지). 일단 우리가 우리의 행동들이 잘못 되었음을 알게 되면, 그 죄를 탐닉하기를 계속할 때 우리는 유죄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 전에는 유죄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이해한 후에야 비로소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책은 선택과 지식에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유대인 가운데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품성과 사업에 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천 후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바로 전까지를 말함).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일찍이 그들의 부모가 거절한 빛을 받아서 실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 .그 자녀들이 부모의 죄 때문에 형벌을 선고 받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부모들에게 주어진 빛은 물론이요 그들에게 추가로 주어진 빛까지도 거절하였을 때, 그들이 부모의 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악의 잔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대쟁투, 27,28페이지).  죄책이 부가된 것은 개인적인 이해와 개인적 연루로 인함이었다.

“악한 말을 하는 죄는 악한 생각을 품는 것으로 시작된다. . .하나의 불결한 생각이 방관되고, 하나의 거룩치 못한 욕망을 맘속에 품으면, 그 영혼은 오염되고, 그것의 순결함은 타협된다.” (증언 5권, 177페에지; 굵은 글씨 강조는 저자에 의해 제공됨). 여기서 차이점을 주목하시기 바란다. 죄와 오염을 구성하는 것은 불결한 생각을 방관하는 것이고, 거룩하지 못한 욕망을 맘속에 품는 것이다.  죄는 생각이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만약 욕망이 즉각 거절된다면, 죄를 짓고자 하는 그 욕구 자체 속에 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모든 거룩치 못한 생각들은 즉시 물리쳐 져야 한다. . .어떤 사람도 죄를 짓도록 강요될 수 없다. 먼저 그 자신의 승락이 있어야 한다. 욕정이 이성을 지배하거나 혹은 불법이 양심을 이기기 전에 그 영혼이 죗된 행위를 의도해야 한다. 유혹은 그것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죄에 대한 구실이 되지 못한다.” (상게서; 굵은 글씨 강조는 저자에 의해 제공됨). 타고난 마음의 기울어지는 성향들은 그것들이 맘속에 품어지고 요구되기 까지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악한 생각들에 동의할 때, 우리는 악과 죄책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솔깃하게 기우는 성향은 악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 성향의 이끎을 행동화하는 선택을 하기까지는 그 기울어지는 성향에 대한 죄책을 지지는 않는다.

“만약 빛이 온 후에 그 빛이 옆으로 제쳐 지거나 혹 거절된다면, 하나님의 형벌과 책망함이 있게된다. 그러나 빛이 오기 전에는 죄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부할 빛이 없기 때문이다.” (증언 1권, 116페이지). 그러므로 죄가 지식과 이해에 밀접히 연관되는 것은 아주 확실해 보인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 조차도 사단에 의해 암시되며 조장되는 불순한 생각들과 느낌들로 괴롭힘을 당한다. 하지만 만일 그러한 것들을 마음속에 품어 키우지 않고 가증한 것으로 물리치면, 그 영혼은 죄책으로 물들지 않으며 그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이 또한 더럽혀지지 않게 된다.” (리뷰와 헤럴드, 1888년 3월 27일) 그 생각과 감정들을 맘에 품지만 않는다면 죄로 오염되지 않을 것이다. 그 생각과 감정들은 잘못된 것들이다. 그것들이 거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악 때문이며, 또 우리가 가진 타락한 본성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을 마음에 품기로 혹은 행동으로 나타내기로 작정하지 않는 한, 그것들은 오염시키지 않는다.

건강에 관한 권면 81페이지에서 엘렌 화잇은 담배의 사용이 몸을 해치나 하나님께서는 무지가운데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에게 자비로우시다고 기술한다. 오직 빛이 그들에게 임한 후에야 그들의 담배사용이 죄가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담배 피우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 것이다. 암까지 생기게까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빛이 오기까지는 그것을 죄라 할 수 없다. 암에 걸리는 그 자체가 꼭 그 사람이 죄인으로 진리의 빛에 거역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나는 죄가 오직 악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고등기능에 존재하는 것이지, 타고난 자연법칙의 영향을 받고 이 땅에서 죄의 순환의 일부가 되는 저등기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죄책은 도덕과는 관계없는 자연세계에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도덕법의 악용에 책임을 지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죄책이란 것 자체가 사람의 동물적인 기능들에 배속되지 않고 선택의 힘을 발휘하는데 관련된 도덕적 기능들에 배속된다.

죄는 원초적으로 자기 사랑이다. 그러므로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들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동기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지 간에 자아를 첫째로 두는 선택이다. 죄는 자아를 첫째로 둠으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고자 하는 선택이다. 그것은 악을 품는 선택이며, 하나님의 뜻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으려는 선택이다. 자신의 재능과 책임들에 대하여 소홀히 하는 선택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질문에서 재림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신학적 분열의 근본에는 죄와 죄책의 본질에 대한 서로 다른 신념들이 존재한다. 논쟁의 핵심은 죄의 본질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질문이 확실하게 답변되어져야 한다: 우리는 왜 죄인이며, 무엇을 용서받아야만 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지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인성을 취하셨는가?  그분께서는 어떤 능력을 사용하셨는가? 그분은 어떻게 죄를 극복하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죄의 본질에 관해 내린 우리의 결론에 따라 각기 다른 답변들을 얻게 될 것이다.


데니스 프리비(DENNIS PRIEBE) 목사는 50년 동안 목사, 교사, 그리고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11년 동안 퍼시픽 유니온 대학에서 교수로 일한 후, 30년 이상을 어메이징 팩트 선교 기관의 전도/세미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데니스 프리비 목사의 세미나 동영상 (한글 자막 첨부 - 출처: MIGHTYCRY.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