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사만 사천의 숫자가 상징적인 수인지 실제의 수인지에 대해 저는 확신을 가지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재림교인이 된 후로 여러 목사와 신학자들이 계시록에 나오는 이 십사만 사천의 숫자가 “상징적인 수”라고 많이 주장하는 걸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런 주장과 논리 전개를 듣거나 읽을 때마다 저는 제 마음속에 떠오르는 한 의문을 간과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라고 주문을 읇조리듯 되풀이하며 강조할까?”

아마 마지막 때 인침을 받고 구원받는 이 십사만 사천이 상징적인 숫자라고 강조하는 분들의 생각엔, 그것이 실제 수라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너무 적은 수이기 때문에 자신이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받을 확률이 너무나 적어, 마음이 아주 불편하거나 불안해진 동기에서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이 솔직히 들곤 했습니다. 아니라면 좋습니다만, 솔직히 그저 그런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었다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참으로 이상한 점은, 그 십사만 사천의 수가 상징적인 숫자라면 구원받는 이들의 수가 실제의 십사만 사천 숫자보다 더 적은 무리를 상징할 수도 있을 터인데, 그것을 상징적인 숫자라고 주장하는 분들의 강론을 듣거나 읽어보면 그들은 항상 그 가능성은 고려조차 하지 않더군요. 저로선 그 점이 참으로 흥미로웠습니다. 상징수라고 주장하면서 항상 셀수 없을 정도로 실제의 수보다 더 많은 무리 쪽으로만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하여튼 저는 이 숫자가 실제 수이든 상징적 수이든 요즈음도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 저에게 중요한 질문은 내가 바로 이 순간 하나님께 충성하는 자인가, 하나님이 내게 보여준 모든 빛에 정말 온전히 순종하려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자인가 라는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정통적인 재림신앙의 핵심은 항상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이 언제나 우리 관심사의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림신앙이 가르치는 복음의 영적인 강조점이 항상 나 자신의 구원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에 있다고 봅니다.

계시록에 등장하는 십사만 사천은 바로 그러한 신앙을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그 수가 실수냐 상징수이냐를 논하기 전에, 그 수의 사람들이 지닌 그 신앙의 자세를 오늘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고자 정진해야 우리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 안에 당신을 나타내 보이기를 간절히 바라신다. 그리스도의 품성이 그분의 백성들 속에 완전히 재현될 때에 그분은 당신의 것을 찿으시려고 이 땅에 강림하실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촉진시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벧후 3:12). 그의 이름을 믿노라고 하는 자들이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열매를 맺는다면 온 세상에는 얼마나 빨리 복음의 씨가 뿌려질 것인가! 최후의 큰 수확을 위해 곡식은 속히 익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귀한 곡식을 거두기 위해 강림하실 것이다.” (실물교훈, 69페이지)

현 대총회장인 테드 윌슨 목사가 그의 설교에서 이 증언의 말씀의 뜻을 명확히 파악하며 자주 인용하고 있는데, 반면에 지금 재림교회의 여러 목회자들이 화잇 여사의 이 말에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많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듯 보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도저히 이를 수 없는 듯이 보이는 표준, 즉 “그리스도의 품성이 우리 속에 완전히 재현될 때” 재림하시겠다는 말이 너무나 큰 부담이 되기에, 어떤 목사들은 강단에서 현란한 언어의 곡예를 구사하는 설교로 이와 정반대되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들이 의도하는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국 듣는 평신도들을 패배주의적인 신앙으로 유도하는 설교가 되어 그들이 영적으로 허기를 느끼면서 돌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증언 말씀이 뜻하는 바를 분명히 깨달아 불편함을 가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실천할 때, 주님의 마지막 백성으로 세 천사의 기별(영원한 복음)을 진정으로 전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지 않고 각종 인간적인 기법을 고안해서 행하는 우리의 전도와 선교는 계속 실패에 실패만을 거듭할 것입니다.

선교의 참된 성공을 거두려면 기법(method)보다는 기별(message)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별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변화되어 가는 우리의 삶이 큰 부분을 차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지금까지 약하고 가냘픈 빛만을 비춰 왔다. 빛이란 무엇인가? 빛은 곧 경건이요, 선이요, 진리요, 자비요,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품과 생활 속에 있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이다. 복음이 적극적으로 전파되는 여부는 신자들 각 개인의 경건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 선교 봉사, 21페이지)

십사만 사천이 실제 수인지 상징적 수인지 논하는 것은 이에 도움이 별로 되지 않겠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늦은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재림성도들은 다음 증언 말씀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능력을 다해 십사만 사천인 가운데 들도록 힘써 노력하자. 하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서로 돕자.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강력한 관심을 우리는 가져야 하는데, 그분이 우리의 구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면에 우리들과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것은 이 죄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삶을 살 수 있음을 온 우주에 증명하시기 위해서였다.” (리뷰앤 헤럴드, 1905년 3월 9일) 

이게 너무 아둔한 생각인가요?


김정대(JUSTIN KIM) 교우는 뉴저지 포트리 교회에 출석하는 평신도로 현재 재림 신앙과 신학 사이트의 편집자로 활동하고 있다.